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 밤색 재킷과 구두닦이

2009.09.05 02:58

김영강 조회 수:1159 추천:178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를 보았다. 이곳 로스앤젤레스의 현지 방송에서였다. 정부에서 주는 기업공로상 수상자에 그가 끼어 메달을 목에 걸고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 장면이 방영된 것이다. 뉴스 시간을 기다린 것도 아니고 우연히 한국 채널을 눌렀는데 그의 심각한 얼굴이 화면에 언뜻 비쳤다가 사라졌었다. 지극히 순간적이었고,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민지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나운서가 언급한 그의 이름도 분명히 귀에 들어왔다. 의외로 아주 담담한 기분이었다.
  
   박기철.... 그는 한때 민지가 사귀던 남자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 같지 않게 민지의 눈에 비춰졌기 때문이다. 결국 둘 사이는 서서히 멀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와 결별을 한 후에야, 민지는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나날 속에 행여나 하고 그를 기다려 보았지만, 돌이키기엔 박기철이 이미 너무 멀리 가버린 후였다. 그는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달음박질을 치며 달아났기 때문이다.  
  
   어느 해 가을, 민지는 그가 이끄는 대로 교외선을 타고 야외로 나갔다. 그 당시에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송추라는 곳이었다. 가을의 끝자락이라 시즌이 지난 탓인지 관광객이 별로 없어 주위는 한적하고 쓸쓸했다. 점심때가 되어 둘은 식당엘 들어갔다. 식당이라는 이름만 붙었지, 그냥 시골집이었다. 손님은 한 명도 없고 주인아주머니가 마당에서 배추를 씻고 있었다. 밥도 그 집 안방에서 먹었다. 밥을 먹고 나오니 쪽마루 밑에 놓인 그의 구두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 서너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가 구두 닦으라고 그랬지? 나는 구두 닦으란 말 안 했는데? 소년은 무안해서 아무말도 못 하고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는 구두끈을 천천히 매고 일어서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구두 닦으라는 얘길 안 했는데 네가 그냥 닦아놨으니, 돈 안 줘도 되지? 민지는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로 돈을 안 주고 그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뒤통수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박기철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구두닦이 소년이 울상을 하고 민지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무슨 큰죄나 지은 듯 가슴이 철커덩하고 내려낮았다. 그를 따라 나가면서 민지는 얼른 지폐 한 장을 소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하루 데이트 비용으로 그 열배 스무 배 이상의 돈을 쓰는 그가 불쌍한 구두닦이 소년에게 돈을 안 주다니... 가슴이 두근거리며 전신의 피가 위로 솟구치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참을 걷다가 박기철이 말했다. 돈을 안 주고 왔더니 기분이 찜찜한데. 그럼 도로 가서 주면 되잖아요. 이렇게 톡 쏘아붙일 수도 있었건만 민지는 그가 무안해 할까봐 도리어 신경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줬어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안 했다. 민지 보기가 민망해서라도 순간적인 실수였다고 한마디쯤 할 수도 있었건만 그는 침묵했다. 민지는 자신까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몹시 불쾌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민지는 그날 일이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베이지색 바지에 밤색 재킷을 차려입은 박기철의 훤칠한 모습이 그날따라 유난히 멋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집을 나올 때는 빛좋은 개살구처럼 보였었다. 구두닦이 소년의 모습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금세 눈물이 주르르 흐를 것 같았던 얼굴 표정, 남루한 옷차림, 본인이 가위질을 한 것 같던 쭈뼛쭈뼛한 머리. 그 와중에도 소년은 민지에게 나지막했지만 비장한 음성으로 “감사합니다”하고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깍듯이 인사를 했었다. 지금쯤은 40대의 남자가 됐을 텐데, 어디에선가 행복하게 잘살고 있으리라는 마음이 든다.
   실은, 박기철이 대통령으로부터 기업공로상을 수상하는 장면을 볼 때, 민지는 그 아이가 머리에 떠올랐었다. 구두 닦으란 말을 안 했는데 그냥 닦아놓았으니 돈 안 줘도 되지? 하던 그의 목소리도 귓전에 들려왔다. 버러지 보듯 소년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빛과 함께. 그 눈빛에는 야비함과 비열함이 곁들어 있었다. 기업도 그렇게 일구었을까?  
  
   텔레비전에서 그를 본 탓인지 요즘 들어 자꾸만 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잊고 있었던 추억들도 심심찮게 떠오른곤 했다. 신문을 들척이다가도 경제면은 제목도 안 보고 넘겨버리기가 일쑤였는데 혹시나 그의 기사가 있나하고 눈여겨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지는 박기철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보게 되었다. 지면도 많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의 사진도 크게 실렸었다. 그는 민지를 쳐다보며 싱긋이 웃고 있었다. 무슨 경영대혁신을 이룩하여 또 상이라도 받았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기사였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박기철이 우리나라에서 제일로 손꼽히는 건설회사인 미래건설 총수의 큰사위라는 점이었다. 첫머리에는 그가 한국의 경제계를 위해 이루어 놓은 업적이 나열되어 있었다. 대단한 야망의 소유자에 능력 또한 탁월했다.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장인과 함께 사업을 부흥시켜 놓았으나 작년에 장인이 죽은 후, 처남들과의 갈등이 고소 사건으로까지 이어진 일이 있었다는 기사가  몇 줄 적혀 있었다. 박기철이 그만큼 힘이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관대해 질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유족에는 아내의 이름만 나와 있었다.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구두닦이 소년과 민지는 분명히 한배를 타고 있었던 것 같다. 풍랑을 만나 고전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잔잔한 바다 위에서 순탄한 항해를 지속하고 있다. 그 풍랑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옛 이야기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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