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그 남자

2003.06.29 08:28

김영강 조회 수:649 추천:90

    분명히 그 남자였다. 무심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미희는 화면에 비친 한 남자의 얼굴에 시선이 끌렸다.
    이곳 LA.의 한국방송에서 병원선전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새로 설립된 메디컬그룹 의사들에 그가 끼어 있었다. 옛날보다는 좀 살이 붙은 듯했으나 그 남자임에 틀림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생각해본 적 없이 정말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신기하게도 옛날의 그 모습이 뚜렷이 떠올라 그를 금세 알아봤다.
    그 남자는 신경정신과 의사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거의 매일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치는 한 남자가 있었다. 키가 훌쩍하니 큰 미남형의 남자였다. 옷을 단정하게 입고 A의대 배지를 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의젓해 학생 같지가 않고 퍽 어른스러워보였다.
  땅딸막한 남자들이 많았던 그 당시에 훤칠한 그의 모습이 미희 눈에 뜨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대체로 그는 미희보다 늘 먼저 와 정류장에 서 있다가 그녀가 나타나면 버스에 몸을 싣곤 했다.
    혹시 저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미희는 부리나케 그의 뒤를 따라 버스에 올랐었다. 안 보는 척하면서도 그녀의 신경은 온통 그를 향해 팽팽하게 곤두섰고, 그의 시선이 자기에게로만 꽂혀 있는 것 같아 부동자세로 꼼짝 않고 서 있다보면 온 몸에 쥐가 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녀에게 한마디 말도 걸어온 적이 없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빽빽한 버스 속에서 그 남자와 서로 몸을 부대낄 때도 있었으나 그는 미희의 존재를 의식도 못하는 듯, 창밖만 묵묵히 내다보며 천장의 손잡이를 꽉 잡고 나무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를 위해 좁은 공간이나마 배려를 해주는 그런 일도 전혀 없었다. 옆에 섰던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어 사람들 속을 비집고 그 남자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몸을 피하곤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그가 안 보일 때는 그를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다. 일찌감치 일어났고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도 길어졌다. 둘째 시간부터 강의가 있는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정류장으로 향했다.
    대학 입학 후부터 미팅이다 뭐다 하여 남자들을 만날 기회가 더러 있었고, 그녀 곁에서 서성거리는 남자들도 많았었다. 또 적극성을 띠고 달려드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미희는 눈 하나 까닥 않고 공부에만 열중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남자를 몇번 본 다음부터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야릇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것이었다.
    한마디 말도 안 해본 생판 모르는 남자인데 겉모습만 보고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런 감정이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일까?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느니, 부모를 버리느니, 또 왕관을 버리느니 하는 것을 미친 짓으로 단정했었고, 또한 첫눈에 반한다는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일축해 버린 미희였다.
  지금 미희 자신이 끈끈한 감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친 짓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미희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 자신의 감정을 삭히려고 애쓰면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리라 믿었지만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고 날이 갈수록 그 남자의 비중은 커져만 갔다. 가슴속의 불빛을 그를 향해 밝혀놓고 얼마나 많은 밤을 잠못 이루고 뒤척거렸는지 모른다.
    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거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 상상의 나래는 밤새도록 온 하늘을 나르며 접힐 줄을 몰랐다. 그가 꼭 껴안아주는 장면까지 연출을 하고 나면, 미희는 그만 토할 길 없는 시커먼 돌멩이 하나를 삼켜버린 듯한 무거움에 가슴이 짓눌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남자가 보이지 않아 한동안 기다리다가 이제 그만 다음 버스를 타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있는데 택시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추었다. 이미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뒷좌석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마침 시간도 급해 학교 앞까지 합승을 한다기에 반가워서 얼른 택시에 올랐다.
    그런데 바로 그 남자가 미희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으면서 까마득한 벼랑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쿵쿵 쿵쿵 하고 가슴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려왔다.
    마음과는 반대 방향인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되도록이면 그와 떨어져 앉으려고 문짝까지 엉덩이를 바짝 당기며 몸을 오그렸다. 갑자기 그의 숨소리가 옆구리를 통해 들려왔다. 건드리면 툭 터져버릴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전신을 휩싸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을 떨며 숨소리를 죽이는데, 그 소리는 몸속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되어 핏줄을 타고 마구 돌아다녔다. 그를 향한 뒷목덜미가 뜨끈뜨끈해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그냥 중간에서 뛰어 내리고 싶었다. 그는 미희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채 계속 책을 읽고 있었다.
    사십 분 정도 달려온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긴 여정이었다. 택시 안을 벗어나니 정말 살 것 같았다.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해방되어 천당에 온 기분이었다.

    택시는 질식할 듯한 침묵의 무게에 눌려 비틀거리며 달렸다. 갑자기 요란한 진동 소리와 함께 미희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산더미만한 추럭이 뒤에서 택시를 들이받은 것이다. 시커먼 절벽의 아가리가 그 남자와 미희를 집어 삼켜버렸다. 밑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 남자는 피를 흘리고 있는 미희를 꼭 껴안고 있었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그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깊은 물 속처럼 차분하고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미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르며 온 천하를 다 얻은 듯한 행복감에 전신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일어나 앉으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그 남자는 얼른 미희의 상체를 안다시피 하면서 그냥 누워있으라고 만류했다. 온몸이 감전된 듯 찌르르 전류가 흘렀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후끈한 덩어리를 겨우 삼켰다. 가슴이 뛰었다. 그와의 끈이 드디어 연결된 것이다.
    "이제 정신이 드세요? 많이 다치지는 않았으니까 오늘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미희의 귀를 간지럽혔다. 온몸이 오싹오싹 오그라들며 안으로 도르르 말리고 있었다. 그녀도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근데, 괜찮으세요? 다친 데 없으세요?"
    "기적이 일어난 거죠. 저는 이렇게 말짱해요."
    그 남자는 일어서더니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서 있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순간, 심한 열등감이 바람처럼 휘몰아치며 그녀를 덮쳤다.
    꿈이었다. 허무했다.

    그 남자와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한 채 미희는 졸업을 했다. 이제는 매일 그 시간에 버스를 타야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허나, 발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류장을 향하곤 했다. 미친 짓이라고 자신을 수없이 채찍질하면서도 그 버릇을 고칠 수가 없었다. 아무에게도 내색을 못한 채 가슴의 갈피에 말못할 사연을 간직하고 그녀는 앓고 있었다.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며 얻은 결론은 서울을 떠나는 것이었는데 마침 그때 운좋게도 대전에 있는 어느 여학교로 교사발령이 났다. 바로, 대전으로 이사를 한 후 수학선생으로 일에 전념하면서 학생들과 더불어 사는 보람을 느끼기 시작하니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차츰차츰 정리가 되어갔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시려오던 그 남자의 모습이, 마치 오래되어 빛바랜 소설책 속의 주인공처럼 담담하게 떠오르게 되기까지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또한 그 가슴앓이가 이성을 향해 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부끄럽게만 여겨져 혹시 누구에게라도 들킬까봐 꽁꽁 싸매놓았던 그 비밀 보따리를 이제는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추억을 가져본 것이 인생의 좋은 경험 같기도 했다.
    주체할 수조차 없는 애절한 마음을 간직하고도 눈 한번 제대로 못 맞춘 채, 그 남자가 다가와 주기만을 수없이 상상하며 애를 태운 자신이 바보 같아 쓴웃음이 일기도 했다.
    언젠가, 한 남자가 버스간에서 따라내려 뒤를 좇아온 적이 있었다. 어색해 하며 겨우 말을 붙이는 그를 미희는 차가운 눈초리로 무시했다. 만일 그 남자가 접근했다 하더라도 어떤 태도를 취했을는지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후,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정말 우연하게도 미희는 그 남자를 텔레비전에서 본 것이다. 이상하리 만치 담담한 기분으로 미희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스쳤다. 역시 의사인 그녀의 남편도 곁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마, 저 의사 내가 아는 사람인데, 옛날에 맨날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던 사람이에요.
    이렇게 남편에게 스스럼없이 그 남자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건만 왠지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딴청을 부리며 하나마나한 말을 꺼냈다.
    "올림픽 가에 또 한국병원이 생겼네."
    어릴 때 미국에 와 미국사람들 속에서만 살아온 남편은 한국사회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부모님의 철저한 가정교육에 의해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에서 근무한 적도 있지만 한국사람들과는 연관 없이 지내고 또 관심도 두지 않는다. 미희는 그 남자를 염두에 두고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 저 중에서 아는 의사 없어요?"
  남편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조덕팔이었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해 입을 꼭 다물고 겨우 참았다. 생김새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이름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 몰래 그 남자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 자신이 가소로웠기 때문이다.
    그 병원 선전은 텔레비전을 타고 매일 흘러나왔고 신문에도 그 남자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경력도 거창했다. A의대 졸업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한데 '1980년 도미'라는 글귀에서 그와는 이상한 인연이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그 해에 미국엘 왔기 때문이다.

    그 병원에 한번 가볼까 말까 하고 며칠을 망설이다가 한번은 꼭 만나봐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며칠 후, 그녀는 꽤 오랫동안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자연스러운 화장으로 이십대의 모습을 살리려고 하니 더 시간이 걸렸다. 보통 땐 좀 짙은 화장을 하는 그녀인지라 립스틱을 두 번이나 지우고 다시 연하게 칠했다. 옷은 약간 화려한 것으로 골라 입었다. 까만 바탕에 노오란 꽃무늬가 있는 실크 원피스다. 목 부분이 약간 패여 그녀의 하얗고 긴 목덜미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옷이다. 핸드백과 구두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까만 가죽에 노란 장식이 진짜 골드를 연상케 하는 아주 고급스러운 것을 골라 옷과 조화를 시켰다.
    신경정신과에 갈만한 별 증상이 없는 미희는 병명을 만들어 불안, 초조, 등등 우울증 증세를 갖다 붙였다.
    사실 요즘은 괜히 허전해 허무한 생각이 들 때가 있기도 하다.
    종합병원이라고 거창하게 선전을 한 것에 비해선, 자그마한 이층 건물에 파킹장도 그리 넓지가 않았다. 새로 단장한 건물이라 바깥 모양은 산뜻했으나 그의 병원 대기실은 실내장식이 아직 덜됐는지 밝은 분위기로 환자의 마음을 안정시켜줘야 할 정신과 대기실 같지가 않았다. 기다리는 환자도 아무도 없었다. 폐교를 해버린 텅빈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선 듯한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미희의 모습이 실내 분위기와는 너무 대조적이어 눈에 확 뜨인 탓인지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맞이했다.
    그 남자는 몸이 조금 불은 듯했으나 크게 변한 곳은 없었다. 옛날의 그 미남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제는 그저그런 중년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미희는 옛날의 그 남자가 아닌 완전히 딴 남자를 보는 기분이라 그녀 자신도 좀 놀랐다. 그것은 그 남자가 변한 것이 아니라 미희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남자 때문에 그렇게도 가슴을 앓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니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문득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남편이 여자 관계로 속을 썩여, 한국에 나간 김에 반발심으로 옛날 애인을 수소문해 만나고는 그 소감을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해 다들 깔깔대고 웃은 적이 있다. 옛날 인상은 완전히 강 건너 가고 배가 불쑥 나오고 대머리가 훌렁 까진, 거기다가 머리까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나타났기에 너무나 실망을 해, 두어 마디 말을 나누고는 바쁘다면서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다. 매력적이었던 예전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편이 속 썩일 때마다 가끔 꺼내보며 즐기기나 할걸 괜히 만났다면서 후회가 막심하다는 것이었다.
    미희는 자꾸 실실 웃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면서 그 남자도 따라 웃었다.
    한 때, 바라만 보며 가슴을 태우던 남자를 이십여년 만에 이렇게 마주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다.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남자로부터 미희가 꼭 들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습니다. 대학 다닐 때 혹시 신당동 살지 않았습니까? 버스 정류장에서 자주 만났던 것 같은데...., 맞죠?
    꼭 이렇게 물으리라 생각을 하고, 신당동에 살기는 했으나 전혀 본 적이 없다고 딱 잡아 뗄 판이었다. 봤을 지는 모르지만 세월에 씻겨 아마 기억에 없나 보다고 조금은 여운을 남길 참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미희를 생판 처음 보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몇 달 동안이나 거의 매일 만났는데 이렇게 몰라볼 수가? 내가 그렇게도 변했나? 내가 제일 변하지 않아 학교 때 모습 그대로라고 다들 그러는데...
    더구나 미희는 어디다 갖다놔도 눈에 뜨이는 날씬하고 예쁜 여대생이 아니였던가?
    사실 미희는 마흔이 넘었으나 이십대의 날씬한 몸매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얼굴도 옛날 그대로 미인이고 거기다가 성숙미까지 곁들여져 지금은 더 세련되고 아름답다.
    나를 몰라보다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헤어스타일이 너무 달라져서 그런가 하고 위로를 하는데 불현듯 B대 남학생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몰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희가 그 남자로 인해 가슴을 앓고 있던 무렵이었다.
    B대에 다니고 있는 정자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같은 과에 있는 남학생을 미희에게 소개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남학생은 미희를 안다면서 만나보면 미희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내용인즉, 그는 버스 정류장에서 자주 미희를 봤다고 한다. 이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계속 지켜보면서도 그녀에게서는 항상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어 말도 한번 못 붙이고 몸살을 앓았단다. 지금은 이사를 해 멀리 살고 있는데도 가끔씩은 신당동 정류장으로 가 미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고 했다. 혹시나 미희를 보게 될까 하고 이발을 하러 일부러 그 먼 곳을 찾아간다고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정자는 그 남학생의 인생상담을 듣게 되었는데, 듣고 보니 그 장본인이 바로 미희였다는 것이다. 그를 만났으나 미희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초면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씁쓸했다. 자신의 모습이 그 남자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소리 없이 실실 흘리던 웃음이 갑자기 밖으로 터져나오려고 했다. 소리를 내어 막 웃고 싶었다. 입을 꼭 다물고 참고 있자니 숨까지 막히는 듯 했다. 큰 소리로 한바탕 웃어버렸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지더니 소리가 치밀면서 입술을 박차고 나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녀는 그만 깔깔대고 말았다. 큰 소리로 하늘 높이 웃어 제겼다. 가슴의 갈피 사이에 끼여 보이지 않던 먼지들까지도 훌훌 날아서 그에게로 다 묻어갔다.
    "죄송해요. 자꾸 웃어서..., 실은 어제 친구한테서 너무 우스운 얘기를 들었거든요."
    미희는 며칠 전에 들은 정말 배꼽 잡았던 외설스런 이야기에 핑계를 댔다.
    "그래요? 무슨 얘기인지 저도 한번 들어봅시다. 웃는 것이 우는 거보다야 훨씬 낫잖아요?"
    아, 이 남자가 나를 정신병자 취급을 하고 이야기를 유도하고 있구나. 정신병원에 왔으니 오늘 하루만 미친 여자가 되자. 앞으로 다시 볼일도 없는데 뭐 어때?
  그 남자의 눈에 완전히 미친 여자로 비치고 있을 자신을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나왔다. 미희는 미친 척하고 그 외설스런 얘기를 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차마 그렇게까지 미친 여자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녜요 그 얘기는 선생님한테 할 수 없어요. 여자들끼리 하는 그런 얘기니까요."
    "그래요? 그래도 듣고 싶은데요."
    그는 미소를 띠고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거 증상이 심상치 않은데...  분명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옛날에는 감히 마주볼 수도 없었던 그의 눈에 미희는 그녀의 눈빛을 꽂았다. 그리고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을 거꾸로 그에게 한번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만 두기로 했다. 기억도 못하는 사람을 아는 척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기억이 없다고 하다가, 본 것도 같은데 세월이 너무 흘러 잘 기억이 안 난다는, 그녀가 준비한 대답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혹시 낯이 익다는 말을 할지도 모르니 희망을 갖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선생님 요즘 제가 좀 이상해요. 자다가 깜짝깜짝 놀라고 어떤 땐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훌러덩 굴러떨어지면서 온몸의 알맹이가 다 빠져 나가버리는 듯해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사실 그럴 때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전화벨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고 괜히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래요. 자꾸 허무해요."
    "뭐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뭐 걱정되는 일은 없는데..., 글쎄요.... 남편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
    그 남자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이 잠자코 있었다. 미희는 처음부터 말이 막히고 말았다.
    문득 한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가만히 보아하니 이 남자의 입에서 낯이 익다는 말도 나오기는 글렀었다. 그는 분명 초면의 여자를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희는 이십년 전의 그 남자,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남편으로 둔갑시켰다.
    그렇게 하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허무한 마음의 병명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딱 들어맞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 얘기부터 시작할게요. 실은 요,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저 혼자서만 짝사랑을 했거든요. 학교 다닐 때 버스 정류장에서 자주 마주쳐 알게 되었는데, 제가 너무너무 속을 많이 태웠었어요."
    미희는 혹시 무슨 표정의 변화라도 있나 싶어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으나 그는 덤덤하게 듣고 있을 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바늘끝만한 변화라도 잡아내려고 계속 살폈으나 허사였다.
    그는 미희의 강렬한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잔잔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미쳤나 하고 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또 웃음이 터지는 것을 입술을 꼭 다물며 겨우 참았다.
    "몇 달을 거의 매일같이 마주쳤는데 남편은 계속 모른 체하며 말도 한번 안 부쳤어요. 그런데 하루는 합승택시에 같이 탔는데 바로 남편 곁에 제가 앉게 되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계속 책만 읽으며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그녀는 다시 한번 그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미희는 그만 아차 했다. 혹시 실오라기 같은 기억이라도 남아있을까 봐 겁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이왕 미친 여자가 됐으니 니가 알아차리더라도 나는 아니라고 잡아떼면 된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또 택시 합승하는 사람들도 허다하니까.
    무슨 반응이 있나 하고 그녀는 그의 표정을 다시금 살폈다. 아무런 반응은 없었으나 진지한 얼굴로 그는 이야기를 계속 하라고 했다.
    "그랬는데 공교롭게도 교통사고가 났지 뭐예요."
    미희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 이야기를 잘도 꾸며대고 있었다.
    "뒤에서 큰 추럭이 택시를 들이받았었어요."
    꿈 이야기이니 그 남자가 기억을 되살릴 일도 없을 터라, 거기다가 살을 부쳤다. 자신이 생각해도 근사한 스토리 같아 미희는 무슨 연속극 작가나 된 것 같은 우쭐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말도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으니까, 하느님이 도와주셨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같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어요. 한 한달 가량이나 병원신세를 졌는데도 그는 저한테 별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저 역시 관심이 없는 척했는데, 어머님들이 문병을 왔다가 만나, 며느릿감 사윗감으로 딱 마음에 들어 갖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 때 남편은 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구요. 이십 년 이상을 살아오면서도 늘 그런 생각이 떠나지를 않고 또 남편이 나를 버릴까봐 자꾸 불안해요."
    계속 혼자만 떠들었기에 그 남자의 말을 듣고 싶어 잠깐 침묵했으나 그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첫째 임무라고 하니, 또 계속 지껄였다.
    "결혼을 하고 보니까, 그렇게 멋있던 남편이 아주 딴 사람으로 제 눈에 비쳤어요. 내가 저런 사람을 뭐 볼 게 있다고 그토록 마음을 조렸나 생각하니 참 허무하더라구요. 깜박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말을 해놓고 보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은 정신이 왔다갔다하는 여자가 되어있으니 이랬다 저랬다 해도 괜찮으리라고 위로를 했다.
    너는 모르지? 지금 내가 바로 너한테 하는 소리야.
    자기를 대놓고 하는 말인지는 꿈에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재미가 났다.
    "제 눈에 씌었던 꺼풀들이 슬슬 벗겨진 모양이죠?"
    갑자기 그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결혼 전에 아내가 혼자서 자기를 짝사랑한 사실을 남편이 알고 있습니까?"
    미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이다가 시침을 뚝 따고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그에게 하는 말이다.
    "아뇨. 통 몰라요. 제가 얘길 안했으니까요."
    그는 대답은 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정확한 진단이 나와 무슨 처방을 내린 그런 얼굴이었다. 갑자기 장난기가 동해 그를 골려주고 싶었다.
    "실은 요, 남편은 굉장히 바쁜 사람이거든요. 회사 일 때문에 출장이 잦아 저랑 같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인지 부부간의 대화가 끊긴 것 같아 더 허무해요."
    그녀는 남편을 사업가로 변신을 시키면서 그에게 눈빛을 남기는 척했다. 그의 표정은 목석같이 덤덤했다. 각본에 없는 즉흥연기를 하면서 남편에게 좀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을 만났을 때, 미희는 그 남자를 향해 느꼈던 그런 감정은 손톱만치도 없었다. 그냥 믿음직스러웠고 같이 있으면 항상 편안했다.
    그때, 남편은 서울에 있는 S종합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의사로 미국 시민권자였다. 곧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미국으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집안끼리 안면이 있는 그의 이모가 귀찮을 정도로 어머니를 졸랐다. 의사라고 하기에 미희는 자신의 팔자엔 의사와 무슨 인연이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십 년이나 되는 나이차와 미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어머니가 거절을 했으나, 그의 이모는 포기하지 않고 그냥 한번 보기만 하라고 사정을 해, 대전까지 내려온 남편을 미희는 처음 만났다. 남편은 평생을 찾아 헤맨 배필을 만난 듯이 맞선을 본 그 다음 날부터 거의 매일 대전까지 미희를 보러왔었다. 그 몇달 후에 그녀는 결혼을 하고 바로 미국엘 왔으며 지금까지 별 불만 없이 잘 살아왔다.
    국정교과서 같은 삶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온 것이다.
    사실 그녀는 공부를 계속하여 직장을 갖고 싶었지만, 결혼하자마자 아들 셋을 연년생으로 낳아 그럴 엄두도 내질 못했다. 애들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이제 애들도 다 대학생이 되어 동부로 떠났다. 머리 좋은 아이들이 셋다 어린 나이에 명문대에 조기입학을 해 너무 일찍 엄마 품을 떠나버려 그녀가 더 허전함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거리들이 손에서 다 떠나버린 듯해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남편이 차츰차츰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어가면서부터 그가 너무 아내와 같이 할 시간이 없었기에 더 허전했다. 남편이 너무 먼 곳에 있는 것 같아 바라만 보기에도 아득했다. 무료한 나날이었다. 뭔가 변화를 갖고 싶었다. 반짝 하고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그리웠다. 그러던 중에 미희는 텔레비전에서 또 신문에서 그 남자를 본 것이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마디 대꾸도 없이 저렇게 무덤덤하게 목석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사십 대의 화려한 여자가 의사를 보자마자 웃음으로 꼬리를 흔들지 않았는가? 또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며 무한한 가능성을 미끼로 던지고 있지 않은가?.
    처음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사건이 진행되고 있어 그녀도 좀 황당했다. 그러나 그가 정신에 이상이 있는 여자가 의사를 유혹한다고 생각할 것이니까 상관 않기로 했다.
    한데, 혹시 이 다음에 남편과 함께 어디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어 좀 불안하기도 했다. 이 남자가 아는 체를 하고 자기를 훑어보며 말을 거는 상상을 하니 온몸이 오싹했다. 남편이 그 남자와 그녀 자신을 번갈아 보며 의아해 할 표정을 떠올리니 더 불안해지며 세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했다. 어서 이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의사로서 무슨 말을 할만도 하건만 그는 미희의 기록 카드를 들여다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이 남자가 처음부터 나를 알아본 것이 아닐까? 정신과 의사이니 환자의 상태를 책엎하려고 잠자코 내 이야기만 들은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고소한 마음으로 그 남자를 갖고 놀았는데 갑자기 그 침묵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러 더럭 겁이 났다. 이 남자에게서 단단히 망신을 당할 것 같고, 남편과 아이들한테도 다 발각이 되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될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두근해지며 불안한 마음에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해 무슨 말이든지 해, 침묵을 깨고 싶어 별 생각 없이 한 마디를 한 것이 또 옛날 그 얘기였다.
    "선생님, 말도 한마디 못해본 사람을 먼발치에서만 보고, 그 사람 생각 때문이 밤잠을 못 이루는 것도 일종의 병이 아닌가요?"
    고개를 들고 미희를 쳐다보면서 드디어 그 남자가 입을 열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곧 일어나야겠다던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실은 저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여학생을 좋아한 적이 있습니다. 말도 한마디 못 걸어보고 저 혼자 짝사랑으로 끝났지만요."
    미희는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나를 두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바짝 호기심이 동해 왜 말도 한마디 못 걸어 봤느냐고 묻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미희의 심중을 읽기나 한 듯 그 남자는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그 여학생이 어찌나 차가운지 도저히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제가 발을 디딜만한 빈틈이 조금도 안 보였어요. 다 제 못난 성격 탓이었겠지요. 그런데 그 여학생과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었는데, 그만..."
    그 남자의 다음 말이 궁금해 귀를 쫑긋 세우는데 세 아들의 얼굴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한번은 집엘 가는 길이었는데 뜻밖에 그 여학생이 버스에 오르지 않겠어요. 항상 등교길에서만 만났지 집에 갈 때 마주친 적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한번 걸어 보리라 생각하고 어떻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하고 골똘히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내릴 곳까지 다 와 버렸었어요."
    미희 역시 그랬다. 늘 등교길에서만 그를 만났었다.
    "선생님, 정말 바보시네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용기가 없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때가 미국 오기 이년 전쯤이었으니까, 이미 제 나이가 서른이 넘었을 때였어요. 그러니까 더 멋쩍어서 용기를 못 냈나 봅니다."
    미희는 재빨리 계산을 했다. 1980년에 도미했으니..., 시기가 딱 들어맞았다. 그녀가 가슴을 앓던 바로 그 해였다.
    그때 벌써 서른이 넘었었단 말인가?
    사실 그 당시에도 그는 대학생이라기보다는 좀 아저씨 같은 인상을 주긴 했다. 그렇다면 남편과 비슷한 나이일 텐데 그가 훨씬 더 늙어보였다.
    아들들 생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미희는 계속 질문을 던지며 그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여학생 뒤를 멀찍암치서 따라갔어요. 그런데 저보다 한 발 빠른 남자가 있었어요. 어깨가 떡 벌어진 거구의 사나이가 그 여학생을 바짝 좇고 있었어요. 그리고 어느새 나란히 같이 걸으며 말을 걸고 있었어요."
    미희는 흥미 있게 듣고 있다가, 언젠가 뒤를 쫓아온 적이 있는 남자를 얼른 머리에 그려봤다. 덩치가 큰지 어떤지는 통 생각이 안 났다.
    "전 그냥 그들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다가 포기하고 돌아서버렸어요. 다음 기회로 미루었죠. 아니 내일 은 꼭 말이라도 걸어봐야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었어요. 그런데 다음날부터는 그 여학생을 볼 수가 없었어요. 정류장에서 매일매일 기다렸으나 나타나지를 않았어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날 몰래 따라가서 집이라도 알아둘 걸 하고 후회 막심하더라구요. 한동안은 절실한 마음이 들어 동네를 훑고 다니기도 하고, 그 여학생이 다니는 학교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지만 다 허사였어요."
    미희는 그 여학생이 어느 학교에 다녔는지 물어보려다 그만뒀다.
    "그 후부터 제가 미국에 올 때까지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어요."
    정말 이상하게도 그 시기는 미희가 대전에 있었던 바로 그 즈음이었다.
    "까맣게 잊은 줄 알았는데 미세스 박 얘기를 들으니 저도 옛날 생각이 나네요. 좋은 남자 만나 지금쯤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죠. 아이들도 한 두셋은 딸렸을 거구요."
    그 남자가 씩 웃으며 미희를 바라보는데 그녀는 꼭 자기를 두고 하는 소리 같아 그 시선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슬슬 불안이 엄습해오며 이제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서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장성한 세 아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막내가 동부로 떠나기 바로 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머릿속을 꽉 메웠다. 문을 들어서면 바로 눈에 띄게 벽 중앙에 걸어놓은 커다란 가족사진.., 마흔을 넘어 중년여인이 되어버린 미희 자신이 중앙에 앉아있고, 양옆에서 또 뒤에서 남편과 세 아들이 환히 웃으며 그녀를 호위하고 있는 사진이다. 아들들이 보고 싶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다. 바라만 보아도 흐뭇했다.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남편의 눈길에서 사랑의 물결이 그녀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남편이 그녀에게서 멀리 있은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남편에게서 멀리 있었다는 깨달음이 언뜻 뇌리를 스쳤다.
    미희가 정신과의사 앞에 앉아 몽땅 거짓말을 신나게 늘어놓고 있는 사실을 남편이 안다면 그녀를 정말로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미희도 자신이 어째 정상이 아닌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미치지 않고서야 도무지 그럴 수 없는 미희다.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며 벌레들이 온몸에 기어다니는 듯해 살갗이 스물스물했다.
    갑자기 그 남자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탕 하고 얹어놓으면서 아주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미희는 깜짝 놀라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는 충격을 느껴 몸을 움츠리는데, 이어지는 그 본론에 그녀는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우선 남편되시는 분을 제게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두 분께서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아야 합니다. 미세스 박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남편도 의사를 만나야 합니다. 남편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상황은 그녀가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갈팡질팡하던 그녀는 무거운 둔기로 한 대 꽝 얻어맞고서야 제정신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전 오늘 제가 선생님을 찾아뵌 것도 남편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은데요."
    "그렇게 하면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진짜 병에 걸린 건가요?"
    "그렇습니다. 정신병이라는 것이 왔다갔다하는 아주 고약한 병입니다. 본인이 이렇게 직접 정신과의사를 찾아온 것은 이미 병이 깊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미세스 박의 심리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납니다. 잘못하다가는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살아야 돼요."
    그 남자는 미희를 우울증환자는커녕 완전한 정신병환자로 판정을 내렸다.
    서둘러 병원 문을 나서는데 그 남자가 따라 나오는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 다음에는 남편과 꼭 같이 와야된다고 그녀의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미희는 재빨리 차머리를 돌렸다.
    괜히 그 남자를 찾아갔구나.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 남자 앞에서 소설을 써가며 연극을 한 것은 정말 미친 짓이었다.
    행복 속에 빠져 있으면서 그것이 행복인 줄 모르고 무료하고 허전해 몸을 뒤튼 자신이 한심했다. 얼마나 할일이 많은 세상인데, 쓸데없는 일에 정신을 판 자신이 부끄러웠다.
    빨간 불에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고 나니 등허리가 오싹하고 진땀이 다 났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다가 이제야 제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혹시 그 남자가 치료를 핑계삼아 전화라도 걸면 어쩌나 하고 스산한 불안감이 강하게 밀어닥쳤다. 기록카드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긴 것이 후회막심했다. 모든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면 어떻하나 하는 걱정이 온몸을 휩싸며 운전대를 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설마 이혼하자 그러지는 않겠지. 그래도 애들은 날 버리지 않을 거야.
    우울증환자 흉내를 내려다가 미희는 그만, 진짜 우울증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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