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시집
2021.08.16 14:38

다섯 개의 비밀

조회 수 75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다섯 개의 비밀

이월란 (2018-7)

 

머리에 뿔이 돋은 건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소가 될까 사슴이 될까 뾰족한 수가 없을 때마다 두 손으로 뿔을 감싸 쥐고 내달리곤 했다. 머리를 숙일 때마다 누군가를 들이받을 것만 같았다. 산란한 욕기가 굳건히 만져질 때마다 새로운 모자를 사러 다녔다. 뿔을 이고 사는 몸이 네 발 짐승이 되는 건 찰나였다.

 

코가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것도 탄로난 적이 없다. 밤마다 나무 인형처럼 앉아 작은 끌로 콧대를 밀었다. 피노키오가 되어 진실 뒤로 숨어 다니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차, 기를 죽이지 않고 잠든 다음날 아침에는 내가 나에게 말붙이기조차 힘들었다. 구석진 오만이 으슥해지고 있다.

 

허리춤에는 도톰한 지느러미가 자라고 있다. 나잇살로 자란 러브핸들인가 했지만 물기 촉촉한 비늘마저 덮여 있다. 그래서인가 보다. 땅보다 물이 편했다. 수영모자 속에 금발인지 흑발인지 모를 사람들이 물안경 너머로 매일 흐려지고 있었다. 락스에 바랜 수영복은 살빛이 되어가고 허우적대는 손짓마저 물에 뜨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가슴이 없다는 사실 또한 발설한 적이 없다. 실리콘으로 부풀릴 때마다 심장소리를 찾아 헤매기 일쑤였다. 고온에도 저온에도 견디는 타인의 가슴으로 허황한 눈물을 길어 올릴 때면 오래된 복받침을 억지로 떠올려야만 했다. 거대한 보형물처럼 하릴없이 풍만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뭉클할 일 없는 가슴팍이 조금씩 내려앉는다.

 

()이 뒤바뀌어 버린 것도 입 밖에 내지 못할 일이다. 폐경이나 호르몬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셈족의 문법에서처럼 중성의 언어들만이 입속에 득실거리기 시작했다. 암수의 구별이 없어진 곳이 홍조를 띠며 문란해질 일도 이젠 없다. 골밀도 높은 제3의 성이 네덜란드에서 합법화 되었단다. 국적을 바꿀 때가 되었다. 내일이 모호해지고 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 제4시집 창세기 다시보기 이월란 2021.08.16 716
56 오래된 가족 이월란 2021.08.16 665
55 바나나 속이기 이월란 2021.08.16 724
54 클래스 바 (Class Barre) 이월란 2021.08.16 756
53 안녕, 눈동자 이월란 2021.08.16 669
52 제4시집 언니 이월란 2021.08.16 772
» 제4시집 다섯 개의 비밀 이월란 2021.08.16 753
50 제4시집 RE: 새벽 이월란 2021.08.16 733
49 제4시집 물병과 병물 이월란 2021.08.16 760
48 제4시집 오디오북 이월란 2021.08.16 765
47 제4시집 들꽃 이월란 2025.05.17 552
46 제4시집 안락하게 죽이는 법 이월란 2025.05.17 548
45 제4시집 스케이프 고트 2 이월란 2025.05.17 503
44 제4시집 스케이프 고트 1 이월란 2025.05.17 535
43 제4시집 혼혈 이월란 2025.05.17 540
42 제4시집 Mother's Day 이월란 2025.05.17 558
41 제4시집 해당 국가에서의 접근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월란 2025.05.17 582
40 제4시집 얼룩무늬 아이가 태어났다 이월란 2025.05.17 531
39 제4시집 야경 찍는 법 이월란 2025.05.17 520
38 제4시집 클래스 바 이월란 2025.05.17 541
Board Pagination Prev 1 ...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Next
/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