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6

2011.02.18 10:53

김영강 조회 수:533 추천:55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6회



    대학 입시 때문에 공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어느 날, 누가 요란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계속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는 다분히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어머니랑 일하는 아줌마가 시장에 가고 없어 나는 부리나케 대문으로 달려갔다. 아주 키가 큰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어딘가 이국적인 인상을 풍기는 얼굴이었다. 피부도 유난히 하얬다. 그는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A대 배지를 달고 있었다.  

    “사모님, 계셔?”

    어머니를 사모님이라 부르며 그는 대뜸 반말을 했다. 그리고 턱을 쳐들고 눈에 힘을 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기분이 몹시 뒤틀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공손히 그를 대했다.

    “지금 안 계신데요. 어디서 오셨어요?”

    “나, 이강재 씨 아들이야. 사모님이 아침에 들르라고 해서 왔는데.”

    나의 공손하고 부드러운 태도에 그 말투가 약간은 누그러진 것 같았으나 뻣뻣하긴 여전했다. 이강재 씨가 누굴 가리키는지를 몰라 주춤하는데 그는 내 맘을 읽은 듯이 바로 말을 이었다.

    “느네 아버지 회사에 다니는 이강재 씨라고··· ···.”

    그때 아버지는 대전에서 운수업을 하고 있었다. 재벌계 회사는 아니었으나 대전운수라면 그곳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정도로 큰 회사였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더 계속하려 하는데 마침 어머니가 아줌마와 함께 집엘 도착했다. 그를 보자 어머니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반가워했다.

    “아이구, 내가 한발 늦었네. 미안해요. 일단 들어가요.”

    아랫사람에게 항상 친절한 성품을 가진 어머니를 나는 존경하지만 아들 같은 사람한테 너무 쩔쩔매는 것을 보니 기분이 씁쓸했다. A법대의 배지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다행히 어머니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 예의가 발랐다. 점심 먹고 가라고 어머니가 붙잡았지만 그는 용건을 끝내고 금세 일어섰다.

    대문까지 따라나가 그를 배웅을 하고 들어온 어머니는 “아들 녀석은 반듯한 게 지 애비랑 아주 다르구나” 하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대전운수에서 트럭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큰아들인 이민우가 A법대에 입학한 후로는 양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어찌나 잘난 체를 하는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고 싶다가도 눈살을 찌푸린다는 것이다.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못 간 아들을 둔 동료들을 무시하고, 앞에다 대놓고 “우리 민우 이번에 회사 장학금 받은 거 알지? 근데 니 새끼는 왜 맨날 그 모양 그 꼴이냐?” 하고 마구 지껄여 한 번은 어느 운전수와 치고 박고 싸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인재를 키우는 데에 관심이 많으셨다. 그 일환으로 회사의 직원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제도를 마련했고, 거기에 이민우도 해당이 된 것이었다.    

&&    그 후부터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이 언뜻언뜻 머리에 떠올랐다. A대에 입학을 하고부터는 그와 마주치는 요행을 바라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렸고, 법대건물 앞에서는 일부러 서성대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를 만났다. 습기를 밴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빗발이 가는 금을 그으며 흩뿌리고 있는 오후였다. 도서관에서 나와 교문을 나서는 참이었다. 분명히 그였다. 하루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있는 듯,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우산도 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면서도 묘한 여운을 남겼다. 나는 뒤를 쫓아가며 “저기요.” 하고 불렀다. 무심결에 나온 호칭이었다. 그는 계속 앞만 보고 걸었다. 나는 바짝 다가가서 “저기요.” 하고 또 불렀다. 그가 휙 뒤돌아보았다.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네가 여기 웬일이냐?” 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A대학 배지를 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일부러 눈을 크게 뜨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부잣집 딸들은 머리가 텅 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어딘지 빈정거림이 내포돼 있었지만, 뒷모습과는 달리 표정과 말투에는 생기가 넘쳤다. 그리고 첫날처럼 건방진 태도는 아니었다. 내가 A대학에 입학한 것을 모르고 있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됐으나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얼른 내 우산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으면서 우산을 치켜들었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스치는 순간, 나는 흠칫했다. 그는 근처 빵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군말 한마디 없이 자석에 끌리듯 그를 따랐다. 그는 말을 참 잘했다. 자기 이야기도 줄줄 잘도 늘어놓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지금 3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나보다는 나이가 무척 많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학교생활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란다. 그의 유창한 화술에 말려들어 나도 이야기가 술술 잘 나왔다.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나를 비하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데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진심 같지가 않고 괜히 한 번 해보는 지나치는 말처럼 들렸다.

    “대전에서 A대에 들어오기는 하늘의 별따기인데, 어떻게 네가 A대엘 붙었지?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나 보네.”

    마침 배가 고팠던 참이라 나는 콜라를 한 병과 커다란 빵 두 개를 후딱 먹어치웠다. 그는 껄껄 웃으면서 나를 놀리기까지 했다.

    “아니, 여학생이 매력 없이 그렇게 막 먹으면 어떡해?”

    이민우는 학교생활의 길잡이가 되어 나를 도와주었다. 법대학생인 그가 내 전공인 물리학에도 아는 것이 많았다. 아니, 모든 분야에 다 박식했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우린 가끔 만나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구경도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엄격한 가정에서 틀에 박힌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큰 사업을 하는 대전의 유지였고, 나 또한 전교수석을 놓친 적이 없는 집안의 외동딸이었기에 늘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서울의 A대학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제약받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도 맘대로 만날 수가 있어 좋았다.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점점 그에게 빠져들었다. 매일같이 만나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부모의 틀을 벗어나고 보니 양어깨에 날개를 단 듯이 자유로워 공중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었다. 온 세상이 내 눈 안에 존재했다. 속되고 어지러운 일들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인데도,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땅과 푸르고 맑은 하늘이 내겐 축복으로 다가왔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흐르는 대자연의 소리는 삶의 생동감을 충동시켜 살아 있음에 환희를 샘솟게 했다.  

    그는 회사에서 지급되는 장학금으로 학비를 해결했고, 생활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기에 대학입시생들에게 과외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학교 끝난 후, 항상 학생들 공부방으로 달려갔고, 나는 데이트할 시간이 충분치 못해 애가 탔다.

    2학년으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길가의 네온사인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히는 가운데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을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산을 떨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우리는 둘 다 하숙방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라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어딜 가는지 그는 계속 걸었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꾹 찌르고는 묵묵히 걸었다. 사람들의 인파가 어깨를 부딪치는데도 그는 내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다. 한참을 걷던 그는 가슴이 답답하다면서 “어디 조용한 데 없나”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민우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덕수궁이었다. 나는 밤에도 덕수궁이 문을 여는지 몰랐었다. 불을 어슴푸레 밝히고 있는 길을 따라 청춘남녀들이 손을 붙잡고 더러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걷고 있었다. 어두운 숲속에서도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그날 밤, 숲속에 파묻혀 있는 벤치에서 그는 내게 첫 키스를 했고, 그날을 계기로 우리의 사랑은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한데, 우리에겐 한 가지 불문율처럼 되어 있는 철칙이 있었다. 그가 맘먹기에 따라 깨져버릴 수도 있었으나 그는 끝까지 그 철칙은 지켰다. 그는 룸메이트가 있었으나 나는 독방을 쓰는 하숙생이었다. 그러나 이민우는 한 번도 내 방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하숙집 담벼락에 기대서서 나를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놓아주지를 않다가도 그대로 돌아섰다.

    덕수궁에 밤나들이를 원하는 그에게 ‘싫다’ 는 말로 대응을 했으나 결국 나는 숲속에서 그의 품에 안겨 있곤 했다.    
    하루는 아침나절인데도 덕수궁엘 가자고 했다. 과외도 쉬고 모처럼 자유로운 주말이라 종일토록 같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그도 즐거워했다. 그날은 미술전시회가 있었다. 숲속을 지나면서 그는 싱긋이 웃으며 내 손을 꼭 쥐었다. 밤도 아닌데 숲속으로 가자 할 리 만무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앞질러 뛰었다. 뛰어가다 말고 그가 따라오는 기척이 없어 뒤를 돌아보니 그는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연못가에 서 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섰다. 푸른색을 띈 물 위에는 빨간 연꽃들이 꽃잎을 좍 벌리고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연꽃을 부채나 병풍 같은 데서 보았고 그림이나 사진에서 보았었다. 꽃꽂이에서 조화나 실물을 더러 보긴 했으나, 이렇게 연못에 피어 있는 커다란 연꽃들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가슴에 이상한 감동이 밀려왔다. 어찌나 크고 환한지 품위마저 느껴졌다.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이민우도 나와 같은 감정인지 깊은 상념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깨끗이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네. 속은 허허롭게 비우고도 겉은 꼿꼿이 섰으며, 넝쿨지지도 않고 잔가지 같은 것도 뻗지 않는구나. 향기는 멀수록 맑으며,  정정하고도 깨끗한 몸가짐은 감히 어루만지며 희롱할 순 없어라.”

    나는 그가 즉석 시를 읊은 것으로 알고 깜짝 놀라서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얼마 전에 읽은 불교 책에 연꽃에 관한 얘기가 있었는데 아주 흥미로웠어.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무숙이 지은 <애련설>이라는 글인데, 난 이 글을 읽으며 어찌나 공감했는지 몰라. 어때 멋진 글이지.”

    작가와 제목까지 기억을 하면서 글귀를 줄줄 외우는 그가 참 신기했다.

    “백합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꽃이라면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어. 고전문학에 보면 청련도 나오고 황련도 나오는데 원산지인 인도에서도 볼 수 없다고 하고, 보통은 홍련과 백련 두 가지 색깔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백련은 드물어.”

    이민우가 하는 말이 지극히 상식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내게는 새로운 사실들이라 그는 점점 더 내 맘속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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