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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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겨울 이야기

2004.01.08 08:20

최영숙 조회 수:1012 추천:201

겨울 이야기

                                                            최 영숙

   남편은 자주색 긴옷을 입고 있었다.
그 위로 허리를 가볍게 묶고 서서 조금은헐렁해 보이는 차림새로 그는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반백의머리가 없어지고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넓은 이마 위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누군가 키가 큰 사람이 서 있었는데 남편이 그를 상당히 의지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자세히 건너다 볼 겨를이 없었다. 남편의 얼굴이 평소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날보고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친근하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떤 권위가 흘러 나오고 있었고 또 욕심이 다 빠져 나간 것 같이 천진한 얼굴 안쪽에는 짚어 볼 수 없는 깊은 속내가 보이는 듯도  했다. 한가지 이상했던 것은 남편의 나이를 영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지 이십오 년이 되었는데 그런 얼굴은 남편의 인생길에서 전혀 본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았다. 나는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어딘가로 뚝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깜짝 놀라 팔을 휘저어 대었다. 꿈이었다.  

알람시계는 새벽 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편은 고단한 숨을 내쉬며 잠이 들어 있었고 그의 흰 머리카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마치 내 얼굴 같은 그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떠올리며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그의 모습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도와 한편으로는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삶의 무게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짐을 벗을 수 있을까. 그 짐은 단순히 먹고 사는 일에 매여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완전하지 못한 피조물로서의 한계가 그렇고 이 육신의 장막을 벗는 날, 그 날과 필연적으로 마주서야 하는 두려움과 소망의 중간에 서 있는 일이 그랬다.

   데메테르는 대지의 여신이었다.  명부의 신으로 죽음의 세상을 다스리는 하데스는 에로스의 화살을 맞고 운명적으로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사랑하게되었다.  하데스는 그녀를 납치하여 땅속에 있는 명부로 끌고 갔고  어머니인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 헤매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하늘의 신 제우스를 찾아가 탄원을 했다. 결과로 페르세포네는 일년의 반은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나머지는 명부에 돌아가 암흑세계의 왕비가 되어 그곳에서 하데스와 지내야만 했다.

그 후로 어머니와 딸이 헤어지는 때가 되면 대지는 어두워 지기 시작하고 나뭇잎은 서서히 떨어져 갔다. 딸이 명부에 돌아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먹지도 않고 슬픔에 잠겨 있기 때문에 땅위에는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얼어 붙어 가게 되었으며 대지에는 죽음의 기운이 감돌았다.  때가 되어 페르세포네가 어머니에게로 돌아오는 날, 어머니는 다시 기쁨을 찾고 더불어 대지에도 생명의 기운이 회복이 되는데 이 때가  바로 봄이었다.

이것은 우화같은 신화이다. 사람들은 겨울과 봄의 반복을 죽음과 생명의 교환으로 견주었고 이 반복은 영원히 계속되는 운명의 바퀴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인간은 아무 선택도 할 수 없이 단지 그 바퀴를 따라 돌아가게 되어있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를 영접하고 난 뒤에도 바탕에 깔려 있던 이 운명론은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비발디의 사계절 중 겨울의 2악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연기를 마친 배우가 무대에서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로 퇴장하는 모습을 늘 연상하고는 했다.

쓸쓸한 무대 뒤로 들어 가기 전에 관객을 향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는 잎사귀가 다 떨어진 나무 끝에 새파란 달이 걸려 있고 그 아래 작은 호수에는 살얼음이 얼어 그 위를 달리는 바람소리에 달빛조차 얼어보이는 겨울의 저녁이 연이어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해진 무대에서 역할이 끝나면 사라져 가야하는  연약한 그릇들. 이 생각은 오랫동안 나를 지배해왔다. 마치 무명옷에 감물이 들면 빨아도 빠지지 않고 녹물처럼 착색이 되듯이 그냥 때가 되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끌려 가 이쪽 저쪽으로 구별 되어져 영원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지식에 물들어 있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물음은 오히려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또한 모든 사람을 이 잣대로만 재어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낼 것인가는 하나님의 영역이었으므로 물어보는 것조차 믿음 없는 말이었고 더우기 그곳에 대한 어떤 모양의 의심이라도 입밖에 내었다가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로 취급되는 형편이었다.

천국이란 단어는 언제나 모든 질문에 대한 마지막 보루였다. 하지만 그 단어는 내게 너무 모호 했다. 숨쉬고 먹고 자며 미워하고 사랑하는 일을 마치고 반드시 나 홀로 그곳으로 가야 하는데 나는 그곳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부자가 들어간 음부와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정도였다.

나사로가 그곳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냥 내 수준에서 짐작해 볼 뿐이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의 크기나 기쁨을 주시는 그 척도를 피조물로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정답에 언제나 가 닿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곳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길은 유리같은 정금이요 열두문은 진주이며 그곳에는 밤이 없다고 했다. 아무리 상상을 하고 그림을 그려봐도 그것은 내게 추상적이었다.

그와 같은 것을 본적이 없는데다 각종 보석으로 꾸며졌다한들 그 돌맹이에 불과한 것들이 천국에서 조차 왜 그렇게 좋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경끼 하듯이 잠에서 후다닥 깨어나 새벽을 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이러다가 끌려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어두움을 노려보며 하나님을 수도 없이 불러댔다. 내 유한한 시간 속으로 그 분이 들어와 주시길 얼굴이 퉁퉁 붓도록 몸부림치며 간구했다. 그리고 나는 꿈속에서 남편의 그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 얼굴은 그야말로 완전했다. 아니 그의 온 모습이 그랬다. 점하나 티하나 없이 깨끗한 물에 닦아 놓은 것처럼 순수하고 맑아서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완전의 실체라고나 할까. 그의 머리카락, 눈썹, 그리고 미소까지도.  그는 더 이상 내 남편이라는 굴레에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제서야 한 말씀을 떠올렸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남편의 실체는 완전한 창조물이 아니었던가. 아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이 이 피조물의 세계를 회복하시는 날이면 본래 창조때의 완전함으로 돌아갈텐데, 나무 하나 풀 한포기 까지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의 원형으로 돌아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는 그곳에서 단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천국이 아니겠는가.

  이제 겨울의 중심에 우리는 와있다. 눈이 내리고 대지는 얼어붙고 바람도 불어온다. 물가에는 살얼음이 얼고 마음은 자꾸 움츠러든다.  나는 이 겨울에 불면의 밤을 끝내고 내 인생의 겨울을 생각하며 옷깃을 여민다.

열심히 많이 달려 왔지만 여전히 제자리인 듯 허망하다가도 완전한 창조물로 돌아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보며 영원을 보낼 생각에 벅차 오르기도 한다. 주변을 돌아보면서 보이는 사람마다 그리고  살아 숨쉬는 것마다 그들이 돌아갈 완전한 모습을 상상해 보는 일은 즐겁고 아름답다.

완전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 거룩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 어린 양 예수가 등이 되어 비추는 곳.  그 곳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내 인생의 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을 계속해서 열심히 할 것이다.  텅 빈 무대 뒤로 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진짜 주어질 배역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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