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7.08.02 00:05

'조심조심, 미리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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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하면 몸에 상처를 잘 입는다. 칼질하다가 손을 베기도 하고 음식 튀기다가 데기도 하고 언제 부딪친지도 모르는 멍 자국이 남기 일쑤다. 덤벙대지 말고 차분히,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얼마 전에는 40여 명의 손님을 초대할 일이 생겼는데 다음날부터 이어질 시인협회 여름 문학축제와 문학기행, 다녀온 후에는 밀린 사무실 일과 집안일, 빡빡한 일정 앞에 걱정이 앞섰다.

우선 적지 않은 손님의 음식준비, 예전처럼 코앞에 닥쳐서 했다가는 스케줄을 소화해 낼 수 없는 일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고민 끝에 서너 가지 주메뉴만 직접 만들고 그 외는 모두 케이터링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변해갔다. '백년을 살아보니'의 저자 김형석 교수의 "조심조심, 미리미리"라는 말이 왜 하필 그 순간에 떠오르는지.

일주일 전부터 매일 한 가지씩 음식을 만들면 힘이 덜 들 거야,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잦은 외식으로 인해 그동안 뭐 먹고 살았나 싶을 만큼 집밥과 반찬 만드는 일을 등한시한 탓에 해? 말아? 엎치락뒤치락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며칠을 보냈다.

더 이상 고민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일주일 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마켓으로 향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일상을 흩트리지 않고 만들 수 있는 소박한 음식, 며칠 냉장고에 보관해도 괜찮은 메뉴를 정하고 조리 스케줄을 짰다. 평소 쉽게 해 먹던 음식도 인터넷에 나와 있는 요리법과 비교해 가며 차근차근 만들어 나갔다.

콩나물은 삶아서 얼음물에 담그면 아삭아삭한 맛을 유지한다는 것, 가지는 쪄서 꼭 짜지 말아야 가지의 향기가 유지된다는 것, 총각김치 고등어찜은 김치를 뭉근하게 익힌 후에 고등어를 넣어야 쫄깃하다는 것 등등. 듣고도 대충 무시한 부분을 실행해보며 인터넷을 제대로 활용하는 살림꾼 같아 괜스레 흐뭇했다.

급하게 음식을 장만해야 할 때는 불안해서인지 무조건 양을 많이 했는데 시간 여유가 있으니 양 조절이 조금 수월하게 느껴졌다. 지난번 손님 치를 때 처음 쑤어본 도토리묵은 정말 너무했다. 마켓에서 산 묵가루 한 봉지를 다 사용했더니 양이 엄청난 데다가 묵가루와 물의 비율이 잘 맞지 않아 묵이 완전 곤죽이 되었다. 묵 외에도 이것저것 남은 음식이 많아 골고루 지퍼에 넣어 오신 분들께 안겨 드렸는데 한 분이 갈색 액체가 있던데 그게 무슨 요리였냐고 물길래 하도 난감해 깔깔 웃고 말았다.

이번에 처음 만들어 보는 고사리나물과 멸치견과류 조림은 미리 조금 만들어 시식해 본 후, 많은 양을 했더니 아주 괜찮았다. 정성을 다해 차린 식탁을 보며 얼마나 뿌듯한지.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제법 음식 만드는 것을 즐기는 사람 같다. 아니다. 우리 집 부엌문 닫고 싶은 순간, 한두 번이 아니다.

주어진 주부 역할에 충실하고 싶은 것처럼 주어진 나의 인생을 잘 해보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조심조심 미리미리'라는 선한 자극으로 인해 몸 상하지 않고 이어지는 일정도 무리 없이 치렀다. 마음 상하지 않기 위해 더 필요한 말임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미주중앙일보 < 이 아침에>20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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