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를 넘는 무명치마

2018.08.24 07:19

허세욱 조회 수: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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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넘는 무명치마 - 허 세 욱 -



그날이 마침 초파일로 기억된다. 모처럼 휴가를 얻어 돌아 왔다가 귀대(歸隊)하는 날이다. 병역을 치르는 동안 누구에게나 귀대날짜는 우울했다. 싫은 귀대를 앞두곤 수일 전부터 뒤숭숭하고 뜨락에 아무렇게나 핀 풀꽃에도 전에 없던 애착을 느끼곤 했다.

어머님은 초칠일 아침, 일찍부터 뒤주에서 쌀을 퍼선, 그걸 뒤적이며 손수 뉘나 잔돌을 고르셨다. 토막마루에 앉으셔서 꼴딱 한나절을 보내시는 거다. 대학을 나오고 그만큼 성장했는데도 나는 잔치 전날의 정갈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뉘와 잔돌을 고르고 나면 그걸 물에 담갔다. 이튼날 아침 하얗게 부어 오른 쌀을 자루에 담았다. 족히 한 말은 넘을 법했다. 그리고 풀칠하여 곱게 다린 흰 무명치마를 갈아 입으셨다.

이십리 밖, 노산(魯山)치 절을 떠나는 차비에 바빴다. 여느때 같으면 집에서 점심까지 먹고 당시 자주 들락거리던 산판(山坂) 트럭 꼭지에 달랑거리며 기차정거장으로 가야 했는데, 어머님의 절 나들이를 배행키로 했다. 하기야 가시는 절이 역으로 가는 방향과 비슷하기에 적어도 그 중도까진 배행할 수 있었다.

어머님은 공미(供米) 자루를 또아리도 없이 머리에 이셨다. 육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한 말 남짓의 쌀을 이셨다. 내가 들재도 마다하셨고, 머슴을 시켜 지게에 지재도 굳이 사양하셨다. 그걸 이시고 먼 두멧길을 걸으셔서 더구나 가파른 재를 오르시겠다는 게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와 나는 같이 길을 나섰다. 오리쯤 신작로 자갈길을 걷다가 이제부턴 논둑길을 다시 오리남짓 걸었다.

겨울을 난 무대가리처럼 덩치는 컸지만, 그 속에 잔뜩 바람만 들어 심심하기 짝이 없는 자식이라서 재미가 없었다. 모처럼 모자의 산책인데 이건 너무했다. 보리가 숙성하게 자란데다 뻐꾸기 울음이 산등성이를 울리는데 그냥 맹탕으로 걷기만 했다.

맵시라고는 깡그리 없게 풍덩하게 입은 초록색 군복의 자식은 하얀 무명치마 곁을 냉큼냉큼 걸었다. 가끔 머리에 인 쌀자루를 들어 고쳐 이실 뿐, 어머니는 좀처럼 후유-하질 않았다. 개버들이 휘영청 늘어진 도랑을 건너서 난 좀 쉬어 가자고 했다. '괜찮다'시면서 도랑의 보에 앉으셨다. 공미를 내려놓자고 했다. 끝내 막무가내신 것이다. 부처님 앞에 공양하기까진 절대로 불결한 땅에 내려놓을 순 없다고 고집하셨다. 그리고 연신 땀을 씻으며 먼산을 바라보셨다.

이윽고 절로 올라가는 산턱에 이르렀다. 쉬엄 쉬엄 십오리(十五里) 길을 걸어온지라 기차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뛰기로 작정한다면 절에까지 모셔다 드리고 가도 좋으련만 그러기엔 시간이 총총했다.
어머니는 거기서 헤어지자고 꾸중하듯 말씀하셨다. 다 큰 자식에게 눈물이 핑 돌았다.

한참동안 머뭇거리다 나는 그 길로 정거장을 직행키로 했다. 말하자면 타관에서 모자가 작별을 했다. 나는 안개 낀 눈으로 길다랗게 꼬부랑한 논두렁을 뛰었다. 왠지 머리 뒷통수가 짜릿해서 얼른 뒤돌아 볼 수 없었다. 한참 뛰다가 이제쯤 어머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으려니 하고 헐떡이는 숨을 멈추었다.

웬걸, 파란 산모퉁이 그 자리에 하얀 쌀자루가, 아까와 마찬가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거기서 '엄마!' 하고 산울림이 나도록 소리치고 싶었지만 소리는 목구멍으로 기어들고 눈이 축축해졌다.

나는 다시 걸었다. 이젠 내를 건너 산 모롱이로 접어 들었다. '이때다!' 하고 신록의 총림에 숨어 건너편을 보았다. 어머님은 우두커니 섰더니만 무언가 두리번거리며 비로소 산길을 오르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하얀 무명 옷자락이 기우뚱거리며 파란 잎사귀에 파묻힐 때까지 나무등걸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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