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결혼 수정 연재 2
2012.07.08 06:29
아 버 지 의 결 혼
제 2 회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도 점점 늘어나고 좋은 식성도 더 좋아져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훤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미만 보면 자꾸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이렇게 살아서 뭐하느냐. 밤에 불 꺼진 집에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더 싫다. 밥맛도 없고 잠도 제대로 안 온다. 혼자 자다가 그냥 죽으면 어쩌나 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잠을 이룰 수가 없다.”라는 등등의 말을 늘어놓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외로워서 못 살겠다는 것이다.
어떤 날 전화를 하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다가 딸인 줄 알고는 별안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래, 나다.” 하고 앓는 시늉을 내곤 했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까놓고 밝힐 수는 없어 은근히 딸 입에서 결혼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정미는 당황했다. 아마 두 아들까지 설득해서 자신을 결혼시켜달라는 속셈인지도 모른다. 이 무슨 변괴인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 결혼이라니.
정미는 아버지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차츰차츰 아버지는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반찬이 맛이 없느니, 짜느니 싱거우니 하면서 일일이 트집을 잡았다. 정미는 아버지가 은근히 밉기까지 해 계속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런데 하루는 가족회의를 소집하고 자신이 직접 결혼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정미는 예상했던 일이었으나 두 아들은 상상조차 못 해본 현실에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 나 같음 재혼 안 하고 혼자 깨끗하게 살겠어요. 더구나 아버진 지금 정미가 바로 옆에 있으면서 시중을 다 들어 드리고 있는데 뭐가 부족해서 결혼하신다는 거예요.”
정미는 불쑥 화가 치밀었다.‘큰오빠는 왜 나한테만 모든 걸 맡겨놓고 나 몰라라 해요? 도대체 이 집 큰며느리는 뭐하는 사람이에요?’큰올케한테 몇 십 년을 두고 쌓인 감정에 정미는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는 말을 하마터면 밖으로 쏟아놓을 뻔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말도 함께 삼켰다. 이럴 때 아버지가 한 말씀 하시면 오죽 좋으련만 아버지는 옛날부터 큰아들 큰며느리라면 끔벅 죽는다.
사실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의 자랑이며 자존심이었다. 항상 수(A)로 총총 엮은 성적표에다, 수재만 모이는 대학에도 거뜬하게 합격을 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다. 경제학 박사가 되어 권력과 재력을 갖춘 아주 근사한 집안의 예쁘고 똑똑한 딸을 며느릿감으로 데려왔을 때, 두 부자는 양 어깨에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아버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데도 큰아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지금 아버지 연세가 몇이신데 결혼을 하시겠다고 그래요? 아버지가 사시면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시겠어요? 자식들 얼굴에 똥칠하고 싶으세요? 집안 망신이에요. 집안 망신!”
큰아들의 말이 좀 지나치다 싶었는데 아버지도 똑같이 대응을 했다.
“그래, 난 앞으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거다. 늙었다고 마음도 늙은 줄 아냐? 내 맘은 아직도 이팔청춘이다.”
그는 ‘이팔청춘’이라는 말에 잔뜩 힘을 주고, 끝말 “다”를 길게 늘어뜨리며 목청을 높였다. 다들 눈을 마주치며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다물었는데 그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 팔’이든 ‘팔 이’든 그 답은 ‘십육’이니 청춘은 청춘이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형 그늘에 가려 빛도 못 보고 자란 작은아들은 매사에 너무 소극적이라 자신의 의견을 펴지 못한다. 형 눈치, 아버지 눈치를 살피면서 난처해하는 표정이다. 결론은 자식이 셋 다 반대라는 쪽으로 표가 던져졌다. 정미는 아버지가 이미 여자까지 정해 놓고 있어 쉽사리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식이 셋 다 반대를 하니 아버지는 부르르 떨면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래 좋다. 난 혼자서는 외로워서 도저히 못 살겠으니 차라리 콱 자결을 해버리겠다.”
모두 깜짝 놀랐고 결과는 아버지의 완전 승리로 끝이 났다.
결혼식은 한국 식당 구석진 방에서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식사를 같이하는 것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식당 측에서 준비를 했는지 이명훈 씨와 최숙자 씨의 혼인식이라는 팻말이 방 입구에 마련돼 있었다. 신랑 신부가 상석에 나란히 앉고 여기저기에 꽃을 장식해 방안 풍경은 화사하고 이름다웠다. 신부에게는 중매해 준 친구 한 사람이 참석했을 뿐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만 1년 후에 아버지는 22년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젊은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숙자 씨는 정미와 동갑이었다. 키도 크고 체격도 크고 얼굴도 그만하면 괜찮았다. 분홍색 한복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이 좀 촌스럽기는 했으나 굉장히 건강해 보여 우선 안심이 되었다. 아버지는 연신 싱글벙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연세보다는 워낙 젊어 보이는 아버지이기에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로 정미 눈에 비쳤다.
자식들은 뒷전이고 어머니만 끔찍이 위해 주던 그렇게도 사이가 좋은 부부였는데…·. 심장 마비라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앞에 아버지는 몸부림을 치며 통곡했다. 그땐 자신이 재혼하리라고는 아마 꿈에도 상상 못 했을 것이다. 언뜻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콧잔등이 찡해졌다. 눈물을 삼키려고 애를 쓰다가 잠깐 나갔다 들어오니 아버지가 숙자 씨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주고 있었다. 큰오빠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정미도 따라 웃었다.
그녀와의 결혼 날짜를 잡고, 아버지는 두 아들한테 느닷없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해내라고 떼를 썼다. 그것도 1캐럿. 다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뭐라 말을 못 하고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화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야, 나는 너희들 결혼할 때 다이아반지 해줬는데, 너희들은 왜 못 해주냐?”
의논이 아닌 완전 명령이었다. 돈이 문제지 아버지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니다. 갑자기 큰아들이 하늘 높이 웃어 젖혔다.
“아버지는 3부짜리 해줘 놓고 왜 1캐럿 해달라고 그래요?”
아버지는 그때랑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는 논리를 펼치며 1캐럿을 강조했다.
숙자 씨는 정미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말씀 낮추시라고는 했으나 그것은 그냥 인사지 말을 놓으리라고는 생각 안 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는 정미가 만만찮은 존재이고 정미에게도 그녀는 쉽게 좋아질 수 없는 존재이다. 법적으로 보면 엄연한 모녀지간인데 나이가 동갑이니 둘은 참으로 어설픈 사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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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가 올라 오기를 기다리며 몇 번을 들락거리다 새벽녘에 읽고 갑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부드럽게 흘러 갑니다.
아마도 원고를 원고지에, 아니면 최근까지도 원고지에 썼을 것 같이 맞춤법 규정에 맞춰 쓴 글이라 더욱 편하게 읽혀 집니다.
'컴퓨터도 원고지 작성법에 따른다.'
나부터도 그렇지만 이 규정을 무시하고 쓰는 글이 대세로 변하는 세태인 지라, 너무도 당연한 일이 오히려 새삼스레 느껴지는군요.
김영강 (2012-07-08 17:13:24)
달샘 (2012-07-08 17:14:04)
저는 영강선생을 '마춤법 박사'라 부릅니다.
서 한글학교 선생을 비롯해, 각 문학단체에 오서 마춤법 강의도 자주 한답니다. 이런분이 제 가까이 있다는것이 '영광굴비'랍니다^^
늙은 아버지가 '자결하겠다' 하면 자식들은 손을 들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당신이 '투자' 했으니... 다이야 3부가 1케럿으로... ㅎㅎ
점점 더 재미있어가니 또 기다립니다.
강기영 (2012-07-08 17:15:28)
rladudrkd (2012-07-08 17:16:02)
"맞춤법 박사"는 너무 지나친 말씀이라 부끄럽습니다. 절대 아니에요. 지금도 늘 인터넷 사전을 뒤적이는 걸요. 최현배 선생님의 "말본", 말씀을 하시니 중 1때 교과서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다 순수한 우리말로 표기가 됐었거든요. 이름씨, 토씨, 움직씨, 그림씨, 어찌씨 등등. 참 옛날 얘기입니다. 이제는 다 너무 바뀌어버려 어떤 건 안 바뀐 것만 못 한 것도 있어요. 저는 인터넷 <네이브 국어사전>을 사용합니다.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도 사용하는데 좀 아리쏭한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정확하게 설명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 군데를 왔다 갔다 하지요. 원고지 1350매 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도 위에서 아래로?
rladudrkd (2012-07-08 17:16:40)
석천 이상묵 (2012-07-08 17:17:44)
자식들에게 다이아 반지를 해 달라고 하는 캐릭터는 도저히 지나칠 수 가 없군요. 상상력의 소산인가요? 홀로된 남자의 외로움이 어떻다는 걸 더 부각시키는 장치인 것 같기도 합니다. 당해 보지 않아서 그러는데 외로움이 그처럼 심각한 질병인지 의문입니다.
어쩌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가장 챙기는 것이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이성의 사랑인지도 모르겠네요.
아버지의 캐릭터가 돌출적이어서 웃음이 절로 나오는군요.
좋은 소설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영강 (2012-07-08 17:18:23)
꿈보다 멋진 해몽, "상상력의 소산"으로 "홀로된 남자의 외로움을 부각시키는 장치"를 여기저기에 설치····. 같은 뜻이라도 이렇게 표현하니 더 문학적으로 보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노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라 노인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인물입니다. 남은 여생의 외로움을 이성의 사랑으로 채워보려는. 그래서 세속적이고 "돌출적"인 캐릭터를 설정해서 제딴에는 재미있게 끌어나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많이 미흡한데도 좋은 소설이라 격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깁니다.
물방울 (2012-07-08 17:19:01)
선생님 수고 하셨어요.
김영강 (2012-07-08 17:19:38)
물방울님, 먼 길 발걸음하여 이렇게 흔적을 남겨주시니 고마워요. 재밌게 잘 읽혀진다니 더더욱 고맙고요. 장편 연재 때에는 물방울님의 댓글이 제게 많은 도움 주신 것, 아시죠? 이 소설에도 조언 주세요. <아버지의 결혼>은 이번 소설집에서는 제외되었으니 혹시 제 2집에? 2집이 나올지 말지는 기약이 없지만요.
손정숙 (2012-07-08 17:20:51)
어머니만 사랑하시던 아버지가 1년만에 재혼하는것 어쩜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뜨거운 사랑의 공백이 그만큼 클 수도 있겠지요. 새 엄마와의 사랑이 어찌 진행될지 .. 다음을 기다립니다. ^^데이지
김영강 (2012-07-08 17:21:39)
빛과 그림자 (2012-07-08 17:22:18)
너무 사랑스럽다고 할까, 인간적이라고 할까... 소설 속 아버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세상 속의 한 캐릭터로군요.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비슷비슷하지 않나 싶네요.
웬지 외로워서 자결이라고 해야겠다는 그 용감한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군요. 다음 회를 기다려 봅니다.
김영강 (2012-07-08 17:22:49)
정말 그래요. "소설 속 아버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세상 속의 한 캐릭터"입니다.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비슷비슷하지"만, 바깥으로는 모두가 가면 몇 개씩은 다 쓰고 있지요. 체면의 가면들이지요. 하지만, 솔직하게 자신을 다 나타내고 살수 없는 것이 세상이기도 합니다. 매사에 그 한계점을 지혜롭게 결정을 해야겠지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참 단순한 인물입니다. 본인에게는 참 좋은 성격이지요.
신영봉 (2012-07-08 17:23:28)
개인적으로 나 또한 예전에 아버지의 결혼을 지켜 보았었기에 더욱 흥미가 있네요.“야, 나는 너희들 결혼할 때 다이아반지 해줬는데, 너희들은 왜 못 해주냐?” 그 말씀이 정말 일리가 있는데요.다음이 궁금해집니다.
김영강 (2012-07-08 17:24:14)
아버지의 결혼을 지켜보셨다고 하시니, 뭔가 서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판이한 줄거리가 전개될 것 같네요. 다이아 반지 얘기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그냥 집어넣었는데 의외로 메아리가 커서 기쁩니다.
원허 정봉희 (2012-07-08 17:24:52)
카페를 자주 들락거리게 됩니다.문턱이 닳았네요.
김영강 (2012-07-08 17: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