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24

2011.06.24 14:17

김영강 조회 수:491 추천:117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24회



   비행기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잘 정돈된 로스앤젤레스 시내가 바둑판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납작한 장난감 차들이 줄줄이 움직이고 있었다. 온갖 잡다한 인생살이가 내 손바닥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해 세상사가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였다. 삶 속에 얽혀 있는 정교한 인간관계나 운명 같은 것이 한갓 종이 한 장처럼 얄팍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에는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가슴에 안고 수많은 밤을 지새웠던 이민우와의 과거지사도 잠시 일었던 파도에 불과했다. 그 파도를 헤치고 나올 생각도 않고 점점 가라앉기만 했던 내 자신이 참으로 바보스러웠고, 왜 그리도 많이 울었을까 하고 생각을 하니 부끄럽기까지 하다. 아무리 세찬 파도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잔잔해지는 법인 것을.  

   아프고 괴로웠던 추억들이 이제는 모두가 다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다. 헤어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를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깨달았다.

   그 소중한 경험을 내 가슴에 안겨준 이민우가 도리어 고맙기까지 하다. 소소한 바람도, 이파리 하나도, 이 세상을 온통 아름다움으로 비춰지게 한 그 사랑까지도. (이 부분은 12회에서 언급을 했으나 몇 분의 독자들이 조언을 주시어 이번 회로 옮긴 것입니다.)

   참 우습게도, 그가 내게서 떠난 것까지도 감사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둥실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손을 뻗치면 뭉텅 바로 잡힐 듯했다. 그 구름을 타고 애경이가 울면서 어디론지 떠가고 있었다.

   ‘난 억울하게 죽었어. 정말 억울하게 죽었다고. 그래서 내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허공을 떠돌고 있단다. 내 죽음의 의문을 풀어줘.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제발, 제발 부탁이야’ 하고.

  나와의 관계에서는 엉킨 실타래를 풀지도 못하고 떠나버렸는데도, 그녀는 내게 간절한 눈길을 보내면서 호소하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언니가 아닌 60 중반쯤 돼 보이는 한국여자가 나를 맞았다. 의외였기에 운전을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아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유해주”라고 쓴 작은 팻말을 들고 있었다.

   “강 작가님이 편찮으셔서 제가 대신 나왔어요.”

   강 작가라는 그녀의 말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어디가 많이 편찮으신가요?”

   여인은 가타부타 말을 않고 입술을 약간 움직이며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그 표정이 아리송하면서도 엉거주춤했다. 그녀는 얼른 내 가방을 끌어주며 앞장을 섰고, 차를 탈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암말 안 했다. 공항을 벗어난 차는 시골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길은 왠지 휑하게 넓기만 해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연적으로 트인 비포장길처럼 보였다. 가을은 벌써 끝이 나버리고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철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엘에이와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어느 해 시월, 단풍이 든 버지니아의 거리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아, 나는 황홀감에 빠졌었다. 신이 요술을 부려 도시를 온통 채색해놓은 것 같았다. 빨강, 노랑, 주황, 등 온갖 색깔들이 어우러져 가는 곳마다 너무 아름다웠다. 노랑, 그 한 가지 색깔만도 샛노랗고, 노르스름하고, 또 노리끼리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강렬한 붉은 색은 마치 치솟고 있는 불길을 연상하게 했다. 여름의 풍성한 짙푸름도 가을의 아름다움을 준비한 과정 같았다.    

   그 황홀했던 단풍들이 땅에 떨어져 지금은 다 사그라지고, 길 양쪽에는 몸통을 드러낸 가로수들이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거리엔 차들도 한산했다. 가로수길이  끝나자 건널목이 나왔고, 건널목이 끝나니 마을 입구가 나왔다. 낡은 집들과 잡목이 흩어져 있는 환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 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아름다운 주위 풍경을 상상했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여인은 혼자 차를 탄 듯이 꼼짝을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같은 한국 여자이니 더러는 내게 말을 걸고, 또 강미경이 잘 지내고 있다는 등의 안부를 들려줄 수도 있건만 그녀는 계속 말이 없었다. 맞은편 서쪽 하늘엔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달군 쇠붙이처럼 붉던 어느 여름날의 저녁노을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잿빛 속에 어른어른 붉은 기운이 감도는 잔잔한 노을이었다. 침묵이 계속되니 차 안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불편했다. 침묵의 무게에 차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기에 언니가 지금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짤막했다. 강 작가님의 집이라고. 그리고 집으로 바로 모셔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민우가 살고 있을 그 집에 말이다. 뜻밖이었다.

   드디어 강미경의 집 앞에 도착을 했다. 자그마한 단층으로 오랜 세월 동안 손길이 안  갔는지 퍽 낡은 인상을 주는 집이었다. 탁한 먼지 색 같은 벽 색깔이 아주 옹색하고 충충해 보였다. 다행히 붉은 색 계통의 지붕과는 그런대로  조화를 이루었다.

   제법 높은 철사로 된  담장이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너무 듬성듬성하게 엮은 철사라 손으로 조금만 힘을 주면 구부러질 것 같았다.  현관으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를 제외하고는 온통 정원인 앞마당에는 잎은 다 떨어지고 가지만 제멋대로 뻗친 나지막한 나무들이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서 있고, 이미  말라버려 갈색으로 변한 꽃나무들의 무리가 함부로 넘어져 있었다. 오래 돌보지 않아 쾌쾌하고 축축한 냄새가 났다.

   여인이 키를 꽂고 대문을 열었다. 문이 열렸는데도 언니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은 떨리고 또 흥분이 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좁은 복도가 나왔다. 앞이 콱 막힌 내부 구조였다. 숨통이 막히는 듯 답답한 분위기였다. 옛날의 화려했던 언니의 취향과는 영 다른 실내였다. 벽에는 그림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복도 왼편엔 거실로 보이는 자그마한 방이 있었다. 한마디로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방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은 곳 같았고 싸늘한 냉기가 내게까지 전해오는 듯했다.

   여인을 따라 거실을 지나서니 툭 트인 뒤뜰이 시야에 들어왔다. 잎을 다 떨구어버린 나무 몇 그루가 추위에 떨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뜰은 꽤 넓었으나 오랫동안 가꾸지를 않아 그대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마침, 서쪽 하늘에 펼쳐지고 있는 저녁노을이 있어 바깥 풍경이 그리 살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엔 처절한 슬픔이 잔뜩 배어 있었고, 집안 분위기도 전혀 예상 밖이라 나는 미스터리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시야가 환해지니 가슴이 확 트였다. 그곳 실내는 거실보다도 훨씬 넓고 또 밝았다. 가족들이 주로 쓰는 패밀리 룸 같았다. 옆 벽이 아치형으로 툭 틔어져서 부엌과 식당이 바로 붙어 있었다. 그곳에도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웬 백발의 깡마른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말라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해 순간적으로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퀭하니 움푹 파인 두 눈만이 온 얼굴을 차지하고 있었고 마른 목이 머리를 지탱하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저녁노을 빛을 어깨너머로 받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윤곽은 희미했으나 입가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은 뚜렷하게 잡혔다.  

   ‘언니는 어딜 가고 저 분은 누구일까?’

   멈칫하다가 나는 그만 하마터면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가 바로 강미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몰라보게 늙어 있었다. 염색을 하지 않은 머리 때문에 더 늙어 보였겠지만 그렇게 온통 백발이 될 나이는 아직 아니라 나는 더 놀랐다. 갑자기 목이 콱 메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민우와 30년의 세월을 살았는지 그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미경이 저렇게 변하다니··· ···.’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그 강산이 열 번을 변하더라도 강미경이 저토록 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갈색의 윤기 나는 긴 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릴 때,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는 그녀를 더욱더 돋보이게 했고, 쌍까풀이 진 깊은 눈 그리고 오뚝한 콧날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그녀는 여자가 보아도 자꾸만 바라보고 싶은 그런 미인이었다.

   어느 날, 사라져가는 석양빛을 창 너머로 받으며 교회 구석진 의자에 앉아 기도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 “헉”하고 숨을 들이쉬고는 금세 뱉어내지를 못했었다.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결국은 연적으로 인연이 끊어졌지만, 한때 그녀는 내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언니 앞에 가까이 가고 있는데도 그녀는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혹시 일어설 수가 없어서?’

   앉아 있는 의자도 특수하게 제작된 것임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팔걸이와 등받이 발판 등이 예사롭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널따란 오른편 팔걸이 바깥쪽에는 스위치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나는 “언니” 하고 부르며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의자 앞에 털썩 꿇어 앉아버렸다. 내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손은 작고 까칠했으나 따뜻했다. 30년 동안의 긴 장벽이 단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녀는 내 맘속에서 경악하는 외마디 소리를 들은 것같이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내가 너무 변해서 놀랬지?”

   나는 말을 잃고 눈물만 흘렸다. 언니의 뻥 뚫린 커다란 눈에서도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져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담담하게 대했다.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딱 30년 만이구나. 내가 이토록 변한 건 그만큼 나한테 사연이 많았다는 증거야.”

   언니는 첫마디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했다. 기운이 다 빠져버려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의자 밑바닥으로 스르르 가라앉을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그 음성에는 생동감에 넘쳐 있어 나는 놀랐다.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눈빛도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았을까?’

   분명히 이민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걸어가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부부의 만남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 길의 끝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길의 시작이 당장은 눈에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결코 영원한 길은 아니다. 변화무쌍한 것이 인생길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펼쳐질 그 길이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탄탄대로일 수도 있고, 험난한 가시밭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길의 끝이 보이지 않고 또 언제 목적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냥 주어진 길을 그대로 걸어가면서 발에 걸리는 돌부리는 걷어내고, 걷어낼 수 없는 장애물들은 피해서 가야 한다. 또 허옇게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들을 치워가며 걷고 또 걸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옳은지, 저 길이 옳은지도 몰라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옳지 않은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언제라도 쉽게 돌아올 듯이 가볍게 발걸음을 뗄 수도 있다.

   ‘아스팔트로 잘 다져진 고속도로를 달리던 그들이 잘못 행로를 잡아 그만 가시밭길로 들어선 것일까? 그래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불행을 느끼고 있는 상태일까? 인생길은 되돌아 갈 수 없는 일방통행이기에.’

  그래서 옳은 길을 가려면 부부는 서로 맞춰가며 살아야 하는 것일 게다. 발목을 묶고 뜀뛰기 시합을 할 때에도 서로 눈을 마주쳐가면서 하나 둘, 하나 둘, 하고 구령을 불러야 하는 것처럼.

   ‘강미경과 이민우는 발목을 묶고 뜀뛰기를 하다가 그만 뒹굴어지면서 나가자빠진 것일까?’

   실은, 나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민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래간 만이야’ 하고 그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아니 마누라 앞이니 정중하게 ‘오래간만입니다’ 하고 존댓말을 쓰면서 말이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단둘이 어디서 우연히 마주쳤다 하더라도 그는 존댓말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처럼 나를 무시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미안해서 눈 둘 곳을 몰라 안절부절못할 수도 있잖은가? 그도 언니처럼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었을까?’

   젊은 시절, 그들은 영화의 주연배우처럼 미남 미녀였고, 참 많이 닮아 오누이 같기도 했었다. 집 안 어디에도 이민우의 자취는 없었다. 아들과 강미경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벽난로 선반 위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아들은 이민우와 판에 박은 닮은꼴이었다. 지금쯤은 서른에 가까운 나이일 텐데 사진은 틴에이저 때 찍은 것 같았고 언니도 새파랗게 젊어 있었다.

   ‘혹시 이혼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나를 집으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른다. 신문에서 ‘강 미셀’ 이라는 이름을 대했을 땐 미처 생각 못했으나, 이혼을 했기 때문에 ‘강’ 씨로 도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지금에야 들었다. 결혼이 만들어낸 실용적인 틈바구니 속에 치여 정서적인 관계가 상실되는 경우가 허다한 일이니, 이민우는 충분히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갈 수 있는 위인이다. 옛날에 폈다 접었다 하던 내 상상의 나래가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이혼을 한 후에 ‘강’으로 도로 돌아갔다면 등단연도를 볼 때, 아주 옛날에 이혼을 한 것으로 계산이 나온다. 그럼 그 후에도 불행한 일만 계속됐다는 말인가? 아닐 것이다. 결혼 후에도 자신의 본성을 고수하는 여자도 많으니 강미경이 저렇게 된 것은 분명히 이민우와의 결혼 생활에서 온 결과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집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저렇게까지··· ···.’

   언니를 보고 앉았노라니 자꾸만 슬퍼졌다.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느라 나는 안간힘을 썼다. 허나, 그녀는 침착했고 이민우와 애경에 대해서도 별말이 없었다.

   그래서 주로 내가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 살아온 이야기였다. 물론 결혼을 한 후의 이야기들이다. 아이가 넷이나 된다는 소릴 듣고 언니는 밝게 웃으면서 “너는 부자구나. 좋겠다. 좋겠다.” 라는 말을 연발하며 신기한 듯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뻐했다.

   아기 낳기 전까지는 병원의 실림을 도맡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아기 낳은 후부터는 애 키우느라고 더 바빴다. 남편이 그렇게 원했고 나 역시 남편에게 순종을 했기 때문이다. 네 아이는 순조롭게 잘 자라주었고 지금은 다 독립하여 집을 떠나 살고 있다. 그리고 남편은 언어학과 교수로 계속 학교에 남아 있다.    

   난, 대학을 졸업하고는 바로 결혼했고, 결혼 후에 박사학위까지 딴다던 계획은 다 수포로 돌아가 버렸지만 미련은 없다. 어릴 적부터 공부가 인생의 전부인 양 생각했던 내가 그리 변할 줄이야 미처 몰랐다. 내게는 가정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좋은 남편 주신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어느 순간, 남편이 곁에 없는 삶을 상상하고는 눈앞이 캄캄해져 그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그는 나의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꿈과 소망을 키우며 사랑의 동반자로 함께 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사람은 바로 남편이었다.

   이민우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부터 시간이 정지되어, 멈춰버린 세월 속에 갇혀 있다가 애론을 만나고부터는 그 정지된 시간이 서서히 발을 옮겨놓았다. 이민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나 자신이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도 않고 살려 달라는 고함을 지르지도 못 하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사랑이 가면 또 다른 사랑이 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내면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다. 내가 예전에 받은 고통을 지금 언니가 받고 있는 것 같아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그토록 변하게 만든 사연들을 그녀가 쉽게 털어놓지 않아도 나는 묻지 않았다. 언니 입에서 슬픈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아들의 안부도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민우와의 모든 추억들을 세월의 강물에 흘려보내면서 마음 구석구석을 다 씻어냈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단단하고 질긴 매듭이 되어 내 가슴속에 서리를 틀고 있었으나 아주 옛날에 나는 그 매듭을 풀어 버렸다. 그것을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다. 그리고 언니가 내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다면 그것도 풀어 주고 싶었다.

   언젠가 애경이가 언니는 위선자라고 욕을 퍼부어대면서 했던 말, 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는, 그 말이 내게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이렇게 사계절이 바뀌듯, 인생도 그저 왔다가 가는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하루하루는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더 많지 않은가?’

   담장 밖에서 부산하게 들려오는 살아가는 소리들, 그 소리들은 하나같이 다 다른 소리를 내며 목청을 돋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훗날, 그들은 화음을 맞춰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강미경의 어깨너머로 펼쳐진 노을이 짙어지고 있었다. 내일도 시간이 있으니 꼭 해야 할 말은 미루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이민우가 집엘 들어오기 전에 일어나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다. 그녀는 저녁 준비가 다 됐다고 나를 붙들었다. 언니 집에서 저녁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호텔 식당에서 옛날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모두가 다 빗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언니가 스위치를 누르니 의자는 스르르 미끄러져 식탁 앞 알맞은 위치에서 멈췄다. 의자와 마찬가지로 식탁 역시 언니에게 맞게끔 특수 제작이 된 듯했다. 의자가 워낙 높은데도 언니의 앉은키에 잘 맞았다. 식탁에 딸린 의자도 보통 의자보다는 높은 편이었다.  

   나는 좀 망설이다가 언제부터 이렇게 많이 아팠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걷지 못함을 뜻하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지나치는 말처럼 건성으로 대답했다.      

   “허리 때문에 고생을 좀 했어. 수술을 네 번이나 했단다.”

   그녀의 눈빛에 슬픔이 가득했다.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속에는 왠지 아픈 기억들이 파편처럼 박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강미경은 여인을 자신의 간병인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간병인이 준비한 저녁을 먹은 다음 나는 내일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한 후, 일어나려고 했다. 언니는 정색을 하고 나를 또 붙들었다. 순간 그녀가 지금 혼자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호텔 예약을 취소하라면서 내 손을 꼭 쥐었다. “여기서 자라.” 는 그녀의 말꼬리엔 내가 가버릴까 봐 안타까워하는 아쉬움이 끈끈이 묻어 있었다. 지금 언니에겐 내가 절대로 필요한 존재였다. 나는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주저앉았다.

   “마지막 수술 때는 정말 힘들었어. 그렇지만 난 절대로 죽을 수 없었어. 꼭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었거든. 그래서 신께서 내게 기적을 베푸셨는지도 몰라.”    

   ‘꼭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내게 꼭 부탁할 말이 있다는 말과 동일한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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