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가득 찬 YMCA 수영장 풍거덩 풍거덩 활기가 넘친다. 한 레인에 두 명씩 들어있는데도 빈자리가 없어 누군가 어서 끝내고 나와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먼저 레인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메이 아이 셰어 위드 유'라는 말로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 예의겠지만 바쁜 아침 시간에 거의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이라 대부분 눈치껏 들어가고 나오고 조금 불편해도 서로 양해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그날 아침 역시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다행히 한 여자가 얼굴에 물기를 쓸어내리며 나오길래 얼른 빠져나온 자리로 가서 그 레인을 살폈다. 그런데 능숙한 몸짓으로 왼쪽 레인에 헤엄쳐 가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수영솜씨가 수준급인 늘씬한 백인 미녀. 무슨 못마땅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프런트 직원에게 불평을 쏟아내던 일그러진 표정이 떠 올랐다. 좀 찜찜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고 또 출발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돌아 오려면 시간도 걸릴 것 같아 그녀의 반대편으로 들어가서 수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저쪽 끝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내 앞을 턱 가로막고 서슬 퍼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실리콘으로 귀를 꽉 막고 있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들어온 것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다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일부러 내 쪽을 막고 따지는 무례함에 슬그머니 화가 났다.
왈왈대는 그녀에게 "유 컴플레인 레이디" 하며 맞대응했더니 약이 올라 방방 뛰었다. 아무튼 하루 시작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해서 좋은 것은 해보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황당했지만 수영장 규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준 것은 사실이다.
그 며칠후 마침 한 사람만 들어있는 레인이 있길래 "메이 아이…" 를 하려고 그 사람이 회전을 해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알아서 들어오면 되지 웬일?'이라는 듯 본 척도 안 하고 왼쪽으로 바짝 붙어 풍거덩 풍거덩 앞으로 나갔다. 오른쪽으로 들어오라는 몸짓이었다.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싶어 웃음이 났다.
얼마 전 인디언 보호구역을 다녀왔다.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자꾸만 수영장의 그녀가 겹쳐왔다. 미국인들은 토착민으로 살던 인디언들에게 '메이 아이'는 커녕 '이 땅 내 것'하면서 무자비하게 그들을 몰아냈다. 척박한 땅 군데군데로 몰아 내고 너희는 놀고 먹어 라며 삶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 버리거나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합법적인 카지노를 허락했다. 그렇게 인디언을 장악한 미국인들은 '메이 아이…?' 하며 밀려들어 오는 이민자들을 큰소리 빵빵치며 선별해서 받아들이고 있다. 텃세 한번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무시무시한 무기에 힘없이 나가 떨어진 인디언들 그들의 천막집과 민속 의상과 장신구들을 보며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이 물씬 솟았다.
오늘 아침은 그 백인 여자와의 언쟁을 곁에서 모두 지켜봤던 한 이웃이 풍거덩 대고 있는 나의 레인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신세 좀 져도 되나요…옹?" 하면서 아주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우린 동시에 와하하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미주중앙일보 '삶의 향기' 2012.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