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탈고법

by 김우영 posted Apr 0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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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탈고법



                                                                                                          나은




지난 늦겨울, 하얀 잔설이 하늘의 구름자락을 찢어서 산과 들녘에 듬성듬성 던져놓은 것처럼 하얗게 되었을 때, 이 맵고 추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한 편 써야겠다며 차디찬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원고지를 잡았다.



가난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지냈던 이 겨울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젊은 작가라는 위인의 오기가 책상 앞으로 끌어 당겼는지 모른다. 그간 준비했던 자료들을 정리하여 원고지 한 칸, 한 칸을 메꿔 나가기 시작했다. 몸이 춥고, 마음이 춥고, 원고지가 한기에 으스스 떨었던 기나긴 세월.



하나의 소설이 봄날 아지랑이 기웃거리는 오늘에야 기어이 완성이 되었다. 고난과 아픔의 나날이 끝났다는 시원함과 탈고의 잔치가 눈에 어린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탈고 때마다 난 술집을 찾는다. 뭔가 허전한 가슴으로 술집을 기웃거린다. 그것도 혼자 아닌 대작을 할 적당한 위인을 찾아서 간다.



작품이 끝날 때마다, 어떤 작가는 뱃속의 오물을 전부 배설한 기분이라면서 아주 시원하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살점을 자꾸만 한 껍질씩 벗겨내어 나신이 되는 것 같다면서 초조하고 안타깝다고 했다. 또 어떤 작가는 몸안에 있는 에너지가 다 나가버려 힘없이 나른한 몸으로 색시가 있는 니나노 술집을 찾아 색시와 실컷 뒹굴며 술을 먹어야 다시 에너지가 충전되어져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고 한다. 또 어떤 작가는 훌쩍 어디론가 혼자 여행을 다여와야 머리가 식혀진다고 한다.



각기 자기의 특출난 성격과 표현의 도출로 작가의 나름대로 자기만의 문학관으로 탈고 후의 허전한 마음을 뭔가로 달래고 새로운 마음을 준비할 것이다.



나 같은 경우 뭔가 허전한 가슴과 부끄러움이 앞서 술집 근처를 서성인다. 본시 술이라는 것이 대작꾼이 있어야 하는 터인데 누군가 더불어 마셔야 한다. 탈고 후에는 알만한 어느 사람의 허리띠를 잡고 술집으로 이끈다든가, 격조했던 지인(知人)을 전화로 다짜고짜 불러내어 술을 마셔야만이 탈고 후의 내 마음의 위안히 된다. 이런 경우, 나한테 걸려든 사람은 한마디로 재수없이 잘못 걸려든 것이다. 몇 달 동안 한 작품을 다듬느라 산넘고 들을 건너면서 숱한 사람들과 작중에서 희노애락을 나누며 머언 고행의 길을 걸어왓던 터라 온몸이 허전하다. 그리하여 이날은 누군가를 움켜쥐고 앉아 몸 곳곳에 주님(酒任)을 분사하듯 술을 뿌려야만 한다.



내 주법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근래엔 초반에 그날치 주량인 과반수를 마셔버리는 <초전박살형>이다. 그러니 내 앞에서 체면상, 반 어거지로 앉아서 울상을 지으며 대작(對酌)을 하는 상대방은 초반에 수없이 놓여지는 술잔 세례에 정신을 못 차린다. 가령 한 잔이라도 거르거나 두 잔(안경 술잔)이 오래도록 놓여있으면 내 수법인 권주시가 등장한다.




그대여



술잔을 들라

이 속에

사랑과 미움이 있노니


인생사

다 그런 것


서둘러봐야 한 발자국

늦어봐야 반 발자국인 것을


그대여

술잔을 들라

이 속에

너와 내가 있고

저 떠오르는 태양이 있노니


자,

이 환희의 술잔을 들게나




                                                                                     (그대여, 전문)




이런 미사여구와 궤변으로 합리화 시키노라면 위세에 눌려 상대방도 내 수준(술잔 수)을 따라온다. 이때, 이 호기를 놓치지 않을세라 연거푸 나의 번개 술잔(술잔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을 돌린다.



이렇게 초반에 잔뜩 술을 마시다보면 나는 물론이고 상대방도 얼떨떨할 정도로 취한다. 이럴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네 이놈, 네가 내 술에 안 떨어질줄 알았느냐. 내가 바로 주걸이로다! 하하하 하하하…….)



같이 취해 놓고는 둘이는 주언부언 세상 얘기에 열을 올린다. 흐트러진 자세와 가끔 삼천포로 빠지는 발음은 누가 보아도 취중객담으로 꽃을 피운다. 직장의 어떤 놈은 못 되었더라, 시내의 어떤 사람은 거만하더라, 어느 술집의 색시는 가슴이 터질 것 같더라, 어느 사무실의 미스 박은 섹시하더라, 이 사회는 악순환의 연속이어서 희망이 없다는 등, 세상의 모든 사람과 일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윷놀이를 하듯 한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스트레스 해소를 하고는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간다.



이것이 탈고 후에 허전한 가슴을 메우는 위안법이요, 다음을 위한 에너지의 재충전이다. 이러지 않고서는 한 작품, 한 작품을 오랫동안 조형하면서 겪은 고통의 낱알들을 버릴 수 없다. 아니, 이러한 나의 영혼 조각들이 다시 뼈가 되고 살이 되어 재충전 되어지는 마음으로 돌아와 다음을 준비하면서 언어를 조탁하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만나는 나의 탈고법(술잔치)을 보고 아내는 이렇게 비양거리기도 한다.



“그럴듯한 술꾼의 변명이요, 주걸레만이 느끼는 카타르시스예요.”



어쩌면 아내의 이러한 표현은 나의 정곡을 찌르는 비수일지도 모른다. 늘 얼굴을 맞대고 살을 붙이며 같이 글을 쓰며 살다보니 나의 아내(○人)만이 심도있게 느낄 수 있는 나의 행위에 대한 지적이다.



어쨌거나 나는 나의 탈고법을 그런대로 잘 적용하여 나의 문학 세계를 펼쳐간다. 다만 안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주기적으로 탈고 술 잔치에 걸려드는 위인이 있어 그렇다. 혼자서 마시는 술은 소인(小人)인지라, 나는 늘 대작꾼을 찾는다.



아! 나는 기다려진다. 다음 탈고 순 잔치 때 걸려들 위인은 누구이련가. 또 그때 만나 세상 놀음을 손 위에 올려놓고 소리를 지르며 시원하게 윷놀이나 해야지.



“윷이야! 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