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6.03.12 16:04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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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동네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는다. 샌드위치나 오믈렛 혹은 핫케이크 일인분을 반 나누고 커피에 뜨거운 물을 섞어 블랙으로 연하게 마신다. 지나가며 다른 손님들의 식탁을 쓱 훑어본다. 아침부터 식욕이 넘치는지 커다란 접시에 수북이 담긴 음식과 몇 번이나 리필해 가면서 마시는 커피. 아침은 다른 문화의 신선함이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레스토랑을 나설 때면 연거푸 마신 커피 탓인지 화장실의 필요를 느낀다. 얼마 전 친구로부터 음식 맛이 괜찮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그 레스토랑에서도 나오기 전 습관처럼 화장실에 들렀다. 내부가 그런대로 깔끔했다. 그런데 손을 씻고 거울을 보는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거울에 엉망으로 새겨놓은 낙서 때문이다. 둘러보니 문에도 벽에도 전등에도 붙박이 물비누 용기에도 낙서투성이다. 낙서가 쓰여진 높이로 봐서 어느 정도 성장한 사람의 짓이다. 레스토랑 주인은 얼마나 속상할까 생각하니 괜히 내가 열이 뻗는다.

지금은 드물지만 몇 해 전만 해도 프리웨이 110번 남쪽으로 드라이브하다 보면 프리웨이 위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 난간 아래 벽면에 커다란 낙서가 흉하게 그려져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태로운 곳일 텐데 왜 하필 하는 강한 의문이 들었다. 사람 눈에 잘 띄는 공공 시설물에 그려진 그런 부류의 낙서를 보면 선진국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사실 나도 낙서를 즐기는 편이다. 어린 시절 나의 노트나 책에는 빼꼼한 구석이 드물 정도로 낙서를 해댔다. 그림도 있고 글자도 있지만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도 많았다. 용기가 없어 실천은 못 해 봤지만 초등학생 시절 '누구랑 누구랑 좋아한다…'는 글 아래 외설적인 그림까지 우스꽝스럽게 그려놓은 낙서를 보며 혼자 얼굴 붉혔던 화장실의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우리 딸도 낙서와 함께 자랐다. 안방 벽에다가 하도 이것저것 그려대길래 마음 놓고 그리라고 엄청나게 큰 종이를 벽에다 붙여 주었다. 그런데 발을 바짝 들고 간신히 손이 닿는 종이 그 위쪽 벽에 그리는 것이었다. 멍석 펴놓은 곳보다는 하지 말라는 곳의 낙서를 더 재미있어하는 딸을 보며 깔깔 웃고 말았다.

지금도 낙서는 나의 일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 바닷가에 가면 낭만 삼아 모래 위에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써본다. 전화 통화가 길어지면 나도 모르게 종이에 뭔가를 끄적인다. 종이가 없는 곳에서는 스마트폰에 부착된 스마트폰 전용 펜을 빼서 노트란에 이것저것 쓰고 그린다. 타이핑을 하면 활용성이 더 높지만 손으로 쓰는 것에 편안함을 느낀다.

무의식적이건 혹은 의식적이건 낙서는 자유스러운 우리 마음의 표출이다. 낙서가 일생 하고 싶은 그림이 되고 글이 되고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웃음이 되고 해학이 되고 음지의 이야기를 양지로 끌어 올리는 토론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레스토랑 화장실 거울에 새겨진 낙서와 프리웨이 고가도로의 낙서는 폭력으로 느껴진다. 자유의 양면성은 낙서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미주 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6.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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