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사라진 자리/수정 2014년

2012.04.08 12:46

김영강 조회 수:864 추천:119

&n소설

무지개 사라진 자리

김영강


   제게는 언니가 하나 있습니다. 저보다 다섯 살이 위예요. 어릴 때부터 언니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내 앞에 딱 버티고 서 있었지요. 그래서 저는 햇빛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답니다. 항상 그늘에서 비실비실 자랐어요. 날씬하고 예쁜 언니에 비해 제 모양새는 제가 봐도 아주 못 났어요. 언니처럼 키도 크지 않고 살결도 곱지 못합니다. 언니는 공부도 아주 잘하지만 저는 바닥에서 헤매는 수준이에요. 그래서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혹시 내가 엄마 아빠의 친딸이 아닌 걸까?’ 하고요.
   물론, 언니는 엄마를 쏙 빼 닮았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어요. 잘난 자식보다 못난 자식에게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 부모 마음이라지만 우리 집은 그 반대였어요. 언니는 지독히 예뻐하면서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안 주셨거든요. 엄마가 외출을 할 때에도 꼭 언니만 데리고 다녔어요. 친척들이 와도 언니만 예뻐합니다. 못난 저는 그냥 슬쩍 제 방으로 숨어버리죠. 한국 살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열 살 때 미국에 왔기 때문에 저는 한국에서의 어릴 적 기억이 아주 생생하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오기 바로 전,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아버지가 부산에서 서울로 전근이 되는 바람에 저 역시 서울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어요. 그때가 겨울방학 중이라 개학하기 전에 미리 전학 수속은 했었답니다.
  그리고 개학 첫날, 등교할 때는 애들이 주르르 학교에 가고 있었기에 그 뒤를 졸졸 따라가 무사히 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학교 끝나고 집으로 올 때, 그만 길을 잃어버렸지 뭡니까.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집 전화가 채 나오기 전이었어요. 길을 잘못 들어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나중에는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분간이 안 되었어요. 아주 낯선 동네까지 와버렸더라고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바람까지 쌩쌩 불어 너무너무 춥고 무서웠어요. 그래서 길거리에서 그냥 막 엉엉 울었어요.
   그때 어떤 아저씨가 제게 다가왔어요. 정말 고마운 분이었어요. 자초지종 설명을 했더니 그 아저씨가 저를 데리고 학교로 갔습니다. 그리고 숙직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주소를 받아가지고 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학교로 도로 갈 생각은 못 했어요. 학교를 찾기가 어려웠으면 물어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 저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애였나 봅니다. 언니 같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겁니다. 아뇨, 언니는 길도 잃어버리지 않았겠지요.
  
  그렇게 집에 왔는데 엄마는 너무나 태연했습니다. 학교 파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하나도 걱정을 안 한 기색이었습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학교에 가는 첫날인데, 갈 때만이라도 데려다 줘야 하는 게 엄마의 도리 아닙니까? 물론 아버지는 퇴근 전이었지만 중학생인 언니는 버젓이 집에 들어와 있더라고요.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병신같이 왜 길을 잃어버리고 그래?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어떻게 길을 잃어버릴 수가 있어? 뼈엉씨--인.’
  그렇지만 설마, 길을 아주 잃어버리기를 바라지는 않았겠죠? 제가 왜 이런 끔찍한 생각까지 하는 걸까요?’
  미국에 온 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저는 길을 잃어버려 막 울고 다니는 꿈을 자주 꾸었어요. 꿈을 깨고 나서는 ‘아, 꿈이었구나. 정말 다행이야 다행. 이게 꿈이 아니고 진짜였더라면 어떡할 뻔 했지? 여긴 한국도 아니고 미국인데 참말로 큰일 날 뻔 했다. 휴우-- 이제 안심이다 안심이야.’ 하면서 막 기뻐하곤 했어요. 오죽하면 꿈속에서도 ‘걱정 마. 걱정 마. 이건 꿈이야. 꿈이니까 괜찮아, 괜찮아.” 하고 나를 위로했겠습니까? 꿈을 꾸는 중에도 어떤 잠재의식이 있나 봅니다. 그리고 꿈속의 저는 항상 초등학교 3학년 아이였어요.    

   지금 저의 부모님은 마켓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살 때, 아버지는 넥타이 매고 회사에 다녔었는데 미국에 와서는 완전히 딴 길을 걷게 된 겁니다. 작업복을 입고 박스까지 나르며 노동을 하고 계셔요. 종업원이 있는데도 새벽같이 마켓에 나가서 정말 열심히 일하십니다. 일에만 묻혀 친구들도 못 만나고 살아요. 동창회에도 통 안 나가시고요. 아버지는 한국에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일류대학을 나오셨답니다.  
  별로 말이 없는 성격의 아버지이시지만 미국에 온 후로는 말이 더 없어지신 듯합니다. 물론 저하고도 별로 말을 안 해요. 할 말도 없고요. 제가 말이 없는 건 아버지를 닮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닮은 게 있긴 있네요. 그 좋은 머리를 좀 닮지····. 좋은 건 언니가 다 앗아가 버려 저한테는 줄 것이 남아 있지 않았나 봅니다.  
   마켓을 시작한 후,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생소해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것 같아요. 제 말은 경제적으로 안정이 됐다는 뜻이에요. 고생은 역시 마찬가지고요.
  일 년 열두 달, 노는 날이라고는 며칠밖에 없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고 있으니 그게 고생이지 뭐예요?
그러니 나 같은 거한테는 신경을 쓸 여가가 도저히 없으시겠죠. 오직 언니, 언니밖에 모릅니다. 부모님의 모든 것이 다 언니를 위한 삶 같아요. 아버지는 맨날 가게에 붙어 계시고 어머니는 저녁때쯤에 집으로 오셔서 딸 둘을 위해, 아니 언니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거지요.  
  
  언니는 참 이상합니다. 하나뿐인 동생인 저한테는 쌀쌀하게 굴면서 남한테는 너무너무 친절하게 잘해주거든요. 엄마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살 때부터 저의 집에는 친척들이 많이 들랑거렸어요. 거의 모두가 뭘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렇게 부자도 아닌데 미국에 와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데 저는 그런 사람들이 싫습니다.
  그 중에서도 엄마의 먼 친척 동생뻘이 되는 이모가 제일 싫습니다. 한국 살 때도 저의 집에 자주 들랑날랑 했는데 미국 와서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어요. 미국에서도 가까이 살게 되었으니까요. 언니도 그 이모를 싫어하면서 앞에서는 아주 잘해줍니다. 남들한테서 착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가면을 쓰고 있는 겁니다. 안팎이 완전히 따로 노는 거지요. 어떤 때는 위선자 같아 보여 구역질이 납니다.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못 사는 사람들일수록 더 잘해주어야 해. 돈 꾸러 와서 눈치 보는 그 마음이 오죽하겠니?”
   저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런 훌륭한 사고방식을 가진 언니가 어떻게 나 같은 동생 둔 것을 부끄러워할 수가 있습니까? 어릴 때부터 늘 느껴온 것이 있습니다. 부산 살 때,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어도 제가 언니 동생이라는 것을 아는 애들이 별로 없었어요. 선생님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요. 언니의 그러한 마음을 알아 저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답니다. 물론 학년 차가 너무 많이 난 탓도 있겠지만요.
  하루는 이모가 또 돈을 꾸러 왔었어요. 그런데 저는 듣지 말아야 될 말들을 그만 듣게 돼버렸습니다.  
  “쟤는 왜 저래? 손윗사람을 보고도 본체 만체 지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네. 생긴 대로 간다더니 못 생긴 게 성격도 되게 못 됐어. 도대체 잰 누굴 닮았어? 지 언니하고는 어쩜 저렇게 다를까.”
  이모가 이렇게 말하면 엄마가 듣기 싫어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자기 딸을 그렇게 말하는데 어떤 엄마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엄마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모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모의 말보다 엄마의 말이 더 서운했습니다.
  서운한 정도를 지나 가슴이 철커덩하고 천길만길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뭔가 바람 같은 것이 한 줄기 휙 하고 가슴에 사선을 그었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휩싸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온몸이 조여오는 통증이 왔습니다. 엄마의 말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턱 꽂힌 것이지요.
   “그러게 말이다. 지 언니 반만 따라가도 오죽이나 좋겠니? 쟤만 보면 내가 울화통이 터져 못살겠다. 창피해서 어디 데리고 다니기가 싫다니까.”
   말 한마디 한마디를 꾹꾹 눌러가며 차지게 뱉어내는 그 음성에는 제가 싫어 죽겠다는 감정이 잔뜩 실려 있었습니다. 엄마의 얼굴도 분명히 일그러져 있었을 것입니다. 당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 엉엉 소리 지르며 울고불고 할 수도 있었지만, 마음뿐이지 저는 두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그날 밤, 저는 뜬눈으로 밤을 꼴딱 샜습니다. 그리고 내가 엄마 아빠의 친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혹시, 아빠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서 나를 낳아 데리고 온 게 아닐까하는 극단적인 상상도 했습니다. 언니와 나이 차가 많은 것도 심상치 않았고요. 그러면서 엄마가 언니와 나를 어떻게 차별하나 하고 더 눈여겨보면서 계속 그 문제로 고민을 했습니다. 부모님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방법도 모색을 해봤습니다. 좋은 방향으로는 도저히 언니를 따라잡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아주 나쁜 애가 되어버려 부모의 속을 썩여주고 싶었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다가 집을 나가 갱단에 들어가 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암만 생각해도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진짜로 엄마가 나를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세월 속에서 제가 10학년이 되었을 때, 제 인생에 햇빛이 들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집 근처에 있는 한국학교에 다니게 되었어요. 그때도 엄마는 “너는 한국말도 잘하는데 뭣 하러 한국학교엘 다녀?” 하시고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제게 실망을 안겨주셨지요. 그곳에서 저는 난생처음으로 칭찬이라는 것을 들어봤습니다.
  ‘아, 제가 칭찬을 듣다니요····.’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10년 동안이나 학교에 다녔으나 선생님으로부터 칭찬 한 번 들은 적이 없습니다. 눈을 닦고 찾아봐도 잘하는 것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없는 저입니다. 이모 말씀대로 저는 성격도 되게 못돼 먹는 애였어요. 사람들을 무조건 싫어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학교 선생님께서 저를 칭찬해주신 겁니다. 사실, 칭찬을 들을 만큼 뭘 특별하게 잘한 것도 아니었어요. 수업태도가 좋고 착하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한국말을 잘한다는 것을 상당히 높이 평가해주셨습니다. 열 살 때 미국에 왔으니까 한국말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아마도 제게는 칭찬할 만한 것이 너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그래도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제게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겼을 땐, 바로 알아보시고 한마디씩 해주셨어요. 머리 잘랐을 때는 물론이고 헤어스타일이 약간 바뀌어도 금세 알아보셨어요. 늘 까만색이나 청바지만 입다가 좀 밝은 색의 옷을 입어도 저한테 더 어울린다고 격려해주셨어요. 엄마 연세 정도의 선생님이셨는데, 결석을 했을 땐, 편지와 함께 과제물을 부쳐주시고 어디 아픈가 하고는 꼭 전화를 걸어주셨어요. 제게 관심을 가져주고, 저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타인에게서는 물론이고 가족으로부터도 그들의 관심 밖에서 늘 혼자였던 저였으니까요.
그런 제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복권에 당첨된 것만큼이나 큰 행운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선생님이 우리 엄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게 하기 싫던 공부였는데 한국어에는 슬슬 취미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의 칭찬과 격려에 힘입어 성적도 눈에 띄게 올라갔습니다. 한데 너무 놀라운 일은 제가 <SAT II 한국어>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만점을 받을 수 있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저는 만점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부모님께서도 깜짝 놀라셨고 저를 보는 눈에 변화가 생긴 건 확실했습니다. 하지만 나와 언니는 여전히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를 두고 있는 부모님입니다.
  
  언니는 지금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동부의 명문 사립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수재만 모이는,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들어가기 어려운 대학인데도 언니는 너끈히 합격을 했었어요. 잠 안 오는 약까지 먹어가면서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으니까요.
언니가 그랬어요. 자기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공부한다고요. 언니의 소망대로 부모님이 기뻐한 건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지요.
  사실 그때 저는 언니가 똑 떨어지기를 바랐답니다. 참 못된 동생이었어요. 언니가 집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으니까요.
  한데 이상하게도 차츰차츰 시간이 흐르니 그게 아니었어요. 미웠던 언니가 조금씩 이해가 되면서 가끔 보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만점을 받고 나니 위축되어 있던 어깨가 슬슬 펴졌어요. 언니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그래서 생전 처음 이메일을 보냈는데 언니한테서는 답장이 없었습니다. 엄마가 전화로 제가 만점 받은 얘기를 했는데도 제게는 일언반구가 없었습니다. 언니는 너무 높은 데서 훨훨 날고 있어 저 같은 존재는 눈이 보이지 않았나 봐요. 못난 딸 못난 동생이라는 낙인이 너무나 오랫동안 찍혀 있었기에 그 굴레를 벗어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겠지요.

  부모님한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전화를 하는 언니예요. 다른 집은 돈이 필요할 때만 전화가 온다고 하는데 언니는 달라요. 그저 부모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려고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그들에게 언니는 믿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언니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언니의 성격상 능히 그럴 수 있으니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집에 왔었는데 며칠 만에 가버렸기에 나하고는 얘기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만점 받았다며?” 하고 한 마디는 하더군요. 아무런 관심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만점? 별 거 아냐.’ 하는 식으로요.
   한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공부하느라 그 예쁜 얼굴이 반쪽이 됐더라고요. 어디가 아픈 사람 같았어요. 아니 확 늙어버려서 언니가 불쌍해보였어요. 아픈 사람 같다기보다는 늙었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입니다. 엄마는 바리바리 음식을 싸고 보약까지 짓느라 야단이 났었어요. 그리고 긴 여름방학 때는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하기학교에서 보충해야 될 공부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집에 오지는 않았지만 전화는 여전히 자주 걸어 부모님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얼굴도 많이 좋아졌다고 했어요. 엄마는 또 보약을 지어서 보냈고요.

  점점 학교생활이 재미있어졌습니다. 좋은 대학에 꼭 합격해야 하겠다는 의욕도 생겼고요. 그리고 친딸일까 아닐까 하는 고민의 벽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벽이 허물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어 갈등을 겪고 있었어요. 찍 찢어진 작은 눈만 성형을 하면 얼굴이 확 달라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거울을 보고 눈두덩 위에 연필로 선을 그어보기도 하고 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보기도 했어요. 물론 이러한 내 맘은 절대로 비밀이었죠.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꾹꾹 참기만 하고 살아왔기에 저는 비밀이 참 많답니다. 친구가 쌍꺼풀 수술을 했는데 아주 딴 사람처럼 예뻐졌더라고요. 나도 해야겠다고 결정을 했으나 제일 큰 문제는 돈이었어요. 이천 달러나 되는 거금을 어디서 구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마한테 말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돈이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하면 어쩌나 하고 망설이고 망설이는데, 갑자기 한국학교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속에 묻어두지 말고 바깥으로 표현을 하라고 하신 말씀이에요. 물론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말들도 무지 많지만 저는 해야 할 말도 너무 안 하고 살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방학 때, 하루는 용기를 내 서두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엄마가 한마디로 승낙을 하신 겁니다.        
  “그래. 당장 해라. 내가 왜 그 생각을 진작 못 했을까?”
  그리고는 그날 바로 성형외과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하고 예약을 해주었습니다. 그때, 만일 엄마가 돈이 없어 못 해준다고 했다면 저는 분명히 친딸이 아니라는 단정을 지어버렸을 거예요. 병원에도 엄마랑 같이 갔었어요. 그런데 일단 병원에 들어서니 겁이 났어요. 할까 말까 망설여진 것입니다. 저는 매사에 이런 식으로 뭘 결정을 못 하는 성격이랍니다. 더구나 의사 선생님의 태도가 ‘야 너, 되게 못생겼구나. 너 같은 얼굴은 쌍꺼풀 하나마나야.’ 하는 듯해 보여서 더 그랬어요. 부풀었던 희망이 단번에 절망으로 나가떨어져 버렸는데, 엄마가 격려를 해주시면서 저를 달랬어요. 쌍꺼풀 수술을 하면 분명히 예쁘질 것이라고요.
   쌍꺼풀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정말 대만족이었어요. 틈만 있으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니까요. 한 줄기 빛이 가슴에 새어 들어오면서 어두웠던 세상이 환해보였어요. 언니처럼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생겼어요.  

  물론 언니는 여전히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있습니다. 언니하고 통화할 때의 엄마 표정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답니다. 예전 같으면 엄마의 그런 행동에 속이 뒤틀렸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아요. 말 한마디라도 곱게 하며 제가 노력을 하니까 엄마에게서도 뭔가 변화를 느꼈습니다. 일일이 퉁명스럽게 군 것이 후회가 됐어요. 언니가 갈수록 자랑스러워졌어요. 언니를 너무 미워한 것이 미안했어요. 언젠가는 언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제 마음을 확 풀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제가 땅바닥에 엎드려 안간힘을 쓰면서 겨우 기고 있을 당시였어요. 그때 무지갯빛 찬란한 공중에서 훨훨 날고 있는 언니가 너무너무 미워서 그 날개가 부러져버리기를 바랐던 적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부끄럽습니다. 그게 다 제 열등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예전처럼 땅바닥에서 겨우 기는 처지가 아닙니다. 이제는 땅위를 걸을 수도 있고 뛸 수도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언니처럼 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생겼고요.
  
  그해 크리스마스 때, 언니는 집에 오지 않았고 그 후로부터는 엄마한테 전화도 좀 뜸해졌었어요. 졸업이 가까워오니 무지무지 바쁠 것이라고 다들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직장이 결정되어, 이제 곧 같이 살게 될 텐데 그까짓 몇 달 참는 것은 아무 문제 아니었죠. 언니한테서 이곳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도 아빠도 저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과연 언니는 언니였습니다. 졸업도 하기 전에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고, 그 중에서도 더 좋은 데를 마다하고 부모님이 계시는 이곳으로 결정을 했다니 말입니다.

  드디어 졸업식이 코앞에 닥치게 됐어요. 부모님은 졸업식에 참석할 계획을 세우며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언니의 졸업식에 참석을 하고 싶었지만 내색도 못 하고 포기를 했었어요. 졸업생 한 명에 두 사람 이상은 참석을 못 하니 저는 오지 말라고 언니가 그랬대요. 언니가 오라고 해도 저는 학교 때문에 갈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섭섭하더라고요.
실은 엄마가 언니한테 한 번 가려고 몇 번을 벼르고 벼렸으나 그때마다 언니가 못 오시게 했어요. 자기는 너무나 잘 있고 공부도 잘 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면서 바쁘신데 안 오셔도 된다고 했어요. 엄마 역시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자제하셨던 것 같아요.
  이번에는 졸업식인데도, 가게 때문에 바쁘실 텐데 안 오셔도 괜찮다고 하는 것을 엄마가 우기고 우겨서 가게 된 거랍니다. 콩을 팥이라고 해도 언니의 말은 다 믿는 엄마라 졸업식에 안 오셔도 된다는 말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이구, 그 착한 것이 부모 생각을 그토록 하다니··· ···.” 하시고는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언니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높이 평가했지요.  

  여행 계획까지 세워놓고 두 분이서 마냥 행복해하시면서 언니한테로 떠난 그날 저녁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아주 흥분된 목소리였습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얘기를 조리 있게 잘하는 엄마인데, 그게 아니었어요. 너무 행복해 기쁨에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모양이지요? 말의 순서가 뒤바뀌면서 갈팡질팡 하다가 나중에는 별 타령을 늘어놓았어요. 끝에 가서는 엄마가 좋아하는 보석까지 등장을 하고요.
  “지금 여긴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미국 레스토랑이야. 꼭 하늘나라에 온 것 같아.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세상이, 별을 확 뿌려놓은 것 같구나. 위에도 별이 있고 밑에도 별이 있고 그야 말로 별 천지다 별 천지. 식당 안에도 별이 반짝반짝 하고 있어.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내부 장식을 기차게 잘 해놓았어. 스테이크가 얼마나 연한지 입에서 살살 녹는구나. 이게 바로 천국이지. 뭐 천국이 따로 있겠니? 그릇 가장자리에도 금빛 별이 뺑 둘러앉아 있다. 내가 별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다. 아냐. 별이 아니고 보석이야 보석. 천국은 맨 보석 밭이라고 하던데 정말 내가 천국에 왔나 봐.”
  보석 타령으로 이어지는 엄마의 기쁨이 제게는 왠지 섭섭했어요. ‘끼니 그르지 말고 밥 잘 챙겨먹어라.’ 하고 한 마디만 해주었더라도 제 맘이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엄마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언니하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작은딸은 생각도 안 났다는 말이지. 밥맛이 없어 점심을 굶었는데도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온종일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비기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더 서글펐습니다.
  한데 두어 시간 후에 또 전화를 거셨어요. 하늘나라에서 이제 세상으로 돌아온 듯, 흥분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첫 마디부터 “거긴 지금 일곱 시쯤 됐겠구나. 저녁은 먹었니?” 하고 제 안부부터 물으셨어요.
  “우린 지금 저녁 먹고 집에 가는 길이야. 음식이 어찌나 맛있는지 네 생각 많이 했다.”
  잠깐 말을 끊었다가 엄마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같이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말을 반복하면서 너 혼자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어요. 아까의 섭섭했던 마음이 금세 눈 녹듯이 다 녹아내렸습니다. 꼭 제 맘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해 부끄럽기까지 했어요. 제게 점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엄마가 이제는 진짜 엄마가 되어 있어 기쁨이 막 용솟음쳤습니다. 다른 엄마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그런 마음이 저게는 감동이었으니l까요.
  “문단속 잘 하고 밥 잘 챙겨 먹어. 내일이 졸업식이니, 끝나고 또 전화할게.”
   저는 오실 때까지 전화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또 감동 먹었지요. 그리고 딸을 배려하는 엄마의 마음이 담긴 말들이 이어져 저의 감동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 곁을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니고 겨우 일주일 후면 오실 터인데, 너무 그러니까 도리어 이상했어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언니가 피곤해보여, 아빠가 운전을 한다고 해도 운전대를 놓지 않는구나. 비까지 뿌리고 길도 꼬불꼬불한 산길이라···.”
   엄마의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잘 있지? 혼자 지내기 무섭더라도 이겨내야 해. 너는 똑똑하니까 모든 걸 잘 극복할 거야. 그리고 말야····.”
  언니가 무슨 말을 무슨 말을 할듯 말듯하는데 그만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높은 데라서 그런지 전화 상태도 별로 안 좋았어요. 길도 꼬불꼬불하고 비까지 온다고 하니 좀 걱정이 됐어요. 교통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하고요. 여기도 비가 오는데 거기도 비가 온다니 좀 불길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똑똑하다는 말이 자꾸 맘에 걸렸어요. 기뻐해야할 말인데 그렇지가 않았어요. 언니는 늘 저를 바보 병신 취급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똑똑하다니요? 여느 때의 쌀쌀한 태도와는 달리 어딘가 따뜻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어요. 조금은 슬픈 기운이 감돌기도 했지만 어조는 아주 단호했어요. 생전처음으로 저를 걱정해주는 언니가 고마웠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고 뭔가 이상한 여운을 남겼어요.
  혼자 지내기가 무섭다 하더라도, 그게 뭐 극복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것도 일주일만 지내면 되는데····.
  “그리고 말야····.” 하고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저는 제일 궁금했습니다. 도무지 감이 안 잡혔습니다.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한잠도 못 자고 내내 뒤척거렸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폭우로 변해 와르르 쿵쿵 하고 천둥까지 쳐서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가끔은 번쩍하고 번개까지 하늘을 가르고 지나갔습니다.

  그다음 날 새벽이었어요. 저는 한통의 전화를 받고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차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 언니랑 엄마 아빠, 세 사람이 다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기 때문입니다. 빗길에 미끄러진 교통사고라고 했습니다.
  아침이 말갛게 다가오고 있었으나, 벼락이 하늘을 쪼개며 제 뒤통수를 내려쳤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저는 동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습니다. 뭔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뭉쳐서 내 머리를 계속 쥐어박았습니다.

  모든 일정이 끝난 후, 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저는 한 없이 한 없이 울었습니다. 이제는 언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언니한테도, 엄마한테도 지금에야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매사를 삐딱하게만 보아왔던 나 자신을 후회하게 되었는데, 더 노력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들은 떠나버렸습니다. 엄마로부터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해, 앞으로 저도 좋은 딸이 되고 싶었는데 모두가 다 허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 근데 이게 웬 말입니까?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한 권의 노트····. ’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언니의 넋두리가 온통 뾰쪽뾰쪽한 바늘이 되어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댔습니다. 가슴팍에 맺힌 핏방울들이 배어들어 온몸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손이 떨려서 노트 장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환각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쓴 글들이었습니다. 죽고 싶다는 말이 페이지마다 나열되었고, 이제는 구제불능이야 하고 자학하는 구절들이 군데군데 진을 치고 있었어요.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언니는 결국 마약에까지 손을 댔고,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떤 땐 또 지극히 정상이었고요. 아, 나는 영원히 좋은 딸, 최고의 딸이 돼야 하는데, 이제는 다 글렀다는 말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어요. 무지개는 사라지고 언니는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는 언니의 독백····. 도저히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어 저는 허리를 꺾고 그 자리에 엎드려 엉엉 울었습니다.    
  다시 노트 장을 넘기던 저는 맨 마지막 장에서 그만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말짱한 정신으로 쓴 것이 분명했습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를 어쩌지? 도무지 대책이 없다. 졸업을 하는 척하고 그냥 가운을 빌려 입고 쇼를 할까? 차라리 교통사고라도 나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한테 대해 실망은 않을 것 아냐. 어마마, 미쳤어 내가 미쳤어. 내가 죽으면 되지 왜 그런 끔찍한 생각을? 아니지, 내가 죽으면 안 돼. 그 뒷감당을 어찌하라고. 부모님한테는 이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거야. 그럼 어떡하지? 졸업식에 오신다고 지금부터 야단인데 큰일 났어. 정말 큰일이야. 다 들통이 날 텐데 말이야.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못 오시게 해야 돼. 무슨 좋은 거짓말이 없을까? 나를 하늘같이 믿고 있는 부모님을 절대로 실망시킬 수는 없어. 부모님께는 영원히 좋은 딸로 남아야 해.

  사건의 실마리가 풀어짐과 동시에, 벼락은 한 번 더 내 정수리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내리쳤습니다. 사후의 세계에서까지 부모님을 걱정하는 언니····. 아! 그렇다면?
   ‘그리고, 그리고, 세상에 홀로 고아로 남아야 하는 동생 생각은 조금도 안 했단 말인가?’
  마지막에 나한테 하려다가 안 한 말, “그리고 말야····.” 그다음 말, 그게 바로 동생한테 남기는 유언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쳤습니다.
  아니면 모든 것을 뭉뚱그려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압축하고 마침표를 찍으려 했던 것일까요?
  
  살아도 죽어도 해결이 안 되는 좋은 딸, 언니는 그 좋은 딸로 남아 그렇게 부모님을 동반하고 영원히 가버렸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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