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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미국 살기로 결정했을 때 영어 이름을 하나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어려운 한국 이름보다는 영어 이름이 사람 관계를 부드럽게 할 것 같았다.

어릴 적에 불렀던 노래 중에 '한 송이 들국화 같은…' 다음 구절에 나오는 서양여자 이름을 골랐다. '바람에 금발 나부낄' 정도로 노란 머리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 영어 이름은 '제니' 그 노래 속의 이름에서 따온 아주 속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남편의 성이 이씨라 '제니 리'가 되었다. 감쪽같이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영어 이름은 나와 그런대로 친숙해졌고 "My name is…" 라고 말할 때면 내 입에서는 제대로 숙성된 버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양쪽에서 흘러들어 온 강물이 잘 어우러져 좔좔 잘도 흘러가는 것처럼 내 영어 이름은 사람과의 사이를 부드럽게 섞어주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영어 이름은 낚시꾼들이 사용하는 미끼 구실 그 이상은 되지 못한다는 느낌과 이런저런 서류에 이름 변경하는 것도 번거로울 텐데 하는 생각으로 한국 이름으로 미국 시민이 되었다. 나와 달리 남편 딸 아들은 모두 영어 이름을 만들고 자신의 한국 이름을 미들네임에 넣었다. 가끔 얼굴을 내밀다가 슬며시 사라질지도 모르는 미들네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름이다.

공식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나도 영어권 이웃들과 통성명할 때나 직장에서 거래업체와 이 메일을 주고받을 때는 편의상 '제니'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오연희가 미국에 와서 이연희가 되고 다시 제니 리가 된 내 이름의 변천사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오연희'라는 원래의 내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그냥 내가 나인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내 이름을 '우연히' 혹은 '오현희'라는 이름으로 쓰는 사람이 더러 있다. 재미있게 받아들이면서도 기분이 아주 묘하다. '제니'라고 불릴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혼이 스며있는 것 같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처럼 누군가에게 불려져서 의미가 되는 존재도 좋지만 내가 내 이름에 의미를 불어넣으며 사는 것은 어떨까.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혹은 누구의 할머니인 대명사도 더없이 소중하지만 내 이름과 함께 하는 나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에 관심을 둬보는 것이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고 하는 일은 한 세대의 일이다. 그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하는 일은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은 일이다. 이런저런 급격한 변화 속에서 여자의 이름은 더욱 희미해져 갈지도 모른다.

무슨 업적을 쌓아서 빛나는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스러운 이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그런 생각이나 행동이 아니라 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자신을 자주 바라보는 것이다. 거칠고 못난 생각이 불쑥불쑥 나를 사로잡지만 생각의 물줄기를 돌리려 부단히 애써 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나를 만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새해에는 내 이름을 자주 불러보아야 겠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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