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28

2011.07.22 13:11

김영강 조회 수:856 추천:131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28회



  “사실, 이 장편 소설이 세상 빛을 볼는지 못 볼는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어.”

  소설을 끝내기 전에 자기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연 이 소설을 끝낼 수 있을까 하고. 그러나 그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얘기를 바로 이었다.

  “너 혹시 2012년에 종말이 온다는 소리 들은 적 있니?”

  지금 한창 떠들썩하게 세상에 퍼지고 있는 소문이라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신문에도 났고 텔레비전에서도  방영을 했었다.  

  “행성 X 얘기 말인가요?”

  “그래 맞아. 너도 알고 있구나. 행성 X뿐이 아니야. 웹봇도 그렇고 마야 달력도 2012년에 종말이 온다고 분명하게 예언을 하고 있어.”

  웹봇이나 마야 달력에 관한 얘기도 나 역시 알고 있었다.

  3600년 주기로 공전하는 행성 X 로 불리는 나비루가 긴 타원을 그리며 지구로 다가와 치명적인 해를 끼쳐 대혼란을 일으킨다는 2012년 지구의 종말론을 비롯하여, 전세계 웹을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니며 앞으로의 벌어질 상황을 제시하는 웹봇이 2012년에서 멈춘 채, 작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기사도 읽었다.

   웹봇은 1990년대 말 주가 사정의 변동을 예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인데, 이것이 작동을 멈추었다는 사실은, 인류가 벼랑에 몰려서 멸망하는 예언이라 했다. 그리고 웹봇은 911 테러, 뉴욕 대정전, 2004년 쓰나미 등의 사건들을 맞혔다고 했다.

  또한 마야 달력은 기원전 3114년 8월 13일을 원년으로 하여 기원후 2012년 12월 21일로 멈추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마야문명에서는 지구에는 재배열이 있는데 약 구만 년 전에 2차 재배열이 있었고, 2012년에 3차 재배열이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연 파괴와 고도화된 기계 문명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리족의 전설이나 중국의 주역에도 2012년이 지구의 종말이라고 예언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강미경은 종말을 믿고 있는 듯이 확신하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괜히 떠도는 소문에 불과하겠죠. 이런 소문이 어디 한두 번 있었나요?”

  “그럼, 너는 믿지 않는단 말이구나.”

  “물론 안 믿죠. 종말이란 내가 죽는 날이 아니겠어요?”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내게 그녀 역시 확신에 찬 말투로 설명했다.

  “아냐 이번은 거의 확실하다고 다들 그래. 1999년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을 한 것이 맞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 거였어. 그의 '잃어버린 그림 예언서'가 로마에서 발견되었는데, 재해석한 결과 지구 종말은 1999년이 아니라 2012년이라는 거야.”

  노스트라다무스는 사후 400년이 넘은 지금도 예언가로 지목받고 있으며, 그는 자신의 죽음과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등을 예언한 바 있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면서도 맘이 급해. 종말이 오기 전에 책이 나와야 하니까. 죽어도 결백을 밝히고 죽어야 잖니?"

  종잡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런 언니는 지구의 종말을 믿어요?”

  “글쎄, 믿는다기보다는 종말이 오면 좋겠다는 쪽이야.”

  제이슨이 나오면 같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강미경이 엉뚱한 방향으로 얘기를 몰아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열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이 뒤엎어져야 한다고. 죄 없는 사람을 12년씩이나 감금해 놓고 나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 마땅히 그 죗값을 받아야지. 지구가 아주 박살이 나야 한다고. 판사놈, 검사놈들부터 쓰나미에 휩쓸려 깊은 바다 감옥에 처박혀야 한다고.”

  그녀의 눈빛이 다시 혼란해지고 있었다. 섬뜩함을 또 느꼈다. 오싹해지는 가슴을 움츠리는데 강미경은 목소리를 낮추고 몽롱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종말 얘기도 소설에 쓰려고 해. 소설 줄거리하고 어떻게 연결시킬까 지금 구상 중이야. 이렇게만 쓰면 소설은 반드시 대 히트를 할 거야. 소설은 버지니아로 와서 바로 쓰기 시작했는데 하나도 히트한 게 없어. 특별한 것을 쓰려고 고심했지만 안 됐어. 이 장편은 반드시 히트를 칠 거야.”

  히트라는 단어를 되뇌면서 그녀는 자신 있게 말했다.

   “실은 말야. 이 장편을 시작하기 전에 소설 하나를 쓰다 만 게 는데, 이것도 히트를 칠 수 있을 것 같아.”

  횡설수설하는 소설 얘기를 나는 또 들어줘야만 했다.


  강미경은 자신의 얘기를 떠난 아주 엉뚱한 줄거리를 늘어놨다.

  “옛날에 잠깐 일간신문에 연재소설로 나왔다가 금세 중단이 돼 버린 건데,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 한국 살 때였으니까 정말 옛날이네. 이걸 소재로 해서 소설을 쓰려고 지금 구상 중이야.”

  “어떤 내용인데요?”

  “자세한 내용은 생각이 안 나고, 그 골자는 대충 이래.”

  서울의 일류대학을 졸업한 남자가 농촌계몽의 큰 뜻을 품고 산간벽지로 내려갔다. 대학 시절부터 계몽활동을 했고 깡패들, 불우 청소년들의 대부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그의 봉사 활동은 눈물겨웠다. 산간벽지로 내려갈 때, 그는 마음잡은 깡패 네 명과 동행을 했다. 물론 그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여자가 있었다. 그의 약혼자였다. 같이 가서 자기도 도와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그녀를 떼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집에 기거하면서 다섯 명의 남자에게 식사, 빨래, 청소 등, 모든 것을 도맡아 시중을 들었다. 방은 약혼자와 한방을 썼다. 남자 넷은 모두들 “형수 씨, 형수 씨.” 하면서 그녀를 따랐다. 주인공인 남자는 평생 잠옷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깡패들에게 잠옷을 입히고 또 목욕도 자주 하게 하고, 면도, 이발로 아주 깔끔하게 그들을 변신시켰다. 그리고 내 것 네 것 없이 모든 것을 공동 소유했다.

  “여기서 한 가지 획기적인 발상은 자기의 약혼자를 공동 소유로 한 거야. 자기 혼자만 여자를 소유하는 것이 동료들한테 미안하다는 거였어. 이러한 주인공 남자의 발상을 여자가 수용했다는 것이 더 획기적인 사건 아니겠니? 사랑하는 남자가 간곡히 부탁을 해, 여자는 그 사랑하는 남자의 뜻대로 따른 거였어. 물론 외부에 새 나갈까봐 쉬쉬했어.”

  “어마나, 정말 이상한 소설이네요.”

  아무리 소설이지만 이건 너무했다 싶었다.

  “한지붕 아래서 밤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양 평온했나봐. 소설에 서술됐는지, 안 됐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에 없지만, 물론 정사를 치루는 데는 순서를 정했겠지. 월요일은 누구, 화요일은 누구, 이렇게 말야. 남자가 모두 다섯 명이니 월.화.수.목.금. 이런 식이었겠지. 일주일에 한 번씩 말야. 토.일은 주말이니 여자도 쉬어야 되지 않겠니? 이렇게 쓰면 독자들의 흥미를 끌겠지?”

  깅미경은 소설이 이미 히트를 친 것같이 흥미진진하게 줄거리를 늘어놓으며 마냥 행복에 겨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섯 남자들의 기술이 다른 것도 서술하는 거야. 남자가 바뀌면 여자의 느낌이 다를 거 아니겠니?”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의미 깊은 시선을 보냈다. 기분 나빴다.

  “그런데 문제는 나한테 그런 경험이 없다는 거야. 남자라곤 이민우밖에 몰랐으니 말야. 아참, 남자 경험이 많은 여자들과 인터뷰를 하면 되겠구나.”

  혼자서 질문하고 혼자서 대답하면서 술술 이야기를 이어가더니 드디어 나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어땠어. 너도 최소한 남자 두 명한테는 경험이 있잖아. 같지는 않지? 다르지?”

  웃음기를 띈 그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나를 쏘아댔다. 섬뜩한 기분에 흠칫하는데 뒷말이 바로 나왔다.

  “그렇게 오래 사귀었으니 이민우가 너를 그냥 두지는 않았을 거야. 그치? 나도 마찬가지였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를 거꾸러뜨려 버렸거든. 너는 어땠니?”  

  얘기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사연도 다 장편에 쓰려고 해. 이민우의 문란했던 성생활도 물론 써야 하겠지.”

  내게는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바로 이민우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이민우가 바로 그 짓을 했단다. 네가 한때 사랑했던 남자고 해서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으나 그만 나와버렸네. 그러니 몸이 다 망가졌지. 흑말, 백말, 노랑말 닥치는 대로 타고 달렸으니 그 몸이 어찌 배겨났겠니? 종국은 자살로 치닫게 돼 있었어.”

  언니답지 않은 말투였다.

  “미치지 않고야 어떻게 그리 살았겠니? 나도 미쳤으니 그런 남자하고 살았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으니 제이슨이 온전했을 리가 없지. 그냥 다 같이 미쳐버린 거야.”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는지 계속 미쳤다는 말을 반복했다.

  “실은 내가 이 소설의 발상도 이민우로부터 얻은 거야. 지금 세상에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니 이런 소설을 써도 들어 먹히겠다는 느낌이 든 거야. 어마나, 내가 신문에 연재된 소설 얘기를 하다가 딴 데로 샜네, 어디까지 얘기했지? 신문에 실린 연재 말야. 여자 하나 가지고 돌아가면서 섹스한 얘기까지 했지?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어찌 소문이 새 나갔는지 마을에 있는 경찰에서 냄새를 맡고 그 집을 감시하기 시작했어.”

  여기까지 나간 다음 소설은 더 연재되지 않았다. 아무런 해명도 없이 그냥 중단되어 버렸다.

  “신문사측이나 작가가 중단 이유를 신문에 발표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보지 못했어. 아마 사회적인 지탄을 받았겠지? 그리고 독자들로부터 빗발치는 항의가 들어왔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왜 이 소설의 내용이 40년이나 지난 지금도 내 머리에 생생한지 모르겠어.”

  “만일 언니가 이 소설을 쓴다면 그것은 남의 소설을 표절하는 게 되잖아요? 이미 신문에 발표된 얘기를 쓴다는 것은 위험하잖아요. 남들이 알고 뭐라 그러면 어떡해요?”

  남의 소설을 완전히 훔치는 격이지만 나는 표절이라는 고상한 단어를 썼다.  

  “쟤는, 이미 40년 전이고 몇 번 나왔다가 중단돼버린 건데 누가 지금 기억을 하겠니. 더구나 여긴 미국 아니니? 별 걱정을 다 한다 너는.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몰라. 걱정 마.”

  그녀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기억에 없다는 소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써놓은 소설을 좀 보고 싶다고 한 나의 말을 한마디로 잘라버린 그녀가 아닌가?’

  이메일로 보내 달라고 했다가 너무 무안을 당해 나는 얼굴까지 화끈했었다. 무식하다는 말을 대놓고 한 그녀다. 나는 그렇게는 말을 못하고 “내가 알잖아요.” 하고 한방 놨다. 그녀의 노기에 찬 음성이 고막을 쳤다.

  "아니 그럼 네가 투서라도 하겠다는 거니? 네가 그래봐야 아무짝에 소용없어. 증거가 없잖아 증거가. 네가 어디 가서 40년 전 신문 조각을 구하니? 무슨 신문인지도 모르고 작가도 모르는데-에--. 하려면 얼마든지 해봐. 너만 망신당할 테니. 하여튼 투서질하는 것들은 다들 바다에 처넣어야 해.”

  그녀는 내가 투서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마 예전에 단단히 당한 모양이다. 어디서 이렇게 에너지가 샘솟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지칠 줄도 모르고 얘기를 계속했고 고함 소리도 우렁찼다.

  ‘내가 미쳤어. 그녀에게 상처 되는 말을 하다니····.’

  소리도 없이 사라졌던 간병인이 갑자기 나타났다. 우리가 얘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나 역시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간병인의 얼굴에는 회색빛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는 뭔가 겁에 질려 있는 듯, 불안해 보였다.  

  “잘 시간이 지났어요. 이제 주무셔야 돼요.”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얼른 휠체어를 밀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간병인은 나타나지 않았ek.

  나도 일어나 내가 잘 방으로 갔다. 귀가 멍멍하고 시야도 흐렸다. 마치 귀신에 홀렸다가 풀려난 기분이었다.

  ‘그녀는 지금 몸도 마음도 환자인 것이 분명하다.’

  공항에서 도착했을 때도, 틴에이저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언니 집에 있다가 문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24시간을 지켜봐야 할 정도로 언니의 건강이 안 좋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간병인이 내게 보낸 눈초리에서도 수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환상의 세계를 헤매는 듯한 그 표정, 두서없이 나열되던 거짓말 같은 말들, 칼끝같이 차갑게 다물던 그 입술, 그리고 순간순간 섬뜩할 정도로 강렬했던 언니의 눈빛에서 나는 정상적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그 무엇을 느꼈다.

  소설을 어떻게 끌어갈 것이라는 줄거리를 나열한 말들이 수시로 바뀌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기억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불과 1, 2분 전에 한 말들도. 그녀가 확실하게 환자라는 사실에 마음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하고 정수리를 내려쳤다.

  ‘제이슨이 이민우를 진짜로 죽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강미경의 얘기 도중에도 잠깐 뇌리를 스쳤지만, 제이슨 역시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 아닐까?’

  세상엔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인데도 강미경이 홀로 상상의 나래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나름대로의 각본을 짤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인해 상상이 현실로 능히 둔갑할 수도 있다.

  ‘그 시간에 제이슨이 어디에 있었는지의 정확한 알리바이, 차고 천장에 목을 매고 있는 이민우를 아들이 언제 어떻게 발견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지 않았는가?’

  유죄로써의 증거가 없었다면 미성년자였던 제이슨이 12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할 수는 없다. 언도가 내려져 지금은 사건이 종결됐어야 한다.

  ‘그럼 혹시 사형을? 아냐. 아니야. 내가 왜 이런 끔찍한 생각을?’  

  만일 내 생각대로 언니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면, 간병인이 내게 조금이라도 귀띔을 해 주었어야 했다.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동안 40분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그녀는 일체 말이 없었다. 하루의 시간이 더 있으니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수도 있고, 또 강미경이 어떤 말을 어떻게 끌어 가나를 주시하면 의문은 풀릴 것이다. 부모의 교통사고 건도 내 머리에 엉겨 붙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소설이 정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저 상태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

  ‘계속 구상만 하고 있는 것일까?’

  ‘비극은 끝나다’ 는 현실에서 허구로 둔갑을 했으나 현재의 장편소설은 허구에서 현실로 완전 둔갑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확신은 없다. 오직 한 가닥 소망의 불빛을 붙들고 희망 속에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아들이 곧 석방되리라는 소망의 불빛, 그것이 그녀의 삶의 등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가,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 버지니아로 불렀다는 강미경은 나를 섹스의 현장까지 몰고 갔었다. 남편이 머리를 스쳤다. 소설에 내가 살아온 지난 얘기를 쓸 것이라는 언니의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나는 남편의 존재는 잊고 있었다. 강미경의 인생이 너무나 처절해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유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을 더 붙여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독자들이 더 흥미를 끌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강미경한테 홀려서 나 역시 잠시 정신을 놓아 버린 기분이다. 그녀에게 완전히 감전되어 다른 생각들을 할 겨를이 없었다.

  강미경의 소설이 신문에 난 후, 며칠 동안 크리스틴이 문득문득 떠올랐었는데, 정작 이민우가 죽었다는 소릴 듣고도 크리스틴이 내 머리에 없었다. 이제야, 그녀가 생각나며 운명이 자꾸 빗나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작용을 했다.

  그리고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강미경이 처절하게 울면서 이들이 감옥이 있다는 얘기를 한 까닭인지, 혹시 크리스틴이 옛날에 오빠 마약사건에 연루되어 감옥까지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자려고 눈을 감았으나 잠이 들지 않았다. 다시금 생각이 얽히며 기분은 자꾸만 깊은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닫힌 방 저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기침 소리는 꺼져가는 촛불처럼 힘이 없었다.

  얼마쯤 지난 후 기침 소리는 잠잠해졌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이리저리 뒤척거리는데 눈가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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