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어놓고 나면 할 일이 부쩍 많아진다. 사무실 일이나 남편 식사 같은 일상의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놓고 싶어, 또 한국 지인들에게 줄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할까 싶어 내내 동동거린다. 여기에 더해 평소 안 하던 일까지 꼭 해놓고 가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더 분주하다. 서랍장 정리가 그중 하나다. 눈에 보이는 거야 한 군데로 몰아 놓으면 되지만, 문제는 부엌 서랍장, 옷 서랍장, 책상 서랍장 등등.
보이지 않는 데가 은근히 켕긴다. 정리정돈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한국 갈 때마다 심각하게 각성하지만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뭉개버리고 만다. 그런 내가 친정집 정리해 주러 한국에 간다.
그 집은 추억 가득 담긴 나의 집이기도 하다. 우리 다섯 남매가 자라고, 결혼하고, 엄마.아버지의 환갑, 칠순, 팔순 잔치까지 했던 집. 안방 다락에는 미국 올 때 맡겨놓은 우리 살림살이도 한 귀퉁이 잘 차지하고 있는 내 마음의 집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홀로 집을 지키는 엄마, 지난 겨울 계단에서 넘어져 한참을 병원 신세지더니 그렇게 미루던 실버타운행을 결정하셨다. 몇 해 전부터 권했지만 '짐 정리는 우짜노'라며 걱정이 늘어지길래 '내가 도와주러 나갈 테니 걱정 마세요' 라고 안심시켜 드렸는데 바로 그날이 온 것이다.
'힘들 낀데 뭐하러 오노?' 말씀은 그렇게 하면서도 엄청 좋아하신다. 내가 짐 정리해 준다고 했잖아, 생색 좀 냈더니 '버릴 것밖에 없어. 몸만 가는 거야' 라신다. 호되게 아프고 나서 마음 정리가 많이 된 것 같다. 엄마 음성이 어찌나 홀가분하게 느껴지던지, 내 마음이 다 시원해진다. 서랍장마다 가득 찬 우리집 살림도 다 버려지는 거구나, 소중하게 잘 사용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리하는데 워낙 소질이 없는 데다 짐을 어떻게 버리는지 한국 상황도 모르는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만, 옛집에서 엄마와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는 데 의미를 두려고 한다. 엄마는 '내가 빨리 가야 너그들이 고생 안 할낀데 내가 짐이구나' 맨날 하시는 말씀 또 되풀이할 것이다. '왜 그런 생각 하세요. 엄마 존재 자체가 가치 있는 삶이라구요.' 나는 또 위로의 말을 건넬 것이다. 무엇보다 짐 정리 하면서 많은 추억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친정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될 것이다.
한국 간다니까 우리 네 자매 오랜만에 뻐근한 모임 좀 해야 하지 않냐, 강원도 여행이 어떠냐, 종로에 무슨 뷔페는 어떠냐, 완전히 딴 동네 이야기가 카톡방에서 오가고 있다. 한국 사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텐데 무슨 짐 정리? 자기들끼리 킥킥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암튼 나는 약속대로 짐 정리하러 간다고 공식 선언했다.
우리 결혼할 때만 해도 정정하셨던 양가 어른들, 이제 엄마 한 분 생존해 계신다. 한국 갈 일이 점점 뜸해지고 있다. 엄마 살아계시는 한국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살아 계심만으로 가치를 지니는 존재, 엄마 뵈러 한국 간다.
미주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