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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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어느날 내가 (단편소설)

2009.01.19 08:32

최영숙 조회 수:1023 추천:280

                              어느 날, 내가  



    눈을 떴을 때,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잔 탓인지 팔 다리가 마치 거미줄에 걸려든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늘, 남편의 전화를 받았던가....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느낌이 의식의 깊은 바닥을 휘저어 댔다. 그 느낌 속에서 뭉얼뭉얼 피어오르는 그리움은 어쩜 막 깨어난 꿈의 연장선에 있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종종 그랬듯이 잠들어 있는 동안 집안의 전화벨이 한참 울렸든가, 그래서 벨소리를 소재로 아마 꿈을 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되었든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다. 적어도 하루에 세 번씩은 전화를 거는 사람인데, 이렇게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지다니...그것은 막막하다 못해 어두운 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처럼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이기 까지 했다. 그러자 심장 있는 쪽이  울울 아파오고 몸 전체에서 기운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목이 타는데다 입술은 버석 소리가 날 정도로 건조해 있었다. 나는 머리를 대충 매만지고 거실로 나왔다. 서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들어 온 햇살이 거실 안쪽에 까지 밀려와 있었다. 햇살은 창문을 향해 마주 놓인 베이지색 가죽소파 앞에도 머물러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으며 코너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향해 오른 손을 뻗었다. 보지 않고도 언제나 손 안에 잡히던 전화기였다. 웬일인지 손 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그곳을 더듬어 봤지만 밝은 햇살에 노출 되었던 눈은 쉽사리 집안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놓여있던 액자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머리가 바람에 날려 내 눈을 가리자 남편이 얼른 손을 내밀어 머리카락을 치워주려는 순간에 찍힌 사진이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남편은 싱긋 웃음을 띠운 채 나를 향해 상반신을 약간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유독 그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웃는 옆얼굴 때문이었다. 적당히 세상을 알아버린 남자의 체취가 눈가의 주름 속에 묻혀 있었다. 젊었던 한 시절에는 야망으로 번쩍였지만 이제는 만만치 않은 세상을 향해 순해지고 길들여진 눈빛이 그의 옆얼굴에 까지 드러나 있던 사진이었다. 나는 거실을 찬찬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전화기는 자리를 옮겨 전축 위에 놓여 있었고, 벽에 걸려 있는 첼로 그림은 제자리에 있었다. 마루 구석의 행운목도 그대로 서있고 오지 화분 속의 분홍색 바이올렛도 여전히 무더기로 피어 있다. 그런데도 어딘지 변화가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쓸쓸하고 낯선 기운이 거실 구석구석에 배여 있었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남편의 전화번호를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숫자로 된 부호들이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진 것처럼 단 한 개의 숫자도 떠오르질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문밖에 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내가 놀랄까봐 항상 문을 두 번 두드리고 난 다음에 열쇠를 집어넣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문은 노크 없이 열렸다.
“엄마!.... 일어...났어?"

딸, 이현이었다. 딸의 얼굴이 약간 부은 것처럼 보였다. 크림색 정장 차림의 이현이는 구두를 벗으면서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엄마, 오늘 좋아 보이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나는 어리둥절해서 이현이를 바라보았다. 그건 늘 내가 그 애에게 먼저 묻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팬케이크...... 내가 해먹지 뭐....너도 먹을래?”
딸이 나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저녁인데....콩나물 국, 안 먹고?”
딸이 계단을 올라오면서 물었다.
"난,...팬케이크가 먹고 싶은데..."
나는 이현이의 시선을 등 뒤에 느끼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마루에 서서 불안이 감도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고 서있어? 들어와, 넌 뭐 먹을래?  아참!  이현아, 너 아빠 핸드폰 전화번호 알지? 잠을 너무 자서 그런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구나, 몇 번 전화 하셨을 텐데 .... 오늘 한 번도 못 받았네."
이현이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출입구 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캐비닛을 열었다. 그곳은 온통 통조림 종류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음 문을 열어 보았다. 라면, 카레, 스파게티 국수가 보이고 네스카페 커피병과 이곳 볼티모어에 공장이 있는 도미노표 설탕 봉지가 있을 뿐, 늘 그 자리에 있던 팬케이크 파우더가 아무래도 보이질 않았다. 마침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은 이현이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거, 여깄어"
안쪽 끝에 있는 캐비닛을 열고 이현이는 그곳에서 납작한 종이팩을 꺼내왔다.
"아! 거기 있었구나."
모든 것들이 조금씩 자리바꿈을 했나보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나저나 내 집에 있으면서도 남의 집에 와 있는 것 같은 서먹한 이 기분은 무엇일까....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나는 간신히 참아가면서 가루를 물에 풀고 계란을 하나 집어 들었다. 반죽에 계란을 넣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우유는, 소금은, 버터는,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굽는 것인지 아님 그대로 굽는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생각나질 않았다. 결국 상자에 적혀 있는 조리법을 따라 우유와 계란을 풀어 넣고 기름을 두르지 않은 채 구워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무턱대고 가루를 쏟아 붓는 바람에 케이크가 일곱 장이나 만들어졌다.  
식욕과는 달리 잘 넘어가지 않는 빵 조각을 접시에 내려놓고 시럽을 잔뜩 뿌리면서 나는 어둑한 표정의 이현이를 넘겨다보았다.  
"너 오늘 참 이상하다, 왜그래?"

이현이는 내 말에는 대꾸도 없이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냅킨 한 장을 들어서 말끔하기만 한 식탁을 문질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이현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한테 그런 거 아냐!..... 그냥 기분이 왜 이렇게 찜찜한지 모르겠어. 모든 게 안개 속처럼 흐릿하고 어둡고....이건 짜증도 아니고.... 화가 나,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오네......."
순간 등에 찬 기운이 스쳐가고 그 기운이 심장에 와서 닿자마자 욱신거리며 아프기 시작했다.  

  문득 통증을 헤집고 열두 살 겨울, 생리를 처음 시작했던 그 해 정월 대보름날이 떠올랐다. 노랗게 솟아 오른 보름달이 가슴 속에까지 차올라 오던 밤, 나는 나보다 두 살 위인 앞집 명자 언니와 함께 냇가 둑으로 달려 나갔다. 이미 그곳에는 빙빙 원을 그리며 크고 작은 불길들이 돌아가고, 나무 타는 냄새는 냇가에 넘쳐나고 있었다. 오산 제지 공장 굴뚝 위로 불쑥 솟아 오른 보름 달 아래로 깡통에서 튀어 나온 불씨들이 연신 퍼져나갔다는 사라져갔고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물론 불구경을 나온 어른들도 동시에 환성을 질러댔다. 그냥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즐거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아이들은 냇가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뛰어 다녔다.

밤은 깊어 가고 머리 꼭대기 위에 머물러 있는 달은 이제 추위로 파랗게 얼어 가고 있었다. 그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환성을 지르며 불구경을 하고 있던 명자 언니가 아참, 잊어먹을 뻔 했네, 하고는 둑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뒤따라 달려갔다. 언니가 검은 색 코트 주머니에서 반도막 남은 초를 꺼냈고 그 초에 성냥불을 그어댔다. 그리고는 모래바닥에 초를 꽂았다. 밝은 달빛 아래에서 촛불은 잠시 꺼질 듯 말듯 휘청거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지를 그을어 가면서 길게 불길을 올리기 시작했다. 달빛은 그악스럽게 쏟아지고 촛불은 밤바람을 따라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그때, 말없이 촛불을 바라보고 있던 명자언니가 갑자기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언니, 지금 뭐해?”
언니는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인상을 쓰더니 내게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월하노인한테 비는 거야, 너두 빌어!”
“그게 누군데?”
“부정 탄다, 얘, 자꾸 말시키지 마...그 월하노인이 남자랑 여자랑 빨간 끈으로 한번 만 묶어 놓으면 원수지간이라도 사랑이 맺어진대”

명자 언니는 촛불과 달빛이 어우러진 하얀 모래를 밟고 서서 꿈꾸듯이 말했다.  달빛은 냇가를 넘어가 건너편 둑에 까지 닿아 있고 그 뒤의 청학리 뒷산 소나무 숲에까지 걸려 있었다. 둑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아갔다. 그 동그라미 속으로 부산행 열차가 부웅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기차는 철교 아래 모래 바닥을 노란 불빛으로 긁으며 이내 사라졌다. 나는 가만히 서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 주변의 요요한 빛이 밀려와  내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그 빛은 우주 밖 어디에선가 시작되어서 수많은 은하계를 넘어 와 이곳에 도달한 건 아닐까.... 달은 떠밀려 내려오듯 밝아지다가는 파르르 떨면서 다시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눈 앞에 까지 빛을 보낸 힘은 어쩌면 월하노인보다, 달의 신보다, 더 큰지도 모른다. 이제 달은 자연 책에 나온 대로 지구의 위성으로써 지구의 사분의 일 밖에 안 되는 크기로 떠 있는 별이 아니라 신기를 가득 담은, 그래서 신비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한 초현실의 존재로 보였다.

그 때, 그리움이었을까, 내 앞에 나타날 어떤 사람에 대한 사모가 가슴 한 구석에서 차올랐다. 나는 장차 내가 사랑하게 될 그 사람에 대한 바람을 갖고 두 손을 모았다. 그러자 훈훈한 기운이 나를 감싸고돌기 시작했다. 어디에선가 나를 위하여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러면서 속이 영글어 가고 있을 그 사람. 이렇게 나를 꽉 채우는 그 사람을 내게 보내 준다면 나는 평생 그 사람만 바라보며, 그 사람을 위하여 살겠노라고 소곤거렸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다 좋아 하고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면 만화가가 되고 싶은 나의 꿈같은 것도 다 버릴 수 있다고 덧붙여 말했다. 나는 그 순간 명자언니보다도 훨씬 세상을 알아버린 것처럼 조숙해진 눈길로, 연신 허리를 굽혀가며 이야기 속 월하노인에게 치성을 드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간절히 빌며 빨간 끈으로 맺어지길 바라는 사람은 누구일까....아무래도 명자 언니의 빌기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발걸음도 조심하며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말을 한마디라도 한다면 내 소원이 저쪽으로 도망 가버릴 것 같아서였다.

앞에 앉아 말없이 시럽으로 범벅이 된 팬케이크를 잘라 먹고 있던 이현이가 심상한 듯이 말을 꺼냈다.  
"엄마, 크리스 말야...생각나지? "
크리스라는 이름이 내 의식 안쪽에서 형체를 갖고 떠오를 때까지 잠간이었지만 명료하지 않은 그 어떤 흐름이 먼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으응, 그래, 그 손가락...."
이현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걸로 기억해? 엄만 차암.... 아무튼, 아버지 찾으려고 무척 애 썼잖아, 근데 알고 보니까  바로 버지니아에 살고 있더래"
."....그러니, 찾았구나...그렇게 가까이 살고 있었는데도 몰랐구나.... 그렇지, 알 수 없는 거지. 찾기 전에야...."
내가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불현듯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 했다. 의미 없이, 생각 없이 상대방의 말을 위해 말을 던지고 나면 뒷맛이 개운하질 않다. 마치 책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그냥 넘어간 것처럼....  
"그러니까 걔 엄마 아빠가 하이스쿨 학생이었을 때였대..... 크리스가 생기는 바람에 그 애 엄만 학교를 그만두고 입양 센터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하우스에 가있다가 거기서 아기를 낳았다나봐.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입양되고. 그래서 크리스 아빤 아기 얼굴도 못 보았다네, 아들이란 소식은 크리스 할머니가 전해주었지만.... 두 사람은 그 후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대, 크리스 엄마가 인사도 없이 타주로 떠나버리고,  나중에 그곳에서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으셨다나 봐.....  진짜 드라마야....그치?"
"양부모들도 좋으신 분들 같던데, 그래도 걔는 친부모를 찾네."

나는 어떻게 하든지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오히려 그 부모님들이 나서서 아빨 찾아 줬다는데, 뭘"  
이현이는 애써 크리스 얘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너, 아직도 크리스랑 만나니? "
이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튼 그 얘기는 아빠계신 데서 같이 해. 난 아직도 맘이 허락 질 않아!"

  이현이가 크리스를 정식으로 우리에게 소개하던 날이었다.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만나자는 대로 나는 남편과 함께 그곳에 도착했다. 키가 크고 순해 보이는 그는 청회색 눈동자를 껌벅이면서 말을 할 때마다 미시즈, 미스터를 정중하게 붙였다. 나중에 어디에서 만나더라도 쉽게 알아볼 것 같지 않은 그저 평범한 인상이었다. 자신이 독일계인 것을 최근에 병원에서 알았다고 그는 말했다. 북유럽, 특히 독일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독특한 유전병이 있는데 손가락 근육이 하나, 둘씩 안쪽으로 오그라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기적으로 수술을 해서 펴줘야만 하는 불편한 일이지 그 이상의 질병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는 밝게 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웃지 않았다. 유전이라는데, 그렇다면 그의 자손의 자손들도 손가락이 오그라들어서 매년마다 수술을 해야 한다면,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크리스가 수술을 했다는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저는 그래서 제 생부를 꼭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흔적을 몸에 가졌다는 사실이 경이로웠지요."
생부라니, 남편과 내가 동시에 놀라서 이현이를 쳐다보았다.

"엄마, 미안해, 미리 말 안 해서, 갓난아이일 때 입양 되었대, 엄마 아빠가 선입견 갖고 만나는 거 싫어서 그랬어...."  
이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나는 스테이크가 아니라 시멘트 덩어리를 씹고 있는 느낌이었다.  옆에 남편이 앉아 있었지만 나 혼자 벌판에 내동댕이쳐 있는 기분으로, 접시에 남아 있는 고기 조각을 한 입에 다 집어넣고 마냥 씹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 유행가가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명자 언니가 월하노인에게 빨간 끈으로 맺어 주십사고 빌고 빌었던 보생당 약방 집 아들이 부모를 따라 대전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얼마 후 그에게서 첫 편지를 받은 명자 언니가 숨이 차서 내게 뛰어 왔다.

"너, 여기, 이 편지에 쓴, 이 시 좀  봐봐!"
언니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는 분홍색 편지지가 들려 있었다.
"너는 울고 있었다, 파란 눈에서 빛나는 눈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그 때 나는 제비꽃이 이슬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하였다, 너는 웃고 있었다. 사파이어 보석이 네 곁에서 광채를 잃었다, 네 반짝이는 눈동자와 겨룰만한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었다....어머 얘! 어떡해.... 이거 확실히 연애시지?"
초록색 잉크로 정성스럽게 써 보낸 바이런의 시였다. 그날 받은 연애 시에 홀딱 빠져버린 명자 언니도 누군가의 시를 열심히 베껴서 보내는 눈치였다. 하지만 어느 날 부터인가 그에게서 편지가 끊어지고 답장마저 오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즈음 고개를 외로 꺾고 다니던 명자 언니가 내 앞에서 눈물 콧물 흘려가며 부르던 노래가 그것이었다.

"얘, 이것보다 더 절실하게 내 맘에 와 닿는 노래가 없더라. 그냥 딱 내 맘이야....이건 틀림없이 경험에서 나온 가사라구...... "
그 후로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명자 언니의 첫사랑이 생각나고 그 첫사랑이 아직도 끈적한 느낌으로 남아있는 것은, 먼 훗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그 구절을 간절하게 부르면서 언니가, 얘,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잊혀진 여인이란다, 하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인이라는 말에서 풍겨오는 든적함을 견디다 못해 끝내 언니, 그 오빠한테 당했어? 하고 물었다. 언니가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다가는 이내 잔뜩 골을 내고 입을 다물었지만 명자 언니의 첫사랑 사건으로 인해 그 노래는 내게 끈적끈적한 이미지로 굳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명자 언니는 나보다 두 해 먼저, 수면리 과수원 집 아들하고 결혼을 했다.

"지긋지긋하게 날 쫓아다녔잖아, 아무리 그래도 시골 과수원에 일군으로 팔려가긴 싫드라.... 넌 과수원이 얼마나 일이 많은지 몰라서 그래. 사과나무는 일 년에 열두 번이나 농약을 친대. 비료도 사철 때맞춰 줘야하고, 꽃이 피면 수정해야지, 사과가 열리면 솎아 주기도 하고.....봉지 씌우고, 봉지 벗기고 사과 따고, 그걸 미수꾸리하고....그러다보면 일 년 후딱 지나가는 거지 뭐."
"언니가 월하노인한테 빌었던 그 오빠는 어떡하고? 노인네가 깜빡 잊고 묶어놓질 않으셨나봐?"
"월하노인?.... 어머머, 맞아! 그래, 내가 그랬지! "
명자 언니가 깔깔 웃었다.

"근데 내가 말 안했니? 그 오빠 말이야, 돼지 기른다고 부모 재산 다 정리해서 충청도 어느 산골로 땅 사서 들어갔는데, 돼지 파동 나서 폭삭 망하고 지금은 술로 엉망진창 폐인 되었대....누가 알아, 나랑 만났으면 그 팔자가 바뀌었을 지... 인연이 아니었나봐... 아무튼 그건 그렇고 얘, 생각나니? 지가 우리 집에서 하숙할 때, 과수원 집 아들이라고 하도 뻐겨서 우리가 걔 꼬셔서 홍옥이랑 자두 얻어먹고 그랬잖아, 알고 보니까 그때부터 날 찍었대나.... 중학생이 그때 뭘 안다고 그런 생각을 해.....징그럽잖니?"
언니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입가에서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기로 말하면 언니야 말로 조숙하기 짝이 없었는데....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하면서 울고불고 까부라지던 일은 아마 까마득히 잊은 모양이었다.  
고기 썰어 먹는 그 자리에서 뚱딴지 같이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노래가사가 떠오르다니. 그랬다. 달빛이 쏟아지던 하얀 모래사장에서 반 도막짜리 초에 불을 켜놓고 빌었던 사랑의 심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시간이 먹어가고 생활이 잡아 가버린, 그래서 남은 거라고는 날마다 먹고 사는 일로 타협하는 것이었고, 신기를 머금고 머리 위에 머물러 요요하게 내려오던 달빛쯤이야 그저 어린 시절 유치한 놀음 속의 한 장면으로만 치부해 버린 우리들의 통속극이었던 것이다.

결국 내 입에서 튀어 나온 말도 인간사 다를 바 없는 통속극이었다. 인종도 다르고, 유전병이 있는데다 부모도 모르고, 그러니 근본을 알 수가 있나,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머리 꼭대기 까지 열이 치밀어 올라서 남편에게 쉴 새 없이 푸념을 해댔다. 원 참, 입양아들은 평생 결혼도 못하겠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까지 빽빽 거리는 날 보다 못해 남편이 볼멘소리를 해댔을 때 나는 통속극의 결말을 보고야 말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욧? 당신이 이현이 교육 때문에 미국 가야 한다고 해서 왔잖아욧? 하면서 터져 나온 화증이, 주저앉아 펑펑 울고 난 다음,  씩씩 거리며 청소기를 돌려대고 말린 취나물, 도라지, 버섯 다 꺼내어 물에 삶고 불리고, 우당탕 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마늘 냄새, 식용유 냄새 풍겨가며 밤이 새도록 반찬을 만들어 놓고 나서야 조금 가라앉아갔다. 이제 그 이야기가 되돌이표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얼른 일어났다. 혼자서 맞이할 일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남편이 있어야만 결정 날 일이 아닌가.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막막함이 나를 짓눌렀다. 사실 나는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차에 기름을 넣는 것, 은행에 돈을 넣고 빼는 것, 수시로 날라 오는 고지서들, 세금관계..., 내 손으로 처리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물며 하나 밖에 없는 딸의 결혼 이야기라니....
접시와 포크를 식기 세척기 속에 집어넣고 나서 식탁을 닦았다. 그리고는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난 다음에 얼굴과 손에 베이비 로션을 바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겨울이면 분홍색 베이비 로션을 쓴다. 여름에는 알로에 베이비 로션을 바르고. 굳이 이유를 찾자면, 순한 향 때문이다. 남편은 향수 냄새를 싫어한다. 요즘 화장품은 향이 너무 강해, 향수처럼, 그가 내뱉은 한마디 말 덕분에 나는 그 후로 향수는 절대 쓰지 않았다. 나는 화장품조차도 순한 향을 찾는다. 비누처럼 은은한 향을 찾아보았지만, 비누마저도 여러 향으로 범벅이 되어서 진짜 비누향이 어떤 것인지를 분간 할 수 없었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밖은 이제 어두워가고 있었다. 뒷마당의 숲, 그 나뭇잎들 사이로 어둠이 스며들어가고 숲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물러가는 중이었다. 잠시 후, 숲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가는 듯 하더니 곧 나를 떠밀어내면서 사라져갔다. 어두운 게 싫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침침해진 방안의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탁, 소리를 내며 방안이 환해졌다. 한 쪽에 침대, 망사 커튼, 벽지 바른 한쪽 벽에는 거울하나, 서랍장, 그런데 책상위에 놓여 있던 남편의 사진이 보이질 않았다. 푸른 색 셔츠에 팔짱을 낀 채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당신은 웃어야 잘 나와요, 해서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다가 방문을 열었다.
"이현아!, 여기 있던 아빠 사진 어디에..."
맞은편에 있는 이현이의 방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거실에 서있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머! 당신 언제 왔어요?"
나는 어느 때보다도 반갑게 소리를 질렀다.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아직 안자고 있었어?”
그는 연두색 셔츠에 베이지 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당신 나랑 첨 데이트 할 때 같네, 그 때 그렇게 입었잖아! 거기에다 갈색 자켓 입고,  근데 웬일? "
"그래, 자기가 좋아해서  한번 입어봤어, 내일은 연보라 색, 어때? 그것도 좋아하지?"

"그 색이 당신한테 잘 어울리니까 그랬지.... 근데 당신은 그 때 내가 무슨 옷 입었는지 생각나?"
"그럼, 딸기 무늬가 있는 병아리 색 티셔츠에 밤색 치마 입고 있었지. 콧잔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그가 허리를 구부리며 침대 위에 걸터앉자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참, 그것도 생각난다. 트리오 로스 판쵸스..."
내 말에 남편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젤 좋아하던 노래, 끼엔세라, 끼엔세라.... 베사메무초...난 클리프 리차드 세대인데.... 첨에 트리오 로스 판쵸스를 당신이 좋아한다고 해서 나 좀 실망 했었어, 한 세대 넘어간 가수였잖아."
"나도 그랬지, 이 사람아, 클리프 리차드를 좋아하는 철부지하고 어찌 사나 했어...."
우리는 마주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편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는 남편의 잠옷을 꺼냈다. 그가 잠옷을 갈아입는 모습 위로 냇가 둑길로 걸어오던 그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나뭇잎은 흔들리고 그의 뒤로 둑길의 나무들이 물러서고 있었다.

그가 제지공장 마크가 새겨진 재킷을 입고 둑길에 나타났을 때, 그즈음 막 배워서  재미가 나기 시작한 자전거를 타고 그의 곁을 지나가던 나는 숨을 삼켰다. 열두 살 겨울 날, 요요하던 달빛 아래에서 가슴 한켠을 치며 올라오던 그리움이, 연보랏빛 석양을 뒤로하고 저만큼 걸어가고 있는 그 사람을 온통 둘러싸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눈여겨보지도 않고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면서 그냥 내 옆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른들 세계 속에서 막 튀어 나온 것 같은 성숙함과 낯설음이 그에게서 풍겨 나왔다. 엄희자 같은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열두 살 때의 꿈을 십년이 지나도록 붙들고만 있던 나는, 그를 보는 순간 그를 주인공으로 순정 만화 한편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한 컷은, 머리숱이 많은 주인공 남자가 도도하게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도토리 같이 자그맣고 까무잡잡한 소녀 앞을 무심히 지나치는 장면이었다. 소녀의 눈은 별이라도 후루룩 쏟아질 것처럼 총총히 빛났다. 별 대신, 나뭇잎들이 꽃잎처럼 그의 등 뒤에 쏟아져 내리고, 소녀는 여전히 별 같은 눈을 들어 꽃잎 같은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길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도, 둑 아래 동네 남촌에 우죽우죽 서있는 포플러들도 그의 뒷전으로 물러나고 오로지 그 사람만이 소녀 앞에 서있었다. 그의 주변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고, 그 바람 속에서 나뭇잎들이 물러가며 소리를 냈다.

나는 새로 산 은빛 자전거를 비스듬히 세워놓고 돌아서서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홉 번째 마주쳤을 때였다.
이건 운명이야,  나는 심호흡을 하며 그의 곁을 천천히 마주쳐 스쳐갔다. 그의 숨결을 느끼며 그의 곁을 지날 때, 나는 그가 속해 있던 과거, 현재의 세계가 시간과 공간을 접으며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 위의 할아버지들....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좁았을 때 혹시 형제이었을지도 모를 우리들의 먼 조상에 까지, 그 시간이 닿아 있었다. 그래서 손을 내밀면 잡아줄 것 같은 친숙함이 그의 뒷모습에 흠씬 묻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자전거를 세워놓고 냇가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그를 스쳤던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때, 그가 멈칫 거리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어떤 집안의 사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그를 기다렸다. 보라색 석양이 옅게 퍼져 나가는 초저녁 무렵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앞에 정면으로 다가섰다.
“편지예요”
그가 빙긋이 웃으며 편지를 받았다.

나는 그날부터 매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요일마다 다른 색의 편지지를 골라서 깨알같이 글을 쓰고, 둑길을 걷고 있는 그를 스케치해서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내 첫 번 만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고독하고 명민한, 그러면서 우수에 서려 있는 내 주인공은 겉보기에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따스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가슴으로 사람을 대할 줄 아는 그런 캐릭터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
나는 정말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엄희자, 민애니 씨에게 문하생이 되게 해달라고  편지를 해야지 하고 결심을 했다가는 그들의 주소를 알아내는 일에서부터 막히게 되자 매번 주저앉고 말았다. 또 하나, 내가 갖고 있는 기대, 말하자면 그들의 손에 의해 탄생되던 주인공들이 만화 밖 세계에 어쩌면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꿈을 깨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의 만화를 카피하면서 보냈다. 여자 주인공들의 크고 검은 눈동자 속에 마름모 꼴 별이나 구슬을 그려 넣고 나면 눈 속에서 별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릴 것처럼 청순하고 가련한 이미지가 된다.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눈동자를 가진 주인공들을 복사한 스케치북이 몇 권인지 쌓여갔고 나머지 시간에는 또 그것을 수정하고 들여다보는 일로 소일하고 있었다.

만화 속에는 시간이 없다. 단지 내 환상과 같이 보내는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함이 있을 뿐이다. 내게 있어 현실이란 만화 밖에서 만화 안으로 들어와야만 하는, 그래서 만화 밖 현실이 만만하다 못해 유치한 유희 정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오산 터미널에서 수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를 만났다.
"어쩐 일이세요?"
"수원에서 출퇴근하니까...."

그동안 그가 둑길을 지나 버스를 타러 가는 길목에서 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 나는 그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행운에 감격을 했다.
"그랬다구요, 시간이 아주 먼 옛날에까지 닿아있는 느낌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만화처럼...."
다른 대화는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활짝 웃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은, 등판이 넓은 그와 그 해 늦가을에 결혼을 했다.

그가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그를 위해 밥을 짓고 그를 위해 빨래하는 일, 그가 앉았던 자리를 닦아내는 일들이 모두 그리움에 몸을 적시는 것만 같았다. 견디다 못할 때에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지에 그의 이름을 하나 가득 적어서 보내기도 했다.  추운 날, 따뜻한 물로 그의 발을 씻어주고 그러면서도 너무 그리워서 그의 팔뚝을 깨물기도 했다. 더 이상 그를 위해 해줄 것이 없어졌을 때, 나는 이십사 년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뜨개질을 시도했다. 그가 여자는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첫 작품이 조그만 화병 받침이었지만 아마 그가 백 미터짜리 목도리를 떠 달라고 했어도 나는 그 일을 기쁘게 해 냈을 것이다. 그를 닮은 이현이를 낳고 나서도 그리움은 멈추질 않았다. 달빛이 늘 그의 언저리에서 맴돌며 나에게 그는 너의 운명이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전히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이미 방안은 환했다. 열한시까지 자고 있다니, 시계를 보고나서 나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 남편은 이미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시트를 정리하고 나서 서둘러 주방으로 나갔다.
"엄마, 일어났어?"
이현이가 김이 올라오는 냄비 앞에서 국자를 들고 있다가 나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미안, 아빠는 아침 들고 나가셨니?"
이현이는 얼른 국 냄비로 얼굴을 돌렸다.

"국 끓였어, 콩나물 국"
"그래, 넌 일 안가고?"
"으응, 오늘 토요일이잖아"
그러고 보니 토요일이라는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아빤 토요일인데도 일찍 나가셨나 보네...."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나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하러 나간 건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시험지를 붙들고 알듯 말듯 하면서도 딱 잡히지 않는 답안을 생각할 때처럼 갑갑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비밀스런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듯, 은밀하고도 약간은 쓸쓸한 기운이 나를 계속 붙들고 있었다.    

  
"엄마, 어제 아빠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 아! 크리스 얘기?  못했네, 어쩌면 까맣게 잊었어...."
그러고 보니 남편과 같이 있던 시간에는 이현이 조차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부챗살 접듯이 시간을 접고, 남편과 나는 오래전 이야기만을 끄집어내며 웃었던 것이다.    
"아니, 엄마, 꼭 그런 건 아니야....어제 내가 했던 크리스 얘긴 생각나?"
이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걸 왜 몰라, 얘는...."
"그리고 또 다른 건 생각 안나? 아무 거라도"
이현이가 국자를 내려놓으며 내게 다가섰다.
"무슨 생각?..... 글쎄, 그냥 집안이 좀 낯설다는 생각은 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현이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고 눈의 초점이 멀리 가 있었다.

"아니, 별일은 아니고..... 엄마, 오늘 컨디션 괜찮으면 나랑 쇼핑 갈래? 맛있는 것도 사먹고....응?"
나는 아이가 웬일인지 잔뜩 긴장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현이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대답을 했다.
“그래, 오래간만에 너랑 나가보자”
왜 오래간만이라는 말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왔을까...

이현이가 차고에서 차를 빼내고 있는 동안 나는 우편함이 서있는 곳에 서서 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순이 돋은 나무 가지들은 미풍에  흔들리고 새들은 그 나무
속에서 튀어나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신기했다. 초록색 나무 꼭대기에는 새파란 하늘이 아주 깊게 펼쳐 있었다. 그 아래에서 일어나는 소음과 움직임, 이를테면 어디선가 전기톱이 돌아가는 소리라든지, 윙윙 차들이 아스팔트 위를 달려가는 소리, 민들레 씨가 홀홀 날아다니는 것,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 지렁이가 잔디 위로 기어 나오는 모습들이 내 건조한 체세포 속으로 한꺼번에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 앞으로 찔레꽃과 넝쿨 장미향이 어우러져 풍겨왔다. 웬일일까.....내 세포들은 건조하다 못해 아예 해면처럼 구멍이 숭숭 나버린 모양이었다. 그 속으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가 아우성을 치며 밀려들어 오는 것이었다.

그 때, 맞은 편 집의 출입문이 열리고 남녀 두 사람이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하이, 라고 인사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낯선 중동 사람들이었다. 분명히 중국인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인데.... 그들이 내게 건네주었던 모리화 차가 생각났다. 아직도 캐비닛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야....두 사람은 차고에서 차를 빼내어 이내 길로 나섰다. 그들은 차 안에서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곧 사라져 버렸다.
머리가 아파오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바라보고 있던 시야가 차츰 사라지고 쇄쇄쇄, 소리와 함께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굴러가고, 차가 달리는 양 옆으로는 날아간 낙엽들이 참참이 쌓여있는 장면이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쳐갔다. 그 뒤로, 마른 나뭇가지들이 싸늘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도 낙엽의 잔상이 아직도 눈앞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월이었다. 눈앞에는 연녹색의 나뭇잎들이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다. 어디에도 잎사귀를 떨군 마른 나뭇가지들과 낙엽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나는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 침침한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턱수염을 기른 얼굴이 사진의 한 컷처럼 확 지나갔다. 나는 잔디 냄새를 맡으며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었다. 왜 그런지 꾸욱 누르고 지나가야겠다는 의지가 일어섰다.
이현이가 차에서 내려 내 옆으로 뛰어왔다.

"엄마, 괜찮아? 얼굴색이 아주 안 좋아, 그냥 집에 들어갈래?"
"아니야, 견딜만해...."
이현이가 차를 앞에 세우자 나는 얼른 올라탔다. 꽃이 진 벚나무들은 물이 올라 있고 단풍나무, 떡갈나무 잎사귀들도  연하디 연한 녹색이었다. 그것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 나가자 차는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일년생 꽃들로 앞마당을 치장하는 철쭉 울타리 집을 지나고, 늘 치와와 한 마리가 나와 앉아 차 구경을 하는 빨간 벽돌집 앞을  지나갔다. 트럭이 옆으로 스쳐가고 한 쪽 다리를 약간 저는 중년 남자가 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때, 다람쥐 한마리가 갑자기 내 쪽에서 튀어 나와 길을 가로질러 갔다. 나는 아악 소리를 질렀다. 이현이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길 위에 낙엽들이 뒹굴고 있다. 그 낙엽 위로 차가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나는 차창으로 낙엽이 굴러가 모여 있는 길가를 바라보고 있다. 절망적인 슬픔이 그 낙엽 속에 묻혀 있다. 낙엽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내 안에서, 어딘지 모르는 깊은 곳에서 우웅 거리며 올라오는 아픔이 나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머리 한 쪽에서부터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 바람은..... 그리움이었다.
달빛 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던 그리움, 둑길에서 불어오던 바람, 그와 함께 있어도 늘 불어오던 그 바람이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그 봄을 그리워하고 다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그 여름을 그리워하고.... 여름의 뜨거움은 다 잊어버리고  그 날의 추억만 붙드는 것처럼, 그렇게 붙들고 싶은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이현이는 집 쪽을 향해 차를 돌렸다.  내가 심하게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 빨리 우리 집으로 와줘, 엄마가....으응, 오케이"
이현이가 핸드폰을 들고 다급하게 말했다.

가을 날, 오후였다. 낙엽은 안마당 뒷마당에 가득 쌓여가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것들은 이리 저리 몰려 다녔다.
“오늘 날씨도 쌀쌀한데 집에서 밥 먹지? 이런 날, 그대는 콩나물국 좋아하잖아. 내가 끓여 줄께, 그건 나중에 자기 옷 사 입어”
다름 아닌 결혼기념일에 이현이가 준 선물 카드로 남편의 양복 한 벌을 장만하러 나가자는 요청이었는데 남편은 여지없이 날씨 핑계를 댔다. 미루고 미루던 일이었다. 나도 이번에는 양보하지 않았다.

촛불을 켜놓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체서픽 만의 물길을 내려다보며 그릴에 잘 구운 연어 요리를 먹겠다는 내 제안을 콩나물 국으로 대체하는 남편에게 눈을 흘기며, 나는 그에게 검은 색 터틀 넥 셔츠에 황토색 재킷을 입혔다. 잘 다린 손수건을 그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넣어 주고 머리카락은 젤을 발라서 자연스럽게 넘겼다. 그리고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문을 나섰다. 언제나 감색 양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색상에 호기를 부려 보기로 했다. 그럼에도 그가 자줏빛 우단 상의에 검은 바지를 골랐을 때, 나는 잠시 주저했다. 그가 그 옷을 입고 내 앞에 섰을 때,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그에게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 십여 년을 같이 살아도 그에 대해서 내가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무안하면서도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다.
약간 이르기는 했지만 물 냄새가 올라오는 이너하버의 식당을 찾아갔다. 노란색과 남청색 등이 낮게 매달려 있는 창가에 앉아서 우리는 연어를 먹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서 그를 바라보는 기분은 또 달랐다. 그 거리를 두고 오래간만에 그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손가락에서도 그리움을 끌어냈던 시절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가 포크를 잡고 있던 손으로 아이스티가 담긴 유리잔을 들어 올리고,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기도 하다가, 나이프를 들어 생선이 잘 구워진 부분을 잘라서 내 접시에 덜어 준 다음, 식탁 위에 그 손을 잠시 올려놓았다. 나는 그의 손아래 내 손을 밀어 넣었다. 따뜻하고 두터운 손바닥이 손등에 느껴졌다. 시린 어깨까지 더워 오는 것만 같았다. 그를 안고 싶었다. 나는 내 손을 덮고 있는 그의 손을 끌어당겨 검지를 잘근 씹었다. 그가 물린 손가락을 빼내면서 다른 한손으로 내 이마를 톡 쳤다. 나는 그에게 내 접시를 밀어주며 말했다.
“나 때린 벌이야, 내 꺼 까지 다 먹어!”

나는 커피 잔을 들었다. 물 건너편, 도미노 설탕 공장의 굴뚝이 시야에 들어오고 볼티모어 항구에 차있는 물은 밤하늘을 끌어안으며 같은 색깔로 어둡게 번들거렸다.  
제법 밤이 깊어졌을 때, 우리는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는  일방통행이 많은 다운타운을 빠져 나오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컨벤션 센터 앞을 지나 캠던 야구장 앞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아 막 좌회전을 할 때였다. 뒤에서 차 한 대가 마구 달려왔다. 피할 사이도 없이 그 차는 우리 차의 운전석을 깊숙이 들이받았다.   순간 나는 남편이 튕겨나갈 듯이 앞으로, 옆으로, 마구 흔들리다가 몸을 뒤로 젖히고, 그러다가 곧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이 달려오고 그들은 창문에 매달려 소리를 질러댔다.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며 내 어깨를 흔들었다. 그에게 내 남편을 먼저 도와달라고 말을 했지만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슴 쪽에 심한 압박을 느끼면서 심장이 멎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 손가락 끝이 찌릿찌릿 해왔다. 그러면서 눈앞의 시야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음주 운전자가 일으킨 사고였다. 내가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남편을 묻기 위해 장지로 가는 길 위에 그렇게 낙엽이 구르고 있었다. 누가 운전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저 차는 앞으로 달려가고 길가에는 바람에 구른 낙엽들이 몰려가 쌓여 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길바닥만 바라보았다. 바람과 낙엽이 서로 부딪치는 길을 내려다보며 앞으로 나 혼자 견뎌내야 할 시간들을 생각했다.
적어도 그 날이든, 전날이든, 일주일전이든, 무슨 징조라도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영화 속에서는 그런 일을 앞두고 그릇이 깨어지기도 하고 손을 베인다던가 아니면 악몽이라도 꾸지만 내게는 그와 비슷한 일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남편이 고른 자주색 상의라고나 할까, 나는 한 번도 그가 그런 색 옷을 택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결국 그 옷을 입고 그는 떠나가게 되었다. 나는 온 몸이 늪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가라앉아 버리면 영영 못 헤어 나올 것 같은 불안이 덮쳐 왔지만 한편으로는 그곳에 영원히 침잠해 버리고 싶기도 했다. 귀도 막고 눈도 막고.....이 상황만 잊을 수 있다면 꿈속에 사는 것처럼 산다할지라도, 그래서 현실의 모든 삶까지 잊어야 한다 해도 그러고 싶었다.  나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안간힘을 썼다. 누군가가 나를 바닥에 메어치고 그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중이었다. 마치 가위에 눌리는 듯이 손가락조차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날, 그와 관련된 사고와 함께 생각의 줄은 그곳에서 끊어졌다. 그리고 단지 그와 함께 지냈던 날들을 향해 뒤돌아 가는 것으로만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랬다. 막막함과 두려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고 있는 것 같은 무거움이 그곳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눈물을 닦고 난 다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 비친 내 얼굴은 시간이 주고 간 생채기들로 주름 투성이었다.
"엄마....이제야 생각났어?....칠 개월이나 지났어, 엄마.  문밖에도 안 나가고, 엄마는 그 날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 못했어, 날마다 아빠하고 얘기하듯이 중얼거리고, 꼭 아빠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랬다니까."
나는 비겁했다. 어쩌면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딸아이가 혼자 당했을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현이가 치워 놓았던 사진 액자들을 제자리에 놓아주었다.
"미안해, 엄마, 아빠 사진을 보면 더 기억을 놓아버리는 것 같아서 다 치워 버렸던
거야"

나는 크리스와 이현이를 데리고 남편의 무덤을 찾아 갔다. 고속도로 변에 자리 잡은 메모리얼 파크 안에는 거위들이 떼를 지어 무덤가를 거닐고 있었다. 검은 목줄기를 구부려 접어 먹이를 집어 올리는 거위들은 묘지를 가로지르는 냇가에서 유유히 노닐다가 그곳으로 걸어 나온 모양이었다. 그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마다 놓여 있는 색색의 조화들, 그리고 비석들과 함께 그들은 마치 그곳에 조각해 놓은 조형물 같아 보였다. 죽은 자들과 함께 그곳에 갇혀서 절대로 울타리 밖을 나가지 못할 운명을 가진 무리들처럼, 그들은 서글펐다.
납골당을 지나 또 하나의 다리를 건너자 작은 떡갈나무가 서있는 아래로 긴 의자 모양의 대리석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 그 자리에 섰다. 하지만 아무도 차에서 내리려 하지 않았다. 화병에는 하얀 데이지가 꽂혀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장미 꽃다발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으며 차에서 내렸다.

가까이 가보니 플라스틱 데이지는 햇볕에 누렇게 바랜 채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장미꽃을 그의 이름이 적힌 동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이름이 낯설었던 것은 그가 그 속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였을까....아무튼 생각만큼 슬프지 않았다. 그곳에는 그저 허물 같은 그의 육신만이 들어가 있고 내가 만지고 품고 그리워하던 그의 실재는, 내가 아직 닿을 수 없지만 또렷한 의식의 세계, 달빛 너머에서 빛을 발하던 그곳에서 이곳의 나와 더불어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그를 죽은 자 속에 묻어 버리고, 그래서 그를 추억할 일도 기억할 일도 언젠가 남지 않게 된다면, 나의 생도 덩달아 끝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워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면....나는 남은 시간을 처절하고 비참하게 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그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향한 그리움을 더욱 키워가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을 그곳을, 그가 누리고 있는 안식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로 맘먹었다.  

크리스가 데이지 꽃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다음 다시 화병에 그 꽃들을 꽂았다. 그리고는 맨손으로 주변에 솟아난 민들레를 뽑아내고 있었다. 나는 크리스의 손가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엄지, 검지, 중지....돌아가면서 정기적으로 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손가락들이었다. 그래 그런지 손가락 놀림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크리스, 이제 그만하렴”
내 말에 크리스가 알았다는 듯이 다른 쪽 손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이현이가 그에게 손을 흔들고 나서 아직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난 이상해, 크리스를 보고 있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들이 하나도 안보이고..... 크리스만 보여, 우습지? 첨에 크리스를 학교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어. 어쩌면 방울 소리 같이 찰랑찰랑 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낯익고... 그래서 달려가 팔짱을 낄 뻔 했다니까, 그땐 크리스가 다리 하나를 절고 있어도 손 하나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어. 엄마, 혹시 우리 조상 중에 유럽 사람이 있었던 거 아니야?"
이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우리 둘 사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우리 쪽을 향해 같이 웃고 있는 크리스를 향해 말했다.

"크리스, 이현이가 너 처음 만났을 때 얘기 하고 있는 거야"
"오우케이, 저도 여러 번 들었어요, 어메이징이잖아요, 안그래요? 전 그 얘기 들을 때마다 눈앞에서 장미꽃들이 왔다 갔다 해요, 마치 구름 속에서 슬라이딩 하는 기분이지요"
크리스가 일어나 이현이에게 다가서면서 장난스럽게 흙이 묻은 손을 내밀었다.
이현이가 얼른 그 손을 잡았다.  

"어어! 이게 아니고!"
오히려 크리스가 놀라서 손을 빼내려 하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들이 큰소리로 웃어대자 놀란 거위 떼들이 날개를 퍼덕이다가는 곧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듯, 유유히 잔디밭 위로 걸어갔다.    
"아참! 크리스, 친아버지를 만났다며? 축하해!"
"땡큐우! 정말로.....저의 전 인생을 통해 받은 선물 중에 최상이었어요. 언제나 이런 날을 상상하면서 포기하지 않기는 했지만 막상 이루어졌을 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와 첫 통화를 했던 날, 아버지가 절.... 마이 썬 이라고  불렀어요.....저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었어요. 제가 그리워했던 것처럼 아버지도 그랬다는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제가 나타나는 것으로 아버지 가족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조용히 아버지와 단둘이 만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아버지가 캔서로 많이 고통당하고 있었어요. 여동생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실을 알려 주었지요. 그러면서 우리 가족이 오빠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어요........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가슴이 벅차올랐지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이상하지요. 전 동생도 아버지도 만나지 않았지만 어디에서고 곧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엄마, 여동생이 오빠라 불렀을 때 크리스가 눈물을 흘린 정도가 아니고 아주 소리 내서 엉엉 울었대요, 전화기를 붙들고...."


"그래... 얼마나 기가 막혔겠니....게다가 아버지가 병환중이시라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만나게 된 것도 감사했습니다. 아쉬웠지만 어머니는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아버지도 그랬어요. 어머니가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되는 건, 저도 원하지 않아요. 이제 저는 양부모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현이를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어머님도요. 돌아오신 것,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현이가 많이 기다렸습니다."

떡갈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렸다. 동판 위에 놓여있는 장미 꽃잎이 하나 투욱 떨어지고, 그리고 화병 속에 꽂혀있는 데이지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남편의 묘비 앞에서 크리스의 손을 잡았다. 두텁고 따뜻한 손이었다. 이현이가 크리스의 팔짱을 끼며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이현이의 얼굴 위로, 은빛 자전거를 세워둔 채 둑길에 서 있던 내 모습이 겹쳐왔다. 저만큼 멀어져 간 거위 떼 뒤로 젊은 날의 남편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를 처음 만났던 날처럼 저만큼 멀어져 가는 그를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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