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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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여섯번째 성경

2004.01.08 08:45

최영숙 조회 수:1148 추천:211

여섯 번 째 성경


                                                         최 영숙

  캐나다에서 파송된 의료 선교사들이 세운 조그만 교회가 있었다.  흔하디 흔한 올갠 하나 없던 그 교회에서는 누군가가 찬송을 선창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냥 따라 불러야만했다.

곡조가 맞든 말든 부르기 편한 대로 늘여 부르다가  반음을 올리고 내리는 애매한 구절에서는 주로 목소리 큰 사람을 따라 불렀다. 한국말을 잘 모르던 선교사가 방석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신 다른 소리를 냈지만 우리는 우리끼리 합심하여 선창자를 따라 한소리를 냈다. 오히려 자꾸 틀리는 선교사를 슬쩍 눈흘겨보면서.  나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다.

기드온 협회에서 증정한 손바닥 만한 책이었다. 신약 성경과 시편만 들어있던 그 책을 호기심 때문에 읽다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요한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맨발로 내게 자꾸 다가왔다. 동의 할 수 없는 그 분의 역설적인 메시지는 둥둥 나를 두드렸고 나는 연신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기실 내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매일밤 싸움이 계속 되었고 견디다 못한 나는 예수님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 그렇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세례를 받고나자 나를 전도했던 친구가 관주없는 신구약전서를 내게 선물했다. 까만 표지에 빨간 물감으로 칠해진 전형적인 예수쟁이 성경을 나는 어머니 몰래 읽었고 그 이야기들을  또 살그머니 동생들에게 전해 주었다. 친구들이건 버스에 같이 앉은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십자가 이야기를 전했다. 나는 그 성경책을 결혼할 때 혼수품목 제 일호로 챙겼다. 마음 놓고 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움으로 대했던 그 성경을 형편이 될 때는 뜯어 먹을 듯이 읽어댄 탓에 성경책은 이미 낡아 있었지만 나는 그 성경을 보란듯이 옆에 끼고 남편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 아이 둘을 낳을 때까지도 빗물에 씻기고 햇볕에 바랜 그 성경책을 자랑스럽게 갖고 있었다.

    새해 어느 날, 교회에서 제직들에게 금책 가죽 성경을 선물했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호화스런 성경책을 받은 나는 실로 당황했다.  낡은 성경을 바꾸기는 해야겠는데  그 동안에 색색으로 그어 놓은 줄하며 곳곳에 써 넣은 나만이 아는 해석과 암호 같은 참조 구절들을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설교 시간에 성경을 찾으려면 한참을 부시럭 거려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하고 성경을 베끼기 시작했다. 줄을 그은 곳에는 줄을 긋고 토를 달아 놓은 곳에는 똑같이 써넣기 시작했다.

결국 예전 성경과 별다름없이 만들어져서야 겨우 마음을 놓고 새 성경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공들여 다시 만들어 놓은 성경을 아이들이 여기 저기에 색색으로 칠을 해 놓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곡선 사선 할 것 없이 줄을 그어 놓기까지 하였다. 성경은 삽시간에 낡은 책이 되어 버렸고 머지않아 제본까지 떨어지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남의 속도 모르는 성도들은 내가 그 성경을 펼치기만 하면 눈이 둥그래졌다. 그렇게나 성경을 읽었으니 믿음이 대단하다고 추켜 올리기까지 하였다.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지 않았다.  젊은 구역장이 되고 여전도회 회장이 되었던 것은 단순히 그동안에 읽었던 성경에 대한 지식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성경을 들고 남을 가르치고 잣대로 재고 고쳐 주려는 자세로 서서히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삼대째 천주교를 믿던 시댁의 무언의 압력과 교회에 대한 회의 때문에 개종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참으로 물러서기가 어려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천주교와 예전이 비슷한 성공회로 옮겨 갔다. 성공회에서는 공동 번역을 사용하고 있었다.  “가라사대”가 “말씀하셨습니다”로 바뀐 것까지는  적응을 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이 조금씩 다른 것에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예전을 배워야만 했고 성례전을 치뤄야 했다. 찬송가도 그레고리안 성가들이 많아서 제대로 따라 부르지를 못했다.

나는 확실한 초신자가 되어서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공동 번역과    다 떨어진 금책 성경을 나란히 펴놓고 앉아서 입에 익지 않은 말들을 기억하느라고  애를 썼다. 성공회 수습 수녀로 있던 여동생이 그 소식을 듣고 엠마오 주석 성경을 보내왔다. 참으로 별일이었다. 똑같은 성경이었지만 세로쓰기를 읽다가 가로쓰기를 읽으려니 성경을 읽는 맛이 경감되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장마다 친절하게 써놓은 주석이 유익하고 편한 것 같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문보다 주석에 더 사로잡히고  때로는 중간 중간에 달아 놓은 소 제목에 갇혀서  말씀의 생명력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세 개의 성경책 앞에서 늘 혼란을 일으켰다. 복음서나 신약의 사건은 금책 성경에서, 말세론이나 계시록 같은 어려운 구절은 공동번역에서, 그리고 구약은 엠마오 주석 성경으로 읽었다.

세권이 함께 있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계속되던 때였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집사님 한분이 개역 한글판 관주 성경 전서를 내게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성경들 때문에 복잡했던 나는 그 책을 바로 책장에 꽂아 두었다. 그리고는 용하게도 그 성경을 미국에 올 때 짐가방에 챙겨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 개역성경은 한영 성경과 영어 성경들 사이에 끼어서  여전히 책 선반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날, 신문 한구석에 실린 종교 칼럼을 읽게 되었다. 신학자였던 그 분은 성경에 줄을 긋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줄을 긋지 않은 부분의 말씀이 내내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가 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애써가며 줄을 긋고 암송하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 남을 가르치기 위해 그리고 지식으로 알고 있는 말씀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던가. 나는 언제나 의인의 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들은 죄인과 악인의 자리에만 앉히려고 했던 일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책장에 꽂아 둔채 잊고 있었던 새 성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결심을 했다.

이제부터는 진실로 나 자신을 위해 줄을 그으리라. 깨달음과 참회와 성숙이 무엇인지 내 영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알려주리라. 이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바로 나를 위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그래서 새로운 말씀으로 모두 받아 들이자.

  다시 읽기 시작한 말씀을 통해 그동안 말씀이 없음으로 느꼈던 공허함에서 나는 구원될 수 있었다. 이제껏 잘못 읽고 잘못 적용한 말씀을 “주 앞에서 낮추라”는 야고보서의 말씀 아래 내려 놓고 나를 위해 새로운 줄긋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감동을 갖고 읽었다. 그분이 사용하셨던 아람어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겠거니 하면 목이 메어 왔다. 마켓에서 무화과 열매를 바라보면서 나는 또 예수님을 생각했다. 시장하신 이른 아침에 요기꺼리도 안되는 저깟 열매를 예수님이 찾으셨다니. 그 옆에 수북히 쌓여있는 사과와 복숭아들이 수박 덩어리들이 저렇게도 흔하건만 여섯 번째 성경 안의 예수님은 여전히 고단하고 시장하고 고독하셨다.

나는 이런 예수님을 이제야 만났다. 그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통해 “사랑하는 딸아” 하고 나를 부르시는 음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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