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울분이 많았던 나이에 봤던
옛날 신성일이와 문희가 나오는
연애영화였는데 말이야 두
남녀가 서로 죽자고 좋아하다 나중에
밑도 끝도 없이 신성일이가 무슨
교통사고가 나는지 하는 껄렁한 흑백영화.
문희가 문짝만한 눈까풀을
위로 잔뜩 힘주어 치뜨면
눈에서 이슬방울인지 땀방울인지
뚝뚝 떨어지던 그 시대에
처음부터 끝까지 당하는 건 사내다, 사내!
카메라 앵글이라는 것이 늘
빛, 빛의 각도를 가지고 지지고 볶고 하는 것
아니니? 하다 못해 여자가 남자가 무서워서
황금 햇살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들판으로
토끼처럼 도망질을 칠 때, 이건 말도 안 돼!
그 화급한 순간에 무슨 알록달록한
양산이 바람개비처럼 뱅뱅 돌아가니? 빛살
눈부신 허공으로 남자도 슬로 모션으로
뛰어가고, 이윽고 풀섶에 발이 걸려
여자가 옆으로 우아하게 넘어진다. 그때
배경음악은 색소폰 보다야 트럼펫. 히히히
근데, 영화 끝에서 신성일이가 어떻게 되는지
죽는지 사는지 기억이 안 나네. 희한하게 어두운
조명 아래서 문희는 나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 하는 앙큼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 서 량 2005.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