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2.09.23 16:05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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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이루어지지 못해 가슴 저렸던 인연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는 계절이다. 지나간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될 때면 지금 나이가 몇이든 그 표정과 눈빛은 소년, 소녀의 천진함으로 가득 찬다. 지난 사랑을 꼭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실망할 게 뻔한데 왜 만나느냐는 사람도 있다.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련해지는 듯 가느다란 한숨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아침저녁 공기가 서늘해지고 길바닥에 낙엽이 뒹굴면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듯 괜스레 조바심을 치게 되는 모양이다. 혼자 좋아하고 혼자 정리한 후 밤새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돌아설 때의 황량했던 가슴, 누군가를 향한 내 짝사랑의 추억이 소록소록 그립다. 구구절절 애절한 사연을 받고도 시큰둥했던 나에게 가슴 서늘한 원망의 말을 남긴 그 누구가 보낸 뜨거웠던 사연도 그립다.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노랫가락이 입안에서 맴돌고 가을 편지라도 들어 있을 것 같은 설렘으로 우편함을 연다. 우편 배달부가 다녀간 날의 반가운 편지는 옛말이고 돈 내라는 고지서와 광고 전단만 수북하다. 스마트폰 없이는 누군가와의 소통이 마비될 것 같아 열심히 충전을 시키고 있는 사람들, 편리함이야 그만이지만 누군가를 가슴에 꼭 껴안아야 쓰이는 편지에 비하면 운치와 깊이는 아무래도 덜한 것 같다.

남녀 간의 사랑뿐이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내 곁에 머물렀던 인연들의 안부가 부쩍 궁금해지는 것도 이때 쯤이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올망졸망했던 그 집 아이들도 많이 컸을텐데 어떻게 자랐을까? 길 가다가 마주쳐도 몰라볼 그 아이들의 어릴 때의 모습을 그려 본다. 혹 바람결에 그때 그 아이들의 결혼 소식이라도 들려 올 때면 한 세대가 지나가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다.

가을은 한때 어긋났던 인연들도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첫 만남이 그 자리가 아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 가을에게 그들의 안부를 묻는다. '당신을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가을은 지난 인연을 향해 마음을 열기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철든 단풍의 계절 가을은 잘 익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재촉하는 것만 같다. 여전히 살아가는 일은 어설프고 나이를 먹을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임을 털어놓아야 겠다. 설익은 대로 어른이 되고 설익은 대로 자식을 낳고 설익은 대로 낙엽이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느냐고 위로해 줄 것만 같다.

설익은 것들끼리 그리워하며 살아가라고 가을이 오나 보다. 내 그리움이 된 지난 사람들과 먼 훗날 그리움으로 남을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지난 그리움에 밑줄을 긋고 훗날 내 그리움이 될 사람들과 연민의 눈빛 주고받으며 그렇게 이 가을이 깊어 갔으면 좋겠다.

가을에 쓰는 편지는 바닥에 떨어진 낙엽처럼 잠잠히 나를 낮추게 하고 낙엽이 땅을 품듯 누군가를 품은 가슴은 한없이 두둑해질 것이다. 낙엽 쌓인 언덕을 천천히 걸으며 그대와의 추억 때문에 이만큼 자랄 수 있었다고 고백하듯이 가을 편지를 써야겠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단풍보다 곱고 가을보다 맑을 터이니.


-미주 중앙일보 '삶의 향기' 201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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