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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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로열 패밀리

2004.01.08 08:38

최영숙 조회 수:1188 추천:201

로열 패밀리


                                               최영숙

   어느 날인가 느즈막한 시간에 아이들이 잠든 방을 들여다보다가 기가 막혀서 나도 모르게 혀를 차댄 적이 있었다.

딸 아이들이 옆으로 나란히 누워 하나같이 손바닥을 뺨밑에 받치고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잠시 애들을 바라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들 애 방문을 열어 보았다.

어머나, 세상에. 얘도 마찬가지네. 아니 무릎을 살짝 구부린 것까지 똑같네. 세 아이들이 방향은 달랐지만 같은 모습으로 혼곤히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을 나는 근래에 와서야 발견했다.  전에도 그랬던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그 모습에 놀란 것은 내 잠버릇이 그렇기 때문이었다. 잠이 쉽게 들지 않는 성질이라 한참을 부시럭 거리다가 얼핏 잠이 오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오른 손을 뺨 밑에 대고 모로 눕는다. 그러면 왜 그런지 맘이 편안해지고 솔솔 잠이 찾아든다. 어느 때는 팔이 저려서 잠이 깰 때도 있다. 게다가 간혹 저린 팔을 주제로 황당한 꿈을 꿀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 손바닥을 깔고 잠을 잔다.  그런데 어떻게 세아이들이 다같이 그걸 닮았을까. 묻는 말에 딸애는 나랑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러면 편안해, 엄마.

   어디선가 식구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잠시 줄을 벗어났다가 돌아오면서 문득 내 식구들을 바라보니 남편과 아들이 배를 슬쩍 내밀고 팔짱을 낀 자세로 오른 손을 코언저리에 얹은 채 무심히 서 있었다. 똑같은 두상에 똑같은 이마에 또 어딘지 비슷하게 생긴 두 남자가 같은 모습으로 서서 나를 보고 동시에 빙긋 웃었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어 서서 그들을 흉내내자 아들 애가 먼저 눈치를 채고 팔을 내렸다. 그러도록 남편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웃고 있고. 정말 못말려.

   사람들은 이런 버릇도 유전으로 물려 받지만 잠재되어 있는 기억도 물려 받는다는 학설이 있다. 그래 그런지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인데도 웬지 한번 가 본 것처럼 낯설지 않을 때가 있다. 꿈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왜 그렇게 낯선 곳을 헤매고 다니면서 거기를 고향이라고도 하고 내 집이라고도 하는가 하면 엉뚱한 사람들을 식구라고 인식 하기도 하는지.

실제로 나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할머니의 먼 친척을 꿈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이런걸 가지고 사람들은 전생이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역을 선조들에게 물려 받았으며 또 자손들에게 물려 주었는가. 그 중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무익한 것, 또한 해로운 것도 있을 수 있다.

내 할아버지는 성미가 급하셨다. 아버지도 급하시고 그 분의 장녀인 나도 당연히 급한 성질이다. 얼마나 급한지 나는 중매를 잘 못한다. 내 성질에는 그 자리에서 결론이 나야만 하는데 어디 결혼 같은 대사가 나 좋으라고 그렇게 속전속결이 되겠는가. 이 유전적인 기질이 신앙 생활에 얼마나 장애가 되는지. 금식도 해보고 결단도 해보고 야고보서를 처방약 먹듯이 읽어대도 못고치는 게 이 혈기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소서.....’  찬송을 부르면서 스스로를 위로해 보기도 한다.

    정말 못고치고 살다가 내 혈기에 치어서 이러다가 갈 것인가. 어디 그것 뿐이랴. 고집도 웬간해야지.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하고 크게 다툰 적이 있었는데 원인은 내가 장녹수를 장희빈이라고 우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정말 장희빈의 본명이 장녹수인 줄 알았다. 평소에 얌전했던 아이가 그 날따라 얼굴을 붉혀 가면서 목청을 높이는게 이상하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끝까지 우겨댔다. 결국 그 친구는 입을 꾸욱 다물어 버렸고 그걸 나는 내가 이긴 걸로 착각을 했다. 나중에서야 그 애 말대로 장녹수와 장희빈 사이에는 이백년이란 시간 차가 있다는 걸 알고서 사과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서 그 애하고의 우정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구약을 읽으면서 최근까지도 아브라함과 이삭이 갖고 있는 유사한 사건을 아브라함에게만 일어났던 한 사건을 세 번에 걸쳐 반복해 설명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만큼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두 번씩이나 아내 사라를 누이라 말하여서 바로왕과 그랄 왕 아비멜렉을 범죄에 빠트릴 뻔 한 적이 있었다.  또한 이삭도 흉년을 피해 그랄에 가서 아버지와 똑같이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 하였다가 부부 사이라는 것이 아비멜렉 왕의 눈에 띄여 분노에 찬 추궁을 당하게 된다.

연속적으로 그의 아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고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의 일로 아버지를 속인다. 다른 각도로 보면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하여 야곱에게 상처를 입혔으며 그일을 겪었던 야곱도 요셉을 더욱 사랑하여 형제간에 죄를 짓게 하였다. 그일로 인하여 뼈를  깎는 아픔을 가졌던 요셉도 자식 사랑에는 편애가 있었는지 아버지 야곱이 장자인 므낫세를 젖혀두고 차자인 에브라임을 축복하자 이에 불만을 갖고 아버지에게 므낫세에 대한 축복을 강하게 요구한다. 다시말하면 아브라함의 실제 장자였던 이스마엘도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도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과 요셉의 장자였던 므낫세도 결국 장자 축복을 받지 못한 불우한 인물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이런 일들은 시간차를 두고 반복되고 있다. 한세대가 묻혀 가고 나면 다른 세대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며 역사는 중첩되어 갈 뿐이다. 내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다음 다음 세대 아이들도 손바닥을 받치고 잠이 들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내 아버지가 아니면 할아버지가 그랬는지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이 지금 살아가면서 행하고 겪는 모든 일들도 사실은 첫사람 아담 이후 연속된 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시대의 한 단편만을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왜 이다지 힘을 주고 기를 써가며 살고 있는 지 내 자신이 측은한 마음이 든다. 이럴 때는 팔짜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운명은 성격이 만든다는 철학자의 말대로라면 이 물려 받은 성격이 바뀌지 않는 한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이고 그게 바로 팔짜라는 거지 뭐겠는가.

그래서 가끔 나는 사탄이 꾸미고 있는 일 중에 하나가 이런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나 쉬운가. 같은 각본을 갖고 같은 무대에서 연출을 해대도 여전히 걸려 들어오는 이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대대로 탄식해오는 것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올무에 빠지는 육신의 연약함이다. 사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당당하게 그 분의 왕국에서 기업을 얻을 우리들이 반복되는 이 싸이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한탄이나 하다가 주저 앉길 바라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그의 각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이후에는 하나님의 각본이 준비되었다는 것. 바로 사탄이 하는 일을 멸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 분은 이 사슬을 끊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미 새 무대가 주어졌고 우리는 새롭게 된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일기를 써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 왕국의 왕자나 공주처럼 살고 있지 못하지만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 우리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새성품을 주셨다. 이건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을 가지고 영원의 시간대에 발자국을 내딛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이 가능성이야말로 커다란 선물이라 생각한다. 이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완전한 선물로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도 우리는 이 가능성을 힘입어 로열 패밀리 답게 당당하고 단정하게 그리고 우아하고 너그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혈기나 고집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사실 그 분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누더기 같은 것이다. 고집이나 혈기 같은 것들은 뿌리가 자기 사랑에 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를 사랑해서 아프고 살내리고 우울하고 밤잠 못드는 일들은 끝내 버리자.

그건 하늘 나라의 로열 패밀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쳇바퀴와 같이 반복되는 싸이클을 벗어나 영원이란 선상에 서있는 우리를 이런 연약함이 자꾸 발목을 잡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달려 가고 있는 중이다.

잠시 쉴 수는 있으나 뒤돌아 갈 수는 없다. 앞서 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전 형적을 지워 버리면서 잡아끌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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