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가을이다. 사색의 계절, 결실의 계절, 여행의 계절 등등. 참으로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풍요와 낭만의 계절이다. 현실적으로는 쇼핑의 계절이기도 하다. 계절 상관없이 쇼핑에 정신 팔렸던 때가 있었다. 열심히 사들였던 것 중 짐 덩어리가 된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부질없는 짓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깜빡하는 사이에 일을 저지르곤 한다. 특히 연말의 엄청난 할인율과 대박, 파격, 폭탄, 초특가처럼 뻥튀기를 연상케 하는 단어들이 분위기 붕붕 띄우면 무심해지지가 않는다.
고마운 분들께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해야지, 싶어 귀를 기울여 본다. 하지만 쇼핑 열정도 예전 같지 않고, 발품 파는 것도 피곤하고, 식재료나 한국 제품 살 일이 아니면 온라인 쪽을 기웃거리게 된다. 가만 따져보니 올 한해 온라인 쇼핑이 부쩍 늘어났다. 별 무리 없이 온라인 쇼핑 시대에 편승한 셈이지만, 정확하게 아는 물건이 아니라면 옷은 직접 입어보고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화면 속의 모델은 옷의 태를 최고로 살려주는 마네킹 같은 몸매인데, 내가 마네킹이 아니라는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요즘은 동영상으로 앞뒤 옆모습까지 자세히 보여주며 소비 욕구를 부추기는, 어쨌든 마네킹이다. 제품을 평가하는 리뷰 사이트를 들여다보다가 킥 웃음이 나왔다. 마네킹이 입은 그 옷이 아니라고 난리들이다. 너도 당했구나. 나도 당했어.
한 모임에서 옷 쇼핑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국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이웃 분의 말씀에 귀가 솔깃했다. 한국도 온라인 때문에 오프라인이 사그라들고 있어 백화점 직원이 얼마나 친절한지 모른단다. 옷 입어보고 안 사면 뒷골 당기던 기억과 피팅룸 거울이 밖에 있어서 불편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요즘은 3D로 하기 때문에 괜찮단다.
이야긴즉슨, 3D 영상처리 기술을 이용하여 손님의 정확한 신체 치수를 측정한 후 다양한 의상을 가상으로 입어 보고 자신의 몸과 취향에 딱 맞는 옷을 선택하게 하는 가상 피팅 시스템이란다.
아무튼, 3D 가상 피팅 시스템을 사용하는 백화점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3D 기술의 응용이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놀랍고 신기하다. 하긴 어린 시절 만화 속 허구의 존재였던 로봇이나 드론이 현실이 되었다. 가상공간 인터넷, 가상화폐 비트코인, 인공지능은 또 어떤가. 최근 10년은 그전의 30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빠른 것 같다.
'옛날 옛적에'라고 말하면 전설 따라 삼천리 시절로 돌아갔는데 이젠 이 땅에 살아 있는 사람이 '옛날 옛적에'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겠다. 함께 피팅룸에 들어가서 서로 맵시를 봐주고 사이즈가 안 맞으면 쪼르르 달려나가 후딱 찾아 갖다 주던 친구 혹은 딸과의 쇼핑이, 옛날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것이 마구 밀어닥치더라도 가상은 대부분 진짜를 위한 것일 터이니,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고 매사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로만 가야겠다.
그러면 이 가을도 풍요와 낭만으로 가득 차게 되지 않을까.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7년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