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욕망의 유산 최종 수정

2003.11.22 04:24

김영강 조회 수:810 추천:116

  요즈음은 가끔 아내가 불쌍한 생각이 든다. 아내와 함께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늘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팔자 좋은 여자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주름진 목덜미를 보는 순간 그 속에 잠긴 깊은 슬픔의 그림자를 보았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경민은 생전 처음으로 장미 꽃바구니를 집으로 보냈다. 당신이 꽃 보냈느냐며  놀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데 경민은 그렇다는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여기 당신 이름 쓰여 있는데····. 혹시 다른 사람이 당신 이름으로 보낸 거 아녜요? 케티가 보냈나?”
  케티는 아내에게 삶의 등불인 외동딸이다. 그제야 경민은 멋쩍은 목소리로 자신이 보냈다고 대답했다.    한데 그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좋아하기는커녕 불안한 목소리로 웬일이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다.
  “나한테 뭐 특별히 할 얘기라도 있어요? 평생 안하던 짓을 하니까 이상해서 그러죠. 설마 이혼하자는 건 아니겠죠. 괜히 겁나네.”
  경민은 어이가 없어 별 소릴 다 한다는 말로 대꾸를 한 후, 일찍 들어갈 테니까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자면서 전화를 끊었다.  
  
  식당에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아내는 편치가 않은 기색이다. 장미꽃 때문에 그렇게 불안하냐고 경민은 싱긋이 웃으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녜요. 그동안 묵은 한이 다 풀렸는걸요. 실은 케티한테서 소식이 없어 좀 걱정이 돼요.”
  그러고 보니 케티한테서 아직 소식이 없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케티는 매사에 엄마를 끔찍이 위하며, 또 그들은 친구처럼 친한 사이다. 그러나 아버지인 경민에게는 아득히 먼 곳에 서 있는 딸이기에 케티 생각을 하면 늘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다. 예전에는 별 느낌 없이 지나쳤던 사실이 요즘 들어 그를 허전하게 만들고, 어깨에 힘이 쑥 빠지면서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심정이 드는 것이다.
  아내가 케티에게 서너 번이나 전화를 했으나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케티는 대학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졸업하고,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경민은 항상 아내로부터 딸 소식을 듣고 있으며, 스티브라는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최근에 들었다. 말이 없고 무심한 남편이지만 아내는 딸에 대한 일들을 아주 상세하게 보고를 한다. 또한 주위에서 일어나는 얘기도 곧잘 한다.
  “지난번에 갔을 때, 뭐가 잘 안 되는 것 같았어요. 스티브가 여자들한테 너무 인기라 케티가 속이 많이 상한가 보던데, 깨지기라도 했나?”
  “깨졌으면 잘됐지 뭐. 여자관계 복잡한 애는 안 돼.”
  “누가 여자관계 복잡하다고 했나요?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있다고 했지. 여자들이 따라도 다 자기 하기 나름 아닌가요?
   아내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경민에게도 결혼 전엔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으나 여자관계가 복잡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사업을 너무 크게 벌여놓아 항상 바쁘고 출장이 잦아 가정에 충실할 수 없는 것이 흠이다. 일에만 몰두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아내는 자신이 반하기나 한 것처럼 스티브에 대한 말을 줄줄 이어갔다. 나이는 케티보다 네 살이 위였다. 아내는 나이도 딱 알맞다면서 천생연분을 만났다고 미리부터 좋아서 야단이었다. 유학생으로 미국서 만나 결혼을 한 부모는 둘 다 의사로 아버지는 외과 전문의이고 어머니는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본인도 의사로 지금 샌프란시스코 의대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만하면 최고 신랑감 아니냐고 아내는 미리부터 좋아서 야단이었다.
  “의사면 최고 신랑감이야?”
   경민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묻었는데도 아내는 케티에게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신의 생일 파티에도 아랑곳없어 보였다. 기분이 씁쓸했다. 괜히 안하던 짓을 한 번 해보려고 한 자신이 우습기까지 했다.  

  경민은 결혼한 후 바로 미국으로 주거지를 옮겨 엘에이 근교 우드랜드힐에 보금자리를 꾸몄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삶의 향기가 온 동네에 서려 있는 곳이었다. 태양의 따스한 손길이 있었고 바람의 싱그러운 속삭임이 있었다.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한 조각의 흰구름은 참으로 여유로웠다. 온통 초록의 잎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뽐내며 서 있는 가로수들, 융단처럼 집 앞을 장식하고 있는 새파란 잔디들을 보면 경민은 활기에 차, 저절로 힘이 솟았다. 더구나 소나무만큼이나 커다란 나무에 꽃망울들이 도란도란 서로를 감싸 안고 한 뭉텅이씩 달려 있는 보라색의 자카란타는 정말 신기했다. 각양각색의 색깔로 나지막하게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들도 너무나 예뻤다.  
  
  그런데 요즘은 모든 것이 다 시들하다.

   귀가하는 차 안에서도 연신 딸한테 전화를 걸더니 거실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아내는 집 전화부터 점검을 했다. 그리고 제로라는 메시지 넘버를 보는 순간, 안절부절못하며 옷도 갈아입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마침 통화가 되었다.
  “그랬구나. 스티브랑 연극 관람 중이었구나. 전화를 안 받기에 난 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걱정했지.”  
  아내는 금세 평안을 되찾은 밝은 목소리로 장미꽃 이야기에서부터 이태리식당에 가서 맛있는 바닷가재를 먹었다고 경민을 한껏 추어주었다.
  케티가 아버지를 바꾸란다면서 아내가 수화기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어쩌다가 경민이 먼저 전화를 받았을 때도 케티는 별말 없이 엄마를 바꾸라고 했었다.  
  “요새 너무 바빠서, 그만 엄마 생일을 깜박 잊어버렸어요. 엄마한테 장미꽃 선물하고, 식사도 같이 하셨다니 너무 기뻐요. 아빠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고마워요 아빠.”
  케티가 지나치게 감격해 경민은 좀 멋쩍었다. 딸한테서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식당에서부터 내내 씁쓸했던 감정이 케티의 말 한마디에 말끔히 가셨다. 그간 아내에게 얼마나 무심했으면 딸한테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딸하고 가까워지려면 아내에게 잘해야겠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나보다 케티가 더 좋아하네. 장미꽃 한 다발에 온 집안에 웃음꽃이 피었어요. 스티브하고는 별일 없대요. 어째 일이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그날 밤, 아내는 곧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스티브도 만나보고 그의 부모도 한 번 만나볼 참이라고 했다. 경민은 장인 장모가 일사천리로 진행시킨 자신의 결혼에 얽힌 일들을 되돌아보며 아내에게 물었다.
  “둘이서 결혼 약속이라도 했대?”
  “아직 그런 말은 없었지만 결혼까지 가도록 추진을 해야죠.”
  “너무 서두를 것 없어. 그쪽 부모는 결혼이 확정된 후에 만나도 돼.”
  “당신, 케티가 지금 몇 살인지 알기나 해요? 서른이에요. 서른. 도대체 결혼할 생각을 안 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좋은 짝 만났을 때 빨리빨리 서둘러야 돼요.”
  “이제 서른인데 뭘 그리 서둘러. 아직 멀었어.”
  “아직 멀었다고요?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아버지라는 사람이 왜 그리 무심하죠? 당신은 그냥 가만히 계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아내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왜, 그 헨콕팍에 사는 오 사장 있죠? 그 집 딸이 드디어 결혼하겠다고 해 경사가 나긴 났는데, 남자 집안이 너무 볼 게 없다는 거예요. 한데 소문을 들으니 이 년이나 동거를 했다고 그래요. 그러니 허락 안 할 수 있겠어요? 딸애가 인물도 좋고 똑똑해 은행장 집에서 탐을 냈거든요. 얼마 전에 미주은행에 새로 취임한 사람, 당신도 알죠? 그 집 아들 변호산데, 하버드 법대 나온 수재래요. 그러니 미세스 오가 얼마나 속이 상했겠어요?”
  아내 성격에 동거를 했다는 사실을 그냥 넘어가버려 조금 의아했는데, 정작 본인은 착실하고 똑똑하며 예의도 바르고 심성도 곱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경민은 또 고개를 갸우뚱했다. 경민은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본인 하나 괜찮으면 됐지 뭘 그리 따지고 그래.”
  언뜻 한 여자의 슬픈 얼굴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본인 하나 괜찮으면 돼? 경민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며칠 후, 아내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텅 빈 집에 들어오니 왠지 쓸쓸하다. 불을 켰다. 고개를 들어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휘황찬란한 빛깔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영롱하게 한알한알 반짝이는 불빛이 눈물처럼 차오르며 집안을 밝혔다. 아내가 구입한 비싼 그림들이랑 조각들이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 집도 곧 처분해야한다. 미련은 조금도 없고 도리어 홀가분한 기분이다. 커다란 액자 하나가 정면으로 경민을 향해 다가왔다. 평상시에는 무심코 지나쳐버린 가족사진이다. 부부에 딸 하나, 너무 단촐하다고 느껴진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럽게 가슴에 닿는다. 가족이란 늘 가까이에서 마주보며 함께 생활하는 사람인지라 흔히 소중함을 잊고 지낼 수도 있다. 경민이 그랬다. 아내와 딸이 곁에 없는 세상을 상상하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리에 누웠으나 경민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 여자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지며 그를 과거의 추억 속으로 이끌어갔다.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까맣게 잊고 살아온 여자다. 케티의 결혼 문제로 아내와 이런저런 얘길 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언뜻언뜻 떠올랐었다.    

  하얀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며 경민의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파도 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 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자신의 노래 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노래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때 그녀는 “어머나 어쩜, 가수보다도 노랠 더 잘 불러요.” 하고 경민의 팔에 매달리며 마냥 행복해했었다. 그와 그녀가 바닷가를 거닐던 연인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는 노랫말 그대로 나 홀로 추억을 더듬고 있는 경민, 그는 추억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다 하여도····.”  

오현아, 경민은 그녀랑 이 년 남짓 사귀었다. 친구들이 하얀 코스모스라고 별명을 붙여준 얼굴이 유난히도 하얗고 예쁜, 가녀린 몸매의 여자였다. 그녀는 어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어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가 온갖 정성을 다해 손녀딸을 키웠으나 그 당시에 치매증세가 있어 경민을 봐도 누군지 알아보질 못했다. 간병인이 스물네 시간 붙어 있었지만 현아는 할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참으로 착한 여자였다. 대학원 재학 중에 만난 그들은 동급생이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현아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았었다. 집에선 되도록 그녀 이야기를 피했고, 눈치 빠른 어머니가 가끔 물을 때는 그냥 친구라고 얼버무렸다. 기회 봐서 부모님을 꼭 설득하리라 생각했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결혼 말은 본인끼리도 오간 적이 없는데, 현아와의 결혼은 절대로 안 되니 더 깊어지기 전에 끝내라고 했다. 그때 이미 경민의 부모는 며느릿감을 정해 놓고 있었다.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김 사장의 딸로, 바로 지금의 아내다. 김 사장은 공직에 있던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경민은 바로 군에 입대를 했고, 남들은 삼 년을 채워야하는 군 복무를 그는 일 년 만에 끝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건장한 남자인 경민이 아버지의 배경에 힘입어 병약 환자로 둔갑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원 재학 중에 김 사장 회사에 스카웃이 되었고, 졸업 후에는 굴지의 기업들이  손을 내밀었으나 그는 김 사장을 선택했다. 아버지의 권유도 한몫을 했었다. 그 즈음의 아내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새내기였다.
  
  어머니가 마련한 자연스러운 자리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고 아내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었다. 현아가 하얀 코스모스라면 아내는 붉은 장미였다. 너무나 조용하고 소극적인 현아에 비해 온몸으로 열기를 내뿜으며 잡아당기는 아내에게 끌렸고 지나치게 사려가 깊은 현아보다는 단순한 아내의 성격이 좋기도 했다. 재잘재잘 말도 잘해 귀엽기도 했다.
  한 번은 현아에게 ‘날 좀 꼭 붙잡아달라고’ 말했으나 그 반응은 냉랭했고,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지도 않아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를 붙잡으려는 기색이 손톱만치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때,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을 경민은 몰랐다.
  
  경민의 발길은 자연히 현아에게서 멀어져갔다. 약속을 어기고도 연락을 안 했으나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흐지부지 소식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한때는 서로 사랑했으나 그들은 ‘잘 있어라, 잘 가라’ 는 말 한마디 없이 헤어졌다. 그냥 지나치다 옷깃을 스친 사람들 모양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제 갈 길을 간 것이다.
  한데, 그 몇 달 후, 어느 날, 그들은 명동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날 밤, 현아는 이상하게도 그녀답지 않게 경민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늘 몸을 도사리며 경민의 애를 태우던 그녀였는데 그날 밤은 달랐다. 현아는 곧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면서 모든 추억들은 한국 땅에 다 버리고 떠날 것이라 했다. 이제 할머니도 돌아가셨으니 한국에는 아무 미련도 없다며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자신이 몰랐다는 사실에 경민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현아는 프랑스에 그냥 눌러앉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전공한 그녀는 워낙에 예술 감각이 뛰어나 대학 재학 중에 이미 국전에서 특선을 했고, 대학원 때에는 파리에서 열린 어느 권위 있는 대회에서도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입상을 해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었다. 지금쯤은 아주 유명한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십 년도 훌쩍 더 넘어버린 세월이 흘렀건만, 그녀의 소식은 바람결에도 들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스티브 칭찬에 여념이 없었다.
  “애가 참 괜찮더라고요. 성격이 서글서글한 게, 예의도 바르고, 미국에서 태어났는데도 어찌나 한국말을  잘하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어요. 케티만큼 잘하더라고요. 키도 크고 어찌나 잘 생겼는지 영화배우 같았어요.”
  미국에서 태어난 케티이지만 아내가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어 그녀는 통역을 할 만큼 한국어에 능통하다. 한창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아내는 사진 한 장을 내놓았다. 스티브의 논문이 어느 학술지에 뽑혀 시상식을 겸한 연회가 있었을 때, 그의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케티도 참석하여 다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둘 다 아주 인상이 좋고 동생들도 무던해 보였다. 그 중에서도 스티브가 인물이 빼어났다. 곁에 선 케티랑 아주 잘 어울렸으며 활짝 웃는 모습이 낯설지가 않고 어디서 본 듯한 친밀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경민은 자신이 스티브의 부모를 부러워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좀 놀랐다. 아들이 셋씩이나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고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결혼한 지 사 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케티를 낳고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다.
  
  케티는 정말 어렵게 태어났다. 아이만 가지면 유산이 되어 아내는 일단 임신을 하면 열 달 동안을 꼼짝 않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화장실을 갈 때는 두 사람이 부축을 하고 살얼음 위를 걷듯이 숨도 죽여야 했다. 장모님이 열 달 내내 아내를 지켰고 일하는 사람도 두 명이나 딸려 있었다. 세 번째 유산이 될 때는 참으로 끔직했다. 뭔가가 물커덩하고 아래로 빠지는 느낌에 얼떨결에 손으로 받쳤는데 이미 생길 건 다 생긴 아기가 미끄러져 나온 것이었다. 고추까지 달려 있었다. 경민은 아이가 없어도 된다고 수차 강조를 했으나, 아내의 집념은 대단했다. 케티를 가졌을 때는 아예 병원에 입원을 했었다.

  경민은 딸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남의 아들을 부러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스티브를 보자 내게도 이런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의아할 정도였다. 이런 감정은 정말 처음이었다.  

  둘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역력히 눈에 보였고, 스티브가 케티 아파트에 자주 들러 한국음식을 즐겨 먹는다면서, 아내는 케티 음식 솜씨가 많이 는 것까지 스티브의 공으로 돌렸다. 스티브 부모 만나는 것은 뒤로 미루었다고 하면서도 아내는 어서 빨리 결혼을 했으면 하고, 케티에게 자주 묻곤 했으나 그 후로는 별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한데, 그 두어 달 후 케티가 휴가를 받아 집엘 왔다. 한 여자애가 끼어들어, 둘이서 다투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아이들 일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결혼은 자기한테 꼭 적합한 남자를 만나 할 테니 아무 걱정 말라고 속상해하는 엄마를 케티가 도리어 위로했다. 그렇다면 스티브는 케티한테 적합한 신랑감이 아니란 말인가?  
  “사귀다가 싸울 수도 있죠. 그러다가 화해하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한 여자가 끼어든 심각한 상태인데도 아내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끼어든 여자애는 의대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케티 말이 여자들이 스티브한테 걸프랜드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꼬리를 친대네요. 그리고 스티브는 그 애들한테 다 잘해주고요. 지난번에는 약속을 어기고도 전화 한 통화 없더니, 한참만에야 그날 너무 바빴다고 그러더래요. 눈치를 보아하니 그 의대생이랑 만나는 것 같다면서 스티브가 맘이 변했다고 눈물을 글썽였어요. 생각해 보니까 스티브가 자기를 좋아한 것 같지도 않대요. 그러면 스티브를 붙들고 자기 맘을 표시하고 따질 것 따지고 할 말을 하고 그래야지, 애가 왜 그리 답답한지 모르겠어요.”
  아내는 딸을 붙들고 누누이 설득을 했다. 속에 있는 말을 다 터놓으라고.

  하지만, 케티는 스티브가 점점 멀어져가는 것이 눈에 선히 보여, 속을 터놓았다가는 더 멀리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자신이 없었다. 사귈 때부터 이런 일로 속을 썩이는 남자, 결혼 후에도 그럴 수 있다. 그녀는 스티브랑 결혼을 하면 평생을 눈물로 세월을 보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맘이 혼란스러웠다. 자신감은 자꾸 없어져 가고····.

  경민은 차라리 깨지는 것이 케티의 장래를 위해서는 다행한 일일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적극적으로 나가 스티브를 붙잡아야 하는데, 도대체 누굴 닮아 맘이 저렇게 약한지 모르겠어요. 내 딸이지만 나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다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아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스티브가 케티 맘을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한 번 스티브를 만나볼까요?”
  경민은 깜짝 놀라 화를 버럭 냈다.
  “미쳤어? 그냥 둘한테 맡겨놓고 가만히 있으라고.”
  불쑥 말을 해놓고는 후회가 되는지  아내는 경민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했다. 케티가 알았다가는 딸과의 사이에도 분명히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금 현아가 눈앞에 떠올라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뜨니, 아내가 경민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사귈 때 말예요. 당신, 얼마나 미직지근했는지 알아요?  
  아내와 남편은 같은 시각에, 같은 시간대의 추억 속으로 되돌아갔으나 둘은 각기 다른 길목에 서 있었다.

  그 마지막 날 밤의 기억이 어젯밤 일같이 눈앞에 펼쳐지며 또다시 그녀가 경민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모두가 다 아름다운 추억들이다. 찻집에 앉아 음악을 들어도, 또 어디엘 가더라도 현아와 같이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찻집의 분위기는 생동감에 가득 찼고, 실내에 흐르는 피아노의 선율은 한없이 명쾌했다. 밤이 되면 그녀를 집으로 보내야만 하는 것이 괴로웠다. 대문 앞까지 와서도 들여보내지 못하고 한참이나 담벼락에 기대서서 그녀를 안고 있었다.
  
  지금은 보고 싶다거나 그립다거나, 그런 감정은 아니고, 뭔가 연기 같은 것이 가슴에 가득 차 있어 숨을 크게 뿜어내도 시원하게 걷히지가 않아 답답한 그런 심정이다.

  언젠가 만날 수 있는 날이 오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꼭 하고 싶다. 결혼 이 년 후에 안 일이다. 어머니가 현아를 만나, 결혼할 여자가 있으니 경민을 단념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날, 무슨 맘이 내켰는지 어머니가 느닷없이 현아 얘길 꺼냈었다. 시집가서 잘 사느냐고. 아내가 두 번째 유산을 한 그 즈음이었다.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있는 현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 모습을 경민은 눈에 본 듯이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다. 마음이 여린 현아가 엄청난 상처를 입었을 것은 뻔한 사실이다.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할 말도 못하는 현아다. 그 답답함이 가끔은 경민을 힘들게 했었다. 경민이 갈팡질팡하며 ‘날 좀 꼭 붙잡아 달라’고 괴로워했을 때도 그를 붙잡지 못한 현아, 암말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 마음속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부모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케티는 울었다. 아내 역시 눈물을 삼키며 딸의 눈치를 살폈다. 케티가 제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땐, 혹시 혼자 울고 있지 않나 하고 문에다 귀를 갖다대고 동정을 살피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부리나케 거실로 도망을 나왔다. 또 스티브랑 통화라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발뒤꿈치를 든 채 고양이 걸음으로 딸 방 주위를 서성이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하루는 케티가 화사하게 차리고 경민의 사무실엘 들렀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나왔다가 그냥 들러본 것이라면서 약간은 멋쩍어했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자마자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아버지한테 너무 무심했다면서 죄송하다는 것이었다. 사업에 바빠 동분서주하는 아버지를 이해 못하고, 어릴 적엔 아빠랑 손잡고 가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워 경민을 많이 원망했다고 한다. 경민도 딸에게 무심했던 지난날을 사과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려워져가고 있는 회사 때문에 어깨가 무거움에 짓눌렸으나 점점 가뿐한 기분이 되었다. 항상 멀게만 느껴졌던 딸이 이제야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아 벅차오르는 기쁨에 콧잔등이 찡했다. 딸이랑 둘이 이렇게 마주 앉았다는 자체가 경민에게는 행복이었다.

  케티는 자연스럽게 스티브에 관한 쪽으로 화제를 이끌어갔다. 스티브와의 관계가 어찌되었던 간에 경민은 딸이 아버지한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 기뻤다.
  “이쯤에서 제가 마음을 접고 정리를 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이 들어요.”
  태연하게 말은 하면서도 케티의 눈에 언뜻 눈물이 비쳤다. 스티브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경민의 머릿속에는 지금 자신의 젊은 시절이 영화필름처럼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케티가 아닌 현아와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던 중, 스티브와 화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단단히 사과를 한 후, 적극성을 띠고 케티에게로 바짝 다가온 것이다. 냉각기를 가지면서 스티브는 자기가 케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케티가 훌쩍 떠나버리고 나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같이 허전했다고 한다. 끼어들었던 의대생 하고도 물론 정리가 되었다. 마음을 접으려고 했던 케티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리움만 더해가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었다. 아내 말대로 전화위복이 되어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둘 사이가 급진전을 했고 또 스티브의 부모도 케티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하루속히 결혼을 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좋아서 야단이었으나 경민은 기분이 떨떠름했다. 정지해 있던 기차가 갑자기 쏜살같이 막 달리고 있어 탈선이라도 할 것 같아 불안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그쪽에선 결혼확정이 다 되었으며, 스티브가 케티 아파트에 매일 들러 저녁을 먹는다는 말을 아내로부터 들었다. 주말엔 아예 같이 지내는 것 같다는 말도 슬쩍 흘렸다. 스티브의 친한 친구 결혼 때에는 하와이에도 같이 가서 며칠을 머물었다고 한다.
  이제 곧 스티브가 인사를 하러 엘에이로 온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스티브보다 한발 먼저 집으로 온 케티가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스티브가 꼭 말씀을 드리라고 해서 얘기하는 건데요····. 이 일로 인해 우리 결혼을 반대하지 마시고 꼭 승낙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반대를 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엄마가 절실히 원한 결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케티 자신이 잘 알고 있잖은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저는 암말 말자고 그랬는데, 스티브가 그랬어요. 부모님을 속이면 안 된다고요.”
  속이다니? 무슨 비밀이 있단 말인가? 아내는 너무 답답해 안달을 했다.
  “실은 스티브 지금 부모님은 친부모가 아니에요. 낳자마자 바로 입양이 됐어요.”
  상상조차 못했던 의외의 말에 무거운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해 기분이 멍해졌다. 어이가 없어 둘이서 얼굴을 마주보는데 케티가 잔잔하게 그 뒷말을 이었다.

  이야기는 삼십 오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곳 미국에서 어떤 한국 여자가 아기를 낳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다. 유학생이었는데, 남편도 죽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 아기는 유복자였다. 상상조차 못한 돌발 사고였다. 병원 측에서도 의사도, 물론 본인도 전혀 예측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죽음은 그렇게도 올 수 있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아기 엄마는 연고자가 아무도 없어 화장으로 처리가 되었다. 담당의사는 아니었으나 마침 그때 스티브 어머니가 그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같은 한국 사람인 까닭인지 그녀는 아기 엄마에게 자꾸 관심이 갔고 항상 혼자였던 외로운 여자였기에 더 마음이 쏠렸었다. 그리고 그 당시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났었지만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었는데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한마음이 되어 눈도 채 뜨기 전에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그 아기를 입양한 것이다.  

   스티브는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언젠가는 꼭 말해주려고 했었는데, 이제 그 때가 된 것 같다면서 어머니가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티브는 모든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진실로 그들에게 고마워했다.

  아내는 그의 착하고 솔직하고 긍정적인 됨됨이를 칭찬하면서 감탄을 했다. 애초부터 스티브한테 홀라당 반해 있던 아내라 아무런 조건도 거슬리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경민은 기분이 매우 찜찜했다. 왠지 경민은 처음부터 그랬다. 낳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니 지금은 더 그렇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돼버렸다. 경민도 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드디어 스티브가 엘에이에 온다고 해 아내는 무척이나 흥분했다. 케티한테 스티브가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가며 며칠 전부터 메뉴를 짜고, 도착하는 날은 온종일 저녁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사내 얼굴이 유난히 하앴다. 한마디로 귀공자 타입이었다. 아내 말대로 미국 태생인데도 어찌나 한국말이 유창한지 놀랄 지경이었다. 존댓말도 완전하게 구사했다. 외모도 빼어나고 말솜씨도 좋아 여자들이 많이 따르게 생긴 건 사실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모녀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세상사는 이야기에 화제의 꽃을 피웠다. 의사 공부 외에도 다방면으로 박식해 말이 잘 통했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처음 만난 자리인데도, 스티브는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태도가 지나치게 사교적인데도 거부감이 일지 않고, 경민 역시 금세 친근감이 생겨 슬슬 스티브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스티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경민은 그가 참 건전하게 잘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의사 노릇을 포기하고 아들 셋과 남편 뒷바라지만 하다가 막내가 대학에 간 다음부터는 어느 자선의료단체에 소속되어 부인들에게 봉사하고 있었다. 경민은 부끄러웠다. 그동안 속세의 욕망에만 집착하며 살아온 것 같아 텅 빈 마음에 허허로운 바람이 일었다. 곧 빈손으로 돌아설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부는 잃었지만 더 귀중한 것을 얻은 기분이라 옴츠렸던 가슴이 활짝 펴지며 따스해졌다. 한없이 치솟기만 하는 욕망 때문에 성공에 다다를수록 목이 말랐던 경민이다. 이제야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음껏 들이킬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스티브가 뜻밖의 말을 했다.
  “참 이상해요. 케티 아버지를 처음 뵙는데도 낯설지가 않고 오래도록 안 사람 같아요.”    
  경민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집에 들어설 때도 처음 보는 사람 같지 않고 눈에 익어 인상이 좋아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혹시 어디서 만난 적이라도 있나 하고 생각을 해봤으나 둘 다 그런 기억은 없기에 서로 마음이 통했나 보다고 그들은 흐뭇해하며 껄껄 웃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활짝 웃는 스티브의 얼굴에 갑자기 한 여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현아다. 현아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매가 현아를 쏙 뺐다. 말이 없고 고요한 성격의 소유자였기는 했지만 소소한 일에도 그녀는 잘 웃었다. 웃을 때가 제일 예뻤다. 활짝 웃는 모습은 뭐라고 형언할 수조차 없는 아름다움으로 경민의 마음속에 스며들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엔 닮은 사람도 허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현아 때문에 요즘 괜히 심란하다 보니 또 그녀가 눈앞에 어른거려서겠지 하고 넘겨버리려고 하는데도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다.

  스티브는 자기가 입양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어갔다.
  “저를 낳은 그분은 아주 착하고 아름다운 여자였었는데 저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스티브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그분이라고 불렀다.    
  “그림을 그리는 분이었는데····.”
  ‘그림’이라는 첫마디에 두근거리던 가슴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현아는 미국이 아닌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 않았는가? 그리고 세상에 그림 그리는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
  “저를 입양한 다음에 그분 지도교수가 어머니께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는데, 굉장히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 앞길이 촉망되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버려 참 아까워했다고 하셨어요.”
  스티브의 말이 계속될수록 사실은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대학교 다닐 때 이미 국전에 특선을 했고 또 파리에서 열린 그림대회에서도 큰상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다음 스티브의 입에서 나온 ‘프랑스’라는 말은 경민을 순식간에 절벽 끝으로 밀어붙였다.  
  “처음엔 프랑스로 유학을 가셨다고 해요. 그런데 프랑스에 가자마자 지도교수가 이곳 엘에이 U.S.C.에 스카웃이 되어 특별 케이스로 그분도 같이 오시게 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친아버지는 분명히 죽었다고 했는데도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낳은 아이일까 하는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현아의 아들이라고 느끼자 바로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며 온몸에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케티보다 네 살이 위라고 했나? 그럼 생년생일은?”
  경민의 질문이 연거푸 터졌다.

  스티브가 뭐라고 말을 하는데 입술 모양만 눈에 들어오고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 안에서 “위이잉” 하는 소리가 갑자기 그를 덮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월이라는 소리는 어렴풋이 들렸다. 명동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마지막 날 밤을 생각했다. 그날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무더운 여름인 것만은 확실했다. 다시 한 번 불길한 생각이 세찬 파도처럼 강하게 밀어닥쳤다.
  
“이상하게도 그분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케티가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전공이 아트인 것도 같고, 어머니 말씀이 케티가 그분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케티랑 둘이 다니면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많이 닮았다면서 진짜 오빠 같다구요.”      
  “진짜 오빠 같다.”라는 소리가 가슴을 후비며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온몸을 휩쌌고, 어느새 그 느낌은 확실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아니 확실했다.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는 것일까? 허구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스티브란 말인가? 아!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스티브가 친어머니에 관해서만 언급을 해, 친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냐고 물었다. 친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고 싶었다. 그래서 현아의 아들은 확실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아니기를 바라는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스티브의 나이로 보아 그가 현아의 아들이면 자신의 아들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또 그녀가 어떤 여자라는 것을 경민이 잘 알기에 아버지가 다른 남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친아버지는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는 별 말씀이 없었습니다. 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분은 바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셨다고 했어요.”
  친아버지라는 말에 경민은 감전이 된 듯 전신이 찌릿찌릿했다. 그렇다. 그때 현아에게 경민은 이미 그녀의 가슴에 묻힌 죽은 사람이었다. 가슴 밑바닥에 구멍이 송송 뚫린 것같이 허전했다. 숨을 쉬어도 허방으로 다 새어버리는 것 같았다. 맥이 탁 풀리며 귀가 멍멍해져 그는 눈을 감았다.
  
  경민이 그녀를 죽였다. 어머니가 현아를 만나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던졌을 때, 그리고 경민이 아내를 택했을 때 현아는 이미 두 번 죽음을 당했다. 지금은 그 육체마저 한줌의 재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바람에 휘말려 저 막막한 하늘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을 영원히 할 수 없게 돼버렸다.
  
  안색이 좋지 않다며 어디 편찮으시냐고 묻는 스티브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들렸다. 경민은 손등으로 감은 눈을 한 번 쓰윽 훔쳤다. 그리고 눈을 들어 스티브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저 젊은이가 내 아들이란 말인가?
  스티브 같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던 바램이 이젠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이 되어 그의 가슴을 저미고 있다. 케티와 스티브가 결혼을 하려 한다는 사실이 숨가쁜 현실로 다가와 그를 까마득한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경민은 혹시 친부모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스티브가 별걸 다 묻는다고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망설였으나 그만 말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알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진실은 밝혀졌으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도 있으니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최종적으로 한 번 더 걸어보고 싶어서였다. 계산은 적중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모르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안다고 했다. 경민은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머니의 이름이 왜 궁금하세요?’ 하고 묻는 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스티브를 마주볼 수가 없어 경민은 그 눈길을 피하며 앞에 놓인 냉수로 입술을 축였다. 물 잔을 쥔 손이 떨렸다.
스티브가 말을 하려고 입을 막 열려는 찰나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죄수가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의 음성이 들렸다.  
  “둘이 앉아 있는 모습이 비슷해 꼭 부자지간 같아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모녀가 과일쟁반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아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또다시 말했다.    
  “근데 스티브 음성이 어쩜 그렇게 당신 목소리하고 똑같죠? 웃음소리도 너무 똑같아서 분간을 못할 정도였어요. 그러고 보니 당신 젊을 때랑 참 많이 닮았어요. 여러 가지로 천생연분인가 봐요.”
  천생연분이라는 말에 정말 그렇다는 듯 스티브와 케티가 눈을 마주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주치는 눈빛에 그들의 마음이 실려 있었다.
  
  이제는 둘 사이가 도저히 남매간은 될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는데, 아! 이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으며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벼랑 끝에 서있는 경민을 향해 굴러오고 있었다. 아내와 케티, 그리고 스티브와 그 부모의 얼굴이었다.
  
  결혼을 승낙해달라는 스티브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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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

    요즈음은 가끔 아내가 불쌍한 생각이 든다. 결혼한 지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내는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팔자 좋은 여자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아내의 주름진 목덜미를 보는 순간 그 속에 잠긴 깊은 슬픔의 그림자를 보았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경민은 생전 처음으로 장미꽃 한 다발을 집으로 보냈다. 당신이 꽃 보냈느냐며 화들짝 놀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데 경민은 그렇다는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여기 당신 이름 써 있는데...., 혹시 다른 사람이 당신 이름으로 보낸 거 아녜요? 케티가 보냈나?”
    케티는 아내에게 삶의 등불인 외동딸이다. 그제서야 경민은 멋쩍은 목소리로 자신이 보냈다고 대답했다. 한데 그 반응이 걸작이었다. 좋아하기는커녕 불안한 목소리로 웬 일이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다.
    “나한테 뭐 특별히 할 얘기라도 있어요? 생전 안하던 짓을 하니까 이상해서 그러죠. 설마 이혼하자는 건 아니겠죠. 괜히 겁나네.”
    경민은 어이가 없어 별 소릴 다한다는 말로 대꾸를 한 후, 일찍 들어갈 테니까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자면서 전화를 끊었다.
    식당에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아내는 편치가 않은 듯 왠지 자꾸 초조해 하는 기색이다.
    장미꽃 때문에 그렇게 불안하냐고 경민은 싱긋이 웃으며 아내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아녜요. 삼십년 묵은 한이 다 풀어졌는 걸요. 실은 케티한테서 아무 소식이 없어 좀 걱정이 돼요.”
    그러고 보니 케티한테서 아직 소식이 없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케티는 매사에 엄마를 끔찍이 위하며, 또  그들은 친구처럼 친한 사이다. 그러나 아버지인 경민에게는 아득히 먼 곳에 서 있는 딸이기에 케티 생각을 하면  마음 한구석이 텅빈 것 같다. 예전에는 별 느낌 없이 지나쳤던 사실이 요즘들어 그를 자꾸 허전하게 만들고, 어깨에 힘이 쑥 빠지면서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그런 심정이 드는 것이다.
  아내는 케티한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면서 셀폰을 꺼냈다.
  “안 받았아요. 어딜 갔지? 영화 보러 갔나?”
  태연하게 말은 하면서도 아내의 얼굴은 여전히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경민은 이십여년 전에 미국으로 주거지를 옮겨 LA 근교 칼라바사스에 보금자리를 꾸몄고, 케티는 대학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졸업한 탓인지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지금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경민은 늘 아내로부터 딸 소식을 듣고 있으며, 스티브라는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최근에 들었다.
    “지난번에 갔을 때, 스티브하고 뭐가 잘 안되는 것 같았어요. 케티 말이 걔한테는 여자애들이 너무 따라 자신이 없다고 그러던데, 깨지기라도 했나?”
    “깨졌으면 잘됐지 뭐. 여자 관계 복잡한 애는 안돼.”
    “누가 여자 관계 복잡하다고 했나요? 여자애들이 많이 따른다고 했지. 여자애들이 많이 따라도 다 자기 할 나름 아녜요?”
    아내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경민에게도 결혼 전엔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으나 여자관계가 복잡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사업을 너무 크게 벌여놓아 항상 바쁘고 해외출장이 잦아 가정에 충실할 수 없는 것이 큰 흠이다. 일에만 몰두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케티가 어렸을 적엔, 하나뿐인 딸이 몇 학년인지조차도 몰랐었다.
    아내는 케티가 스티브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이는 케티보다 두 살이 위이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안도 좋다는 것이다. 유학생으로 미국서 만나 결혼을 한 부모는 둘다 의사로 아버지는 외과전문의이고 어머니는 산부인과전문의라고 한다. 본인도 의사로 지금 샌프란시스코 의대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만하면 최고 신랑감 아니냐고 아내는 미리부터 좋아서 야단이다.
    “의사면 최고 신랑감이야?”
    짜증 섞인 경민의 목소리에 아내는 흠칫하며 남편을 의아해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분이 씁쓸했다. 괜히 안하던 짓을 한번 해보려고 한 자신이 우습기까지 했다. 먹은 게 잘못 됐는지 배까지 쌀쌀 아팠다.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내는 전화통에 먼저 눈길을 주었고, 케티로부터 메시지가 없자 안절부절못하며 옷도 갈아입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아내의 머릿속엔 지금 온통 케티로만 꽉 차 있을 뿐이다. 마침 통화가 되자 아내는 불안한 표정으로 안부부터 묻더니 금세 평안을 되찾은 밝은 목소리로 장미꽃 이야기에서부터 이태리식당에 가서 맛있는 바닷가재를 먹었다고 경민을 한껏 추어주었다.
그리고 스티브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케티가 아버지를 바꾸란다면서 아내가 수화기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어쩌다가 경민이 먼저 전화를 받았을 때도 케티는 별말 없이 엄마를 바꾸라고 했었다.
    “요새 너무 바빠서, 그만 엄마 생일을 깜박 잊어버렸어요. 엄마한테 장미꽃 선물하고, 식사도 같이 하셨다니 너무 기뻐요. 아빠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고마워요 아빠.”
케티가 지나치게 감격해 경민은 좀 멋쩍었다. 딸한테서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식당에서부터 내내 씁쓸했던 감정이 케티의 말 한마디에 말끔히 싹 가셨다. 그간 아내에게 얼마나 무심했으면 딸한테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딸하고 좀 가까워지려면 아내에게 잘하면 된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나보다 케티가 더 좋아하네. 장미꽃 한 다발에 온 집안에 웃음꽃이 피었어요. 스티브하고는 별일 없대요. 어째 일이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그날 밤, 자리에 누운 아내는 곧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스티브도 만나보고 그의 부모도 한번 만나볼 참이란다. 경민은 장인 장모가 일사천리로 진행시킨 자신의 결혼에 얽힌 일들을 되돌아보며 아내에게 물었다.
    “둘이서 결혼약속이라도 했대?”
    “아직 그런 말은 없었지만 결혼까지 가도록 추진을 해야죠.”
    “너무 서두를 것 없어. 그쪽 부모는 결혼이 확정된 후에 만나도 돼.”
    “당신, 케티가 지금 몇 살인지 알기나 해요? 올해 넘기면 서른이에요 서른. 도대체 결혼할 생각을 통 안해 이러다가 시집 못 가는 게 아닌가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좋은 짝 만났을 때 빨리빨리 서두르야 돼요. ”
    아내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일어나 앉으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왜, 그 헨콕팍에 사는 오 사장 있죠? 그 집 딸이 드디어 결혼하겠다고 해 경사가 나긴 났는데, 남자 집안이 너무 볼 게 없다는 거예요. 그래도 할 수 없어 좋다고 해놓고는 딸 안 보는 데서 울었다니 미세스 오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애가 인물도 좋고 똑똑해 은행장 집에서 탐을 냈대요. 얼마 전에 미주은행에 새로 취임한 사람, 당신도 알죠? 그 집 아들 변호산데, 아주 괜찮거든요. 그러니 더 속이 상했겠죠.”
    그러나 본인은 착실하고 똑똑하며 예의도 바르고 심성도 곱다는 것이다. 경민은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본인 하나 괜찮으면 됐지 뭘 그리 따지고 그래.”
    언뜻 한 여자의 슬픈 얼굴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본인 하나 괜찮으면 돼?’
  경민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돌아누워 눈을 감았으나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저녁 때 먹은 음식이 목에 콱 걸려있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오며 눈앞이 몽롱했다. 가슴 한복판에서부터 뭐가 쏴아하고 온몸에 퍼지면서 통증이 심하게 왔다. 경민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토하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나며 숨까지 찼다. 아내는 너무 놀라 경민의 등을 탁탁 치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까 먹은 씨 푸드가 안 좋았나 봐요. 거기다가 와인까지 짬봉이 돼 가지고...”
  한참을 토하고 설사까지 쏟고나니 차츰차츰 편안해졌다. 경민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럼이 들여다 보며 아내가 약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보니 저녁에 먹어야 할 약들을 깜빡했다.
  “지금 속이 비었는데 약 먹어도 되겠어요?”
  아내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면서 경민은 약 세 알을 입안에 틀어넣었다.
  “내일 아침에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요새 당신 얼굴이 영 안 좋아요.”  

    그 며칠 후, 아내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텅빈 집안에 들어오니 왠지 쓸쓸하다. 불을 켰다. 고개를 들어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휘황찬란한 빛깔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영롱하게 한알한알 반짝이는 불빛이 눈물처럼 차 오르며 집안을 밝혔다. 이 집도 곧 처분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미련은 조금도 없고 도리어 홀가분한 기분이다.의사의 말에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정말 좀 편안하게 쉬고 싶을 뿐이다.    

    그날 밤, 경민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요즘 케티의 결혼문제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문득문득 생각나는 한 여자가 있었다.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까맣게 잊고 살아온 여자다.

    오현아, 경민은 그녀랑 삼년 남짓 사귀었다. 여자들이 항상 그의 주위에 맴돌았기에 뜸한 적도 있었으나 어쨌든 경민은 현아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친구들이 하얀 코스모스라고 별명을 붙여준 가늘가늘하고 얼굴이 유난히도 하얗고 예쁜 여자였다. 그녀는 어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어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가 온갖 정성을 다해 손녀딸을 키웠으나 그 당시엔 치매증세가 있어 경민을 가끔 봐도 누군지 알아보질 못했다. 시중드는 사람이 스물네 시간 붙어 있었지만 현아는 할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참으로 착한 여자였다.
    결혼 말은 본인끼리도 오간 적이 없는데 경민은 부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현아와의 결혼은 절대로 안되니 더 깊어지기 전에 끝내라고 했다. 그때 이미 경민의 부모는 며느릿감을 정해 놓고 있었다.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김 사장의 딸로, 바로 지금의 아내다. 김 사장은 공직에 있던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마련한 자연스러운 자리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고 아내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었다. 현아가 하얀 코스모스라면 아내는 붉은 장미였다. 너무나 조용하고 소극적인 현아에 비해 온몸으로 열기를 내뿜으며 잡아당기는 아내에게 끌렸고 지나치게 사려가 깊은 현아보다는 단순한 아내의 성격이 좋기도 했다.
    한번은 현아에게 ‘날 좀 꼭 붙잡아달라고’ 말했으나 그 반응은 냉랭했고,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지도 않아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경민이 결혼을 한, 한참 후에야 알게 되어 지금도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다 보니 경민의 발길은 자연히 현아에게서 멀어져갔고 그녀도 잡으려는 기색이 없었다. 사정이 생겨 약속을 어기고도 경민이 통 연락을 안했으나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흐지부지 소식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한때는 서로 사랑하며 삼 년을 사귀었는데 그들은 ‘잘있어라, 잘가라’ 는 말 한마디 없이 헤어졌다. 그냥 지나치다 옷깃을 스친 사람들 모양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제 갈길을 간 것이다.

    한데, 반년쯤 지난 어느 날, 그들은 명동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날 밤, 현아는 이상하게도 그녀답지 않게 경민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늘 몸을 도사리며 경민의 애를 태우던 그녀였는데 그날 밤은 정말 이상했다. 현아는 곧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면서 모든 추억들은 한국땅에 다 버리고 떠날 것이라 했다. 이제 할머니도 돌아가셨으니 한국에는 아무 미련도 없다며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녀 말대로 프랑스에 그냥 눌러앉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전공한 그녀는 워낙에 예술감각이 뛰어나 대학 재학 중에 이미 국전에서 특선을 했고, 파리에서 있은 어느 권위 있는 대회에서도 동양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입상을 해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었다. 지금쯤은 아주 유명한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십 년도 더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소식은 바람결에도 들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스티브 칭찬에 여념이 없었다.
    “애가 정말 괜찮더라구요. 성격이 서글서글한 게, 예의도 바르고, 미국에서 태어났는데도 어찌나 한국말을  잘하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어요. 케티만큼 잘 하더라구요. 또 키도 크고 어찌나 잘 생겼는지 몰라요.”
    초등학교 때 미국에 온 케티는 아내가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어 통역을 할 만큼 한국어에 능통하다.
    한창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아내는 사진 한 장을 내놓았다. 스티브의 논문이 어느 학술지에 뽑혀 시상식을 겸한 연회가 있었을 때, 그의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케티도 참석하여 다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둘다 아주 인상이 좋고 동생들도 무던해 보였다. 그 중에서도 스티브가 인물이 빼어났다. 곁에 선 케티랑 아주 잘 어울렸으며 활짝 웃는 모습이 낯설지가 않고 어디서 본 듯한 친밀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경민은 자신이 스티브의 부모를 부러워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좀 놀랐다. 아들이 셋씩이나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고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이 년이 좀 지난 후에 케티를 낳고 아내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했으나 남의 아들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는 경민이다. 이런 감정은 정말 처음이었다. 스티브를 보자 내게도 이런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역력히 눈에 보였고, 스티브가 케티 아파트에 자주 들려 한국음식을 즐겨 먹는다고 했다. 그 동안에 얼마나 스티브를 해 먹였으면 음식솜씨가 많이 늘어 자기보다도 한국음식을 더 잘하더라고 아내가 칭찬이 대단했다. 얼마 전엔 스티브의 친한 친구가 뉴욕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그곳까지도 같이 가 일주일을 머물다 왔다고 했다. 스티브가 마음에 쏙 드는 사윗감이기 때문인지 아내는 그들이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미 둘 사이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는 사실을 경민은 단박에 알 수가 있었다. 허나, 독립해 살고 있는 서른이 다된 딸을 부모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것이 지금 세상이다. 결혼이 늦어져 아내가 애를 태운 것 외에는 아직까지 한번도 부모의 속을 썩인 적이 없는 딸이다. 이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으니 케티를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민은 가슴 깊은 곳에서 이건 아닌데 하는 찜찜한 기분이 일고 있어 자신도 의아했다. 스티브 부모 만나는 것은 뒤로 미루었다고 하면서도 아내는 어서 빨리 결혼을 했으면 하고 케티에게 자주 묻곤 했으나 그후로는 별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한데, 그 두어 달 후 케티가 휴가를 받아 집엘 왔다. 둘이서 다투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요새 아이들 일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스티브 주위엔 늘 여자애들이 맴돌아 케티가 속 끓이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속 상해 하는 엄마를 도리어 위로하면서 결혼은 자기한테 꼭 적합한 남자를 만나 할 테니 아무 걱정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티브는 케티한테 적합한 신랑감이 아니란 말인가? 경민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내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애들이 사귀다가 싸울 수도 있잖아요. 그러다가 화해하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가늘가늘한 몸매와 하얀 피부가 어딘지 현아를 연상하게 하는 때문인지, 케티를 보니 또 현아 생각이 났다.
    그 마지막 날 밤의 사건이 어젯밤 일같이 눈앞에 펼쳐지며 또다시 그녀가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현아와의 추억들이 자꾸만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모두가 다 아름다운 추억들이다. 찻집에 앉아 음악을 들어도, 또 어디엘 가더라도 현아와 같이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밤이 되면 그녀를 집으로 보내야만 하는 것이 괴로웠다. 대문 앞까지 와서도 한참이나 담벼락에 기대서서 행인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안고 있었다. 동갑인 그들이었기에, 그때 현아는 이미 대학원을 졸업한 후였으나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한 경민은 대학도 졸업을 못한 처지여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현아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집에선 되도록 그녀 이야기를 피했고, 눈치 빠른 어머니가 가끔 물을 때는 그냥 친구라고 얼버무렸다. 허나, 때가 되면 부모님을 꼭 설득하리라 생각했었다.
    한때나마, 경민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아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에..., 보고 싶다거나 그리운, 그런 감정은 아니고, 뭔가 연기 같은 것이 가슴에 가득 차 있어 숨을 크게 뿜어내도 시원하게 걷히지가 않아 답답한 그런 심정이다.
    언젠가 만날 수 있는 날이 오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꼭 하고 싶다.

    결혼을 하고, 오 년이 지난 후에 안 일이다. 어머니가 현아를 만나 경민을 단념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암으로 고생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털어놓은 말이다.

 현아보다는 훨씬 조건이 좋은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데려왔으나, 자기 주장이 강하고 시댁에는 무감각한 아내이기에 시어머니로서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착하기 그지없고 어른에게는 한없이 공손했던 현아 생각을 아마도 가끔씩은 했을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있는 현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마음이 여린 현아가 엄청난 상처를 입었을 것은 뻔한 사실이다. 그래서 경민이 갈팡질팡하며 ‘날 좀 꼭 붙잡아달라고’ 괴로워했을 때도 그녀는 그를 붙잡지 않았을까? 암말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 마음속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부모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안 보는 데서 케티는 울었다. 아내 역시 눈물을 삼키며 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케티가 제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땐, 혹시 혼자 울고 있지나 않나 하고 문에다 귀를 갖다대고 동정을 살피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부리나케 거실로 도망을 나왔다. 또 스티브랑 통화라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발뒤꿈치를 든 채 고양이 걸음으로 딸 방 주위를 서성이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하루는 케티가 화사하게 차리고 경민의 사무실엘 들렸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나왔다가 그냥 들러본 것이라면서 약간은 멋쩍어했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자마자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동안 아버지한테 너무 무심했다면서 죄송하다는 것이었다. 사업에 바빠 동분서주하는 아버지를 이해 못하고, 어릴 적엔 아빠랑 손잡고 가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워 경민을 많이 원망했다고 한다. 경민도 딸에게 무심했던 지난날을 사과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려워져가고 있는 회사 때문에 어깨가 무거움에 짓눌렸으나 점점 가뿐한 기분이 되었다. 항상 멀게만 느껴졌던 딸이 이제야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아 벅차 오르는 기쁨에 콧잔등이 찡했다. 딸이랑 둘이 이렇게 마주 앉았다는 자체가 경민에게는 행복이었다.
    케티는 자연스럽게 스티브에 관한 쪽으로 화제를 이끌어갔다. 스티브와의 관계가 어찌되었던 간에 케티가 아버지한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 기뻤다.
    “걸프렌드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자애들이 스티브를 따라요. 그리고 스티브는 그냥 친구라면서 그 애들한테 다 잘해주는 그런 남자예요. 제가 불만을 터뜨리면 스티브는 아무것도 아니니 제발 간섭 좀 하지 말라면서 도리어 저보고 이해심이 부족하대요. 뭐 자기를 너무 구속한다나요?”
    태연하게 말은 하면서도 케티의 눈에 언뜻 눈물이 비쳤다. 스티브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경민의 머릿속에는 지금 자신의 젊은 시절이 영화필름처럼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케티가 아닌 현아와 앉아있는 듯한 착각에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던 중, 스티브와 화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녀석이 단단히 사과를 한 후, 적극성을 띠고 케티에게로 바짝 다가왔다는 것이다. 냉각기를 가지면서 스티브는 자기가 케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케티가 토라져서 훌쩍 떠나버리고 나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같이 허전했다고 한다. 마음을 접으려고 했던 케티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리움만 더해가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었단다. 아내 말대로 전화위복이 되어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둘 사이가 급진전을 했고 또 스티브의 부모가 케티를 아주 마음에 들어해 하루속히 결혼을 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으나 경민은 왠지 기분이 떨떠름했다. 정지해 있던 기차가 갑자기 쏜살같이 막 달리고 있어 탈선이라도 할 것 같아 불안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그쪽에선 결혼확정이 다 되었으며, 스티브가 케티 아파트에 매일 들려 저녁을 먹는다는 말을 아내로부터 들었다. 주말엔 아예 같이 지내는 것 같다는 말도 슬쩍 흘렸다. 이제 곧 스티브가 인사를 하러 LA로 온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스티브보다 한발 먼저 집으로 온 케티가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스티브가 꼭 말씀을 드리라고 해서 얘기하는 건데요..., 이 일로 인해 우리 결혼을 반대하지 마시고 꼭 승낙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반대를 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을 케티는 계속했다. 엄마가 절실히 원한 결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케티 자신이 잘 알고 있잖은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저는 암말 말자고 그랬는데, 스티브가 그랬어요. 부모님을 속이면 안된다구요.”
    속이다니? 무슨 비밀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내는 너무 답답해 안달을 했다.
    “실은 스티브 지금 부모님은 친부모가 아니에요. 낳자마자 바로 입양이 됐대요.”
    상상조차 못했던 의외의 말에 무거운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해 기분이 멍해졌다. 어이가 없어 둘이서 얼굴을 마주보는데 케티가 잔잔하게 그 뒷말을 이었다.

    이야기는 삼십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곳 미국에서 어떤 한국여자가 아기를 낳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다. 유학생이었는데, 남편도 죽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 아기는 유복자였다. 그리고 아기엄마는 연고자가 아무도 없어 화장으로 처리가 되었다. 담당의사는 아니었으나 마침 그때 스티브 어머니가 그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같은 한국사람인 까닭인지 그녀는 아기엄마에게 자꾸 관심이 갔고 항상 혼자였던 외로운 여자였기에 더 마음이 쏠렸었다. 그리고 그 당시 결혼한 지 일년이 지났었지만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었는데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한마음이 되어 눈도 채 뜨기 전에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그 아기를 입양한 것이다.

    스티브는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언젠가는 꼭 말해주려고 했었는데, 이제 그 때가 된 것 같다면서 어머니가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그 때란 결혼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스티브는 모든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또 앞으로는 부모님한테 더 잘해드려야겠다면서 밝게 웃었다고 한다. 아내는 그의 착하고 솔직하고 긍정적인 됨됨이를 칭찬하면서 감탄을 했다. 애초부터 스티브한테 홀라당 반해 있던 그녀라 아무런 조건도 거슬리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허지만 경민은 기분이 매우 찜찜했다. 왠지 경민은 처음부터 그랬다. 스티브가 잘난 놈이긴 하지만 썩 내키지 않는 마음이었다. 낳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니 지금은 더 그렇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돼버렸다. 경민도 딸의 선택을 존중해 스티브를 좋아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드디어 스티브가 LA에 온다고 해 아내는 너무 좋아 무척이나 흥분했다. 케티한테 스티브가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가며 며칠 전부터 메뉴를 짜고, 도착하는 날은 하루종일 저녁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사내녀석이 얼굴이 해맑았다. 한마디로 귀공자 타입이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아내 말대로 미국태생인데도 어찌나 한국말이 유창한지 정말 놀랄 지경이었다. 존댓말도 완전하게 구사했다. 외모도 빼어나고 말솜씨도 좋아 여자들이 많이 따르게 생겼다. 이미 다 결정이 된 상황인데 왜 자꾸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이 치닫는지 알 수가 없다. 저녁을 먹은 후 모녀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들은 식탁에 그대로 앉아 세상사는 이야기에 화제의 꽃을 피웠다. 의사 공부 외에도 다방면으로 박식해 말이 잘 통했다. 금세 친근감이 생겨 슬슬 녀석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스티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참 건전하게 잘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의사 노릇을 포기하고 아들 셋과 남편 뒷바라지만 하다가 막내가 대학엘 간 다음부터는 어느 자선의료단체에 소속되어 부인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한다. 경민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동안 속세의 욕망에만 집착하며 살아온 것 같아 텅빈 마음에 허허로운 바람이 일었다. 곧 빈손으로 돌아설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부는 잃었지만 더 귀중한 것을 얻은 기분이라 옴츠렸던 가슴이 활짝 펴지며 따스해졌다. 한없이 치솟기만 하는 욕망 때문에 성공에 다다를수록 목이 말랐던 경민이었다. 이제야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음껏 들이킬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스티브가 뜻밖의 말을 했다.
    “참 이상해요. 케티 아버지를 처음 뵙는데도 낯설지가 않고 오래도록 안 사람 같아요. 마음이 편안해서 그런지 말도 자꾸 하고 싶고 그래요.”
    경민도 마찬 가지였다. 사진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집에 들어설 때도 처음 보는 사람 같지 않고 눈에 익어 인상이 좋아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혹시 어디서 만난 적이라도 있나 하고 생각을 해봤으나 둘다 그런 기억은 없기에 서로 마음이 통했나 보다고 그들은 흐뭇해하며 껄껄 웃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활짝 웃는 스티브의 얼굴에 갑자기 한 여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현아다. 현아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매가 현아를 쏙 뺐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엔 닮은 사람도 허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현아 때문에 요즘 괜히 심란하다 보니 또 그녀가 눈앞에 어른거려서겠지 하고 넘겨버리려고 하는데도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다.

    스티브는 자기가 입양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어갔다.
    “저를 낳은 그분은 아주 착하고 아름다운 여자였었는데 저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해요.”
    스티브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그분이라고 불렀다.
    “그림을 그리시던 분이었는데....”
    ‘그림’이라는 첫마디에 두근거리던 가슴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현아는 미국이 아닌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 않았는가? 그리고 세상에 그림 그리는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
    “저를 입양한 다음에 그분 지도교수가 어머니께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고 해요. 굉장히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신 분으로 살아계셨으면 세계적인 유명한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셨대요. 대학교 다닐 때 이미 국전에 특선을 했고 또 파리에서 있은 그림대회에서도 큰상을 받으셨대요.”
    스티브의 말이 계속될수록 사실은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 다음 스티브의 입에서 나온 ‘프랑스’라는 말은 경민을 순식간에 절벽 끝으로 밀어붙였다.
    “처음엔 프랑스로 유학을 가셨다고 해요. 그런데 프랑스에 가자마자 바로 지도교수가 미국으로 오게 되어 특별 케이스로 그분을 데리고 오셨대요.”
    그렇다면 혹시?
    친아버지는 분명히 죽었다고 했는데도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낳은 아이일까 하는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현아의 아들이라고 느끼자 바로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며 온몸에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생년월일을 물었다. 스티브는 1970년 4월 20일이라고 또렷이 말했다. 명동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마지막 날 밤을 생각했다. 그 날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났지만 무더운 여름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그해 겨울에 결혼을 했으니까....
    다시 한번 불길한 생각이 세찬 파도처럼 강하게 밀어닥쳤다. 재빨리 스티브의 나이를 계산해보았다.
    “이상하게도 그분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케티가 더 가깝게 느껴졌어요. 전공이 아트인 것도 같고, 어머니 말씀이 케티가 그분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케티랑 둘이 다니면 사람들이 그랬어요. 많이 닮았다면서 진짜 오빠 같대요.”
    ‘진짜 오빠 같대요’ 하는 소리가 가슴을 후비며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온몸을 휩쌌고, 어느새 그 느낌은 확실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아니 확실했다.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는 것일까? 허구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스티브란 말인가? 아!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스티브가 친어머니에 관해서만 언급을 해, 친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냐고 물었다. 친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고 싶었다. 그래서 현아의 아들은 확실했지만 자신의 아들이 아니기를 바라는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걸어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스티브의 나이로 보아 그가 현아의 아들이면 자신의 아들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또 그녀가 어떤 여자라는 것을 경민이 잘 알기에 아버지가 다른 남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친아버지는 돌아가셨다는 것 외에는 별 말씀이 없었어요. 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분은 바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셨다고 했어요.”
    친아버지라는 말에 경민은 감전이 된 듯 전신이 찌릿찌릿했다. 그렇다. 그때 현아에게 경민은 이미 그녀의 가슴에 묻힌 죽은 사람이었다.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숨을 쉬어도 허방으로 다 새어버리는 것 같았다. 맥이 탁 풀리며 귀가 멍멍해져 그는 눈을 감았다.
    경민이 그녀를 죽였다. 어머니가 현아를 만나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던졌을 때, 그리고 경민이 아내를 택했을 때 현아는 이미 두 번 죽음을 당했다. 지금은 그 육체마저 한줌의 재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바람에 휘말려 저 막막한 하늘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을 영원히 할 수 없게 돼버렸다.
    안색이 좋지 않다며 어디 편찮으시냐고 묻는 스티브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왔다. 경민은 손등으로 감은 눈을 한번 쓰윽 훔치면서 괜찮다고 얼버무렸다. 그리고 눈을 들어 스티브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저 젊은이가 내 아들이란 말인가?
    스티브 같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던 바램이 이젠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이 되어 그의 가슴을 저미고 있다. 케티와 스티브가 결혼을 하려 한다는 사실이 숨가쁜 현실로 다가와 그를 까마득한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경민은 혹시 친부모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스티브가 별걸 다 묻는다고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망설였으나 그만 말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알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진실은 밝혀졌으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도 있으니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최종적으로 한번 더 걸어보고 싶어서였다. 계산은 적중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모르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안다고 했다. 경민은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머니의 이름이 왜 궁금하세요?’ 하고 묻는 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스티브를 마주볼 수가 없어 경민은 그 눈길을 피하며 앞에 놓인 냉수로 입술을 추겼다. 물잔을 쥔 손이 떨렸다.
    스티브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막 열려는 찰나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죄수가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의 음성이 들렸다.
    “둘이 앉아있는 모습이 비슷해 꼭 부자지간 같아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모녀가 과일쟁반을 받쳐들고 다가왔다. 아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또다시 말했다.
    “근데 스티브 음성이 어쩜 그렇게 당신 목소리하고 똑같죠? 웃음소리도 너무 똑같아서 분간을 못할 정도였어요. 그러고 보니 당신 젊을 때랑 참 많이 닮았어요. 여러 가지로 천생연분인가 봐요.”
    천생연분이라는 말에 정말 그렇다는 듯 스티브와 케티가 눈을 마주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주치는 눈빛에 그들의 마음이 실려 있었다.
    이제는 둘 사이가 도저히 남매간은 될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는데, 아! 이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으며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벼랑 끝에 서 있는 경민을 향해 굴러오고 있었다. 아내와 케티, 그리고 스티브와 그 부모의 얼굴이었다. 결혼을 승낙해달라는 스티브의 말이 아득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 들리면서 시야가 몽롱해왔다. 그리고 그는 밑이 보이지도 않는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의 몸은 낭떠러지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지지 않고 공중을 날고 있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열손가락을 다 펴고 두 팔을 너울거리며 그는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다. 온통 하얀 코스모스만이 하늘거리는 끝없는 벌판이 경민의 시야에 펼쳐져 있었다.    
  ‘아빠 아빠’하는 케티의 목소리와 ‘여보 여보’하는 아내의 음성이 범벅이 되어 귓가에서 뱅뱅 돌았다. 스티브의 목청이 제일 크게 들렸다. 아버님 아버님 하더니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르고 또 불렀다. 스티브가 자신의 가슴을 탁탁 치고는 숨을 불어넣고 얼굴을 막 부볐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범벅이 된 찝질한 액체가 스티브 얼굴에서 경민의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경민은 활짝 웃었다.

  몽롱한 시야 속에 저만치서 현아가 보였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얀 코스모스 벌판 위를 그녀 역시 활짝 웃으면서 훨훨 날고 있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20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경민의 가슴에 감격이 차오르며 행복감이 온몸에 녹아내렸다.
현아가 손을 내밀었다. 경민이 그 손을 잡고 그들은 같이 공중을 날았다. 점점 높은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위이잉-- 위이잉--거리는 싸이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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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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