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갈림길

2011.10.04 21:42

김영강 조회 수:613 추천:213


  조용한 아침나절이다. 미동도 않고 그림처럼 앉아 있던 하영은 무심결에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초침소리가 유난히도 선명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아홉 시 반이었다. 홀로 앉은 시간이 한나절을 훌쩍 지나버린 것 같았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여느 때 같으면 회사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바짝 긴장하고 있을 시간이다. 시간이 후딱후딱 초침처럼 지나가버려 점심때도 잊고 살았다. “하영, 런치 타임. 런치 타임.” 하고 동료들이 사무실 창을 톡톡 두드려야만 ‘아, 벌써 열두 시구나.’ 하고는 시계를 쳐다보곤 했다.

  지금은 휴가 중이다. 며칠 동안 컴퓨터는 켜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홀가분한 기분은 아니다. 가슴이 파르르 떨리며 아스스한 느낌이 쏴 하고 전신에 퍼진다. 사느라고 바빠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이 쉴 새 없이 밀려오며 그녀는 지금 혼란에 빠져 있다.  
  외로움이 산더미만한 파도가 되어 온 집안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갑자기 정적을 깨며 전화기가 자지러질 듯이 울어댔다. 동시에 남편 얼굴이 확 떠올랐다. 가슴이 철커덩 천길만길 내려앉는 충격 속에 쿵쿵하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수화기를 들었다.
  남편이 아닌 동생의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데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지금 언니 집으로 가는 중이니 꼼짝 말고 있으라는 말에 하영은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동생은 어찌 지냈느냐는 안부는커녕, 이쪽 사정은 묻지도 않고 완전히 명령조로 말했다.

  ‘혹시 그 일을 알아버렸나?’

  남편이 별거선언을 하고 집을 나간 지가 보름이 넘었다. 하영은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소문은 빨랐다. 현관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동생은 다그쳤다.
  
“언니, 형부가 집 나갔다는데, 정말이야? 정말 맞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생겼지. 그렇지?”

  바짝 약이 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생을 바라보며 하영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 맞아. 이혼하재. 그래서 시간을 두고 좀 생각해 보자니까 별거선언하고는 보따리 싸가지고 자기 발로 걸어나갔어.”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은 게 누구 덕인데 이혼을 하재? 근데 언니, 형부 서울 간 거 알아? 집 나와서 바로 서울 갔대.”

  동생은 하영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똑똑 끊어지는 차가운 어조로 뒷말을 이었다.

  “형부한테 여자 생겼지? 그렇지? 서울 있는 여자지?”

  가정의 모든 경제는 하영이 걸머지고, 남편은 빌빌거리며 골프나 치면서 무역을 한답시고 서울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것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바라보던 동생이다. 남편이 사업관계로 두어 달씩 한국에 머무른다고 하면, 혹시 여자가 생겼는지도 모르니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살펴보라고 했다. 그러나 하영은 동생의 말을 대수롭잖게 여겼었다.

  “여자 감춰놓은 지가 벌써 육 년이나 됐어. 그동안 감쪽같이 속았으니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와.”

  “뭐야, 육 년이나 됐어? 한데 그렇게 눈치를 못 챘단 말야? 내가 뭐랬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 언니한테 너무 서운해. 왜 내가 언니 별거사실을 남한테서 들어야 해? 뻔하지 뭐. 내가 걱정할까 봐 날 위해서 말 안했다 이거지.”

  하영의 대답까지 다 해버리며 동생은 서운한 마음부터 털어놓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너한테 말했으면 네가 가만히 있었겠니? 당장 이혼하라고 그랬을 건 뻔한 노릇 아니니?”
  
  하영의 남편은 미국에 유학 와서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직장생활이 적성에 안 맞는다면서 회사에 붙어 있질 못했다. 결국은 무역업에 손을 댔고, 그 규모는 보따리 장사나 다를 바 없어 집에다 사무실을 차려놓고 침실도 겸하고 있었다. 한국과의 비즈니스라 밤중에도 전화가 걸려와 그들은 자연스레 각방을 쓰게 되었다.
  하영은 각방을 쓰니 너무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하루는 한밤중에 갑자기 잠이 깼다. 왠지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말랐다. 냉수를 마시려고 부엌을 향하는데 남편의 웃음소리가 불빛과 함께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사업상 무슨 좋은 일이 있나 하고 반가워서 방문을 열려는 찰나, 이어지는 남편의 목소리는 예리한 둔기가 되어 그녀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왜 그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도 몰라? 날 하루 이틀 겪었어? 벌써 육 년이야 육 년. 그런데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계약이 성립됐으니까 앞으로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 수 있어. 내가 곧 서울 가니까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하자고.”

  잠깐 말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지난번에 만 불밖에 못 줘서 화났어? 미정아, 미정아, 그러지 말고 내 얘기 좀 들어 봐.”

  저쪽에서 뭐라고 그러는지 남편은 “미정아, 미정아.” 하고 여자 이름을 애타게 부르다가 조용해졌다.
  하영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도저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방문을 열 수는 더더욱 없었다. 까마득한 벼랑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걷잡을 수 없는 급류에 휘말린 것같이 정신이 혼미해진 그녀는 겨우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그냥 확 방문을 열어젖힐 걸 그랬나? 아니지. 우선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냉정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모르는 척하고 동태를 살펴봐? 만일에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면 평생을 모르는 척해? 육 년을 넘게 알았다고 하니 지나가는 바람 같지는 않다. 육 년 동안이나 남편한테 딴 여자가 있었는데 그렇게 몰랐을 수가?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랑? 어휘조차 잊은 지 오래다. 다시금 남편의 목소리가 뼛속을 후비며 파고들었다. 뭐 지난번엔 만 불밖에 못 줘서 화났느냐고? 그렇담 그 전엔 더 많은 돈을 갖다 바쳤다는 말 아닌가?

  갑자기 핏줄이 팽창해오는 긴박감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남편에게로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울부짖고 싶었다. 내게는 돈 한 푼 갖다 주지 않고 그 여자한테 다 갖다 바쳤어? 육 년 동안이나? 아니, 내게서 솔솔 빼간 돈들이 다 그 여자한테로 흘러 들어갔단 말이지?

  남편이 여자를 안고 있는 장면이 영화필름이 되어 머릿속에서 막 돌아갔다. 뜨거운 분노의 덩어리가 핏줄을 타고 마구 돌아다녔다. 토할 길 없는 시커먼 돌덩어리 하나를 삼킨 것같이 답답해 숨을 토하는데 바늘로 속을 긁어내는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머리에서 불꽃이 일더니 팽창했던 핏줄이 여기저기서 툭툭 터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뭐 만 불밖에 못 줘서 뭐가 어쩌고 어째?”

  사랑보다도 돈 문제에 더 치가 떨리는지 동생은 언성을 높이며 흥분하다가 한심해서 죽겠다는 듯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속을 끙끙 앓으면서 얼마 동안이나 모른 척하고 있었어?”

  “사흘. 그 이상은 도저히 내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어. 밤마다 그 여자한테 전화하는 것 같아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 여자랑 전화하는 형부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며 밤새 귓가에 맴도는 거야. 형부 방 앞으로 자석에 끌려가듯 가려고 하는 내 발을 침대에 묶어놓는 것도 힘이 들었고.”

  “뭐, 그 여자? 쌍욕을 해도 시원찮을 년한테 뭐 말라빠진 그 여자야. 언니, 똑똑히 들어. 그 년은 나뿐 년이야. 또 형부도 나뿐 놈이고.”

  한껏 옥타브를 높이며 비약하는 그녀에게 하영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왜, 형부 욕하니까 듣기 싫어? 언니, 제발 정신 좀 차려.”
  옥타브가 조금은 낮아지면서 동생은 말을 이었다.  

  “언니 같으면 영원히 자신을 속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야. 하여튼 언니는 위대해. 나 같음 문 박차고 쳐들어가 이판사판 바로 결판 내버렸을 거야. 그건 그렇고, 어쨌든 간에, 언니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단 말이지? 그러니까 뭐래.”

  “어쩜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위치가 완전히 뒤바뀐 기분이었어. 나는 눈물이 나서 말도 이어갈 수가 없었는데 형부는 너무나 당당했어.”
  
  남편은 그랬다. 안 그래도 이혼을 하자고 말을 꺼내려는 참이었다고.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차라리 잡아떼며 오해라고 해주기를 바랬다. 제스처라도 좋으니 하영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비는 시늉이라도 해주기를 바랬다. 그날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감정이 웬만큼은 정리가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광목 끈으로 단단하게 매듭을 짓고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글쎄 뭐라 그런 줄 아니? 정말 사랑한대. 남자들이 흔히 피우는 바람이 아니라, 사랑이래 사랑.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정말 기가 막혀, 그걸 가지고 뭘 그리 울고불고 야단이녜. 당신한테 남자가 생겼대도 난 아무치도 않겠다. 갈라서면 간단하잖아? 글쎄 그러잖니?”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을 마당에 남편은 아내 앞에서 그런 뻔뻔스러운 말을 서슴없이 했다. 아무리 아내가 싫어졌다 하더라도 앞에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법적으로 묶어 놓은 아내의 위치를 그렇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부부라는 관계가 무엇인가? 만인 앞에서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등등,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위하며 살겠다고 서약한 것도 말짱 헛것이란 말인가? 남편은 마음이 변했다. 하영으로부터 아주 완전하게 마음이 떠나버린 것이다. 아무리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불같은 정열을 품고 그토록 사랑했는데 이토록 얼음장같이 냉랭해질 수가 있단 말인가?
  
   대학시절, 그들은 아주 열렬히 연애를 했다. 둘은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고 그가 하영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는 몸짓 손짓을 빼고도 눈빛만 보아도 알 수가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모르는 친구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고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다들 부러워했다. 머리 좋은 수재에다, 훤하게 잘 생기기까지 한 아주 멋진 남자, 그녀 또한 여자들도 반하고 싶을 만치 한없는 매력을 지녔었다. 많은 남자들이 하영의 주위를 맴돌았으나 그가 하영에게 퍼부어 대는 맹렬한 공세에는 아무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하고 미국유학 길에 올랐다. 모든 친구들의 흠모 대상이 되었던 두 사람은 참말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한 쌍의 부부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말야. 그 여자가 몇 번인가 미국에도 왔었어. 서울에서 바이어가 와서 무슨 컨벤션 쇼에 간다고 며칠씩 집을 비운 적이 있었거든. 그리고 공항에 나갔던 날도 술을 많이 먹어 운전을 못 한다고 안 들어왔었어. 정말 감쪽같이 속았어. 바이어랑 같이 다닌다고 해 돈까지 대주었으니····. 참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와.”

  그동안 빈껍데기하고 살면서 그것도 모르고, 사업차 서울 나간다고 하면 새 양복에다 새 구두에다, 친구들 만나면 기죽지 말라고 돈까지 두둑이 지갑에 넣어주었다. 그 돈으로 여자 만나서 연애질하고 다니는 걸 하영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의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도 몰랐고, 여자한테 척척 목돈을 갖다 바치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젊은 여자의 날렵한 몸매와 매끄러운 살갗에 길들여져 가면서 아내의 펑퍼짐하고 축 늘어진 모습으로부터 멀리 도망 치고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옛날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하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하얗고 예쁜 얼굴에 키도 크고 늘씬해 친구들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던 그녀였다.  

  예뻤던 여자도 안 예뻤던 여자도 반세기 이상의 인생을 살다보면 평준화가 돼버리지만, 잘 늙은 얼굴은 우아하고 편안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늙지를 못했다. 피곤에 찌든 얼굴에, 눈언저리뿐 아니라 얼굴 전체의 피부가 축축 늘어져 있다. 체중도 많이 불어 사이즈 식스가 이제는 그 두 배보다도 더 늘어났다. 옷도 편한 것이 좋아 훌렁훌렁한 바지에 블라우스만 걸치고 다닌다. 그녀는 혼자 쓰는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만 들여다보기에 멋하고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고, 또 너무 바쁘다 보니 자기를 가꿀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반면에 남편은 늘 멋지게 차려입어 그 모습이 삼십대 같다. 오십대 후반라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헬스클럽에 쉬지 않고 다니면서 운동으로 단련된 몸도 청년과 다를 바 없다.  
  
  하영은 미국 굴지의 은행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그녀가 쓴 프로그램이 미국 전 지역에서 사용되기에 언제 뭐가 잘못될지 몰라 그녀는 항상 대기 상태에 있다. 전화가 오면 한밤중이라도 벌떡 일어나야 한다. 일감을 집에까지 가지고 와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도 있다. 착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하영은 항상 최선을 다하고, 성취감 속에서 일하는 보람을 느낀다. 그녀는 한 번도 일하는 것을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해, 가정을 위해, 또 사회발전을 위해 여자도 자기 능력에 맞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조다. 연봉도 무지하게 높아 하영의 수입만 가지고도 아이들을 사립대학에 보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 피곤해 좀 쉬고 싶다. 가끔은 머리가 무거워 터져버릴 것만 같고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혈압약을 먹기 시작한 지도 근 십 년이 가까워 온다. 일한 지가 삼십 년이나 되었는데도 시스템이 바뀔 때마다 그녀는 열병을 앓고, 요즘 들어선 자꾸만 일이 겁이 난다.

  “사실을 알고 또 형부가 이혼을 요구하는데도 처음엔 도대체 실감이 안 났어. 이혼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어. 왜 그랬을까? 이게 사랑이라는 걸까 하고 의심이 가더라고. 미국 와서 바쁘게 살다보니 사랑 같은 거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거든. 그런데 여자가 있는 사실이 확인이 되었는데도, 형부가 나한테로 돌아올 것은 희망이 생기는 거야. 그냥 용서해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내 마음이 눈 녹듯 다 녹아내릴 것만 같고, 형부 가슴에 안겨서 막 엉엉 울고 싶었어. 그래서 이런 감정이 사랑인가 하고 골똘히 연구를 해 봤어.”

  동생은 갑자기 깔깔대고 웃었다.

  “그래서, 연구 결과 어떤 결론이 나왔어?”

  “지금도 모르겠어.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형부에게 기대를 걸 만한 한 가지 사건이 있었어.”

  남편이 집을 나간 그날, 하영은 그의 방을 뒤져 전화 빌을 찾아냈다. 거기까지는 신경을 못 쓴 탓인지 남편은 흔적을 남겨놓았었다. 똑같은 서울 전화번호의 나열, 남편은 그 여자한테 매일 밤 전화를 걸었었다. 한지붕 밑에 아내가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데 두렵지도 않았을까?

  열에 받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다이얼을 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하영은 깜짝 놀라 수화기를 내던졌다. 그리고 다시 곰곰이 생각한 결과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준비를 한 후, 떨리는 가슴으로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신분을 밝히니 미정이라는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상하게도 하영은 여자의 나이부터 물었다. 그녀보다는 무려 열네 살이 아래였다. 말씨로 보아 교양을 갖춘 여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잠깐 침묵을 지킨 그녀는 모든 사실을 다 시인한 후, 용서를 빌었다. 일이 너무 쉽게 풀어지는 듯해 하영은 의아했다. 미안하다고 지극히 공손한 목소리로 사죄를 하면서 한때의 바람으로 생각하고 남편을 용서해주라는 것이었다.

  우습게도 하영은 그 여자의 신세한탄을 들어야만 했다. 듣고 보니 그 여자도 불쌍했다. 말 못하는 자폐증 아이가 있어 무거운 십자가에 눌려 산다고 했다. 결혼을 하려면 그러한 자기 환경을 이해하고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돌봐줄 수 있는 남자하고 해야 하는데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그와의 결혼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사실은 지금, 나이는 좀 많으나 재력도 있고 마음도 따뜻한 남자가 있어 곧 결혼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편은 그 여자에게 뭐였단 말인가. 결혼할 남자는 따로 두고 그냥 심심풀이로 놀았단 말인가? 아니면 돈 때문에? 돈 때문이라면 남편 외에도 여러 남자를 두었을 수도 있다. 괘씸한 생각도 잠깐이었고, 그 여자가 어찌나 서럽게 흐느끼며 하소연을 하는지 하영은 그만 말려들고 말았다. 그리고 곧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말에 밀렸던 숙제를 끝낸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었다.

  “그래서 형부가 언니한테로 도로 돌아올 것 같단 말이지?”

  동생은 한심하다는 듯이 하영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는 순진하고 진실해 보이더라.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어찌나 불쌍한지.”

  하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생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도대체 언니는 뭐야? 바보야아- 천사야? 아니면 내 앞에서 괜히 그러는 위선자야? 뭐? 순진하고 진실해? 또 뭐 교양을 갖췄어? 순진하고 진실하고 교양 갖춘 년이 남자 꼬셔서 육 년 동안이나 돈 뜯어내? 그 년이 완전포장을 하고 쇼하는 것도 모르고 아주 홀랑 넘어갔구나. 머리채는 못 휘어잡았을 망정 한바탕 욕을 퍼부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그년이 불쌍하다고? 그래서 같이 울어주기라도 했어?”

  하영은 잠자코 있었다. 동생은 계속 껄끄러운 말들만 했다.

  “그러니까 형부가 돌아오면 대환영하겠다아-- 그 말이지? 언니, 언니가 이혼을 하기 싫은 이유가 뭔지 내가 정확히 가르쳐줄게. 그건 사랑 때문이 아냐. 체면 때문이야 체면. 주위의 시선 때문이야.”

  그렇다. 동생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영은 그렇게 가정교육을 받았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 항상 참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동생은 다르다. 십 년이라는 나이차 때문만은 아니다. 친자매지간인데도 그들의 성격은 어릴 때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지금도 언니를 대하는 동생의 말투가 신경질적이지만 그대로 들어준다.  

  “언니 가정은 겉으로 보기엔 미국 와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야. 어쨌든 형부는 무역회사 사장이고, 언니 또한 무지하게 돈 잘 버는 머리 좋은 프로그래머잖아? 아이들도 일류 사립대학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다니며 쭉쭉 잘 뻗고 있으니까 말야. 그래서 속이 곪았어도 언니는 그걸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거야.”

  동생의 입에서 또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 하영은 부모님한테로 화제를 돌리면서 동생의 이혼 사건을 끄집어냈다.    

“실은 엄마랑 아버지 때문에 더 망설여지기도 해. 너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까지 이혼한다 그래봐, 그 심정이 어떠시겠니?”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동생은 하영을 비꼬았다.

  “언니 효녀인 줄 세상이 다 아니까 이제 그 위선 좀 작작 떨어. 괜히 부모 핑계 대지 마. 난 다 알아. 언니 자신이 이혼한다는 게 창피해서 그런 거야. 이혼녀라는 말을 듣기 싫은 때문이야. 나 이혼한 것도 남들한테는 쉬쉬하잖아? 언니는 정말 고리타분해. 지금이 이조시대인 줄 알아?”
  
   일 년 전 동생이 이혼할 때 부모님은 펄펄 뛰며 만류를 했었다. 이제 하영이까지 이혼을 한다고 하면 부모님은 어떤 얼굴을 할까? 딸 둘이 다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을 주위에서 알게 될 텐데. 위신과 체면을 금쪽같이 귀히 여기는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하면 하영은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러나 하영은 동생의 경우와 다르다. 동생은 그녀의 남편이 여자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면서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자신이 원해서 이혼을 했다. 그의 까다로운 성격에 지치고 시중들기가 귀찮아 남편을 발길로 내지른 것이다. 디스크 수술을 두 번이나 한 동생이기에 건강이 안 좋아 더 이상 남편의 시중을 들 수가 없다는 것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이혼의 이유였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부터 좀 편하게 살아보자는 이기심의 발동이다.
  그런 남편과 계속 같이 살다가는 디스크가 언제 또 재발할지 모르고, 늙기도 전에 자기가 쓰러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라나? 물론 표면에 나타난 이유는 남편의 바람기였다. 동생이 그러한 의중을 하영에게 토로했을 때, 그녀는 그럼 못 쓴다고 극구 말렸다.

  “어떻게 남편 시중들기 싫다고 이혼을 하니? 그건 말도 안 된다. 네가 몸이 약하니까 앞으론 남편이 너 시중을 들어줄지 모르잖아?”  

  “언니는 지금까지 내 얘기 다 듣고도 그딴 소리해? 끼니때마다 진수성찬을 해 바쳐야 하고, 평생 물 한그릇도 자기 손으로 안 떠먹는 사람이 내 시중을 들어? 눈앞에 어른거리기만 해도 뭘 시켜 어떤 때 난 살살 피해 다녀.”

  “네 남편 돈 잘 벌어 너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사는데, 그런 것도 안 하고 살래?”

  끝까지 동생 편을 들어주지 않는 언니를 그녀는 섭섭해 했었다. 부모님도 눈물을 흘리며 딸을 설득했지만 동생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언니, 부모님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 나하고 언니하고는 경우가 달라. 언니가 이혼하겠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지도 몰라. 지난번에 엄마가 그러더라. 언니 얼굴이 누렇게 떠 있더라면서 어디 아픈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셨어. 전자파니 뭐니 하는 소릴 들으셨는지 컴퓨터 중독병에 걸렸으면 어쩌지 하고는 병 이름까지 만들어 붙여 내가 웃었다고. 언니가 평생 동안 가장 노릇하고 있으니 형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는 당연지사지 뭘 그래.”  

  “허지만 막상 이혼한다고 하면 반대하실 거야. 그리고 지니하고 제인도 맘에 걸려. 결혼할 때 부모 이혼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잖아?”

  사실 그것은 하영 자신이 딸들 결혼에 내세운 결혼조건 중의 하나였다. 양친부모 밑에서 화목하게 자란 남자면 좋겠다고 두 딸에게 말한 바 있다.  
  지극히 침착한 하영에게 감전이 된 듯 동생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걱정도 팔짜다 팔짜야. 부모 걱정 애들 걱정. 아휴 골치 아파. 지니하고 제인, 둘 다 미국 남자하고 사귀는 거 언니도 잘 알잖아? 결혼까지 할 모양이든데, 언니가 하도 고리타분하니까 애들이 나한테 하소연하더라. 언니한테 못하는 얘기 나한테는 다 해. 그러니까 애들 문제는 조금도 신경 쓸 거 없어. 지니 보이프랜드 엄마는 두 번이나 이혼했대.”

  하영도 짐작한 바 있다. 사귀는 미국 남자가 있다고 해, 그들과는 친구 관계로 끝내고 결혼은 한국 남자하고 하는 것이 엄마의 희망 사항이라고 말했었다.

  “나한테 못 하는 얘기라니, 내가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라도 있어?”      

  “아니, 비밀은 무슨 비밀. 언니가 너무 봉건적이고 고지식하니까 결혼하겠다는 말을 못하고 지금 고민 중에 있다는 얘기지. 둘 다 엄마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래.”

  뒤가 캥키는 일이 있는지 동생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하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겼으면 진작 애들하고 의논을 했었어야지. 정말 언니 하는 짓 보면 내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이럴 땐 그 인간도 같이 애들 만나야 되는 건데 서울로 내뺐으니 할 수 없고. 이따가 시간 맞춰서 애들한테 전화부터 걸자고. 언니한테 맡겨놓았다간 질질 끌어 죽도 밥도 안 될 게 뻔해. 생각 같아선 빨가벗겨 내쫓아버렸음 속 시원하겠지만 미국법에 따라야 하니까 우선 변호사부터 선정을 해야지.”

  변호사 선정이라는 동생의 말에 하영은 정신이 번쩍 났다. 동생한테 하소연을 하다 보니 이야기는 어느새 이혼으로 결론이 지어진 것이다. 갑자기 생각이 갈팡질팡해 혼돈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영은 동생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너무 그렇게 서두를 것 없어. 형부가 온 다음에 애들한테 알려도 돼.”

  동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 어린 눈빛으로 하영을 빤히 바라보며 빈정대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왜? 그 인간이 와서 언니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빌 것 같아? 아니면 언니가 다시 시작해보자고 애원할 거야? 어쨌든 이혼은 하기 싫다 이거지. 언니의 사전에는 이혼이란 두 글자는 없다 그런 말인가?”

  하영은 움칫하며 도리어 변명을 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이혼을 한다 하더라도 당장 급할 건 없다는 거야.”

  “참 답답하네. 언니는 회사일이나 남을 위하는 일에는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면서 왜 자신을 위해서는 옳은 결정을 못하는 거야?”

  ‘어떤 게 옳은 결정인데?’ 하고 한마디 하려 하다가 하영은 잠자코 있었다. 이런 문제에 어떤 결정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따질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옳고 그름이 뒤집어질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모든 세상사가 그렇다.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그날 밤, 하영은 동생의 말들을 되새기며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렸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건만, 가정은 깨졌다. 남편한테 여자가 있는 것을 육 년 동안이나 모르고 살았다니····. 하영이 남편한테 아내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은 사실이다. 돈만 벌었지, 뭐 잘해준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 지, 그걸 모르고 살았다.

  스산한 바람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갔다. 썰렁하고 추웠다. 이불을 잡아당겨 목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 한기는 바깥이 아닌 맘속으로부터 새나오고 있었기에 그녀의 몸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갑자기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하영은 침대에서 발딱 일어났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순간적으로 남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부리나케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불을 켰다. 남편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현관 문지방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하영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놔요? 못 들어와요.”

  그리고는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남편을 두 손으로 힘껏 떠밀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남편은 문밖 시멘트 바닥에 가방과 함께 나뒹굴어졌다. 문을 쾅 닫고 돌아서는데 그렇게도 후련할 수가 없었다.

   꿈이었다. 꿈을 깨고도 하영은 날아갈 듯이 기분이 가벼웠다. 갈증을 해소한 것 같은 충족감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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