<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22

2011.06.10 10:16

김영강 조회 수:708 추천:97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22회




   그는 가끔 깊은 우주의 형성에 관해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신의 섭리에 부합시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참으로 오묘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지구가 현재처럼 23.5도로 기울어져 있어서 사시사철 계절을 구경할 수가 있지, 만일 그 각도가 기울지 않았더라면 지구는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했을 정도로 뜨겁거나 춥거나 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의 면적이 지구 표면에 70%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물의 순환이 이루어져 생물이 존재하고 있지, 만일 바다보다 육지가 더 넓었다면 지구는 죽음의 땅이 됐을 겁니다. 사람이 숨을 쉬는 대류권층의 두께도 지금보다 더 높거나 낮아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됐겠지요. 그렇게 보면 무엇 하나 오묘하고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어요.”

   물리학과 학생인 내가 교수로부터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우주를 보면 그 웅대함과 오묘함에 절로 감탄하게 되지요. 태양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무엇이 저렇게 이글이글 계속 타고 있을 까요? 학자들은 수소가 탄다고 합니다. 1초에 약 6억 톤에 가까운 수소가 타는데, 한 시간이면 2조 톤에 가까운 수소가 탄다고 해요. 그것이 무려 45억 년이나 탔는데도 아직 반도 안 탄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한 얘기라면서 그는 명쾌하게 웃었다.

   “어릴 적에 저는 무엇이 저 넓고 깊은 우주를 형성하고 운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가졌어요. 거기에 대한 책도 많이 읽고 했지만 지식으로 알기엔 그 의문이 해결이 안 되었어요. 신의 섭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고등학교 때 깊이 파고들었지만 해답을 못 얻었어요. 결국, 자연의 위대함은 인간이 증명할 수 없는 과제 같아요. 감히 인간이 어찌··· ···.”

   이렇게 학구적인 얘기로 시작하여 우리는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를 처음 볼 때부터 어딘지 이민우와 닮았다고 느껴졌는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그랬다.

   ‘일차로 만든, 약간은 각이 져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이민우의 형상을 전체적인 윤곽과 코끝을 둥글게 부드럽게 만든 완성품이라고 할까?’

   닮긴 했으나 내가 느낀 첫 인상은 상반되었다. 퍽 따뜻한 인상이었다. 그의 한국학 강의를 듣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몰린 것도  그의 인성이 많은 작용을 했을 것이다. 실력 또한 대단했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영어로 번역했다고 하니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공문이기 때문에 어려운 한자어도 많았을 테고, 그 내용을 상대방이 받아들이게 하려면 설득력 있는 감동도 깃들여져야 했을 텐데 말이다.

   거기에는 긴 세월의 노력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와 한집에 기거해, 한국말을 잘하는데도 그는 어릴 적부터 여름방학 때마다 한국에 나가 여름학교까지 다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말고 한번은 어릴 적 자기의 꿈이 소설가였다고 해 나는 깜짝 놀랐다. 이민우와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국의 고전문학에 심취해 있는 것도 비슷했다. 나는 이민우한테 얻어 들은 지식으로 그와의 대화를 이어가면서 씁쓸한 기분을 맛보았다. 어학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에도 통달하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한국 친구 중의 하나가 소설가라고 했다. 그 친구는 쓰다가 막히기만 하면 애론을 붙들고 아이디어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고 한다. 소설을 다 써놓고는 제목이 안 떠올라 고민에 고민을 해 애론도 제목 짓느라고 가끔씩은 밤새 고심을 했다기에 내가 물었다.  “그냥 소설을 쓰지 그랬어요?” 하고.

   “소설, 어렵지요. 아무나 못 씁니다. 그 친구는 중도에 그만 포기를 했어요. 더 이상 안 씌어지면 못 쓰는 거지요.

  허지만 그는 이민우처럼 밑지는 장사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잊고 있다가도 애론과 대화를 나눌 때는 왜 어김없이 그가 떠오르는 것일까?’

   씁쓸한 기분이었다. 닮은 점이 많아서겠지 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내가 아직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걸까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그가 결혼한 지도 2년이 넘었고 애경이가 나타나지 않은 지도 오래되어 이민우가 내 마음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문득문득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경이 말대로 그를 원망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 거나 하는 그런 감정도 없었다.    
  
   어느 날, 금요일 저녁이었다.

병원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니 애론이 와 있었다.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해 이미 상은 다 차려져 있었다.  

와인까지 곁들인 탓인지 애론은 세 여자를 웃겨 가면서 재미있게 대화를 이어갔다. 술이라면 입에도 못 대는 나였는데도 닥터 윌헴이 권하는 바람에 한 잔 받아 마셨다. 그녀는 계속 마셨다.  

  “아니, 해주 씨는 겨우  한잔 마시고 얼굴이 빨개져요?”

  애론이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주 기분 좋게 말했다. 왠지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어정쩡한 웃음을 띄며 눈 둘 바를 몰라 하는데,  다행히 그가  “어 ! 할머니도 아줌마도 다 빨간네?” 하고 연이어 말을 해 우린 번갈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정을 시키려고 했으나 계속 콩당콩당 했다. 닥터 윌헴이 화제를 바꾸었다.

   “요즘도 영아한테서 소식 있니?”

   “아뇨. 없어요.”

   어머니의 시선을 피한 채 말끝을 흐리는 애론의 희미한 어조에 할머니가 그들의 말을 가로 막았다.

   “이렇게 좋은 날에 영아 얘기는 왜 끄집어내?”

    아줌마가 황망히 일어서며 말했다.

   “선생님이 술에 취했나 봐요. 어마나, 저 얼굴 좀 보세요. 이제 그만 하세요. 안 되겠어요. 방에 들어가 누우셔야 되겠어요.”

   아줌마가 부축을 하고 일으키니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술 더 먹어야 한다고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했다.

   “그런 나쁜 년이 세상에 또 있을까? 너 말야, 영아하고 또 엮이면 나하고 끝장이야. 애론, 내가 너무 속상하다. 내가 네 생각만 하면 답답해서 미치겠어.”

   애론이 얼른 부축을 하며 어머니를 방으로 모셔 갔다. 닥터 윌헴의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다. 그녀의 입에서 이처럼 과격한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일이다. 얼마 전, 영아 얘기를 할 때는 속아서 분해 죽겠다는 감정이 속속들이 스며 있었으나 그 태도는 지극히 점잖았다.  할머니도 방으로 들어갔다.

   얼굴이 계속 달아올랐다. 나는 살그머니 빠져나와 정원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뺨을 스치니 기분이 상쾌했다. 뿌연 외등 아래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개인집 치고는 유난히 큰 나무들이 많았다. 꼭 무슨 공원 같았다. 순간 나는 덕수궁의 밤이 떠올랐다

   갑자기 정원 전체가 환해졌다. 언제 나왔는지 애론이 내 옆에 서 있었다. 내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못하는 애론은 말을 술술 잘 이어갔다. 말을 잘하는 것도 이민우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어머니는 일찍 혼자 되셔서 재혼도 안 하시고 병원 일에만 몰두하며 저 하나만 키우셨어요. 그러면서 술로 외로움을 달래신 것 같아요. 깔끔하신 분이 술이 들어가면 저렇게 자세가 흐트러지고, 평소에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을 쏟아내곤 합니다.”

   땅바닥에 붙어 있는 작은 등들의 조명을 받으며 잔디가 반짝이고 있었다. 키 큰 나무들도 눈 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하얀 꽃송이를 달고 있는 목련나무가 가장 눈에 띄었다. 그가 목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커다란 나무에 커다란 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것이 모습이 참 수려하지요. 어디에서 보든지 간에 첫눈에 환히 들어오는 꽃이지요. 오늘 밤에는 유난히 우뚝합니다. 이른 봄에 피는 꽃인데도 저는 늘 가을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그의 옆얼굴에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어느 시인은 목련을 ‘내가 어려서 홀로 된 누님’ 같다고 했어요. 학같이 고아한 봉오리, 눈같이 맑고 깨끗한 자태가 청순하고 우아한 여성을 떠올리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홀로 된 누님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맞는 착상 아닐까요?

   그는 시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동주 시인은 ‘목련을 사랑하기에는 나이 서른도 오히려 앳되다’ 고 했어요. 목련이 모든 고초를 다 겪고 이제 조용히 자신 속게 침잠해 있는 여인 같아서 한 얘기 아닐까요?”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가 전부인인 영아 얘기를 끄집어냈다.

   “실은 제가 이혼한 적이 있어요. 아까 어머니가, 영아 얘기를 했는데, 제 엑스 와이프예요.”

   ‘아, 네····. 어머니한테 얘기 들었어요.’라고 말할 수도 없어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도 더 이상의 말을 이어가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분위기가 거북스러웠다. 나는 “밤공기가 찬데 그만 들어가세요.” 하고 앞서 걸었다.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는 기분이 상쾌해서 아주 좋은데요. 해주 씨는 추우세요?”

   “아뇨. 춥진 않아요.”

   “그럼 여기 좀 앉으세요.”

   나 역시 상쾌한 기분에 가슴 속이 탁 트여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반대의 말을 했기에 순순히 그를 따랐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호기심이 동했다. 차가운 벤치의 감촉이 시원했다.

   “처음엔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금세 감정이 무디어졌어요. 영아한테서 연락이 와도 그냥 덤덤해요. 영아 역시 그래요. 그냥 친구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어머니가 너무 걱정을 하세요.”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닥터 웰헴은 영아가 그 남자하고도 헤어졌다고 했다.

   “그렇게 친구처럼 지내다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어요. 재결합을 할 거라면 진작 했었겠죠.”

   그의 어머니와 똑같은 말을 하면서 그 어조도 그녀와 같이 단호했다. 나는 별 할 말이 없어서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는 말을 더 할듯 말듯 하다가 내일 아침 새벽에 등산을 가야 한다면서 일어섰다.  

   “등산을 해보니 건강에 아주 좋은 운동 같아요. 해주 씨한테도 권하고 싶은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실은 나도 무슨 운동이건, 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터였다. 아프면서 체중이 급속도로 떨어져 휘청거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회복을 하여 아프기 전보다도 체중이 더 나간다. 몸과 마음이 안정되어 편안해지니 체중도 늘어갔다.  

   등산은 그를 따라 딱 한 번 가기는 했다.  버스로 어느 지점까지 가서 단체로 오르는 등산이었다. 토요일, 병원을 쉬게 하면서까지 닥터 윌헴이 시간을 내준 것이었으나 내게는 무리였다. 눈앞이 노래지며 구역질까지 나고 계속 목이 말랐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제일 쉬운 코스로 가는 기초반이었고 애론이 무척 배려는 해주었으나 너무 힘들었다. 숨이 차서 일행을 따라 올라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속이 메슥메슥해지며 토할 것 같았다.

   내려올 때는 훨씬 수월해 맘 놓고 발을 뗐었는데, 다 내려와서 나는 그만 발을 헛디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발목을 삔 것이었다. 금세 복사뼈 주위가 탁구공만 하게 부풀어 올랐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발목이 종아리 둘레만큼 퉁퉁 부었다. 그는 놀라서 재빨리 나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더 놀란 듯이 말했다.

   “아니, 왜 이렇게 가벼워요. 체중 미달입니다. 좀 더 잘 먹어야겠어요.”

   크리스틴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인상이 퍽 차다는 느낌을 받은 아이였는데  등은 유난히 따뜻했다. 크리스틴을 생각하면 바늘구멍에 끼인 실처럼 자연히 이민우가 따라 떠오른다. 그들이 피를 나눈, 그 출생의 비밀을 차라리 몰랐던 것이 더 나을 뻔했다

   의료원에 도착하자 바로 침 치료를 받았다. 기도실에서 쓰러진 날 생각이 저절로 났다. 그날, 애론이 나를 들쳐 업고 그의 어머니에게로 달려왔기에 나는 닥터 윌헴을 만나게 되었고, 또 이런 좋은 날들이 내 앞에 펼쳐졌다.

   복사뼈에 첫 침을 꽂자마자 나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소리를 삼키려고 이빨을 악물었지만 신음 소리는 저절로 새나왔다.

   “소리가 나오면 질러도 돼. 괜찮아. 참으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요. 침 맞을 때 제일 아픈 곳이 바로 복사뼈야.”

   정말 숨을 못 쉴 정도로 아팠다. 침을 다 꽂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치료실을 나오니 애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주 씨가 소릴 지르니까 내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서 혼이 났습니다.”

   다행히 뼈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운동을 통 안 하다가 해서 그러니, 우선 걷는 운동부터 하자고 애론이 제안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애론과 같이 걸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토요일 저녁엔 항상 집에 와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요일 새벽에 나를 데리고 나갔다. 10분 정도 집 주위를 벗어나니 걸을 만한 코스가 여러 군데 있었다. 거기엔 많은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해 발자국들로 이미 길이 닦여져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니 숲이 우거지고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숲속의 공기는 신선하고 향긋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니 날아갈 듯 가슴이 가벼워졌다.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머리가 맑아지고 땀이 식는 숲, 그러나 그 풍요로운 숲이 거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시련의 때가 있었다. 긴긴 겨울, 매서운 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로 서서 뾰족뾰족한 가시에 찔리듯 아픈 단련의 시기를 보낸 것이다.

   ‘내게도 생의 한여름이 온 것일까?’

   우리는 그 저녁에 석양을 바라보며 숲속을 걸었다. 그는 바위들이 막고 있는 길에서는 내 손을 잡아주었고 안다시피 나를 이끌어 주기도 했다. 극히 자연스레 취해진 행동에 나는 편하게 그에게 몸을 맡겼다.  

   처음엔 숨이 차서 못 올라가던 나지막한 언덕도 차츰차츰 편안하게 오를 수가 있었다. 종아리의 근육도 탄탄해져 힘이 생겼다. 내려오다 우리는 펀펀한 바위에 앉아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집에 들어오면 세 여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우리를   반기며 행복해 했다.  
  
   그러던 중,  애론이 내가 다닌 A대학에 국문학과 교수로 초빙이 되었다. 1년 계약직이었다. 1년이라고는 했으나 더 연장이 될 확률도 높았다. 영문과도 아닌 국문과 교수를 미국에서, 그것도 미국 사람을 초빙했다는 것이 내게는 이상한 일로 비추어졌다. 혹시 전부인과의 재결합을 위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떠나고 나니, 모든 현실이 한바탕 꿈이었던 양 허전했고, 애론과 같이 보낸 시간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며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만 넷이 사는 집은 모든 일이 다 순조로웠다. 애론한테서는 전화가 자주 왔다. 어머니랑 할머니와 통화를 한 후에는 꼭 나하고도 얘기를 나누었다. 퍽 자상스럽고 정겹게 나를 대했다. 떠날 때는 한 마디의 언질도 주지 않았던 그가 한국으로 나가서야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할머니가 손뼉을 치며 좋아서 말했다.

   “예전에 서울 가서 일할 때는 한참이나 소식이 없곤 했는데 해주가 같이 살고부터는 전화가 자주 와,  정말 좋네. 이렇게 우리랑 오래오래 함께 살아.”    

   곁에 있던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말예요. 그렇지만 이제 해주 씨도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 언제까지 붙잡아 둘 수는 없잖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나가는 말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인데도 세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아주머니가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해주 씨가 애론이랑 결혼을 하면 모든 게 다 한꺼번에 해결이 되는데, 애론을 어떻게 생각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아주머니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할머니가 분위기를 조정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는 해주랑 애론이 결혼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얘기를 많이 했어. 우리 애론이 이혼한 경험도 있고, 해주보다 나이도 많고 해서 그간에 말도 못 꺼내고 둘이 좋아지기만을 고대했으나 이렇게 애론이 한국으로 나가버려 이젠 내가 나서야 되겠어. 참 그리고 해주한테 데이트 신청을 한 사람도 있다고 하니 내 맘이 더 급해지네.”

   디스크로 병원에 오는 환자 중에 자기 아들을 내게 소개한 사람이 있었다. 왠지 나는 어른들이 며느릿감으로 좋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내 몸은 그럴 때마다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따지고 보면 결혼을 한 경험이 있고, 또 내 과거를 아는 닥터 윌헴을 어머니로 둔 애론이 내게는 더 편한 상대다. 그렇지만 세상의 조건을 따지면 애론 역시 내가 오를 수 없는 나무이다.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려고 간절히 원하는 할머니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아침 운동을 나갈 때, 가족이 다 같이 걷자고 몇 번 제안을 했으나 그들은 새벽의 찬 공기가 싫다면서 마다했었다. 그게 다 핑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론한테는 내가 벌써 귀띔을 했어. 애론은 해주를 아주 좋아하고 있다고. 선뜻 해주 앞에 나서지를 못하는 입장이라 미적미적하고 있는 게 분명해. 이제 해주만 맘을 정하면 되니까 잘 생각해 봐.”  

   ‘선뜻 나서지 못 하는 입장이라니··· ···.’

   할머니가 말한 악 조건이 내게는 더 합당한 조건이었다.  

   “내 살아생전에 애론이 결혼해서 애기 낳고 사는 거, 보는 것이 소원이야.”

   할머니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닥터 윌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주위 사람들이 좋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정식으로 사귀어보고 본인들이 결정을 해야지.”

   내 맘은 계속해서 감동의 파도가 일고 있었다. 유산까지 시킨 나의 과거를 훤히 다 알고 있는 그의 어머니가 나를 며느릿감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통화를 자주 하면서 애론과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다시는 남자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사랑은 옮겨가는 것이었다. 엘에이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멀리 있고 보니 예전부터 나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애론은 고백을 했고 “보고 싶다”라는 말도 스스럼없이 했다.  

   1년 계약이 만료된 그는 더 연장해 달라는 학교 측의 제안을 물리치고 미국으로 돌아왔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나는 애론과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한 후, 나는 병원 살림을 도맡아 해야만 했다. 병원의 규모가 차츰 커져 내가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시어머니가 된 닥터 윌헴을 도와주는 것이 내게는 가장 우선순위였다. 대학원을 계속한다던 계획을 포기하고 병원에 눌러 앉게 된 것을 시어머니는 내게 미안하게 생각했다.

   “장학금을 받으면 졸업 후, 그 회사에서 몇 년간은 일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잖아요. 저도 마땅히 병원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 병원을 떠나고 싶지가 않아요.”

   그동안, 나는 학생 신분으로 참 오랜 기간을 버텨왔었다.

   그리고 이제, 내 나이도 50을 훌쩍 넘어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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