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 가시꽃 향기 (하)

2014.01.31 03:22

김영강 조회 수:533 추천:78



가시꽃 향기  (하)



  
  눈앞에 뿌예지며 남자의 얼굴이 작아졌다 커져다 하면서 빙빙 돌았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같이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고개를 한 번 세차게 흔든 다음, 눈을 질근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숨을 한 번 훅 내쉬고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십대의 미스 장이 아버지뻘로 보이는 어떤 남자의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이었다. 그 남자에게로 몸을 기대다시피 바짝 붙이고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은은한 미소를 얼굴 전면에 띄고 있는 남자의 표정에는 행복감이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잘못 봤나 하고 눈을 닦고 또 닦으며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그 남자는 미스 장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 남자는 바로 내 남편이었다. 눈이 익은 회색 양복에 빗금이 그어진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 보고 또 보아도 분명히 남편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짓고 있는 행복감이 충만한 그 미소는 낯이 설었다. 남편 사진이 또 있나하고 재빨리 뒷장을 넘겼다. 거기엔 그림이나 책에서 본 바 있는 외국의 풍경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는 미스 장이 남편의 팔짱을 꼭 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사진첩을 서랍에 도로 넣고 얼른 방을 나왔다. 가슴이 심하게 뛰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겨우 거실로 나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하나의 사건이 주마등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작은아들이 유학을 떠난 그해였으니 만 10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괴상망측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나는 부리나케 대문을 나섰다. 마구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택시를 불러 타고 전화의 목소리가 일러준 곳으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문 앞에 서 있겠다던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집인지를 몰라 서성이고 있는데 한참 만에 열 서넛쯤 돼 보이는 계집아이가 두려운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계집아이는 문 앞에 선 채로 놀라운 이야기를 일러주었다. 남편한테 젊은 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바로 이 집의 주인이며 자기는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데, 내일 시골로 내려간다고 했다. 그래서 돈이 필요했고, 또 이 사실을 아주머니한테 얘기해야 될 것 같아 전화번호부를 보고 남편의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회사와 직책까지 일치했다. 주인 여자는 일이 있어 인천엘 갔는데 내일 새벽에 돌아온다고 했다.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당장 집으로 오라고 했다. 너무나 흥분해 부들부들 떨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남편은 지극히 침착하게 무슨 큰일이 났냐면서 지금 바빠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퇴근 후에 보자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와요. 당장. 안 오면 내가 회사로 간다구요오····. 회사에서 망신당하게 전에 당장 와요. 지금 당장 오라고요.”
  계집아이가 내일 시골로 간다니까 가기 전에 삼자대면을 해야 한다는 작정이 서 있었다. 남편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슬슬 후회스런 감정이 밀려왔다. 침착하게 대책을 세운 다음 전화를 걸 걸, 바로 전화를 걸어 그냥 울어버린 것이 뭔가 잘못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제하고 참는 데는 선수인 내가 왜 그런 경솔한 행동을 했는지 나 자신도 이상했다.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음인지 남편은 직접 차를 몰고 한 시간쯤 지난 후에 집으로 왔다. 나는 앞뒤 말을 다 잘라먹고 그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남편은 참말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하고 반문했다.
  “그 집이라니 도대체 누구 집인데 그래?”
  “당신이 매일 가는 집인데 왜 나한테 물어요? 빨리 가자고요.”
  나는 남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자초지종 알아듣게 얘기를 해 보라면서 남편은 정말 모르는 얼굴을 했다.
  “그렇게 시침 뗀다고 내가 속아 넘어갈 줄 알아요? 그동안 속고 산 것도 분한데 이제는 더 안 속아요. 빨리 차 몰아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남편은 버럭 화를 내면서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순간, 나는 정말 아닌가 하고 잠깐 헷갈렸다.
  “그러면 내가 일러줄 테니 운전이나 하세요.”
  그 계집아이랑 맞대면을 하면 더 이상 잡아떼지는 못하겠지.           “그래. 가자구.”
  남편은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하며 내가 일러주는 대로 방향을 잡아 운전을 했다. 정말 깜깜하게 모르는 길을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또 헷갈렸다. 정말 아닌가 하고.
  아니다. 이름, 직책, 회사까지 다 맞는데 그 계집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의 무게가 나를 사정없이 내려 눌러 짓뭉개는 것 같아 한숨을 크게 내쉬는데 갑자기 남편이 명령조로 말했다.
  “무슨 일 때문에 내가 당신한테 닦달을 당해야 하는지 애길 해 봐. 나도 알아야 될 거 아냐?”      
  차는 이미 그 집 앞에 도착되어 있었다. 나는 “차 세우라”고 동문서답을 한 후에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 동안 아무 기척이 없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초인종을 계속 눌러댔다. 초조했다. 계집아이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계집아이와 남편의 눈이 마주쳤다. 남편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한데 여자애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말에 나는 또다시 헷갈렸다.
  “아녜요. 이 아저씨가 아녜요. 제가 전화를 잘못 걸었나 봐요.”
  아이는 정말로 미안해 죽겠다는 듯이 안절부절못하며 쩔쩔 맸다. 삼양물산의 이경수 상무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고 내가 되물었더니 아이의 대답이 혼선을 빚었다.
  “삼양물산인지 삼영물산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주인 언니가 전화하는 소리만 들었거든요. 분명히 이 아저씨는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아줌마, 아저씨, 정말, 정말로 미안해요.”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아이가 울상을 지었다. 머리 좋은 그가 사건의 상황을 금세 파악하고 전화 한통화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 연출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남편은 아주 태연하게 아이를 타일렀다.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전화를 하면 어떡하니? 앞으로는 조심해라.”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을 외면한 채 나는 아무 말 않고 돌아섰다.
  
  시계를 보니 겨우 10분도 지나지 않았었다. 나는 손으로 가슴을 훑어내리며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전신에 맥이 다 빠져버려 일어나 앉을 기운조차 없었다. 갑자기 하얀 벽들이 뱅뱅 돌면서 속이 메슥메슥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면서 한참을 그대로 누워 있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남편이 투자했던 주식이 한창 날개가 돋쳐 회사까지 그만두려고 망설일 때 그 사건이 터졌으니 경제적으로는 가장 전성기였다. 나이를 꼽아 봐도 딱 들어맞는다. 그때 계집아이가 주인 언니의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했다. 그 스물여섯이라는 숫자가 뇌리에 박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다.  
  ‘몇 년이나 살았을까? 사건이 터진 그 훨씬 이전부터였겠지? 각방을 쓰기 시작한 50대부터라고 치면, 미스 장은 그때 겨우 스물이 넘었을 적이 아닌가?’
  맨 처음에 붙어 있는 사진은 남편이 주식으로 돈을 벌었던 50대 초반 같고, 미스 장도 앳돼 보이니, 사건이 터지기 훨씬 전에 찍은 사진이 틀림없다. 뒤에 보이는 높은 빌딩도 증권회사 같다.
  ‘증권 회사의 직원이었을까? 아니면 증권을 하다가 만나 증권 박사인 남편에게 조언을 구하다가 정이 들은 것일까?’
  여자애의 말을 종합해 봐도 삼양물산의 여직원은 아니다. 더구나 남편이 회사의 직원을 첩으로 삼을 사람은 아니다.  
  ‘혹시 요정의 기생이었을까?’
  그랜드 캐니언에 여행 갔을 때의 일이 뇌리를 스쳤다. 그 때, 그녀가 회상에 젖어 옛날이야기를 했었다. 실연을 당한 후, 대학을 중퇴하고 돈을 벌어 막 쓰고 싶어 취직을 했다고 했다. 그 ‘취직’을 한 곳이 증권회사일 수도 있고 삼양물산일 수도 있으나, 둘 다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분명히 요정 같다. 철이 없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후회한 것을 보면 직업 마담의 미끼에 걸려든 것이 분명하다. 그 당시 어머니가 많이 아팠다고 하니 미스 장이 보수가 많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친구 오빠한테 버림 받은 심리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회사일 때문에 요정 출입이 잦았던 남편이다. 기생인 미스 장을 만나 첩으로 삼은 게 틀림없다. 어머니를 거역하고 제 멋대로 산 것이 후회스러워 눈물을 흘린 것을 보면 그 ‘취직’을 한 직장이 분명히 요정이다.

  남편과의 관계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만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는 지속되었고 어머니는 더 많은 눈물을 흘리다가 돌아가셨다. 물론 돈이 첫째 이유였겠지만 남편의 외모와 인격을 종합해 보면 그는 젊은 여자가 따를 만한 매력을 지닌 남자다.
  ‘그래서 미스 장이 존경하게 되어 좋아한 것일까? 과거를 고백한 것도 남편의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였을지라도, 내게 그런 고백을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날 호텔 방에서 미스 장은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착하긴요. 저 착한 사람 아니에요. 죄 많이 지었어요.”
  흐린 불 아래였지만 그녀의 울먹이는 음성과 더불어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미스 장은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었다.

  ‘쏴아쏴아’ 하는  바람소리가 물결처럼 귓가에 밀려왔다. 창밖을 스치고 간 바람이 나뭇가지 위에 걸려 서럽게 울었다. 으스스 몸이 떨렸다.  내의를 입었는데도 가죽 소파의 차가운 기운에 온몸이 시려왔다. 싸늘한 냉기가 등덜미를 훑어내렸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바닥으로 내려와 양탄자 위에 누웠다. 한결 나았다. 이런저런 줄거리를 연결시켜 보니 모든 게 다 들어맞는다. 완전히 사기를 당한 기분이다.
  그녀와 얼굴을 맞대기조차도 고역스러울 것 같아 그냥 가버릴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아니지. 그냥 가면 안 되지. 둘째 아들 얘기를 하면서 어떤 식으로 거절을 하나 심중을 떠봐야지. 절대로 좋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썼다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을 티니까.’
  
  비디오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도 줄거리는 눈에 들어왔다. 본마누라와 첩이 ‘형님 동생’ 하며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남편이 버젓이 살아 있었다. 동생은 형님에 비하면 딸 같은 나이였다. 생긴 것도 형님은 고생에 찌들어 빠진 아낙네이고, 동생은 좀 천하긴 하나 화장까지 곱게 하고 있었다.  
  동생이 형님의 손을 붙들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형님,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죄를 너무 많이 지었어요. 용서해주세요. 형님이 그렇게 고생하시는 것도 모르고 형님 미워하고 또 아픈 가슴에 상처만 줬으니 제가 죽일 년이에요. 어어엉--엉엉...”
  동생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형님은 더 서럽게 울었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잘못했다. 미워한 걸로 치면 네가 나만 했겠냐? 우리 앞으로는 서로 의좋게 지내자.”
  두 여배우가 울음바다를 이루었는데 나는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도 잘 우는 울보인 내가 눈물은커녕 찡하는 기미도 없었다. 반듯이 누워 고개만 모로 돌리고 있었더니 목이 뻐근해 텔레비전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래도 줄거리가 어떻게 전개되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장면이 바뀌어 형님 동생이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형님, 힘드신데 왜 무채를 썰려고 하세요. 채칼 이리 주세요. 형님은 저기 불려놓은 마늘이나 까세요”
  동생은 형님. 형님을 입에 달고 극진히도 형님을 위했다. 갑자기 열 살 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나타나면서 “큰엄마” 하고 형님 품에 안겼다. 동생은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무채를 밀면서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말했다.
  “큰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나가서 놀아.”
  그러나 형님은 아이를 예뻐 죽겠다는 듯이 품에 꼭 안았다.
  “아이고 내 새끼. 배고프지?”
  조금 후, 장면이 다시 바뀌었다. 동생이 형님에게 화장품을 내밀면서 말했다.
  “형님도 좀 가꾸세요. 아이고, 손이 이게 뭐예요. 거북이 등처럼 터져가지고····.”
  안쓰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동생은 형님의 손등에 로션을 발라주고는 막 문질러댔다. 그리고 형님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세상에...,  피부가 너무 거칠어 수세미 같아요. 형님, 이거는 스킨이라고 맨 먼저 바르는 거구요, 또 이거는 그 다음에 바르는 료숀, 이거는 그 다음에 바르는 언더메이컵”
  동생이 화장하는 순서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이 립스틱은 제가 딱 한 번밖에 안 발랐으니 새 거나 똑 같아요.” 하면서 화장품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는데 마지막 한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형님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하고 있으니까 호경이 아빠가 만날 저만 찾잖아요.”    
  ‘나도 그렇게 구질구질했었나?’
  그랬다. 나도 멋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너무너무 검소했다. 남편한데 아양 떨 줄도 몰랐고 알뜰살뜰하게 남편을 위할 줄도 몰랐다. 그냥 세월 따라 그렁저렁 살았다.
  큰아들이 결혼할 때였다. 동서가 나를 보고 한심하다면서 혀를 끌끌 찼다.  
  “내일이 상견례인데 그래도 다이아몬드 한 캐럿 정도는 끼고 나가야지····.  그쪽 집도 만만찮은데. 자네는 맘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잖아. 욕심이 없는 거야? 바보야? 도대체 자네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남편 몰래 뒷주머니도 좀 차고 그래봐. 그렇게 바보같이 살지 말고.”
  시장바닥에서 콩나물을 사도 값을 깎는 동서다.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하는 듯한 핏기 없는 아낙의 얼굴을 보며 나는 곁에 서 있기조차도 창피했다. 그런데도 동서에게는 다이아몬드 반지도 있고 밍크코트도 있다. 내 눈에는 동서가 한심해 보였다.
  “아참, 자네 시집올 때 돈 싸들고 온 거, 설마 다 내놓은 건 아닐 테니 뒷주머니는 차고 있겠네.”
  동서하고 말을 하다보면 상처를 받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의 자격지심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대로 넘기곤 했으나 가끔씩은 ‘내가 바보인가’ 하고 스스로 반문하기도 한다.  
  
  얼마 전 일이다. 며느리 친구가 친정엄마라는 여자랑 잠깐 집에 들른 적이 있다. 그날은 웬일인지 방안에 처박혀 있는 나를 며느리가 불러내어 아주 상냥하게 인사를 시켰다. 나하고 동갑이라는 그 친정엄마가 너무 젊어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 나는 조금 나이가 더 먹은 친구인 줄 알았다. 화장을 곱게 했었는데 눈 화장이 아주 선명했다. 지금도 그 여자의 모습이 내 머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굽슬굽슬하게 웨이브가 져 있는 갈색 머리 결이 반짝반짝했다. 뭘 발랐는지 얼굴도 반짝반짝했다. 피부에도 검은 티 하나 없었다. 까만색으로 정장을 했었는데, 옷감은 니트였다. 재킷 가장자리에는 노란 금줄이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둥근 모양으로 달려 있는 단추는 진짜 금을 연상시켰고 노란 단추의 가장자리에는 까만 선이 둘러져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거울을 앞에 놓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거뭇거뭇한 저승꽃들이 내게 손짓을 했다.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제법 큰 반점들이 어느새 하나 둘씩 늘어가고 있었다. 흰머리도 많이 늘었다. 머리를 자르러 갈 때마다 미용사가 염색을 권했으나 한 번도 염색을 해본 적은 없다. 좀 충격을 받긴 했으나 그때뿐이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것이 내 인생이다. 이제 나는 완전히 할머니 티를 내며 살고 있다.
  
  드디어 인기척이 났다. 달각거리는 열쇠 소리에 또다시 숨이 가빠 왔다. 한 줌의 바람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왔다. 온몸이 얼어붙는 듯 움칠했다. 싸늘한 냉기가 다시금 등덜미를 쓸어내리며 다리가 뻣뻣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편안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미스 장은 너무나 놀라 들고 있던 가방을 팽개치고 내게로 달려왔다. 실내인데도 바바리코트 자락이 심하게 펄럭였다. 나갈 때는 몰랐는데 디자인이 눈에 익다.
  ‘내 앞에서 어쩌자고 저 바바리코트를? 아니지. 내가 올 줄을 모르고 문을 나사다가 만났으니 그럴 수 있지.’
  늘 즐겨 입으면서도, 더구나 비가 내리는데도 그 바바리를 입고 오지 않은 내가 이상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앰뷸런스를 부르려고 했다. 내가 말렸다. 내 병은 내가 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서너 번 이런 증상이 나타났었다. 금세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아 숨을 헐떡거린 적도 있었으나 가슴을 쓸어내리고 주먹으로 치고 하면 괜찮았었다.
  “괜찮아요. 내가 가끔 이래요. 좀 있으면 금세 나아요.”
  “안돼요. 병원에 가야 돼요. 안색이 너무 창백해요. 숨도 가쁘잖아요. 아주머니도 심장이 나쁜가 봐요. 저의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셔서 제가 잘 알아요.”
  어머니 심장병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이 귀에서 튕겨나갔다.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수화기를 놓지 않았다. 도리어 내가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미스 장은 민첩하게 또 침착하게 행동했다. 우선 따뜻한 물과 청심환으로 나의 정신을 가다듬게 한 다음 포근한 담요를 가져와 내게 덮어주고는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것처럼 팔다리가 편안하게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주무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경험에 의한 익숙한 손놀림이다.
  
  반듯이 누운 남편의 다리를 미스 장이 주무르고 있다. 남편의 뜨거운 눈빛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하니 열기를 띠었다. 깨물고 싶도록 예쁘다. 서른여섯이 아니고 스물여섯 같다. 그녀의 열 손가락이 종아리에서부터 허벅지로, 그리고 점점 더 위로 올라가고 있다. 갑자기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더러운 기분이 전신을 휩쌌다. 목구멍으로 헉하고 뜨거운 김이 치솟아오르며 숨이 막혔다. 뜨거운 불덩어리가 핏줄을 타고 마구 돌아다녔다. 얼굴이 화끈했다. 애써 마음을 꾹꾹 누르고는 최대한으로 태연을 가장하면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어마셨다가 후우 하고 내쉬었다.

  미스 장은 어쩌다가 그런 증세가 왔는지를 물었다. 나는 시침을 뚝 떼고 거짓말을 했다.
  “소파에 누워 비디오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었는데, 가죽소파에서 찬기가 몸에 스며들었나 봐요.
  비디오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형님과 동생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사제지간인 젊은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제야 미스 장은 비디오를 껐다. 나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참 웃기는 애기도 다 있네. 본마누라와 첩이 어떻게 한집에서 살아?”  
  완전 무방비 상태인 그녀의 가슴에 나는 비수를 날렸다. 그리고 입귀를 칼끝처럼 다물면서 어금니를 꽉 물었다. 턱이 아프도록 꽉 문 어금니 사이에서 뱉어내지 못한 말들이 파랗게 갈려 부서지고 있었다.
  ‘그래 너는 본마누라와 첩이 형님, 동생하며 한집에서 의좋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불가능한 일이겠지? 만일 남편이 죽고 없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어디 네 생각이 어떤지 한 번 들어보자.’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최대의 노력을 하며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누워있으라는 그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어나 앉았다. 나 역시 아주 침착하게 다음 행동을 개시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미스 장의 눈을 뚫어지라고 빤히 들여다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내가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왔어요. 우리 둘째 아들한테 미스 장 얘기를 했더니 아주 좋아했어요. 다음 달에 여기로 온다니까 한 번 만나보세요. 아까운 나이인데, 미스 장도 얼른 결혼을 해야지요.”
  
  사진을 꺼내들고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둘째는 남편과 판에 박은 닮은꼴이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입술이 잠시 파르르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는 미스 장이 청심환을 먹어야 할 차례다. 그녀는 할 말을 잃어버린 듯, 아니 못 들은 척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의 다리를 계속 주물렀다.  
  ‘그렇지, 네가 내 눈빛을 바로 받지는 못할 거다.’
  “왜. 마음에 안 들어요? 우리 아들이 이혼해서 그래?”
  그녀는 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아아뇨.” 하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몽땅 잡아내려고 작심을 하며 그녀의 수그린 얼굴에 시선을 박아놓고 있었다. 뒷말을 잇는 미스 장의 음성이 떨려나왔다.
  “아드님은 공부도 많이 했는데 저는 대학을 졸업도 못 했잖아요. 또 나이도 더 많고요.”
  “그까짓 두 살 더 많은 게 뭐 어때서 그래. 내가 다 얘기했는데 우리 아들이 아무 상관없다고 그랬어.”
  ‘이혼이니 학벌이니 나이니 그런 건 물론 이유가 되지 않지. 아유는 딴 데 있겠지.’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내 다리를 열심히 주물렀다. 아들이 곧 온다고 했으니 한 번 보기라도 하라고 나는 그녀의 가슴에 계속 화살을 쏘아댔다. 안 되겠다 싶었던지 미스 장은 진짜 피할 수 있는 핑계를 내세웠다.
  “실은 저한테 남자가 있어요.”
  ‘남자는 죽고 없는데, 남자는 무슨 남자야.’
  “분명히 남자가 없다고 나한테 얘기해놓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녀를 낭떠러지를 향해 잔인하게 밀어붙이면서 화를 냈다. 미스 장이 놀래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컸었나 보다. 나는 아차 했다. 태연한 척하려고 최대의 노력을 했는데도 잠시 이성을 잃은 것이다. 더 이상 앉아 있다가는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겁이 났다.
  
  마침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미스 장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무슨 흔적이라고 남겨놓은 것 같아 속이 떨렸다. 손잡이에 묻은 지문이라도 감지할 것 같아 발이 저렸다. 무슨 전화인지 미스 장은 한참 동안이나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설마 화장대 서랍을 열어 사진첩의 위치를 점검하지는 않겠지. 분명, 내 말을 어떻게 막나 하고 연구 중일 거다.’
  사기를 당한 기분이 다시금 엄습하며 속을 떠보고 있는 내 자신이 우스꽝스러워 졌다.
  ‘뭐 핸드백이 꼭 마음에 들어? 니가 고른 것이니 네 맘에 들 수밖에.’
  그때, 남편은 의아해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뭘 아나? 같이 간 비서실장이 챙겨준 거야.”
  미스 장이 방에서 나오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높은 목청이 떨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론 브로커가 일을 느리게 하는 바람에 다된 계약이 깨지게 생겼어요. 화를 좀 냈더니 열이 나네요.”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미소까지 띄는 여유를 보이면서 그녀를 괴롭혔다.  
  “오늘은 내가 말할 기운이 딸리네요. 다음에 또 얘기하기로 하지요. 나는 그 간에 미스 장을 내 둘째 며느리가 다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생각해 보세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나를 부축했다. 가녀린 몸매가 수양버들처럼 흐느적거리며 감겨들었다. 뭇 사내들의 혼을 몽땅 앗아버릴 만한 요염한 자태다.
  어쩔 수 없이 미스 장의 차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맘 같아선 며느리를 부르고 싶었다. 빗줄기는 올 때보다 더 굵어져 차창을 마구 때리면서 울부짖었다. 바람도 몹시 불어 가로수들이 몸을 떨며 잎사귀를 털어내고 있었다. 빗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공중에 흩날리는 잎사귀들이 몸부림을 치며 아우성을 쳤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 어디로 가는 거냐고····.’
  내 가슴속에서도 삭막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나를 홀로 남겨두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쓸어가버릴 것 같은 세찬 바람이었다.
  
  거리엔 차가 줄줄이 밀렸다. 웬 신호등이 그렇게 많은지 차는 가다가 서고 가다가 서고 하며 거북이 걸음을 했다. 나는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꼼짝을 안했다. 입을 꼭 다물고 침묵했다. 침묵의 무게에 눌려 차가 짜부러져 전신이 짓이겨질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가느다란 작대기 두 개가 앞유리에 쏟아져내리는 빗물을 부지런히 닦아내며 빠른 속도로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모양이 숨이 차 보였다. 미스 장도 보통 때보다는 갈팡질팡하며 숨가쁘게 운전을 했다.      
  “어마나, 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웬 차가 이리 많아요? 비가 오니까 교통이 더 혼잡하네요.”
  무슨 말이라도 해서 침묵을 깨야겠다고 느꼈음인지 미스 장은 뻔한 소리를 하며 목청을 돋우었다. 안정감 없는 소리가 붕 떴다가 흩어졌다. 앞차의 뒤꽁무니라도 들이박을 것 같아 불안했다.  
  
  집 앞에 차가 멎자마자 며느리가 우산을 받쳐 들고 쫓아 나왔다. 차문을 열어주다가 며느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어머니 어디 편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창백해요.”
  나는 얼른 며느리의 팔을 잡으며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며느리는 미스 장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내가 암말 않고 며느리를 떠밀다시피 하면서 발걸음을 떼놓았기 때문이다. 며느리는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다. 붕하고 그녀의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뒤통수가 자꾸 뒤로 잡아끌리고 발길이 닿은 땅이 흐물흐물했다.
  “어머니 지금 병원에 바로 가셔야 되겠어요.”
  집 안으로 들어온 며느리는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아냐. 괜찮아. 내 병은 내가 알아. 좀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전기담요나 꺼내서 좀 깔아줘.”
  며느리도 미스 장처럼 우기는 것을 겨우 말렸다. 전기담요를 꺼내 침대 위에 깔고 스위치를 조정하면서 며느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머니, 저 여자가 미스 장이죠. 근데 어디서 본 여자 같아요. 낯이 익어요.”
  낯이 익다는 며느리의 한마디가 나의 귓전이 후려쳤다.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며느리가 생각난 듯 "아, 바로 그 여자예요" 하고는 말을 시작했다. 가슴이 덜커덩하고 내려앉는 충격이 왔다.
  “아버님 장례식에서 본 바로 그 여자예요. 까만 바바리코트를 입은 모습과 그리고 얼굴이 너무 예뻐서 들어올 때부터 인상에 남았었거든요. 모르는 여자라, 아마 아버지 회사 계실 때 직원인가 했어요. 그날 제가 입구에서 손님들에게 인사했잖아요. 그리고 장례식 시작할 때가 되어 안으로 들어와서 앞줄로 가는데 그 여자가 또 눈에 띄었어요. 한쪽 구석에 앉아서 아주 서럽게 울고 있더라고요. 지금도 제 기억에 아주 선명해요. 나가면서 유가족에게 인사할 때는 못 봤어요. 그래서 장례식 끝난 다음에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는데 일찍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어요. 분명해요.”    
  
  그 후, 나는 근 한 달 동안을 호되게 앓았다. 배가 쌀쌀 아프기 시작하더니 목구멍이 따끔따끔하고 기침이 났다. 목이 잠겨 소리도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아랫배가 뻐근해 소변보기도 힘이 들었다. 어지간하면 그냥 견디는 성격이었지만 열이 내리지 않아 할 수 없이 며느리를 따라 병원에 갔었다.
  “신우염, 방광염에 몸살감기까지 겹쳤습니다. 진작에 병원에 왔었어야지요. 이렇게 병을 키우다가는 정말 큰일 납니다.”  
  의사는 당장 입원이라도 해야 될 것처럼 겁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 온 1년 동안 병원이라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에 가끔씩 몸이 나른해지며 가슴이 답답하고 배가 살살 아플 때가 있었지만 혼자서 삭이면서 지나쳤다.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으니 건강검진을 꼭 받아야 한다고 의사가 강조를 했다. 그날, 집에 오면서 며느리가 “어머니,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하고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거울 속에 웬 80대의 노인이 후줄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얼굴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살갗은 바람 빠진 풍선모양 축축 늘어져 있고 조막만한 얼굴에는 두 눈만 뻥 뚫려 있다. 어찌나 목이 말라 비틀어졌는지 머리를 지탱하기조차도 힘에 겨워 보인다. 흰머리도 어느새 그렇게 많이 늘었는지 아주 반백이 되었다. 폭삭 늙어버린 내 모습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인생은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이라고. 강물이 흘러흘러 바다로 가듯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듯이 내 인생 뒤에는 또다른 인생이 오고··· ···. 인생은 그저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날 본 비디오 생각이 자꾸 났다.
  ‘만일 미스 장한테 아이가 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그랬다면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을까? 여자아이라고 가정을 하는 것이 우리 집안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아버지 같은 두 아들을 ‘오빠, 오빠.’ 하고 부르겠지? 아들들은 그 애를 귀여워해 줬을까? 아니면 본척만척 했을까?‘
  미스 장을 꼭 닮은 예쁘장한 계집아이가 눈앞에 떠오른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꼭 백설공주 같다. 머리를 양갈래로 가지런히 땋아내리고 나를 보고는 환히 웃는다. 그리고 "큰엄마" 하고 부르면서 내게로 달려온다.
  ‘그러면 나는 "아이구, 내 새끼" 하고 그 아이를 껴안아 줄 수 있을까?’
  
  한참 소설을 쓰고 있던 나는 갑자기 하나의 궁금증이 머리를 세차게 쳐 현실로 돌아왔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평가다. 두 아들은 어릴 때부터 ‘우리 아버지는 최고’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자랐다. 큰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버지가 든든하게 뒤에 버티고 있는 한, 그들에겐 아무 걱정이 없었다.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두 아들은 열심히 노력했고 원하는 학교에 척척 잘 붙어주었다. 가정적인 면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는 남편이었지만 아이들 학교문제에는 늘 과민반응을 보였었다. 올 에이를 받아온 둘째가 “나는 아버지 때문에 공부해. 이건 내 성적표가 아니고 아버지 성적표라니까.”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둘 다 미국유학까지 시켜 명문대학을 나왔으니 어마어마한 돈을 교육비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남편은 두 아들의 대학졸업 논문까지도 봐 줄 만큼 박식했었다. 지금도 두 아들의 가슴 속에는 존경스러운 아버지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만일 미스 장과의 일을 안다면 그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재조명할까? 그리고 미스 장을 만난다면 그녀를 어떻게 대할까?’
  
  그날 밤이었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비디오의 스토리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미스 장이 내 손을 붙들고 잘못했다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그녀가 내게 붙인 호칭이 형님도 아니고 아주머니도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부르며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미스 장이 다 털어놓을 모양인가?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그 며칠 후, 미스 장이 아닌 며느리로부터 나는 진짜 꿈같은 말을 들었다. 꿈을 잘 꾸지도 않고 꾸어도 생전 들어맞은 적이 없는 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 꿈을 들어맞았다.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여자는 이 세상에 며느리밖에 없다.
  “어머니, 그 동안 제가 어머니한테 너무 무심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어머니이---. ”
  내 손을 붙들고 며느리는 울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전류가 흐르듯이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나도 울고 있었다.
  “아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다. 용서해다오.”
  어찌나 며느리가 흐느껴 우는 지 내 눈에서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온 방안이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어 감동의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잘 챙겨 먹는데도 며느리는 시간 맞춰 물을 떠받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끼니때마다 다른 종류의 죽을 정성스럽게 끓여주었다. 흰죽. 야채죽, 전복죽 그리고 깨죽까지 끓여 내 입맛을 돋우려고 노력을 했다. 아들도 퇴근 후엔 내 방을 들여다봤다. 혼인은 깨졌다는 말을 듣고도 그 사이에 둘째 아들이 다녀갔다. 그리고 병원비에 보태라면서 돈을 내놓았다. 아무런 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 혼자 고민을 했는데 하늘을 나를 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열도 완전히 떨어지고 거의 회복이 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막내 놈이 장 아줌마한테 가자고 졸랐다.  
  “어머니가 편찮으신 거, 미스 장이 몰라요? 어머니가 못 가시니까 저의 집으로 오라고 하세요. 아버님 옛날 부하직원이고 또 어머니하고 친하니까 저도 미스 장하고 친구하면 좋잖아요.”
   부하직원이라는 며느리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난 그동안 하루도 미스 장 생각을 안 해본 날이 없었다. 그녀가 내게 전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건만 전화통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 웃음을 짓기도 했다. 나의 건강을 핑계로 한 번쯤은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져봤으나 두어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막내가 계속 성화를 하고 또 며느리가 전화를 걸어보겠다고 하기에 나는 번호를 건네주었다. 가슴이 뛰었다. 수화기를 들고 있던 며느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상해요. 전화가 디스커넥트가 됐대네요. 새 번호도 안 나오고요.”
  며칠 후, 며느리가 다시 미스 장 얘기를 끄집어냈다.
  “어머니, 제가 한번 그 집에 가볼까요?”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미스 장 집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집 앞에서 눈길도 한 번 안 주고 돌려보낸 지, 거의 두 달쯤 됐을 때였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현관문을 바라만 보며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10년 전 그 집 근처에서 서성이던 생각이 문득 떠올라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무의식중에 길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미스 장이 아닌 웬 중년의 미국 여자가 황급히 문을 나섰다.  
  
  며느리와 둘이서 부엌 식탁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깔끔한 며느리는 콩나물을 무쳐도 항상 꼬랑지를 딴다. 며느리가 나를 바라보다가 잠시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흰머리가 너무 많네요. 머리도 많이 길었어요.”
  내 몰골이 흉측하게 비쳤나 보다. 그러고 보니 고무줄로 묶어도 될 만큼 머리가 길어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며느리와 같이 미장원엘 갔다. 그리고 며느리가 시키는 대로, 또 미용사가 해주는 대로 그대로 따랐다. 커트를 하고 파마도 했다. 생전 처음 염색도 하고 하이라이트라는 것을 몇 가닥 넣었다. 미용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불로우드라이어를 하고 고데로 머리 모양을 창조해 냈다.
  “어머니, 10년을 젊어 보이세요. 정말 너무 멋있어요.”
  미용사도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봐도 놀랄 만큼 완전 딴 여자가 되어 있었다. 머리 모양이 이렇게도 사람을 달리 보이게 한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언젠가 본 며느리 친구의 친정엄마라는 여자가 생각났다. 상쾌한 기분으로 미장원을 나와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화장품 가게에도 들르고 옷가게에도 들렀다.
  “이 바바리코트, 옛날에 아버님이 영국 출장 가셔서 사 오신 거죠? 아버님이 안목이 높으셨나 봐요. 그런데 너무 오래 이것만 애용해서 많이 낡았어요. 이제 날씨도 제법 춥고 하니 코트 하나 새로 사셔야 되겠어요.”
  그때서야 나는 입고 있는 바바리코트에 눈이 갔다. 거의 사철 내내 이 바바리코트를 즐겨 입었다. 폭신폭신한 카시미어로 된 안감에 지퍼가 달려 있어 비 오는 여름철에도 또 바람 부는 겨울철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오늘도 무의식중에 이 코트를 걸치고 나왔다.  
  “어머니도 이제 좀 가꾸고 젊게 사세요. 화장품 가게에서 가르쳐준 대로 하면 피부도 고와지고 주름살도 줄어들 거예요. 저도 오늘 많이 배웠어요. 이제 저녁마다 저랑 둘이서 젊어지기 시합하세요.”
  며느리가 신이 나서 깔깔 웃었다.    
  
  그 며칠 후, 며느리와 같이 병원엘 갔다 오는 길에 산소엘 들렀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종합 진단 결과에 며느리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아버님한테 가자고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아마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다. 나 역시 혹시 심장에 무슨 이상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염려를 했었다.
  “아까 의사가 깜짝 놀라는 거 보셨죠? 어머니 오늘 너무 이쁘세요. 아버지도 깜짝 놀라실 거예요.”
  며느리는 깜짝깜짝을 연발하면서 신이 나서 손뼉이라도 칠 것같이 좋아했다. 며느리의 팔짱을 끼고 등성이를 올라가다가 저쪽 소나무 밑에 놓여있는 긴 의자에 시선이 갔다. 빈 의자가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순간, 한줄기 바람 같은 것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면서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쏴아아-- 하고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쳤다. 그리고 슬픈 얼굴을 한 미스 장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어디에선가 아주 먼 곳에서 어머니····. 하고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꿈에서 내 손을 붙들고 어머니라고 부르며 목놓아 울던 미스 장, 그녀가 나를 또 다시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눈물을 흥건히 머금은 그 소리의 여운은 점점 멀어져갔고,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네가 가시꽃이었다 하더라도, 그 향기로 내게 진 빚은 이미 다 갚았잖느냐?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너와 나의 실마리를 풀 수는 없었을까?’
  
  요즘은 손자 녀석들이 시끄럽게 굴어도 밉지가 않고 예쁘기만 하다. 며느리하고 도란도란 얘기도 자주 주고받는다. 밥도 한상에서 먹고 출근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운전 조심하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아들네는 항상 별개의 식구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나도 아들네와 한식구라가 되었다는 소속감이 생겼다.
  그중에서도 제일 값진 것은 매일 아침 출근하듯 집을 나서는 버릇이 없어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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