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위한 변명

by 황숙진 posted Apr 0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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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위한 변명.

문학관련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다 보면 가끔 자유게시판이란 곳에서 이런 글을 읽을 때가 있다. ‘소위 시인이라는 자가 어쩌고저쩌고…….’ 글을 올린 분은 등단한 시인이나 작가가 아니고 일반회원인데 동 카페에서 올린 시인이나 작가의 글에 꽤나 열 받았던 모양이다. 나는 이런 글을 읽을 때 해당 시인이나 작가가 올린 글의 내용의 문제점을 떠나서 ‘소위 시인이라는 자’란 말이 성립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 더욱 의문으로 남는다. 예를 들어 ‘소위 교육자라는 분’이라든지 ‘소위 정치가’라는 분이 우리 평범한 인간들보다 못한 행위를 했다면 보통사람들보다 더 지탄받을 수 있으나 시인이나 작가가 인간들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부도덕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더 지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소위 시인’ 이러한 표현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로는 일반적으로 시인이란 보통의 우리 인간보다는 좀 더 고상한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역사상 내가 아는 많은 뛰어난 시인은 인격적으로 고상한 존재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우리 보통의 인간들보다 더 인간적인 결함이 많거나 심지어는 알코올중독자, 동성연애자, 마약중독자 등 정신질환에 가까운 장애자 또한 많다는 것이다. 상징주의라는 현대시의 새로운 흐름을 창시했다는 보들레르는 심한 알코올중독자였으며 불과 19세의 나이에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란 시집을 발표 천재시인으로 알려진 랭보는 동성애자에 마약중독자였으며 15세기 유랑시인으로 현대에 와서 재평가된 천재시인 프랑소와 비용은 절도와 살인으로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냈다.

물론 시인으로서 우리 범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고귀한 정신의 경지에 오른 시인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라고 노래한 윤동주 시인이나 그 유명한 귀천이라는 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라고 노래한 천진한 어린이와 같은 심성을 지닌 천상병 시인과 같은 시인도 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시를 쓴 천상병 같은 시인조차도 평생을 백수로 살았고 지인에게 술값을 뜯어내기 위해 툭하면 손을 벌리는 우리 범인들과는 거리가 먼 지독한 알코올중독자였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보들레르나 랭보나 천상병처럼 시인은 천재이기 때문에 기인일 수 있으나 그 대부분 시인들의 심성은 매우 고귀하다고. 그러나 나는 이 점에 대해서도 과연 그럴까? 라는 의구심이 남는다. 예를 들어 서정주는 어떠한가? 그는 아직도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나 다음과 같은 그의 시를 보자.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 부분 - <서정주>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는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전두환 대통령 탄신58회 축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이하중략.....

서정주는 일제 강점기 학도병 지원을 고무하는 많은 친일시를 썼으며 해방이후에는 이승만 정권 이래 독재시대의 권력을 찬양하는 많은 아부시를 썼다. 프랑스 같으면 분명한 것은 그가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나 작가라 할지라도 나치를 찬양하는 단 한 편의 작품을 썼다 한다면 드골정권하에서 사형을 면치 못했으리라는 사실이다.

어디 서정주 뿐인가?
  
오늘 대동아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 것일 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황국신민(皇國臣民)된 우리는 조고마한 개인적 생활의 불편가튼 것은 수(數)에 모들 수 업는 만큼 여간 커다란 보람이 안입니다.시국(時局)에 편승하여서도 안 될 것이고 시대(時代)에 이탈하여서도 안 될 것이고 어데까지던지 진실한 인간생활의 탐구를 국가의 의지(意志)함에 부(副)하야 전개시켜 가지 안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라가 잇서야 산하도 예술도 잇는 것을 매거(枚擧)할 수 업시 목격하고 잇지 안습니까. 오늘 혁혁(赫赫)한 일본의 지도적(指導的) 지반(地盤) 우에다 바비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업습니다. <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 >

이와 같은 노골적인 친일선전문을 쓴 이는 누구인가? 놀랍게도 아래와 같은 아름다운 시를 쓴 청마 유치환이다.
    
행복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럴진대 아직도 시인은 고귀한 마음을 지녔다든지 고상한 정신을 가진 분이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시인과 아름다운 시나 고상한 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시인은 감수성이 보통사람보다 탁월하거나 언어를 다루는 재주가 비상하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같은 시인들조차도 시인은 고상하고 품위 있고 아름다운 표현을 써야한다고 생각하는 ‘고상한 정신’을 가진 시인들이 꽤 있는 듯 하다. 일전에  문인모임에 나가 이곳 문단에서 꽤 알려진 어느 시인이 자신의 시를 신문에 기고했다가 당한 곤혹스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시가 신문에 실리자 정작 일반 독자들은 아무 이의가 없었는데 오히려 이곳 문단의 중견 시인들로부터 신문사로 항의전화가  빗발쳤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시어로 쓰인 ‘똥구멍’이란 한 단어로 인해 시인의 품위를 해쳤다는 것이다. 시인이란 고상한 표현을 골라 써야 하는데 비속어를 씀으로써 시인들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것이다. 똥구멍이 비속어라면 나는 그렇게 항의하는 시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여주고 싶다.

        강남의 술집은 음습하고 황량하다

        얼굴에 ‘정력’을 써붙인 사람들이

        발정한 개처럼 낑낑대는 자정,

        적막강산 같은 어둠 속에서

        여자는 알몸의 실오라길 벗었다

        강남 일대가 따라 옷을 벗었다


        아득히 솟는 여자의 유방과

        아련히 빛나는 강남의 누드 위로

        당당하게

        말좆 같은 뱀이 기어올랐다

        소름을 번쩍이며

        좆같은 뻣뻣함으로

        여자의 젖무덤을 어루만지고

        강남의 모가지를 잡아 흐느적거리고

        여자의 입에 혀를 널름거리고

        강남의 등허리를 기어내리고

        태초의 낙원

        여자의 무성한 아랫도리에 닿아

        독재자처럼 치솟은 대가리를

        강남의 아름다운 자궁에 박았다

        여자는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고

        강남의 불빛이 일시에 꺼졌다

위 시는 83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시인 고정희(1948-91)의 뱀과 여자의 일부이다. 그렇게 항의한 여류시인이 이처럼 비속어를 남발한 고정희 시인보다 더 고상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더 훌륭한 시인이라고 나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서정주나 유치환처럼 유난이 시에 있어서 아름다운 표현을 많이 쓰는 시인들이 속으로는 추악한 내면을 가진 것은 아닌가? 반면에 자신의 시 속에 비속어를 많이 쓴 김지하 시인이나 고은 시인, 김남주 시인 등이 오히려 고귀한 정신을 가진 시인이 아니가? 하는 조금은 역설적인 생각이 든다.

불과 17세의 나이에 랭보가 시인으로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시인과 고귀한 정신에 대한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이제, 난 가능한 최대한도로 방탕하겠다. 왜냐고 ? 난 시인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난 선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당신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며, 나도 당신에게 설명을 하지 못하겠다. 모든 감각의 타락을 통해 절대자에게 도달하려는 것이다. 고통은 대단하지만, 시인으로 탄생하는데는 강해야만 한다, 그리고 난 내 자신이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또한 조금도 내 탓은 아니다. 난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사람들이 날 생각한다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타인이다.         (1871년 이잠바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나는 랭보의 이 말이 당시의 시란 고상한 것이며 그러한 고상한 시를 쓰는 시인이 대우 받는 풍토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의 바른 태도와 세련된 매너, 그리고 풍부한 교양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 당시의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유럽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브르조와의 위선적 태도에 랭보는 극도의 혐오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랭보는 오히려 방탕한 시를 씀으로써 절대적인 가치에 근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낭만주의 시대를 개관하면서 아놀드 하우저가 말한 바와 같이 흔히 우리 인간은 고상한 말이나 표현을 고상한 정신과 혼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다지  짧지 않은 오십 고개를 바라보는 나의 인생 경험상으로도 유별나게 격식을 잘 갖추거나 품위 있는 표현을 하려고 일부러 노력하거나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 등은 사기꾼이거나 속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에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지만 솔직한 사람이거나 어느 때는 분명히 분위기를 가리지 않고 노라고 말하는 사람은 당시에는 조금 기분이 나쁠 수 있어도 지나고 나면 큰 문제가 없다. 고귀한 정신은 고상한 언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속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 시가 비루한 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고상한 표현을 썼다고 해서 그 시가 고상한 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상한 언어로 조탁된 시를 쓸 필요가 없다면 시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귀한 정신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최근 신문 기사를 읽으니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서정주의 시가 90년대 중반 이후 모조리 빠졌다고 한다. 한 때 학계와 문학계에 불어 닥친 친일논란 때문이다.
오늘 그의 시 동천을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冬天(동천)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가 아무리 민족 앞에 죽을죄를 진 대역죄인이라도 이 시만큼은 정말 몸서리치도록 아름답다. 차라리 그의 시를 교과서에 다시 실고 작자 밑에 서정주,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썼으나 일제 강점기에 친일에 앞장섰음. 라고 각주를 다는 것은 어떨까? 아마 지금은 고인이 된 그도 그것을 바랄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밤 이 시를 읽으며 ‘소위 말하는 시인’과 시, 예술과 예술가의 사회적 책무, 고상한 언어와 고귀한 정신 등 뚜렷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깊은 간극사이에서 고민하며 잠을 이룰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