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17

2011.05.06 10:33

김영강 조회 수:567 추천:98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17회



   “아버지가 구박받는 저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그 여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화를 불러일으켰나 봐요. 어릴 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질투한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중학생이었지만 워낙에 키가 크고 또 빨리 성숙한 편이라 대학생 같았거든요. 미국 오자마자, 한 번은 어느 학부형이 학교에 왔다가 운동장에서 지나치는 저를 보고 선생인 줄 알고 공손히 인사를 하며 도서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어요."

   그녀는 씩 웃었다. 사실 지금도 크리스틴은 나이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인다. 이민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대학생 같지가 않았다. 아주 멋있는 아저씨였다.

   “아들을 낳은 다음부터는 구박이 더 심했어요. 양아버지도 그 애한테만 폭 빠져서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요.”

  양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믿어왔던 나의 상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정말 크리스틴의 인생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워 언쟁이 붙었고 결국 새엄마가 폭력을 휘둘러, 크리스틴이 피하면서 그 여자를 밀었는데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찧어 수술까지 받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저는 정말 운이 없는 아이인가 봐요. 고의적인 아닌 사고였는데도 저는 구속에 됐었어요.”

   새엄마는 계략을 꾸며 모든 것을 크리스틴의 잘못으로 뒤집어씌웠고, 평소에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면서 아예 세상 빛을 못 보게 정신병자로 몰아붙였다. 양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병원에 다닌 것이 그 증거의 하나로 크게 작용을 했다.

   1년 정도 병원에 붙잡혀 있다가 퇴원을 하니, 양부모는 어디로 종적을 감춰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 멀리 이사를 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대로 있다고 해도 크리스틴은 집으로 도로 들어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그들 역시 그녀를 받아줄 리는 없다. 없어져버린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크리스틴은 하나의  놀라운 소문을 들었다. 그들이 종적을 감춘 첫째 이유가 그녀 때문이 아니라 어린 아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살이 되도록 말을 못하고 하는 행동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 너무 이상해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자폐아로 판정이 났다는 것이었다. 자폐증은 부모가 지고 가야할 평생 십자가이다. 아주 중증 자폐아였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제가 느낀 게 뭔 줄 알아요? 입양한 아이를 정신병자로 몰아 병원에다 버리더니, 고거 봐라. 죄 받았지? 신과의 약속을 깼으니 싸다 싸.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말에 동조를 했다가는 내게도 무슨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것 같아 두려웠다.

  “선생님, 정말 뭐가  있는 거  같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으나, 그냥 “뭐가?” 하고 물었다.

  “하나님 말예요. 앞으로 무서워서 나쁜 짓 못 할 거 같아요.”

  병원에서 퇴원한 크리스틴은 다시 고아원으로 갔다가 두 번째로 미국으로 입양이 된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고초를 겪다니··· ···.’

  나는 그녀의  말에 감동을 받으면서 눈물까지 글썽였고 내가 인생을 다시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인데도 그녀는 나보다 세상을 아주 많이 산 사람처럼 보였다. 현실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 그녀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내게 위로할 겨를도 주지 않고크리스틴이 화제를 돌렸다. 이민우 얘길 꺼낸 것이다.

   “이민우 선생님 결혼했다고 그러던데 혹시 선생님은 아셨어요?”

   나는 한 대 뻥하고 옆구리를 차인 것 같아 순간적으로 얼떨떨했다. 나와 이민우가 애인관계였다는 것은 학생들은 아무도 모른다. 과외를 시작할 때, 이민우가 아이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고 내게 부탁을 했었다. 나 역시 동감이었기에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는 더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을 했다.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며 그들을 속였다.

  아이들한테뿐만 아니었다. 이민우는 주위의 아는 사람들에게도 나를 철저하게 숨겼다. 나는 그의 친구들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내게는 늘 불만이었다. 나는 그가 내 남자친구인 것이 자랑스러웠으나 그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민우가 그만둔 후, 아무도 내게 그의 안부를 묻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크리스틴이 그의 얘기를 꺼낸 것이다. 잠깐 당황했지만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그래. 나도 몰랐는데 한참 후에 소식 들었어.”

  “어떤 여자예요? 소문 들으니까 굉장히 예쁘고 똑똑하고 또 집안도 좋고, 좋은 건 다 갖추었다던데 정말 그래요?”

  “그래. 민우 선생님이 장가를 아주 잘 갔나봐.”

  의외로 담담하게 말이 나왔다.

  “근데, 선생님은 결혼식에 안 가셨어요? 청첩장도 안 보냈어요?”

   마땅한 구실이 생각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가 내 정곡을 찔렀다.

  “선생님이 민우 선생님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맞죠?”

  크리스틴에게 이렇게 당돌한 면이 있는 것도 처음 발견했다. 나는 가타부타 대답을 회피했다.

  “그래? 나는 그런 소문이 난 것조차 몰랐네.”

  철저하게 비밀로 하며 아이들을 속였으나 그들은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 뒷말을 기다리는 듯 잠시 내 눈을 응시하다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선생님만 좋아했나요 뭐? 애들도 민우 선생님 다 좋아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랬어요. 유해주 선생님이 좋아하는 남잔데 꿈깨라 꿈깨 하고요. 민우 선생님보다  해주 선생님을 우린 더 좋아했거든요.”

  크리스틴의 장난기 섞인 가벼운 음성이 내 좁은 아파트를 밝게 해주고 있었다. 크리스틴의 이렇게 밝은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실은 저두요, 많이 좋아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가 민우 선생님이에요. 그냥 처음 보자마자 필이 ‘팍’ 하고 꽂혀버렸거든요.”

  싱긋이 웃는 그녀의 얼굴에 이민우가 겹쳐지고 있었다. 커다란 체격, 하얀 피부, 이국적인 용모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민우 선생님은 가르치는 데에 성의가 없었어요. 나중엔 우리가 실망을 많이 했죠. 좋아하던 마음도 점점 줄어들었구요.”  

   학생들이 보는 눈은 정확했다. 이민우의 그런 점이 늘 나를 안타깝게 했었다.

  “선생님은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주셔서 이해가 잘 돼요. 그리고 정말 열심히 가르치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크리스틴이 그리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약간 당기던 다리가 일시에 다 낫는 기분이었다.

크리스틴이 갑자가 킥킥 웃었다.

“실은 선생님 첨 봤을 때, 저는 선생님인 줄 모르고 저보다 어린 학생이 공부하러 온 줄 알았어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나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국교회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고, 신랑 쪽에는 하객이 거의 없었다는데도 학부형들한테는 일체 알리지 않은 모양이지? 내게 대한  양심이 작용한 것이었을까?’

   그녀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면서 다시 화제를 바꾸었다.

  “선생님, 엄마한테서 우리 오빠 얘기 들으셨죠?”

  물잔과 물병을 들고 돌아서서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아주 침착해졌다.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며느릿감으로 점을 찍었던 사실을 크리스틴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음 말을 바로 이었다.  

“우리 엄마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우리 오빠랑 결혼하면 안 돼요.”

  그녀는 직선적으로 결론부터 말했다.  

  “왜, 지난번에 엄마가 선생님보고 입주가정교사로 우리 집에 들어와 사시라고 했잖아요? 그때 전 선생님이 허락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내게 라이드의 손길을 내민 후, 내 좁은 아파트를 방문한 바로 그날, 크리스틴의 어머니는 입주가정교사를 제안했었다. 그때는 나를 며느릿감으로 찍어놓은 것을 모르는 상태였으나, 어느 집이건 간에 들어가 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상태이기도 했으나 아팠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게 다 오빠 때문이었어요. 물론 아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엄마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어떻게 선생님한테 오빠를····. 엄마가 오빠를 너무 과잉보호하기 때문에 오빠는 더 비정상인 길로 가는 것 같아요. 오빠는 좀 이상한 남자예요. 집을 훌쩍 떠나서 소식이 없다가 한참 만에 돌아오곤 해요. 옛날부터 그랬는데 지금도 여전해요. 학교도 휴학하고 또 다니고 그래요. 지금 서른 살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대학생이거든요. 그래서 결혼을 하면 마음을 잡을까 해서, 선생님 알기 전에도 엄마가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오빠가 통 말을 안 들었어요.”

  그녀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얘길 계속했다.

  “떠돌아다니는 병이 있는 거지요. 언제 어떻게 또 훌쩍 어디로 사라져버릴지 아무도 몰라요. 첨엔 엄마가 무척이나 고민했지만 이젠 받아들일 때가 됐는데도 엄만 오빠를 붙잡아 두려고, 만날 결혼시킬 생각만 하나 봐요. 엄마는 자기가 낳은 아들인데도 오빠를 너무 몰라요. 근데 제 생각에는요, 혹시 오빠가 결혼을 할 수 없는 몸이 아닌가 하는··· ···.”

  자기가 한 말에 자신도 놀란 듯이 크리스틴은 말을 중단하고는 두려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어마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더 이상의 얘기가 나올까봐 두려웠을까? 왜 오빠가 결혼할 수 없는 몸이라고 느껴졌을까?’

  긴 얘기들이 많은 여운을 남겼다. 친부모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도 그랬다. 세 살 때 친부모한테서 버려졌다면 생부와 생모에 관해서는 기억이 없을 것이다.

  그 며칠 후였다. 그날도 엄마 대신 크리스틴이 왔다. 병원엘 갔다 온 후 그녀가 물었다.

  “선생님, 저 오늘밤 여기서 자면 안 돼요?”

  나는 “여기서?” 하고 깜짝 놀라 반문했다.

  “네. 여기 바닥에서 자도 괜찮아요.”

  잠자리가 마땅치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내 아파트에서 자겠다고 제안한 것이 놀라운 사실이었다. 가끔 나타나는 환영 때문에 혼자 자는 것이 두려웠는데, 참말로 손뼉이라도 치며 환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전처럼 침대에서 떨어지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나, 가위에 눌리고,  막 쫓겨 도망을 가야 하는데도 한 발자국도 발을 떼놓을 수가 없어 발버둥을 치는 꿈은 가끔 꾸었다. 손가락 하나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꿈속에서 ‘이건 꿈이야. 현실이 아니야. 아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 괜찮아’ 하고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꿈을 깨고 나선 ‘그거봐. 정말 꿈이었잖아.’ 하고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면서 기뻐했다. 그러면서 환영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땐 “야, 귀신들아, 내가 니네들을 무서워할 줄 아니. 하나도 안 무서워. 아무리 겁을 줘도 나는 안 넘어가.” 하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아주 똑똑한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눈을 똑바로 뜨고 외치기도 했다.  

  언젠가 목사님 설교에서 들은 얘기를 써먹은 것이다. 설교를 들을 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코웃음을 쳤으나 내 처지가 급하니 뭐든지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예수의 이름으로··· ···.” 라는 말도 꼭 덧붙였다. 그리고 자기 전에는 기도를 했고 성경도 읽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틴이 우리 집에서 자도 되느냐고 제안을 한 것은, 내게는 구세주나 다름없는 반가운 소리였다.

  “그럼 괜찮지. 그런데 어머니가 허락하실까?”

  “그럼요. 엄마는 선생님이랑 내가 친해지기 바라니까 좋아하실 거예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우리 엄마가 선생님 좋아하는 거.”

  오빠 얘기는 꺼내지 않고 그녀는 의미 있게 웃었다. 크리스틴의 말대로 그녀의 어머니는 첫 마디에 좋다면서 아주 유쾌히 허락을 했다.

  “요즘 무서운 꿈을 꾸어 혼자 자기가 싫었는데 너무 잘 됐다.”

  “어마나 그러세요. 저도 한국 있을 때,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밤마다 꿈을 꾸었잖아요. 왜 제가 말씀드렸죠. 근데 꿈같지가 않았어요. 진짜로 뭐가 눈에 보였거든요.”

  “그래 나 역시 그래. 진짜로 헛것이 눈에 보여.”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얘길 했다.        

   “그건 선생님이 지금 몸이 너무 허약해져서 그런 거예요.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것 같아요. 건강해지시면 괜찮을 거예요. 병원에도 갈 필요 없어요. 병원에 갔다가 기록이 남아 나중에 저처럼 정신병자 취급 받을지도 몰라요.”

   “그래. 나도 병원에는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닥터 윌헴한테 말해볼까 하다가  조금씩 덜하기도 하고, 또 창피해서 암말 안 했어.”

  “창피할 거야 없죠. 선생님도 혼자 사시려니 힘든 일이 많은가 봐요.”

  순간, 가슴이 찡했다. 고아인 것은 크리스틴이나 나나 마찬가지 신세다. 가르치는 제자이지만 이민우로 인해 힘든 이 맘을 다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 언뜻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나의 고통을 하소연 한 적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냐는 나의 질문에 크리스틴은 아주 편하게 잘 잤다고 활짝 웃었다.

  “선생님, 다음에 또 자도 돼요? 집에서보다 훨씬 편하게 잘 잤어요. 한번도 깨지 않고 계속 자고 나니 몸이 아주 가뿐해요.”

  잠시 말을 끊은 그녀는 웃음이 싹 가신 얼굴로 한숨을 푹 쉬면서 내 서선을 외면하고 말했다. “집에서는 잠이 깊이 안 들어요.” 하고.    

  순간, 나는 엉뚱한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집에서는 잠을 깊이 잘 수 없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번 더 라이드를 주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내 아파트에서 밤을 지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첫 입양이 되었을 때, 그녀 말대로 새끼 식모로 살아 그런지 크리스틴은 청소선수였고 반찬도 곧잘 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 공부도 했고, 그녀가 시장까지 봐와서 만든 음식으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 그냥 이렇게 크리스틴이랑 둘이 살았으면 하는 상상까지 했다.  

  어느 날 밤. 드디어 그녀는 자신의 친부모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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