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1

2011.01.14 21:11

김영강 조회 수:647 추천:70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1회


   일간신문을 대충 훑으며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예면에서 시선이 멈췄다. ‘비극은 끝나다.’ 라는 단편소설이 신문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해마다 한국 문단에서 실시되는 그 해의 가장 우수한 작품 하나를 선정하는 데에 뽑힌 수상작이었다. 강 미셀이라는 재미작가의 소설로 사진도 크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돌멩이 하나가 퐁당 하고 가슴 속으로 뛰어들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물결은 곧 잔잔해졌다. 이곳 엘에이에서 발간되는 신문이라 나는 늘 미주판만 뒤적거리곤 했는데, 어쩌다 본국판을 들여다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강 미셀은 바로 강미경이었다.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그녀를 금세 알아보았다.

   강미경··· ···. 그녀는 한때 내가 애절하게 사랑했던 남자인 이민우의 아내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크리스틴, 이민우가 결혼했을 즈음에 그녀와도 소식이 끊어졌으니 역시 30년이라는 세월이 같이 흘렀다. 여고생이었던 크리스틴이 지금은 거의 50에 가까운 나이가 됐을 것이다.  그녀 생각을 하면 나는 늘 미안하다. 아니, 죄의식에 시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두운 인생길만 걸어온 아이이니 이제는 행복해져야 할 권리가 있다.      

   크리스틴 생각에 잠시 머물다가 나는 강미경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얼굴 사진이 아닌 몸 전면 사진이었다. 천연색으로 처리된 제법 큰 사이즈로 두 손바닥 면적 정도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회색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나무에 기대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머릿결이 날리는 듯했다. 머리 위에 펼쳐진 파란 하늘, 그리고 껍질이 유난히도 거칠어 보이는 거무스름한 나무 기둥과 발밑에 깔려 있는 갈색의 낙엽들이 가을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녀는 여전히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예전에 느꼈던 신비스러운 분위기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강미경이 소설가가 되었단 말인가?’

   문득, 아주 옛날 이민우가 어릴 적 자기의 꿈이 소설가가 되는 것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고전문학에 관해서 특별히 조예가 깊었던 그였다. 조선 시대 시조들을 줄줄 외웠으며 그 작가들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시조뿐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역사 시간에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 보았으나 아는 것이 너무 없어 부끄러웠다. 그가 우러러보였고, 또 그에게 점점 더 빠져들었다.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한민족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를 나는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에게는 학자가 딱 어울렸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이민우는 어디까지나 돈을 쫒는 사업가였으며 이재에 밝은 아주 우수한 두뇌를 지닌 현실적인 남자였다. 그가 나를 버리고 강미경을 택한 사실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럼, 이민우가 아내를 소설가로 만들었나? 소설가 아내를 두었다는 것도 그의 이미지에는 도움이 될 테니까.’

   약력을 보니 벌써 오래 전에 일간신문에서 실시하는 신춘문예에 당선을 했고, 문학상도 탔었다. 몰랐던 사실이다. 문학과는 거리가 먼 나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약력 맨 끝에는 ‘버지니아 거주’ 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버지니아?” 하고 확인하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혹시 우리의 삼각관계에 얽힌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고 재빨리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내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사실 삼각관계이긴 했으나 소설을 쓸 만한 소재는 아니다. 한 남자가 변심하여 다른 여자한테로 가버린 지극히 흔한 스토리였으니까. 그러나 소설엔 처음부터 상상조차 못했던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는 긴박감에 휩싸여 숨을 죽였고, 드러나는 내용에 점점 빨려 들어갔다.  

   강미경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강애경, 그녀는 25년 전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나와는 친구 사이였다. 애경이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가 나도 이민우도 자연스럽게 강미경을 만나게 되었다.

   소설은 바로 애경이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것이었다. 놀랍게도 소설에는 실명이 그대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동생인 애경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인데, 작가인 강미경이 자신의 이름을 주인공에게 갖다 붙였다는 것은 실로 획기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다.
&
nbsp;  ‘필명이 강 미셀이니 가능한 일이었을까? 자신의 감정이 강미경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와 이제는 강 미셀로 굳어졌다는 의미일까?’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한밤중,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며 요란하게 울렸다.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미경은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휘이잉 휘이--잉, 하고 유리창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가 가슴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쫙 끼쳤다.  

   “애경이가 자살을 했어요. 천장에 목을 맸다고요.”

   뭔가에 쫒기는 듯, 숨 가쁘게 뱉어내는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엉엉 우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애경의 남편 톰이었다. 벌떡 일어나 앉는데 무거운 둔기로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아찔함에 현기증이 났다. 애경이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지 않나 하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으나 이어지는 톰의 말은 명확한 현실이 되어 미경의 가슴에 칼날처럼 박혔다.  
   “밤중에 웬 전화야” 하고 남편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톰이에요. 톰”

   미경은 부들부들 떨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남편이 얼른 일어나 불을 켜고 전화기를 뺏었다.>>

   갑자기 목이 탔다. 나는 숨을 크게 한번 내쉰 다음 냉수 한 컵을 죽 들이키고 재빨리 그 다음을 읽어 내려갔다.

   <<"언니, 언니가 계속 그딴 식으로 나오면 나 그냥 콱 죽어버릴 거야." 하고 애경은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심지어는 언니네 식구 다 쏴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는 험악한 말까지 했으나 미경은 동생이 자살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남편은 아파트의 위치를 묻고는 "알았어. 곧 갈게." 라는 한마디를 한 후, 미경에게 빨리 나오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그는 지극히 태연했다. 아마 잘 죽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외출을 알리고 그들은 집을 나섰다.

   바람은 더 기승을 부리며 불었다.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거리에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가로수들이 마구 휘청거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미경은 코트자락을 여민 후, 두 팔을 오므리고 팔꿈치를 꼭 잡았다. 뿌연 불빛을 내비치며 묵묵히 서 있는 가로등의 둥그런 눈에 그득하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불빛 아래에는 눈물이 비가 되어 가는 금을 그으며 흩날리고 있었다.
   남편의 뒤를 따라 차에 오르는데 갑자기 부모님의 슬픈 얼굴이 떠오르며 그제야 울음이 솟구쳤다. 거의 한 시간가량을 차를 타고 가면서 미경은 계속 흐느꼈다. 흐느낌 속에 소리까지 묻어나왔으나 남편은 침묵을 지키며 고개도 까딱 않고 앞만 보며 운전했다.

   동생이 사는 아파트이지만 미경에게는 첫 방문이었다. 온 동네가 침침한 분위기였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도 희끄무레했다. 겨우 눈에 들어온 오래된 아파트들이 마치 유령의 집인 양 음산했다. 웨스턴을 타고 남쪽으로 피코 불루버드를 지나 한참을 내려왔으니 그녀에겐 동네 자체에도 첫걸음이었다.>>

   소설에 서술한 바에 의하면 애경은 센트럴 엘에이 지역, 어느 열악한 환경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미경은 동생의 집에 가보기는커녕 그 동네에조차도 첫 발걸음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파트를 찾지 못해, 몇 번이나 골목을 돌며 헤맸으나, 그들에겐 애경이의 전화번호조차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문도 없는 입구가 입을 쩍 벌리고는 시커먼 속을 들어내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 건물은 꽤 높은데도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안 했고 층계는 너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애경이가 산다는 4층으로 올라가니 컴컴한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애경의 죽음은 옆방에서조차 모르는 듯했다. 어슴푸레 시야에 들어온 복도 끝이 지옥의 입구라도 되는 듯, 미경의 몸은 경직되어 갔다.>>

   갈수록 궁금증은 더해 갔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최고로 비싼 동네에서 살던 애경이가 이렇게 살다가 죽었다는 말인가?’  

   나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허구인 소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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