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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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하란땅

2004.01.08 08:47

최영숙 조회 수:1589 추천:238

하란 땅


                                                         최 영숙

   월신에게 바쳐진 성읍, 니느웨와 바벨론으로 다메섹과 두로 그리고 가나안과애굽에까지 길이 닿아있는 하란은 나그네들이 거쳐 가는 길목이었다.

달의 신 “난나”는 빛을 주는 자로 성읍의 중심에 높이 솟은 신전에서 섬김을 받고 있었고 동식물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정령들에 관한 믿음과 광명의 신, 폭풍의 신으로부터 내리는 신탁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영생을 모르는 그들에게 현실세계는 비관적이고 숙명적이었으며 내세는 음산하고 어두운 땅 속의 세계일 수 밖에 없었다. 신들은 이들의 현세를 돕기 위해 탄생되고 조각되고 그리고는 신전의 신상 속에 갇힌 다음 제사장의 부름을 기다려야만 했다. 도시에는 신과 관련된 터부우들과 악한 정령들의 힘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마법이 성행했고 이를 통한 점술이 운명을 예견한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면서 나는 “하란”이라 적혀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곳의 남서쪽 경계는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서 가나안 땅이었고, 아브라함의 본토 갈대아 우르는 그만한 거리 남동쪽에 떨어져 있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길목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버지 데라가 가려고 했던 가나안은 어떤 모습으로 떠올랐을까. 그곳은 또 다른 신들의 영역이었다. 풍요와 다산의 신을 섬기는 그 땅은 더 타락한 곳이었다. 여호와는 하란에서 이미 아버지를 잃고 가장이 된 아브라함을 그곳으로 부르고 계셨다.

   자선이가 눈앞에 떠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맥을 놓고 있노라면 자선이의 긴 얼굴이 어느 때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기도 하고 때로는 심퉁한 표정으로 저만큼에 서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린 날의 추억이려니 했는데 어찌 된 셈인지 날이 갈수록 또렷하게 생각났다. 그 아이는 팔다리가 길 뿐만 아니라 키도 컸다.  또래들보다 머리크기만큼 크던 자선이는 피부가 검은 편이어서  남자아이들이 곧잘 놀려 댔지만 자선이는 그럴 때마다 그 아이들을 기필코 따라 잡아 멱살을 움켜 쥔 다음 다시 안그러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서야 놓아주던 아이였다.

  폭 넓은 치마 자락을 펄럭이며 긴다리로  운동장을 뛰어 다니던 자선이는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고무줄 놀이와 공기를 잘하던 그 아이는 운동장의 여자 대장이었다. 나는 뭐하나 제대로 할줄 모르던 소심장이여서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힘차게 뛰고 노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 실력을 아는 아이들이 서로 자기 편에 끼어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선이를 부러워한 것은 고무줄이나 공기 놀이 뿐이 아니었다. 봉숭아 물을 들인 자선이의 손톱은 어떻게 된 셈인지 다 자라서 사라져 버릴 때까지 주홍빛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느 여름 날, 자선이는 자꾸 물어보는 내가 귀찮았든지  아예 봉숭아 물을 들여 주겠다고 자기 집에를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사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자선이네 안마당에 들어섰을 때 코 끝에 와 닿던 매캐한 연기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축축하던 마당과 그곳을 밟고 서 있던 자선이의 납작 고무신, 마당 한켠에 그득 피어 있던 봉숭아와 장독대에 깔려 있던 시형풀들까지도. 그리고  마루 끝에 걸터 앉아 검은 색 소반 위에 반찬 그릇 하나 놓고 점심을 먹고 있던 자선이와 똑같이 생긴 자선이 엄마. 한쪽 무릎 위에는 아기가 누워서 엄마 젖을 먹고 있었고 막 밭에서 돌아온  자선이 엄마는 흙투성이 발 하나를 그대로 고무신 위에 얹은 채 한 손으로는 반찬을 집어먹고 있었다.

자선이가 소금과 백반을 넣고 봉숭아 꽃잎을 찧어 놓자 자선이 엄마가 그것을 내 손톱위에 얹고는 콩잎으로 싸서 무명실로 챙챙 감아 주었다. 밤에 잠잘 때 빠지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 무척이나 조심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몇 개는 빠져 나가고 남아있는 것도 방향이 돌아가버려 손톱 반대쪽이 물들어 있었다. 나도 물론이었지만 자선이의 실망은 대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시간에 나는 자선이 편이 되어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필 내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우리 편이 지게 되었을 그 때였다.  자선이가 갑자기 욕을 하며 내게 달려들면서 가슴팍을 세게 밀쳤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엉겁결에 한손으로 자선이의 머리채를 휘어 잡았고 한손으로는 자선이의 손을 있는 힘을 다해 뿌리쳤다. 자선이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나는 그애의 얼굴에 세로로 길게 그어진 붉은 줄을 보았다.

손톱자국이었다. 내 손톱이 깊이 파고 들어간 바람에 자선이 얼굴에는 금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자선이가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하자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모여 들었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곧 일어날 일에 흥미진진한 모양들이었다. 자선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은 울렸고 아이들은 다 흩어져 갔다. 나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는데 자선이는 그때서야 울음을 그치고 신발 속에 들어간 모래를 툭툭 털어 내고 나서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로도 자선이는 나만 보면 골오른 얼굴이 되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읍내로 전학을 나왔다.  자선이를 다시 본 것은 장터에서였다.  자선이는 아기를 업고 있는 엄마와 함께였는데 마침 바닥에 늘어 놓은 좌판을  들여다보느라고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맞은 편에서 내가 자선이를 보았을 때 흠칫 숨을 들이 마신 것은 그애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 때문이었다. 내가 파 놓은 흔적은 너무나 선명했다. 손톱 자국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어른들 말대로라면 자선이는 평생 저 상채기를 갖고 살아야 될텐데. 나는 급히 몸을 돌렸고 서둘러 시장을 빠져 나왔다. 그러면서 자선이의 일은 서서히 잊혀 갔고 그 일은 사십여 년동안 내 무의식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하란에 우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지도에서 그곳을 찾아낸 다음이었다. 그 때부터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나그네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뒤돌아 내려 가면  본토 갈대아 우르이고 가던 길을 계속 가면 가나안이었다. 하란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 있으나 그곳은 이방신들의 영역이었다.

아브라함은 별자리와 동물의 내장에서 까지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 내고자 애쓰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순수하게 예배하기에 어려움은 없었을까.  영원한 생명은 없으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현실주의자들 앞에서 그는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을 잊지 않았을까. 나는 이런 일들에 자주 부딪치고는 했다.  

그리고 내가 보잘 것 없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 여러 사건들과 사람들. 그들은 끊임없이 나를  가르치려고 애를 썼다. 그쯤에서는 적당히 허리를 굽혀야 된다거나 그래도 안될때는 무릎으로 기어야 한다고 했다. 절대로 머리는 들어서 안되고 빈손으로 뭘 바래서도 안되고 뼈 아픈 일을 당해도 내게는 아프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선이의 상채기는 이런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영악하게도 자선이가 그 일로 어머니를 대동하면서 까지 나를 다루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선이 엄마가 밭에 나가 일을 하는 동안 걸음마를 아직 못하는 자선이 동생은 빈 집에 혼자 남겨 있었다. 아기가 몸을 뒤채면 파리가 잠시 날아 오르다가 다시 내려 앉았고 잠에서 깨어난 다음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입에 집어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시큼시큼한 냄새가 나던 하나도 예쁘지 않던 아기. 자선이는 자신의 가난한 환경에 길들여져 있었다.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걸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그래서 염치도 없어 보였다. 그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나는 오만하게 자선이 얼굴에 만들어 놓은 깊은 상처에 대해서도 그다지 마음 쓰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렇게 대접 받아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나안을 찾아 태평양을 건너 온 나에게 뒤늦게 다가온 깨달음은 그것이 바로 내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은 왜 그런지 그런 환경에서 나를 쉽게 건져 주시질 않았다.  깊은 아픔이 나를 관통해 갔던  수많은 밤들. 시편을 붙들지 않았으면 지레 죽을 뻔 했던 날들이 어느새 지나가 버린 지금에서야 나는 자선이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 어디 자선이 뿐이랴. 반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나머지 인생을 그리 살뻔 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하란 땅에 던져 놓으시는 덕분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하란을 통과하면서 버려야 할 것, 고쳐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곳에 머물 수는 없다.

이후로는   가나안에 들어가 벧엘에 제단을 쌓고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또 사랑하는 외아들을 바치는 데까지 나갔던 아브라함의 여정을 좇아 가는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이방신과 이방인의 도시일테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바라보는 자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뒤돌아 본토로 돌아가지도 않고 하란에 머물지도 않으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