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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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토지 (독후감)

2004.02.04 03:37

최영숙 조회 수:1779 추천:265

<토지: 박경리>


"1897년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라고 시작되는 대하소설 "토지"의  서두를 접하면서부터 나의 모든 관심은  구십여년 전 하동땅 평사리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그때라면 내 증조 할머니가 살아 계시던 때였으니 전후 세대라 불리는 나에게는 웬지 멀고도 가까운 시대라 하겠다.
왜냐하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당한 우리 민족의 수난이란 덮어두고 싶을만큼 처절하고 비참했다는 것을 교과서에서 배운 세대이며 한편으로는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통해서 "울면 순사가 잡아 간다"는 알지못할 윽박 속에서 자라온 세대이기 때문이다.

책에서나 방송 드라마 속에서 일제 시대가 다루어진 것이라면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들의 초점은 평화스럽게 사는 나라를 침범한 일본의 갖은 수탈과 만행에 맞춰져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무지하고 선량한  조선의 백의 민족들은 광명의 날이 올 때까지 " 참을 인"자를 씹으며 감내하는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토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이 땅위에 "세월의 팔짱을 끼고 지나간" 선조들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과 투쟁하며
살아왔나를 깨닫게 되었다. 무슨 이유로 이 땅에 태어났는 지 그들은 몰랐지만 떨어진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는 명확히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만석군 최참판댁 당주인 최치수가 횡액에 가고 평사리 마을을 덮친 역병으로 윤씨 부인이 죽어가면서부터 일기 시작한 회오리 바람이, 조준구가 최치수의 딸 서희를 밀어내고 최참판댁 재물을 움켜 쥐는 시점에 이를 때까지  숨 쉴틈없이 나를 몰아 대었다.

서희와 봉순이가 나란히 앉아 연못 속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면서 노는 모습을 기웃이 들여다 보기도 하고 때로는 용이와 월선의 한스러운 사랑의 줄다리기에 어느 쪽에도 얹음돌을 놓을 수 없는 한계를 느끼며 돌아 앉을 때도 있었고 달빛을 받으며 초당을 내려다 보고 서있는 구천이의 곁에서 그들의 헤일 수 없는 운명의 늪을 가늠해 보기도 했다.

또한 섬진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윤보 목수의 얽은 얼굴을 들여다보여  이 사람 어디에 의를 향한 그 대들보 같은 심지가 숨어있을까를 생각해보기도 했고 뻐드렁니 김평산과 귀녀의 최치수 살인극을 볼 때는 곧 불어닥칠 하늘의 심판을 눈에 보는 듯이 조마조마했다.

그러한 모든 일을 미리 알기나 하듯 아니면 늘 그래왔듯이  지나갈 것을 아는 것처럼, 수천 세대를 두고 농토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나라 땅의 임자이신 나라님은 멀었고 만의 벼를 거둬들이는 토지 소유자인 최참판댁은 가까웠다"라는 말로 표현 되듯이 그들의 농토에 대한 끊임없는 소유의 염원이란 부황증에 눈매가 파묻혀 버린 아내를 바라보는 피맺힌 남편의 눈발이었으며  보리가루를  개울물에 적셔 굶어 죽어가는 시아버지를 살려보려고 부들부들 떨던 안산댁네 삼베 치마폭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절규를 농토는 또한 수백년을 두고 외면해 오고 있었다.

있는 자는 군림하고 없는 자는 비열해지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하늘의 순리를 아는 몇몇 사람의 의연한 충직함에는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길상이와 수동이의 사력을 다한 서희에 대한 보호본능,봉순이의 철저한 순종, 그리고 작인들의 의거로 이어지는 사건들. 그로인해 고국산천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몰리면서 까지도 굽힘이 없는 의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간도에 있는 용정촌의 대화재로 시작되는 제2부를 대하면서는  제1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즉 자료의 방대함과 자연스런 새 인물의 등장과 치밀한 배치, 그들의 입을 빌어 말하는 민족주의,독립사상등의 해박한 논리성에 완전히 압도 당하기 시작했다. 간도에서 새 생활을 시작한 평사리 사람들의 묘한 인연을 돌이켜 보면
그들 한사람마다 간직한 이야기가 한편의 소설이 되어 들려 오는 것 같다.

서희와 길상이의 결혼이 이루어지기 까지 그들과 더불어 나도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오로지 조준구에 대한 복수심으로만 뭉쳐진 서희의 닫혀진 마음이 안쓰럽다 못해 미웁기까지 했다. 결국 어렵게 이어가는 그들의 결혼 생활을 보며, 정작 이긴 자의 자리에 섰을 때 허무함으로 무너져 갈 수 밖에 없었던 서희의 메마른 영혼을 왜 길상이는 미리 구해내지 못했을까 하는 서운함도 생겼다. 또한 임이네로부터 월선이를 보호하기  위한 용이의 통포슬행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초승달 같은 처연한 사랑이 가슴 아프다가도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운명을 끌고 나간 용이의 성격에는 반발이 생기기도 했다.

선산과 자식을 버리고 왔어도 대의명분을 꼿꼿이 지키던 김 훈장.
길상이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기생의 길로 들어서 결국은 자살로 생의 종지부를 찍은 봉순이.  모두 일그러진 운명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순복했던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이런 여러 인물 속에서도  두드러지게 눈길을 끄는 사람은 구천이, 김환이었다. 동학의 접주 김개주와 최참판 댁 윤씨 부인 사이에 태어난  운명의 무게도 감당하기 어려웠을텐데 그는 이복형의 아내를 사랑하여 그녀와 야밤도주를 한다. 최치수의 잔인한 추적을 교묘하게 피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북변 끄트머리 어느 깊은 골짜기, 얼음조각 같은 달이 검은 능선 위에 걸려 있던 밤"에 그 여인의 병사로 끝나버리고 만다.

가슴에 가득찬 한을 깊이 묻어 둔 채 여러 모습으로 변신해 가는 김환의 행적에 동행하면서 그의 독특한 성격에 매료 되기도했다. 냉소적인가 하면 정염이 뚝뚝 흐르는 일면을 갖고 있으며 집요하고 잔인하다 하면 직관과 본능으로 해야할 일을 감지해 내는 타고난 동학군이었으며 벽을 바라보고 마주 앉은 듯이 응고 되어 반사할 줄 모르는 가하면, 터무니 없는 곳에서 무너지는 심약한 사람이었으니 이런 복합적인 인물을 상상 속에서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길상이와 김환의 해후에서도 그의 독특한 분위기가 부딪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흘 밤 사흘 낮을 마시고 강가에 나와 외치고 함께 뒹굴고 " 하는 기묘한 시합을 통해 그들은 세상이 입혀준 껍데기를 홀랑 벗어버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귀국 후, 그의 활약은 점점 날개를 잃음으로 어려워 가고 설상가상으로 밀고를 통한 체포로 인해 뜻하지 않은 그의 자살을 대하게 된다. 나는 그가 황천의 삼도 천을 건너가 진달래 꽃으로 화전을 부쳐 드리고 싶다던 별당 아씨와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그래서 그들이 다시 만나 행복해 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잠시 책을 덮었다.


세월을 훌쩍 넘어서 그네들의 2세 시대가 문을 연 제3부에서는 간도에 남은 사람들과 귀국한 사람들의 질긴 인연이 전개되며 또한 민족주의와 독립사상,애국애족에 대한 장황한 토론이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서로 다른 각도로 제시되고 있었다.

어느 의견도 강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해 나간  민족사관과 독립의 방법을 통해  나는 나름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들의 의견을 차분하게 수렴해 볼 수 있었다. 투철한 민족주의의 옷을 입었으되 사욕이 없고 그럼에 나를 드러내지 않으며 자기 길을 충실히 가는 것이 애국은 아닐른지......  먼지이는 연해주 바닥에 젊음과 함께 묻혔거나 논두렁 밭두렁에서 베잠방이 입고 " 디견이 목에 피 내묵듯이" 살아온 이름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용정 방문길에서 혜관 스님이 염주를 걷어 해란강 물속에 넣고 기약 없는 걸음을 걷던 그 길을 생각해 본다. 많은 우마와 장꾼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혜관 스님의 지신지신 밟는 걸음새를 그려보며 새삼 그의 고독에 공감을 느껴보기도 한다.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날 때 뒷모습을 보이며 혼자 가는 것, 대신 가 줄 수도, 동행도 없이 너도 나도 가야할 길이지만 천년을 살 듯 아둥거리는 인생들이 부질없어 장마비를 이고 오는 먼 하늘을 바라다 본다.

올 한해는 "토지" 속에서 만난, 이 땅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간 많은 인생들을 하나씩 생각해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기에도 짧은 한 해가 될 것 같다.
                                      1989년 7월


* 이 글은 KBS 주최 토지 독후감 응모 입선작입니다.
박경리 선생님을 뵐 수 있다는 기대와 백만원 상금에 눈이 어두 워 응모했다가 장려상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상금이 삼십만원이었는데  십육만원 짜리 정장을 사입고 시상식에 갔습니다. 그래도 남으니까 나머지를 쓸 곳까지 미리 생각해 놓고 9시 뉴스를 잘 보라고 여기저기 전화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시상식에 가보니 장려상이 세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돌아온 상금은 십만원이었지요. 게다가 저만 쓸데없이 멋을 부리고 갔더군요. 9시 뉴스에는 한복을 입고 오신 우수상 수상자가 어필되었고 저는 오른 쪽 어깨만 잠시 보이다 말았지요.
마침 박경리 선생님은 사정상 불참하셨는데 안오시길 천만다행이다 싶었어요. 저는 지금도 최우수상을 받으셨던 다리를 저는 젊은 여자 분의 화장기 없던 얼굴과 예사롭지 않던 총총한 눈빛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