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프리웨이 하늘에 피는 노을

2005.02.18 02:38

김영강 조회 수:1278 추천:152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해에는 서쪽 하늘에 펼쳐진 노을이 유난히도 붉게 타올랐었다. 퇴근 후 달리는 차안에서 본 프리웨이 하늘에 핀 노을이었다. 황홀하리 만치 아름다운 한 폭의 거대한 그림 같은 노을..., 질주하는 차들이 온통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취해 노을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그러다가 노을은 어느새 핏빛 슬픔으로 변해 내 가슴에 고인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소리 내어 울고 싶어도 집에 오면 내게는 그럴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참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라는 말과 딱 맞아떨어지는 삶을 산 시절이었다. 집안일, 회사일 그리고 시댁일에 몸을 쪼개야 하는 판국에 또 학교까지 다녔으니 몸이 마음을 따라가느라고 무척이나 힘이 들었었다. 이십여 년 전의 일을 지금 와 생각하니 한참 까마득한 옛날 일로 느껴진다. 그땐 아마 젊음이라는 것이 나를 그만큼이라도 지탱을 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같으면 정말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퇴근시간이 다 돼갈 무렵이었다. 벨이 울려 수화기를 드니 뜻밖에도 서울에 있는 동생이었다. 첫마디가 ‘누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였다. 동생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도 나는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그렇게도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수화기를 막 놓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안색이 안 좋다면서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그 때서야 눈물이 났다. 복받치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이며 흐느꼈다.
    그 날, 퇴근길 프리웨이를 달리는 차안에서 나는 붉게 타오르고 있는 저녁노을을 보았다. 평상시에는 무심코 보아온 노을이 그 날은 유난히도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맞은 편 하늘이 온통 새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노을을 마주하고 운전을 하면서 나는 울었다. 엉엉 소리를 지르며 통곡했다. 나만의 유일한 시간, 또 나만의 유일한 공간이 프리웨이를 달리는 차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한번도 미국에 모시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러웠다. 그 전 해에 있은 아버지 회갑에 나가지 못해, 일 이 년 후에는 꼭 초청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게 그만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일 년도 채 기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 지나치면 다시는 붙잡을 수가 없는 게 세월이라는 것을 그 때 정말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것 저것 생각 말고 그냥 초청을 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회갑 때 나가기만 했더라도 아버지 얼굴을 한 번 더 뵐 수 있었을 것을....
    자상하시면서도 엄격하셨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해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한 여학교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근 30년만의 해후였는데 친구는 대뜸 아버지 안부부터 물었다.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너의 아버지는 정말 멋진 분이셨어.”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양 회상에 젖어 눈물을 글썽였다.
    “너, 생각 나니? 우리가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이니 아주 까마득한 옛날 일이야. 그런데도 나는 너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라. 훤칠한 키에 양복을 입고 계셨던 모습이 참 멋있었지만, 더 멋있었던 것은 너를 데리고 탁구장에 가신다는 것이었어. 그 날, 방과 후에 빵집에 앉아 있는데 너의 아버지가 널 데리러 오셨더랬어. 그리고 거기 있던 친구 모두에게 빵을 한 봉지씩 사 주셨어.”
    그날 밤 친구는 어린 딸을 데리고 탁구장엘 가는 젊은 아버지가 부러워 잠을 설쳤다고 한다. 아버지와 가끔 탁구장엘 가서 신나게 탁구를 치곤하던 기억은 있으나, 나는 그 일들을 그냥 대수롭잖게 흘려버렸었다.
    친구에겐 근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아버지의 그 모습을...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이었을까? 아버지의 사업이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진 적이 있었다. 집까지 날아갈 위기에 처해 빨간딱지가 여기 저기에 붙었으나 우리들 앞에서는 눈 하나 깜짝 않으시던 아버지였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조금도 걱정 말고 평상시대로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나는 무조건 아버지를 믿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커다란 믿음을 심어주셨기에 아버지는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냥 믿은 것이다. 그 믿음이 현실로 옮겨지기까지 아버지가 겪어야 하는 고충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후, 완전히 재기하셨을 때도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에 관해서도 전혀 생각을 못했다. 정말 아버지를 위해 한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아버지를 미국에 한번도 모시지 못한 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에 걸린다. 좀 지나면 큰 효도나 할 것처럼 하루하루 미루어 온 내 처사가 후회막심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돌이킬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초청을 하고 싶어도 아버지가 이 세상에 안 계시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렇게도 건강하시던 분이 하루아침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다.
    내가 만일 ‘고아원 하늘에 피는 노을’ 의 그 아이처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 아래로 옹말졸망 동생이 넷,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버지는 우리 오남매를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 주시고, 또 결혼까지 다 시키신 후에 이 세상을 떠나셨다. 자신의 임무는 아주 완벽하게 끝내신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한테서는 효도 한번 제대로 못 받으셨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노을은 변함없이 프리웨이 하늘에 피어있다. 그 속에 선명하게 그려진 아버지의 발자국이 보인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내 인생이 보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길지 않은 지금, 나는 그 남은 여백에 정성을 다하여 그림을 그릴 것이다.

    아버지처럼, 아름다운 인생의 노을을 남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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