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들이

2021.01.09 22:43

이진숙 조회 수:111

겨울 나들이

                                            이진숙



 ‘구장군 폭포’ 맞은 편 위쪽에 있는 정자에서 먹은 김밥은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음에도 달았다. 집에서 나서기 전에 끓인 뜨끈한 둥굴레차를 보온병에 담아 왔다. 그곳까지 올라오느라 마침 시장기가 들었는데 추운 날씨 임에도 딸 모녀와 우리 내외 넷이서 뜨거운 차와 함께 먹으니 추위쯤은 문제될 것도 없었다.

 한 달간 일정으로 큰마음 먹고 한국에 왔지만 자가격리 2주간을 지나고 나니 갈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서 마음이 바빴다. 매일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에 대해 계획을 세웠지만 추운 날씨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것들이 더 많았다. 멀리 떨어진 곳 나들이는 어려울 것 같고 가까운 곳으로 방향을 돌려 순창 ‘강천산군립공원’으로 오게 되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앞에 있는 ‘여성전용화장실’부터 다녀왔다. 어느 관광지를 가든지 감동으로 다가 오는 곳이 바로 화장실이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고 해외여행에서도 만날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만 맛 볼 수 있는 감동이 바로 이곳 화장실이다. 특히 강천산군립공원 입구에는 여성 전용화장실까지 있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후회 막심했다. 군데군데 쌓인 눈이 녹아 흘러서 얼어붙은 빙판을 보니 가볍게 생각하고 평소대로 운동화를 신고 나온 내가 바보 같았다.

 그래도 모처럼 큰마음 먹고 오랜만에 한국, 아니 친정 나들이를 한 딸과 손녀를 데리고 왔으니 용기를 내보자 하며 매표소에서 아이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다.  부지런하게도 벌써 다녀온 사람들의 차림새를 보니 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입구에 있는 화장실을 지나자마자 내 걱정이 괜한 짓이었음을 단박에 알아챘다.  양 옆 계곡과 산에는 눈이 쌓여 있고 길에도 마찬가지로 눈이 쌓여 있는데, 고맙게도 길바닥에는 미끄럼을 막기에 적당한 고운 흙이 쭉 뿌려져 있었다.

부지런한 공원관리인들에게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가 나왔다.

딸과 손녀는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기쁨의 환호성을 울리며 여기 저기 사진 찍기에 바빴다. 마치 모녀가 다정한 친구인 냥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눈을 뭉쳐 던지기도 하고, 얼어 있는 눈덩어리를 돌처럼 쌓기도 하면서 즐거워했다.  핀란드는 산이 거의 없고 언덕과 평지가 많다며 모처럼 멋진 풍경에 홀딱 반한 모습들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얼어붙은 조각들이 따뜻한 햇살에 녹아떨어지는 소리가 웅장한 나팔소리처럼 계곡에 울려 퍼졌다.

하늘은 추운 날씨와 어울리게 *토청 색(코발트 불루)으로 쨍하게 맑은 색이 마음까지도 말갛게 씻어 주는 듯했다.

열심히 걸어 올라가다 보니 마스크 속으로 침인지 땀인지 모를 물방울이 맺혀 위로 올라오는 바람에 안경알이 뿌옇게 흐려져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뿐이랴! 강천산 공원의 맑고 투명한 공기를 직접 들여마실 수 없는 오늘이 참 원망스러웠다.

 핀란드는 사람 수가 워낙 적다 보니 밖에 나들이 할 때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마트에 들어 갈 때 만 쓰는데 그것도 강제가 아니어서 거의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린 손녀는 끝까지 마스크를 벗지 않고 잘 견디어 주니 대견했다.

 곳곳에 있는 폭포는 여기저기 고드름이 매달려 있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얼음 속에서도 쉬지 않고 흘러가며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주고 있었다.

 걷다가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바위에 별자리가 새겨져 있었다. 호기심에 멈춰 서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녁에는 불이 들어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할 것 같다.

 "할머니, 이게 무슨 별자리예요?"

 "어디, 우리 손녀의 별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서로의 별자리를 찾아 가며 즐거워했다.  따뜻한 봄이나 더운 여름이었다면 신발 속에 벗어 놓은 양말을 뭉쳐 넣어 양손에 들고, 호기롭게 맨발로 걸었을 텐데, 곱게 다듬어 놓은 그 길들이 지금은 눈으로 덮이고 그 위에 흙이 뿌려져 있었다.

 어느 새 하늘 위로 붉은 색 현수교가 멋지게 결려 있는 곳에 다다랐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내 간은 정말 콩알 만 할까? 한 번도, 어디에서도 저런 다리를 건너보질 못했다.

 아주 오래 전 젊었을 적에 영암 월출산을 이른 새벽에 올라갔었다. 그때도 출렁다리가 나와 기다시피 앞사람에게 매달려 걸었는데 한참 뒤까지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콩닥거렸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한 겨울이 아니었다면 딸과 손녀는 그곳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목적지인 ‘구장군 폭포’ 바로 코앞까지 왔다.  여느 때 같으면 이곳에서 잠시 목을 축인 다음에 걸어가는데 조금 위로 올라오니 겨울바람이 몹시 차서 곧장 걷기로 했다.

 평소 발목이 좋지 않은 남편이 염려가 되어 뒤를 돌아보니 문제없다며 계속 걷자고 했다. 우리 내외는 다리 위로, 딸과 손녀는 물이 흐르는 아래 쪽 길로 걸었다. 물 위로 살얼음이 있어 미끄러울 텐데도 뭐가 그리도 좋은 지 연신 깔깔 리는 웃음이 계곡에 울려 펴져 맑은 소리로 되돌아왔다.

 ‘맨발로 걷는 길’이 끝나는 곳에 안내 표지가 있었다. 성인은 뱃살이 빠진단다. 다음 좋은 계절에 다시 오면 맨발로 걷기를 해볼 생각이다.  드디어 ‘구장군 폭포’가 보였다.  시쳇말로 ‘물 멍 때리기’ 좋은 곳이다. 날씨가 좋을 땐 ‘구장군 폭포’ 맞은편에 있는 의자들은 차지하기가 어려운데 오늘은 의자들이 모두 비어 있었다. 대신 눈을 한 아름씩 앉혀 놓고 있다. 추운 날이지만 폭포는 얼음 사이로 연신 물줄기를 아래 로 아래로 쏟아 내리고 있었다. 간간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람에 흩날리는 곳도 있었다.

 올 들어 서너 번째 오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새롭고 즐겁다. 걷기도 편하고 구경거리도 많고, 여기저기 세심한 손길이 있어 더욱 정이 가는 곳이다.

 또 중간에 ‘강천사’가 있어 경건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어 볼 수도 있어 좋다. 계곡 아래 있는 조그마한 돌들로 돌탑을 쌓으며 산란했던 마음도 추스릴 수 있으니 더욱 좋다. 예쁜 손녀는 자기도 한 번 탑을 쌓아 보겠다며 얼음 덩어리를 가지고 와서 앙증맞은 모습의 얼음 탑을 쌓고 곁에 나뭇가지로 장식을 해주며 재미있어 했다.  왔던 길을 되접어 오지만 올라 갈 때와는 또 다르게 새로운 기분으로 내려오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푸른 대나무 숲과 그 아래쪽에 차나무들이 아직도 꽃송이를 군데군데 매달고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에 ‘강천산군립공원’의 끝없는 매력에 취할 수 있어 좋았다.  가까운 곳에 이런 멋진 공원이 있으니 언제라도 또 한 번 들러야겠다.

                                                         (2021. 1. 6.)


*토청 색 : 우리나라 흙에서만 채집되어 청화자기의 안료로 사용되는 푸른 도료의 색(코발트 불루의 우리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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