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3

2011.01.28 12:04

김영강 조회 수:446 추천:70


    -장편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3회


    그리고 두 주가 지난 후, 죽기 바로 며칠 전에 전화가 왔었다. 생각했던 대로 역시 돈 이야기였다. 미경은 ‘또 시작이로구나.’ 하는 후끈한 덩어리가 치밀어올라 언니를 만나고 싶다는 동생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계속 고민에 빠져 밤잠을 못 잤다. “언니가 안 도와주면 나 죽어버릴 거야.” 하고 전화를 탕 끊어버린 동생의 음성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남편은 죽든 말든 인연을 끊어버리라고 강력히 말했다.

    소설의 끝 부분은 이렇게 매듭지어졌다.

    <<아침이 되어서야 푸르스름한 가운을 입은 남자 둘이 들어섰다. 진회색의 제법 두꺼운 비닐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애경이를 둘둘 말고는 노끈으로 팔 그리고 발목 부분을 단단히 묶은 후, 들것에 담고는 두 사람이 들고 방을 나갔다.  
    그 순간,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천장에 목을 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람을 발견했으면 놀라 뛰어나와 먼저 옆집 사람을 부르는 것이 상식 아닐까?’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어 미경은 톰이 가리켰던 저기라는 곳을 자세히 살펴봤다. 애경이가 목을 맨 곳이다. 거기에는 손목만큼 굵은 파이프가 여러 개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곧고 매끈매끈한 보통 파이프가 아니었다. 납으로 만들었는지 표면이 좀 꺼칠꺼칠해 보이고 또 약간은 울퉁불퉁하기도 한 것들이 색깔도 허옜다. 파이프가 천정에 딱 붙어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었다. 히터 시스템이라 했다.  

    길 한쪽 옆에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차 뒷문을 열고 들것째로 애경의 시체를 밀어넣고는 문을 쾅 닫았다. 부르릉거리는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동생의 통곡이 되어 미경의 고막을 쳤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경아!” 하고 부르며 달리는 차를 향해 뛰었다. 남편이 따라와 붙들었다.

    어느새 쫓아왔는지 톰도 미경의 팔을 잡았다. 소름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톰의 팔을 세차게 뿌리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가슴 속에 쌓였던 덩어리들이 통곡이 되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통곡소리는 아침공기를 가르며 하늘에 땅에 마구 퍼져나갔다.
    남편이 말했다.

    “남들한텐 자살했다 그러지 말고 교통사고라고 해.”

    그 다음날부터 미경은 편지함을 열 때마다 가슴이 섬뜩섬뜩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유서는 없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창작이고 허구라고 하지만, 강미경의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의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진실을 밝혀도 괜찮을 것이라는 계산 아래 이 소설을 발표했을까? 이 소설을 근래에 쓴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마도 애경이가 죽고 나서 바로 썼을 것이다.’

    끝맺음에서 교통사고로 위장하라는 이민우의 말은 현실감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천륜이지만 그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어 갈망하던 소망을 톰이 이루어주었기에, 그 끔찍한 사건을 영원한 어둠 속에 묻어버린 것일까? 조금만이라도 톰을 추궁했더라면 단번에 밝혀질 진실을 일부러 모른 체한 것일까?’

    또 한 가지 의문은, 소설 어디에도 의사가 다녀갔다는 얘기가 없었다.

    ‘사망진단서 없이 현장에서 시체를 치울 수가 있는 것일까?’

    소설도 현실의 법규에 맞아야 한다. 만일 의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창작일 수도 있다. 작가가 미처 생각을 못해 리서치를 철저하게 안 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예외는 있는 법, 의사 없이 시체는 치워질 수 있고, 또 의사가 다녀갔으나 소설에 서술이 안 됐을 수도 있다.

    심사평에는 “미국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그려진 소설이다. 심리묘사가 아주 뛰어나 사품 치는 갈등이 내내 눈을 떼지 못하도록 독자들을 긴장케 한다. 그리고 죽음에 이른 애경의 사연을 담담하게 끌어가는 솜씨가 만만치 않고 끝마무리도 깔끔하다. 애경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글쓰기는 오랜 연마의 수준을 가늠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라고 첫머리에 써 있었고, 그 다음에는 깜짝 놀랄 몇 마디가 덧붙여져 있었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은 애경이의 죽음을 놓고 ‘자살이다, 타살이다.’ 하는 두 가지로 생각이 갈릴 것이다. 그냥 톰의 말을 사실로 느껴버리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옆집에 알리지 않고 먼저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일 경우는 마음이 급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이 소설의 내용에서 보면, 자살을 가장한 타살임이 분명하다. 톰이 틀림없는 범인이지만, 미경의 남편이 시켜서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소설에는 미경의 남편이 처제인 애경을 차라리 죽어 없어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을 갖고 있음이 군데군데 깔려 있었다. 아예 노골적으로 “당신 동생은 사회악이야. 그런 인간은 빗자루로 싹 쓸어 바닷물에 처넣어야 해” 하고 무지한 소릴 했었다.
    그 구절을 읽을 때 나는 ‘강미경이 이렇게 무시를 당하고 산다는 말인가?’ 하고 거기서 그쳤는데, 심사평에는 미경의 남편을 범인의 한 사람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절대 아니라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평론가가 말했듯이 나 역시 애경의 죽음은 타살이라고 심증이 굳어졌지만 그건 톰의 단독범행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남들은 이 소설을 어찌 받아들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톰을 범인이라 지목은 하겠지만, 과연 미경의 남편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도 느껴졌을까?’

    그날 밤, 소설을 읽고 있는 남편을 보며 나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작가가 친구의 언니라는 것을 말해버릴까?’

    친구의 언니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너무 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주인공의 이름이 작가 강 미셀의 한국이름이라는 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소설, 어때요?”

    문학에는 남다른 취미와 특기를 갖고 있는 남편이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이민우와 흡사한 남편, 그 역시 어릴 적 꿈이 작가였다.

    “아주 잘 썼네. 평도 잘해줬고. 올해의 소설로 뽑힐 만해.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같이 현실감이 살아서 움직이는 군.”

    “그렇죠? 작가가 진짜 경험한 일 같죠?”

    남편의 말이 채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 소리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 자신도 놀랐다. 얼른 소리를 낮추었다.

    “근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진짜로 애경이가 자살을 한 걸까요? 아니면 타살일까요?”

    소설이란 사람마다 시각을 달리 할 수 있기에 나는 그냥 물어보는 척했지만 질문의 핵심은 따로 있었다. 혹시 주인공의 남편이 가담했을 수 있다는 대답이 나올까 해서였다.

    “글쎄, 작가가 톰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줄거리를 끌어갔네.”

    남편다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는 뒷말을 금세 잇지를 않았다.

    “작품평에는 미경이 남편이····.”

     하마터면 이민우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뻔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남편은 내 머릿속에 이미 이민우라는 세 글자로 각인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톰에게 시켜서 그랬다고····. 당신 생각은요?”

    “글쎄. 그것도 가능한 얘기지. 죽은 다음에는 주인공도 남편도 잘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거기까지는 독자생각이 미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한데, 이런 얘기를 심사평에 쓴 것이 잘 이해가 안 돼. 독자들이 소설을 읽기 전에 심사평을 읽을 게 뻔한데, 심사위원이 이렇게 미리 써버리는 것은 독자들의 궁금증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될 텐데····.”

    듣고 보니 사실이 그랬다. 나는 또 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왜 이렇게 캐묻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가?’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강미경이 동생 때문에 얼마나 지쳐 있었는가는 보지 않고도 눈앞에 그대로 그려낼 수가 있었다. 애경이와 마지막이 되었던 그날, 내게 했던 행동으로 봐도 그렇다. 누구보다도 나는 애경이를 잘 안다. 언니인 강미경보다도 내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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