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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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푸른 색 접시

2014.01.21 22:52

최영숙 조회 수:698 추천:133

                              푸른 색 접시

                             
북유럽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 색 접시 세트.

주방에 있던 유리 장식장 안에는 선물로 받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 들여다보기만 하던 접시 세트가 있었다.
짙푸르고 커다란 연속 꽃무늬가 테두리에 프린트 된 그 이국적인 접시를 보면, 마치 덴마크나 네덜란드에라도 간 듯이 흥분되곤 했는데, 그 접시와 함께, 시골 풍경이 그려있는 영국식 핑크 접시세트는 자랑스러운 내 소장품이었다.

언제고 좋은 날에 좋은 사람들 불러서 좋은 음식을 담아 한 번 써야지... 하고 벼르기만 하다가 나는 결국 그 그릇을 이민 짐에 싸 넣지 못하고 미국으로 왔다.  

미국에 와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정들었던 가재도구는 내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는데, 유독 장식장 안에 두고 온 푸른 색 접시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접시의 푸른 색 꽃무늬가 눈에 밟히다 못해 가슴마저 아릿해지는 것이었다. 그릇 상점을 둘러보다가 푸르스름한 접시를 보기라도 하면 나는 한숨을 내쉬는 버릇이 생겼다.

“근데 그 접시는 누가 가져갔지? 지금 누가 쓰고 있을까?....언제고 한국에 가면 꼭 찾아와야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가게를 서성였다. 그리고 나면 영락없이 남편에게 대한 화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 당신은 접시가 쇳덩어린가, 그걸 왜 못 갖고 왔대!”
나중에 한국에서 짐을 챙겨 온 남편에게 원망을 퍼붓는 것이다. 푸념은 계속 되었다.
“내가 뭐, 다이아 반지를 사나, 그렇다고 귀걸이를 하나.... 비싼 화장품을 사길 하나... 명품 백을 사냐고요....내가 가진 건 고냥 살림욕심 뿐이잖아요!”

어느 날, 식탁에 올려놓은 접시 하나가 이가 빠진 것을 보게 되었다. 이 빠진 그릇을 쓰면 복이 나간다고 어머니는 아낌없이 내다버렸는데, 중국에서는 그런 그릇이 오히려 집안의 자랑거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는 증거라는 이야기였다. 어쩔까...주저하면서 접시를 집어 들었는데 불현 듯, 오매불망하는 푸른 색 접시가 머릿속에 둥실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차암, 나도 병이다, 병...”
장식장에서 그 접시를 꺼내 이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접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상실감. 그리고 빼앗김에 대한 분노,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것 같아 애태우던 심정. 아깝고, 허전하고, 약 오르고, 짜증이 났다.

“구질구질해!”
이 빠진 접시를 미련 없이 주방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기세 좋게 뚜껑을 닫아버렸으나 기분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쓰레기통을 열고 접시를 꺼냈다. 나는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쳐 내면서 이 빠진 접시를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깨끗이 닦았다.  

햇빛이 눈부시게 비쳐들어 오던 거실, 흘러나오는 음악, 커피를 내려 내 전용 찻잔에 담아들고 거실에 앉아 고요하고 단정한 시간을 보내던 일... 창문을 열어놓으면 토닥토닥 발자국 소리, 여인네들의 담소가 들리고, 누구네 집에선가 전화벨이 울리고, 아기가 울고, 널어놓은 빨래는 부드러운 바람에 팔락인다.
아무 염려도 없고 평온했지.... 예쁜 그릇으로 장식장을 채우고, 식구들은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을 늘 맛있게 먹었다. 가족은 건강했고, 나는 젊었다.  
  
푸른 색 접시는 내게 그 시절에 대한 상징이었다. 나는 유리 장식장 안에 들어가 있던 접시를 통해 내 생애에서 가장 평온했던 시절을 되살려 보며 아쉬워하고 그리워한 것이다. 그리움의 실체는 접시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 때 내가 명징하게 깨달은 또 다른 사실 하나는 푸른 색 접시를 두고 와서 애태우던 일이나 금전적인 손해를 보거나, 원하는 뭔가를 손에서 놓치고 속상해 하던 마음의 언저리가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고통과 자유가 그다지 경계가 없는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배웠다. 침대에 누워서 이불의 장미 꽃잎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을 괴로워하던 심정과, 지금처럼 축축한 맨땅에 모로 누워서 한쪽이 녹을 만 하면, 땅에 닿은 한 쪽은 얼어붙는 고통을 겪으며 잠들어야 하는 일이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꽉 끼는 댄싱 슈즈를 신었을 때 느끼던 아픔과, 오래 신어 너덜거리는 신발을 끌고, 상처로 뒤덮인 맨발로 걸어가야 할 때 당하는 고통도 그렇게 마찬가지였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이 대목은,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로 잡혀있는 삐에르가 또 다른 진리를 깨닫는 장면이다.

나는 돈에 대해서 많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돈 들여 사들이는 물건보다 얻거나 누가 버린 물건을 내 취향에 맞게 개조해서 쓰는 경우가 더 많고, 또 그 일을 아주 재미있어 한다.

얻은 옷을 갖고 이리저리 손질해서 입고 나가면 돈 주고 산 옷보다 훨씬 개성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단 한 벌 뿐인 옷도 제법 있다. 덕분에 비싼 옷으로 차려입은 사람 앞에서 기죽는 법도 없다.

좋은 집에 가서도 감탄은 하지만 부러운 적은 별로 없다. 나는 내 집을 구석구석 감칠 맛 나게 내 식으로 꾸미고 살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주 위치를 바꿔서 지루하지 않게 한다. 대신 남편은 그런 나 때문에 고된 일이 많다. 아무튼 비싼 가구도 없고 돈 될 만한 물건도 없지만,  우리 집은 내게 따스하고 편안하다.

문제는 중고가게를 열심히 드나드는 일이다. 싸다는 이유로 뒤지고 다니지만, 그것도 결국은 나를 속박하는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모두 집착이고 소유욕이었으며 그래서 뿌리가 같은 것이다. 아름다운 욕심이든 건전한 욕심이든, 욕심이라 불리는 것들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동질의 죄성 일 뿐이지 않은가....

올해에는 정말 자유롭고 싶다. 자유인!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욕심에서 자유로운 경지는 어떤 것일까?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으니 알 리가 없다. 평생 머리가 아픈 사람이 말한다. 머리가 아프지 않은 기분이 어떤지 상상을 못하겠다고.

폭설이 내려 모든 것이 하얗게 덮여 버린 아침에 나는 이 욕심을 끊어내는 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다. 버리고, 나누고, 그리고 간직하지 않는다.
하여, 그 집착에게서 자유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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