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수희

2004.04.03 07:48

김영강 조회 수:961 추천:150

    사흘 후면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다. 희망에 부푼 감정보다는 왠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앞선다. 남편이 미국유학을 위해 회사를 그만 두어야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반대했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이 워낙 확고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여러 학교에 지원서를 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조건으로 입학 허가를 받은 곳이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학교였다. 바로 수희가 살고 있는 곳이다. 다 늦게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는 남편을 따라, 그것도 세 살짜리 아들까지 데리고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 겁이 난 탓도 있겠지만 수희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더 무거운 마음이 앞서는 지도 모른다.
    팔 년만에 만나는 친구인데도 반가운 마음이 아닌 것은 웬 일일까?
    며칠 전 수희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아파트 구할 때까지는 꼭 자기 집에 묵어야 한다는 그녀 말에 그러자고는 했으나 홀가분한 기분은 아니다.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난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떠있다는 수희의 흥분된 목소리가 귓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가장 친한 친구라...., 과연 우리가 가장 친한 친구일까?
    수희와 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이다.

    수희는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녀의 어머니가 가끔 나를 붙들고 암담한 집안 사정을 하소연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수희는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밤을 지내기도 하고 또 시험 때에는 며칠씩 계속 같이 기거하곤 했으나 그녀는 오직 공부에만 전념했지 집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도 그 결과는 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를 않아 나는 그녀의 성적이 어느 정도에 머무는지조차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성적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을 안했기 때문이다.
    대학을 갈 때에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가라고 주위에서 권했으나 그녀는 나와 같은 대학을 지원해, 첫해는 낙방을 했다. 그때 그녀는 다락방에 숨어 찾아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차는 아예 갈 생각도 않고 재수를 한 수희는 결국은 나와 같은 대학에 합격을 했으며 가정교사를 하면서 등록금을 벌었었다. 거기서 그칠 줄 알았던 수희의 향학열은 미국유학에까지 치달았고, 그녀를 붙잡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미국 땅을 향해 떠난 지가 팔 년 전의 일이다.
    무서운 집념과 앞만 보고 달리는 수희의 뜨거운 욕망에 나는 가끔 피곤함을 느꼈다. 또한 친구들을 은근히 차별하면서도 나와는 친하려고 지나치게 애를 쓰는 것 같아 그녀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미국으로 떠난 후, 삼 년 동안은 완전히 소식이 끊겼었다. 수희의 어머니는 도리어 나에게 혹시 편지가 왔느냐고 딸의 안부를 묻고는 걱정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에게서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결혼식을 남편의 집에서 했다면서 사진을 여러 장 보내왔었다. 하얗게 단장된 집 전경은 영화에서 본 백악관을 연상케 했고 결혼식이 거행되었다는 뒤뜰은 잘 가꾸어놓은 공원 같았다. 정말 아름다웠다.
  그  땐 수희 어머니가 서울 근교 어디 변두리 지역으로 이사를 해 소식이 끊어진 지가 오래되어 연락할 길이 없었다.
    수희로부터 가끔 편지가 날아들었고 전화도 종종 왔었다. 주로, 아주 행복하게 잘 산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렇게 잘 산다고 늘어놓으면서도 어려운 친정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어쩌다가 내가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느냐고 안부를 물으면 그런 건 자기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이니 너는 신경 안 써도 된다면서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한국에 나온 적도 없었다. 어머니를 찾을 생각도 않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으나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도 수희는 싫어했기 때문이다.

    수희는 나를 껴안고 팔짝팔짝 뛰며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학교 때에는 너무 억센 인상을 풍겨 겁난다는 표현을 쓴 남학생도 있었는데 팔 년만에 만난 수희는 완전히 딴 여자가 되어 있었다. 어찌나 예뻐지고 세련됐는지 몰라볼 정도였다. 까무집잡하던 피부도 아예 뽀얗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우아함마저 갖추고 있었다.
    수희 남편은 아주 정중히 또 친절하게 우리 부부를 반겼다. 집 구할 때까지 마음 편히 있으라고 했다. 이층에 방이 많이 있으니 불편하지 않으면 아예 한집에 살아도 괜찮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작은 체구와는 반대로 사업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통이 커 보였다. 수희보다는 근 십 년이 위인데도 왜소한 외모와 작은 키 때문인지 그는 굉장히 젊어 보였다.
    도착한 바로 그날, 수희는 방방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집 자랑을 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크리스털 샹데리아를 무려 이만 여 달러를 주고 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벽에 걸린 그림이 얼마짜리라는 등, 그녀의 지나친 허영끼에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식구도 단둘뿐인데 왜 이리 큰 저택에 살까 하고 이상했다.
    수희는 며칠 동안을 계속해서 돈 자랑을 했다. 수희가 입으로 외지 않아도 그녀가 부자인 것을 금세 알 수가 있는데 왜 저렇게 돈 많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백만 불이 넘는다는 집값에서부터 남편이 자신을 위해 무지하게 큰 생명보험에 들었다느니, 또 지금 자기가 타고 다니는 차가 무려 십만 달러가 넘는다느니....
    돈의 도가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녀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희는 나한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든 앉으면 돈 자랑을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일주일 후, 우리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수희네 집에 비하면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초라한 곳이지만 이제야 안식처를 찾았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희가 우리 식구를 위해 잘해주려고 최선을 다하는데도 뭔가 묘한 바람이 불어 나는 불안했다. 남편도 하루속히 나가기를 바랬지만 첫째로 아들이 북새통을 떨어 수희 남편의 눈치가 보였었다. 그가 무슨 못 볼 것이나 보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아들을 바라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오 년이 지났으나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다. 그래서 늘 신혼기분이라 더 행복하다고 수희는 합리화를 시켰고, 남편이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희는 운전을 해주며 나를 도와주었다. 고맙다는 내 말에 그녀는 옛날에 신세 입은 것을 지금에야 갚게 되었다면서 쓸쓸히 웃었다.
  “  학교 다닐 때, 네가 맨날 자장면 사주고 빵 사주고 그랬잖아. 또 너이 엄마가 너 옷 사면서 내 것도 몇 번 사 주시고 그랬어. 제일 잊지 못할 건, 등록금 네가 내준 거야. 생각나지? 내가 등록금을 마련 못해 애태우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등록해준 거 말야.”
    옛날 일이라 다 잊어버려 생각조차 안 해본 사실이다. 등록금은 그 후에 매달 조금씩 다 갚았었다.
    “그땐 참 내가 너무 힘들었어. 너를 좀 따라 잡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도 역부족이었어. 너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 너는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왜 나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을까? 하고 원망도 했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한번도 안 해봤기 때문에 수희가 가진 것을 따지며 나를 부러워했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나는 말이지, 어릴 때 기억들은 생각조차 하기 싫어. 남들은 고향에 가고 싶고 어쩌고 하는데, 난 아냐. 한국 땅은 쳐다보기도 싫어. 우리 남편은 내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통 몰라.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암말도 마.”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이 뭐가 어때서 남편한테 감추려고 하는 것일까? 이해가 안 되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들은 그 땅에 다 버리고 떠나왔다고 했다.
    버리고 떠나오면 버려지는 것일까? 어머니가 한국에 있는데 어쩜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으니 이제 금의환향을 해 어머니를 찾아 어려운 친정도 도와주리라는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어린 시절이란, 그 시절이 어떠했던 간에 지나고 보면 그 나름대로 다 정답고 아름다운 추억이지 않느냐고 위로하는 내게 그녀는 말했다.
  “  웃기지 마라 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내 인생에서 싹 도려 내버리고 싶어. 기억 상실증에 빠져 그 기억들을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싶단 말야. 정말 지긋지긋했어. 아무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런 일도 있었고....”
    옥타브를 확 올렸다가 끝마디에 가서는 음성을 죽이면서 수희는 방바닥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남들에게 말못할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이를 악물고 치를 떨면서 생각에 잠긴 그 표정이 너무 심각해 나는 입이 안 떨어졌다. 불편한 기분 속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수희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은 꽉 다문 그녀의 어금니 사이에서 산산이 부서져나와 내 귓가에 흩어졌다.
    “정말 지긋지긋했어”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회복하기 위해 꿈을 크게 잡았다고 했다. 그러더니 ‘내 꿈이 너무 컸나?’ 하고는 깔깔대고 웃었다. 정말 신나게 하늘 높이 웃어 제겼다.
    이제는 그 꿈을 다 이루었다는 뜻인가?
    허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남편한테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신 걸로 돼 있으니 너도 실수 없도록 명심해.”
    나는 어이가 없어 정색을 하고 똑 똑 끊어지는 어조로 냉정하게 말했다.
   “뭐? 남편한테 어머니 돌아가셨다고 그랬어? 너 그러면 못 써.”
    그녀는 내 말을 무참하게 짓뭉개 버렸다.
   “그러면 못 쓴다고? 그건 부모 잘 만난 너한테나 해당되는 말이야. 난 달라. 그 누구도 나한테 그런 말할 자격 없어. 우리 남편 앞에서는 물론이고 내 앞에서도 우리 엄마 이야기는 입밖에도 꺼내지 마. 나한테 우리 엄만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녀는 서슬이 퍼어런 칼날로 말을 잘라 뱉듯 날카롭게 말했다.

    수희는 돈 자랑뿐 아니라 남편의 사랑타령도 자주 했다. 부부싸움을 해도 남편이 꼼짝을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자기가 과일칼을 들고 대들기 때문에 싸울 기미가 보이면 남편은 칼부터 치운다고 했다.이야기는 항상 수희 자신은 못된 아내이지만 남편은 너무 착해 못된 아내를 여왕처럼 모시고 산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렇게 착한 남편인데 과일칼을 들이대며 싸울 일이 뭐 있을까?
    칼부터 치운다는 남편도 이상하고, 나로서는 다 이해가 안 되었다.
    “얘, 너 정말 미쳤구나. 복에 겨운 줄 알고 남편 하늘처럼 모시고 살아야지. 그리고 너 어쩌자고 칼을 들고 대드니? 앞으로는 그러지 마.”
    그녀가 독한 면이 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남편한테 칼을 들고 덤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그녀도 내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더니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아버지한테 도움을 청해 집을 사라는 것이었다.
    “애는 자꾸 커 가는데, 언제까지 이 좁은 아파트에 살거니? 니네 집 부잔데, 결국은 다, 너 줄 거잖어? 어려울 때, 미리 좀 달래는데 뭐 어떠냐?”
    빈정거림이 섞여 있는 그녀의 말투에 감정을 꾹 누르고 있는 나를 빤히 응시하며 수희는 더 기분 상하는 말을 했다.
    너네 남편은 은근히 바라는 지도 모르잖아?”
    나는 아니라고 단호히 말했다.
    유학 올 때, 학비와 기본 생활비는 장학금으로 받게 되었기에 다른 부수적인 것은 아버지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거절을 했었다.
   “얘는 아직도 세상을 모르네. 그건 그냥 체면상 인사로 하는 소리야. 처갓집에서 도와주겠다는 데 싫다는 남자가 어딨니?”
    수희는 우물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튀어 나왔으면 세상이 어떻다는 것도 알아야지 왜 그리 순진하냐고 열변을 토했다. 공부 끝나면 한국으로 나갈 텐데 집은 사서 뭐하냐는 내 말에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돈이 돈을 버는 건데 왜 그리 머리가 안 돌아가느냐고 했다. 돈 버는 데는 부동산이 최고라면서 자기 집이 그 동안에 백만 불이나 올랐다고 했다. 수학적인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닌데도 나는 얼른 계산이 안 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네가 맨날 일등했지만 그게 무슨 소용 있니? 이제부턴 돈 벌 궁리를 해.”
    힘이 잔뜩 들어간 말투에서 나를 따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옛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따라잡았다는 거만한 표정도 곁들여 있었다.
   “니네 남편은 맨날 연구실에 쳐박혀 세월 가는 줄 모르는데, 박사학위 받아봤자 월급쟁이밖에 더 되니? 돈 벌기는 글렀어. 그러니까 네가 돈 버는 쪽으로 그 좋은 머리를 굴려보라는 거야.”
    어릴 때는 느끼지 못했던 교만끼가 줄줄 흘렀다. 그녀는 내게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쉴새없이 지껄였다. 한국에 박사가 수두룩한데 학위 따더라도 별볼일 없을 거라면서 그냥 미국에 눌러앉으라고 권했다. 한국은 정말 지겨운 곳이니 돌아가지 말라고 했다.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너무 돈 돈, 그러지 마. 돈이면 다야?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그런 거야. 너하고 나하곤 가치관이 다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 하고 한마디 쏘아붙일 걸, 암말도 못하고 당하기만 한 것 같아 속이 부글거렸다.
    수희는 턱을 약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면서 좁은 아파트를 두리번거리며 분명히 나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었다. 그러나 앞에서는 절대로 쏘아붙이지 못하는 것이 내 성격이다. 쏘아 부치기는커녕 이상하게도 난 수희 앞에서는 할 말도 생각이 안 나 불쾌한 감정을 침묵으로 대신하는 때가 많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야 그럴 땐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왜 암말도 못했지 하고 속상해 하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두를 빚다 보니 수희 생각이 났다. 껄끄럼한 감정을 애써 없애려고 노력하며 전화를 걸었더니 그 팔팔하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기운이 빠져있었다. 어디 아프냐는 내 말에 그녀는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려, 언뜻 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 지금 울어?’ 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아니라면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몇 시간 후 전화를 건 그녀는 생기를 되찮은 듯 살살 감겨드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 느끼는 가식이 가득한 그런 목소리다. 만두는 그냥 얼려 두란다.
   “실은 어저께 치과엘 갔었거든. 그런데 의사가 마취주사를 잘못 놔 얼얼해 아까 아침에는 말도 제대로 못했어. 지금에야 괜찮아.”
    어제 마취주사를 맞았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얼얼하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더 이상했다.
   “우리 남편이 의사 고소한다고 야단이 났어. 주사약이 잘못됐는지 얼굴에 막 멍이 퍼졌어.”
    멍이 든 게 아니고 멍이 퍼졌다고 했다. 누가 보면 두드려 맞은 줄 알겠다면서 수희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 며칠 후, 수희를 보고 나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멍 투성이었다. 코뼈도 약간 삐둘어져 있었다. 그녀는 치과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아직도 잇몸이 아프다고 엄살을 떨었다. 마취 주사약이 잘못돼 멍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입 주위보다는 눈언저리가 더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어 이상했다. 코뼈까지 비뚤어져 있어 더 그랬다.
    남편한테 맞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으나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내색을 안했다.
    그날 밤, 난 자꾸만 수희 생각이 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래 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편이 아내를 마구 때리는 장면이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여자는 어느새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놀라서 주춤하며 씩씩거리는 남편을 향해 칼을 겨눈 채 여자는 무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렇다. 수희도 남편이 때리니까 칼을 드는 것이다. 자기 방어이다. 맞고 사는 것을 혹시 남들이 알까봐 남편을 더 감싸고 추어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녀는 왼쪽 귀로는 잘 듣지를 못한다. 얼마 전에 귀에 염증이 생겨 계속 치료를 받았으나, 그만 고막이 상했다고 해 그대로 믿었었는데, 혹시 너무 세게 따귀를 맞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이것은 추리가 아니다.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하다. 지금 수희는 남편으로부터 두드러 맞으며 살고 있다.
    맞고 사는 여성들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통 때는 그냥 넘겨버렸는데, 이제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매맞는 여성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끔직한 일들이 많았다. 휘발유를 부엌 바닥에 부어 놓고는 불을 지른다고 위협을 하는가 하면, 방문을 잠그놓고 본인은 윗통까지 벗어 던지고 아내를 두드려 패며, 후라이팬에 머리를 수도 없이 맞아 병원에 실려간 여자도 있고, 심지어는 포크로 찌르며 담뱃불로 지지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쉬쉬하며 감추고 살아 드러나는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다고 한다. 어린 자식이 보다 못해 경찰을 부른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들을 위한 피신처도 있고 또 그들을 돕는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수희도 알고 있을까? 피신을 해야 할 만한 정도는 아니겠지.
  토할 길 없는 시커먼 돌덩어리 하나를 삼켜버린 듯한 무거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확신은 섰으나 그녀가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다. 수희가 바락바락 달려들어 부부싸움 끝에 어쩔 수 없어 손이 올라갔다면, 그 한번으로 그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도 영원히 모르는 척, 비밀로 묻어두면 된다.
    때리는 남자들의 특징은, 그 다음 날은 부인에게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싹싹 빌고 보석을 사주고 옷을 사주고 하면서 아내에게 돈을 쳐 바른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 수희는 보석반지도 많고 옷도 많고 그렇구나.
    한쪽 벽을 온통 붙박이로 짜 넣은 옷장을 확 열면서 수희는 옷 자랑도 했었다. 이건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누구누구의 작품인데 얼마를 주고 샀다는 둥, 그 값이 수천 달러에 달했다. 그런 고급 옷들이 즐비하게 걸려있는 옷장 앞에서 나는 무슨 옷가게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하며 눈이 휘둥그레져 놀랐었다. 그리고 구석진 벽장 안에 놓여있는 금고에서 보석함을 꺼내 보여준 적도 있다. 가지각색의 색깔을 가진 보석들도 신기했지만,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는 금고도 내게는 보물처럼 보였다. 어른 허리 정도의 키를 가진 커다란 쇠덩어리가 정교하게 짜여져 만들어진 금고였다. 나는 개인 집에도 그런 금고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사소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면서 수희가 껄끄럽게 느껴지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대로 잘 넘기면서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날 여학교 동창인 영미가 미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이다. 마침 이곳에 세미나가 있어서 온 것이었다.
    마침 그날 수희와는 연락이 닿지를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희한테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한 마음으로 영미와 단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가지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영미는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수희에 관한 것이었다.

    한 이 년 전쯤, 그때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였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미국이 싫어 영주 귀국했다는 한 여자가 영미의 병원을 찾으면서부터 그들은 친분을 갖게 되었었다. 영미의 따듯한 성격 때문인지 그 여자는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하소연도 했다. 미국서 살 때, 억울하게 이혼을 당한 이야기였다. 자기 남편을 빼앗아간 그 나쁜 년을 용서할 수 없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야기를 들을 때 영미는 수잔이라는 그 나쁜 여자가 수희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러 수희 소식을 내게서 들었을 때도 영미는 전혀 몰랐었다. 내가 미국 온 후, 그 어마어마한 저택이랑 남편이 큰 사업체를 경영하는 사장이라는 등등, 수희의 안부를 전했을 때도 연관을 못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하게도 무슨 말끝에 그 여자가 이혼한 남편의 이름을 들먹거렸는데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바로 수희 남편 이름이었던 것이다. 내게서 몇번 들었을 뿐인데 우판석이라는 그 이름이 특이해 영미는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라 이야기 줄거리를 앞뒤로 끼어 맞추어 보니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고 한다.
    미국 온 지 일년도 못돼 더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된 수희는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무역회사에 비서로 취직을 했었다. 그 사장이 지금 수희의 남편이다. 수희가 그의 아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수희가 계획적으로 그를 유혹했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어서 주위의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란다. 수희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가정을 파괴시키다니..,
    그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수희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여자다. 수희는 남편을 직장에서 만났다고만 했지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 학교 이야기도 통 안해 한번은 박사학위는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그까짓 박사학위 받아 봐야 아무 쓸모도 없어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녀의 전공은 영문학이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그녀인데 포기한 것이 이상했다. 그녀에게는 최상의 목표였던 돈, 부자 남편을 만나 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미에게 계속 검진을 받고 있는 그 여자는 지금도 수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그들의 소식을 듣는다면서 지금은 남편이 또 다른 여자한테 한눈을 팔아 아예 드러내놓고 수희에게 이혼을 요구한다고 했다. 더구나 사업까지 도산할 위기에 처해 살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저택도 곧 은행에 넘어가게 생겼다고 한다.
    반대로 그 여자는 지금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단다. 물론 이혼할 때 받은 돈을 바탕으로 한 재산이다. 그때는 사업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해 위자료도 무지하게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데 육 년도 채 못되어 수희 남편의 사업이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다니, 정말 사람일이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첫부인 사이에 아이는 없었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아이를 못 가지는 남자라고 했다. 부인이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으나 그가 원치 않았다고 한다.
    수희가 남편이 자기를 너무 사랑해 귀찮을 정도라고 늘 말을 해 처음에는 그대로 믿었으나 차차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에게 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생각조차 못한 일이다.

    나는 너무 놀라 그 동안에 수희가 내게 한 말들이랑 내가 느끼고 있는 수희에 관해 속을 다 털어놓았다. 얼굴에 멍든 이야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수희는 완전히 가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어. 그리고 굉장히 정서가 불안한 상태야. 아마 어릴 때부터 형성된 성격 탓일 거야. 이건 내 추측인데, 수희가 한국을 지옥처럼 싫어하는 것도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이 그렇게도 지긋지긋했다면 혹시 말야,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인데 너니까 하는 얘기야. 의붓아버지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도 그냥 내버려 두어 수희가 어머니하고도 인연을 끊은 것이 아닐까?”
    역시 영미는 의사라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어릴 때 그녀는 자기 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했다. 학교가 끝나면 우리 집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다.
    영미 말이 지금 수희는 정신적인 학대와 육체적인 학대를 다 받고 있는 셈이니, 수희 자신을 위해서도 하루 빨리 이혼을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했다. 계속 모든 것을 감추며 가식의 세계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아니 현재의 상태로서도 수희는 당장 전문가를 찾아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미가 다녀간 후에도, 수희는 계속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행세를 해 나는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진실을 꽁꽁 묶어서 베일 속에 가려놓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녀는 우리 아파트에 불쑥불쑥 잘 들렸다. 자신을 꽁꽁 감추고 있으면서도 나를 위해선 모든 편의를 다 봐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너한테 베푼다는 만족감에서일까?
    수희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며 나는 그녀의 호의를 다 받아드렸다. 그것이 그녀를 위하는 길이다. 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 않는 것도 자존심 때문이니 그녀가 말할 때까지 영원히 모른 척하기로 했다.
    나는 대학졸업 후 영어교재 편찬하는 일을 해왔는데 아이를 낳은 다음에도 홈 오피스를 차려 집에서 일을 했었고 미국 온 후에도 인터넷을 통해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다행히 서울에서 계속 일거리가 와 컴퓨터 앞에 하루종일 매달려 있어야 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이었다. 일은 밀렸는데 녀석이 하도 칭얼거려 수희 아줌마한테 데려다 주겠다고 하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다. 수희는 아들을 굉장히 예뻐하며 아들도 그녀를 잘 따른다. 내가 바쁠 때 수희는 아들녀석을 종종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놀곤 했다. 갑자기 녀석이 울면서 품에 안기며 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저씨 무서워.”
   “왜 아저씨한테 야단 맞았어?
   “아니. 아줌마가 아저씨한테 막 야단 맞았어. 아줌마가 나하고 노는 거 아저씨가 싫어해.”
    모든 상황을 금세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이가 부부싸움의 요인이 되어 수희가 또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지도 모른다. 그녀의 남편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자기 아내가 아이를 예뻐하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다.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요즘은 좀 소식이 뜸했었다. 수희가 남편한테 얻어맞는 모습이 영화필름처럼 머리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며칠 내내 수희 생각에 시달린 탓인지 꿈에까지 수희가 나타났다. 암만해도 무슨 일이 있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어 하루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는데 내 예감은 적중했다. 낯이 익은 히스패닉 여인이 청소를 하다말고 나를 반기면서 수희가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에는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눈두덩이가 어찌나 퉁퉁 부었는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밤새 울은 것이 분명했다. 코의 모양도 온전치가 않았다. 완연하게 한쪽으로 삐뚤어져 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뭔가 후끈한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치솟아 오르며 콧잔등이 시큰해 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더 이상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희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어쩌고 하기에는 이미 위험수위가 넘어 있었다. 남편한테 두드려 맞은 것이 분명했다.
    아니, 사람 얼굴을 어떻게 저렇게까지... 나쁜 자식.
    딴 여자가 있다는 영미의 말도 함께 떠올라 울컥 화가 치밀며 욕이 절로 나왔다.
    수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전화도 없이 웬 일이냐고 담담하게 말했다. 침대에 걸터앉으며 ‘수희야’ 하고 울먹이면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 반응이 전혀 뜻밖이었다.
    그녀가 내 손을 뿌리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비참한 꼴을 보이게 되어 느닷없이 불쑥 찾아온 내게 화가 났다는 표시인가? 눈물까지 보이며 자기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그런 내 동정을 받기 싫다는 뜻인가?
    왜 이래? 내 얼굴에 멍든 거 때문에 그래?”
    현관 대리석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앞에 있던 조각품에 얼굴을 부딪쳤다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아무개의 작품인데 돈을 얼마를 들여 겨우 구입했다고 자랑하던 그 조각품이다. 내 손을 마주 잡으며 와락 눈물을 쏟을 수도 있었건만, 그녀는 진실을 은폐했다. 그리고 나를 외면했다.
    눈에 불을 보듯 빤한 일인데 사실을 숨기면 내가 믿으리라고 생각할까? 바보,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만 두는 저 속이 어떨까? 이제는 목구멍까지 치솟아 더 담아둘 공간도 없을 텐데.., 저렇게 말하는 저 가슴속엔 소나기 같은 눈물이 내리고 있으리라. 누구에게든 하소연을 해야 숨통이 트일 것 아닌가?
    그 상대는 나밖에 없다. 나는 지극히 차분하게 그리고 애원 조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수희야. 이제 좀 솔직해져라. 언제까지 감추고 살 작정이니? 너 남편한테 맞았지?”
    수희는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우리 남편은 나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인데 그럴 리가 있겠냐면서, 남편이 너무 걱정을 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위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말이 막히고 말았다. 수희는 끝까지 사실을 감추고 남편을 감쌌다.
    한참 변명을 늘어놓던 그녀는 정말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을 했다. 어이가 없었다.
   “왜 내가 너무 잘 사니까 배가 아파서 괜히 한번 해본 소리야? 내가 남편한테서 얻어맞기라도 했으면 하고 바라는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아냐.”
    후끈했던 내 감정에 그녀는 찬물을 끼얹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고백하고 위로하며 돌파구를 찾아야겠다는 나의 의도를 그녀는 시커먼 휘장으로 가로막아 버렸다.

    인간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다. 마음의 문이 서서히 닫혀지면서 불쌍하다는 감정도 사라졌다. 수희가 가끔 나를 찔러도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참았었다. 이미 나 있는 상처는 조금만 건드려도 피가 흐르니까. 쓰라린 기운이 가슴으로 올라왔다. 이건 어지간해야지 대꾸라도 하지, 나는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화를 꾹꾹 누르며 듣고 있었다.
   “왜 암말도 안해? 내가 너무 유치해서 상대하기 싫다, 그거야?”
    말이 좀 지나쳤다 싶었는지 수희는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론을 또 펼쳤다. 내게는 신물이 나도록 지겨운 이론이다.
   “나한테는 네가 가장 친한 친군데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에 너하고 상의를 하지 그냥 있을 내가 아니잖아?”
    나한테 솔직하게 진실을 털어놓은 적이 아직 한번도 없는 그녀 아닌가? 정말 뻔뻔스럽다.
    실은 아까부터 영미가 한 말들이 입안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모르는 척할까 말까 하고 계속 망설이고 있는데, 별안간에 그녀가 진저리치게 밉다는 감정이 온몸에 밀려왔다. 드디어 그 이야기가 입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평소에 쌓였던 불쾌한 감정들도 합세를 해 그녀를 아주 난처하게 몰아붙였다.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내가 너의 제일 친한 친구냐?’ 라는 식으로.
    수희는 그건 사실과 다르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우리 남편이 첫부인과 이혼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나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야. 나랑 결혼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데 나로서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어. 나 역시 그이를 사랑했어. 이혼할 때 재산은 그 여자가 다 가져가 그이는 알거지나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시련을 극복했어. 그리고 사업도 더 크게 번창시켰어.”
    수희는 모든 것을 다 반대로 말하고 있었다. 여자 얘기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어떤 여자가 돈을 보고 우리 남편을 유혹한 일이 있지만, 벌써 끝난 일이야. 그이는 눈하나 깜짝 안했어. 우리 남편 양복 쫙 빼 입고 밖에 나가면 쳐다보는 여자들 많아. 거기다가 돈 있고 성격 좋으니 여자들이 따르는 것은 기정사실 아니겠니? 허지만 그이한테는 나밖에 없어.”
   ‘밖에 나가면 쳐다보는 여자들이 많다’는 수희 말은 남편의 외모가 멋있다는 뜻이었다. 키가 너무 작고 체격이 왜소해 볼품이 없어 한번 더 쳐다본다는 그런 뜻은 결코 아니었다.
    수희의 변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는 자기가 너무 행복하게 잘 사니까 그런 허황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며, 내가 자기하고 친하니까 영미가 질투를 해 중상모략을 했다는 것이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질투라는 말에 언뜻 옛날 여학교 때 일이 생각났다. 내가 영미와 친하게 지내게 되자 수희가 질투를 해 괴상한 말로 내 속을 뒤집어놓은 일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인 자기를 무시하고, 부잣집 딸이며 공부 잘하는 영미한테로 내가 붙었다는 것이었다. 수희 자신은 약자이고 영미는 강자이니까, 강자한테 붙었다는 말을 다른 친구로부터 들은 것이다. 강자 약자 따지려는 영미보다는 수희가 강자다.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영미에 비하면 수희는 체격도 크고 키도 크며 또 힘도 세다. 어린 나이에도 수희는 세상을 보는 잣대를 돈에다만 놓고 잰 것이다.
    그때 난 붙었다는 저속한 말에 너무나 화가 나서 토할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을 느꼈었다. 당장 달려가 따지며 한바탕 하고 싶었으나 일러준 친구는 절대로 모른 척하라면서 자기 입장 난처하게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영미도, 수희의 열등의식과 자격지심 때문이니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라고 했다. 자기 자신이 그러니까 남도 그런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미는 말을 전한 아이한테 도리어 충고를 했었다.
    그 후부터 일단 마음을 접고 수희를 대했으나, 수희의 끈질긴 필요에 의해 난 언제나 그녀의 제일 친한 친구였다. 세월이 약인지, 그 더러웠던 감정도 점점 엷어지더니 그녀를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었다.
    그러나 지금, 밉다는 감정이 또 복받혀 난 수희를 계속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럼, 옛날엔 내가 영미한테로 붙고, 지금은 너한테 붙었니?”
    수희는 그게 무슨 소리나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나도 정색을 하고 십 년도 훨씬 더 넘은 일을 따지고 들었다.
    이미 다 삭아 없어져버린 감정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화가 나는 것은 웬 일일까?
    그녀는 펄쩍펄쩍 뛰며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뗐다. 멍든 얼굴이 더 일그러지면서 그 표정이 너무 흉측해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섬뜩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온몸에 핏줄이 팽창해 퉁겨 나오는 징 소리 같았다.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펄펄 뛰며 변명을 했다. 부모형제에게보다도 더 마음을 주고 좋아한 친구가 나란다. 도대체 누가 그랬느냐고, 한국 나가서라도 만나서 삼자대면하자는 것이다. 부모형제보다 더.., 운운하는, 끈적끈적한 그녀의 목소리가 목에 감기면서 갑자기 살갗이 도르르 일어서는 듯하더니 소름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수희가 지겨웠다. 그녀의 얼굴을 대하기도 싫었다. 정말이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어릴 때부터 이런 감정이 들랑날랑 했었다. 언젠가 남편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당신은 맨날 왜 수희한테 질질 끌려 다녀? 그런 친군 진작에 잘라버렸어야지.”
    천륜이 아닌 이상에야 그런 인연은 맺을 필요가 없다는 남편의 말에 그가 몰지각한 사람 같아 실망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로부터도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녀에게서 소식이 없으면 홀가분해져야 할 텐데 자꾸 생각이 나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십여 년을 질기게 이어온 그 끈끈한 인연 때문이겠지. 미운 정도 정이니까.
    내 의지에는 상관없이 자기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접근해오는 그녀인지라 곧 무슨 연락이 있으리라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이번에는 그냥 허물어지지 말고 좀 냉각기를 가져야지 하고 마음을 굳게 먹기도 했다. 두 갈래 길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 나도 몰라 내 자신이 미웠다.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내가 바보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차 날이 갈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에 안 보이면 멀어진다 듯이 그 질긴 인연이 슬슬 끈을 놓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인연은 항상 수희가 끈을 잡아당기면서 맥을 유지해왔다.

    그렇게 소식 없이 거의 석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느닷없이 수희가 찾아왔다.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남편이 유럽으로 출장을 갔다면서 기가 폭 죽은 모습이었다. 얼굴도 야위어 꺼칠해 보였고 어디가 아픈지 안색이 아주 안 좋았다. 암말도 않고 있는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대뜸 애 데리고 공원에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오래간만이다, 그간 어찌 지냈니?’ 등등의 일상적인 말들은 그녀도 하지 않았다. 다른 때는 물어보지도 않고 당당하게 활기차게 아들을 데리고 나갔었는데, 그날은 나를 대하는 태도에 어딘가 조심스러운 데가 있었고 또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풀 죽은 모습을 보니 그녀가 불쌍했다. 끝없이 미웠다가 또 불쌍했다가, 하는 내 마음을 나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정확히 열흘이 지난 아침, 나는 천지가 진동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잠깐 정신을 잃었었다.
    수희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한 달 복용할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한꺼번에 다 삼켜버렸다고 한다. 그녀가 불면증에 시달려 이런 저런 약들을 복용하고 있던 사실을 나는 몰랐었다. 빈집에 혼자 죽어있는 것을 부동산회사 직원이 발견했다고 한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수희가 죽다니.., 거짓말이야.
    사실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날 수희는, 아들을 데리고 나가 재미있게 놀았다면서, 풀 죽었던 아침 모습과는 달리 환히 웃으며 아주 기분이 좋아 장난감도 사고 시장까지 잔뜩 봐 가지고 들어왔었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손수 부엌에 들어가 요리솜씨를 발휘했고 설거지까지도 다 해주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가 싫어 핑계삼아 컴퓨터만 두드리고 있었다. 수희는 아들과 늦게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이 출장을 갈 때에는 늘 따라다녔는데 이번에는 안 따라갔다고 했다. 혼자 자려니까 왠지 무섭다고 쓸쓸히 웃는 얼굴 표정이 맘에 걸렸지만, 잘 방도 없을 뿐더러 또 나도 원치 않아 그대로 보냈었다. 잘 있으라는 그녀의 말꼬리에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끈끈히 묻어 났고, 애잔한 눈빛을 온 집안에 남긴 채 돌아서는 그 뒷모습이 굉장히 외로워 보였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려 눈인사로 잘 가라는 말을 대신했다.
    한데, 그녀가 눈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내 가슴속엔 그 쓸쓸한 모습이 계속 남아있어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무슨 말을 할듯 말듯 내 눈치를 살피면서 머뭇거리던 수희의 표정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수희 남편은 유럽출장 중이 아니고 아예 짐을 싸 새여자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고는 한번도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녀의 죽음은 사업파탄과 가정불화로 인한 자살로 판정이 났다.
    혹시 내게 마지막 편지라도 부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편지함을 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러나 유서는 없었다.

    수희는 시커멓게 썩은 가슴에 얹힌 무거운 눈물을 쏟아놓지도 못하고 한줌의 재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바람 속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수희를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손을 내밀기는커녕 그녀의 아픈 가슴에 비수를 날렸다. 그리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그녀를 조소의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그녀를 감싸고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 수희가 아들 방에서라도 자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감지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척 외면했다.

    우리 집에서 그냥 자기만 했더라도 그녀는 가슴에 쌓인 눈물을 쏟으며 속을 터놓고 내게 하소연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새 삶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영미의 말을 무심히 흘려버리고 그녀를 지극히 정상인으로 생각하며 코너로 몰아붙인 내 파렴치한 행위가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것 같아 괴로워 미칠 지경이다. 영미는 미국에 다녀간 후로도 나와의 통화에서 수희 안부는 꼭 물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난 수희에 대한 감정이 악화돼 있어 영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장황한 설명에 동의하지 많고 수희를 감싸는 영미가 얄미웠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수희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하고 자신만만하게 잘라 말했었다.

   그날 밤, 수희가 나간 다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 틈새로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녀는 자동차 시동을 건 후에도 금세 떠나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안고 긴 그림자를 동행하며 차안으로 들어가던 그 마지막 날 밤의 수희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수희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수희를 부르며 허리를 꺾고 엎드려 울었다.

    아득히 먼 하늘, 어느 한 자락에서 쏟아져나오는 찬란한 빛을 받으며 수희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바람에 실린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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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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