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14

2011.04.15 11:10

김영강 조회 수:695 추천:95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14회



   크리스틴은 열네 살 때 입양이 된 아이였다. 어느 날, 크리스틴 어머니가 밝혀주어 알게 된 사실이다. 갓난쟁이가 아닌 다 큰 아이도 입양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 후부터 애틋한 마음이 생겨 더 관심이 갔으나 그녀는 공부에 별 의욕이 없었다. 미국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언어문제로 모든 상황이 어려우니 남들보다 더 노력을 해야 하는데도 크리스틴은 그렇지가 못 했다.

   반면에 어머니는 매사에 적극적이며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크리스틴 어머니는 나를 며느릿감으로 찍어놓고 눈여겨보아온 것이었다.  크리스틴 오빠가 동생을 픽업하러 와 나랑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으나 어머니로부터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어색했다. 표정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 후로도 크리스틴 어머니가 몇 번 뜸을 들였으나 나는 애인이 있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땐 이미 이민우와 끝난 이후였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로도 크리스틴 어머니는 여전히 내게 친절했고, 아프다는 소릴 듣고는 전적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사실, 좀 흔들리기도 했다. 애경이 말대로 좋은 남자 물어서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하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이민우는 이미 결혼까지 했는데 나는 남자를 새로 사귈 수가 없었다.    

   하루는, 그녀의 어머니가 라이드를 주기로 한 날이었는데, 뜻밖에 크리스틴이 들어섰다. 벽을 짚고 겨우 문을 열어준 나를 그녀는 표정 없이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은 엄마가 양로원에 갈 일이 생겨, 제가 대신 왔어요.”  

  갖고 온 반찬들을 냉장고 안에 넣은 후, 그녀는 내게 등을 내밀었다. 업히라는 것이다. 서면 통증이 더 심했으나 부축을 해주면 겨우 걸을 수는 있기에 나는 괜찮다고 사양을 했으나, 어느새 그녀는 나를 덥석 업었다. 업자마자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왜 이렇게 가벼워요?”

  보통 때는 백 파운드 정도였으나 지금은 더 내려갔을 것이다. 며칠 전에 샤워를 하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왼다리가 오른다리보다 눈에 띄게 가늘어져 있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크리스틴인지라, 대수롭잖은 그녀의 한 마디가 내게는 의아스럽게 들렸다. 아니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마웠다. 그녀의 널널한 등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크리스틴은 나를 차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시트벨트까지 매주었다.  

   의료원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20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데도 그날은 프리웨이 중간쯤에서 사고가 있어, 차량들과 경찰차들이 레인을 세 개나 차단해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크리스틴은 거북이걸음으로 운전을 하면서 자기가 처음 사고 낸 이야기를 했다.

   “면허증을 따고 나니 어찌나 운전이 하고 싶은지, 자나깨나 차 생각밖에 없었어요. 차 사달라는 말은 물론 끄집어낼 수도 없었죠. 어쩌다 엄마랑 같이 나갈 때 운전을 하는 게 고작이었어요.”

   말 수가 극히 적은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너무 좋아서 얼른 다녀오곤 했어요. 기껏해야 집 가까운 마켓에 가는 정도였지만요. 프리웨이를 타고 한번 좍 달리고 싶었는데도 먼 데는 절대로 못 가게 했어요. 한번은 엄마랑 백화점엘 가는 중이었어요.  신호등이 없는 곳이라 레프트 턴 시그널을 켜놓고, 쇼핑 몰 입구로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서 오던 차가 멈추어 섰어요. 그리고 나보고 먼저 가라는 사인를 했어요. 나도 고맙다는 눈인사를 보내고 얼른 차를 꺾어 입구로 들어가려 하는데, 그만 쾅하고 육중한 것이 차를 들이박았어요. 끝 쪽 레인에서 차가 오는 걸 제가 못 본 거였어요. 제가 조심해서 살살 레프트 턴을 했는데도, 그 차 역시 내 차를 못 보고 달리던 속력을 그대로 낸 거겠죠. 차 오른편 앞쪽이 박살이 나고, 나랑 엄마는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상체를 가누지 못할 정도로 흔들거렸으나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어요. 까닥했으면 엄마가 크게 다칠 뻔 했어요.”

   크리스틴이 얘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자체가 신기해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고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관심 있게 말을 받았다.

   “큰일 날 뻔했네. 크리스틴이 조금만 빠르게 차를 꺾었거나, 그 차가 몇 초만 늦게 달려왔더라도 엄마 앉은 자리를 쳤을 거 아냐. 아휴. 그만하기 정말 다행이야.”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그런데 다행히 상대편 사람이 한국사람이었어요. 몰 안 파킹장으로 들어가 서로 인포메이션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엄마가 부탁을 하더라고요. 나는 깜짝 놀랐지만, 엄마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요. 제가 운전을 한 것으로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 엄마가 운전을 한 것으로 해달라는 거였어요. 그 분도 흔쾌히 허락을 했지만 저는 계속 찜찜했고, 또 걱정이 됐어요.”

   가르치는 학생한테 ‘그건 엄마가 잘 판단한 거야. 진실대로 하면 앞으로 네가 불이익을 당하니까 엄마가 그런 제안을 한 거지.’ 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싱긋이 웃으며 침묵을 지켰다.

   “혹시 그 분이 보험회사에다 엄마가 한 말까지 리포트를 해 더 큰 죄가 되면 어쩌나 하고 밤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고, 알고 보니 그 분이 바로 우리 집 근처에 살아 한동안 친하게 지냈었어요. 엄마가 가끔씩 맛있는 반찬도 갖다주고 그랬어요.”

   “어머니가 양로원에도 봉사하시는 모양이지?”

   “네, 외할머니가 양로원에 계시거든요.”

   “그랬구나. 지금 많이 편찮으셔?”

   “3년 전에 스트록이 와서 지금 누워 계세요. 스토록이 중추신경으로 왔대요. 처음에는 피가 자꾸 굳어져 큰 병원에서 5개월 입원하고 계셨어요. 피가 묵처럼 되는 거였어요. 항생제가 든 링거를 하루 종일 꽂고 있고, 해파린이라는 주사를 배에까지 맞아서 나중에는 온 배가 시퍼렇게 됐었어요.”

   크리스틴은 정말 생각지도 못 한 집안 얘기를 스스럼없이 내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럼 크리스틴이 병원에 자주 갔었겠구나.”

   “자주는 못 갔어요. 저는 정말 할머니가 돌아가실 줄 알았어요. 퉁퉁 부어 가지고 의식도 없어, 다들 돌아가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셨어요.”

   그녀는 앞만 보며 운전을 하면서 아무런 표정 없이 남의 얘기하듯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피가 깨끗해지고 나니까, 꼼짝도 못하는 할머니를 이제 퇴원해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양로원으로 모셨어요. 의식도 돌아와, 저도 똑똑히 알아보시는데 몸을 못 움직여요. 제가 가끔 갈 때는, 간호사들이 할머니를 휠체어에 꽁꽁 묶어서 밖에 모시고 나가게 하는데, 목도 제대로 못 가누어요. 뼈가 없는 사람 것같이 그냥 문어처럼 물렁물렁한가 봐요.”  

   “착하네. 공부하느라 정신없이 바쁠 텐데, 할머니한테도 자주 가고...”

   말을 계속하려 하는데 크리스틴이 가로 막았다.

   “아니에요. 저, 착하지 않아요. 엄마가 가라 그래서 할 수 없이 가는 거예요. 양로원에 가면, 할머니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할머니들도 돌봐줘야 돼요. 어떤 할머니는 자식이 있는데도 생전 안 와요. 그 할머니는 내가 갈 때마다 꼭 틀니를 닦아달라고 그래요. 간호사들이 더럽다고 안 닦아 준대요. 그리고 휠체어에 앉혀서 화장실에 데리고 가야 하고, 어떤 할머니에게는 플라스틱 용기를 엉덩이에 받혀주어야 하고. 어느 날은 힘이 들어 정말 가기가 싫어요. 그래도 엄마 때문에 가요.”

   '그럼 오늘도 엄마가 가라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게 라이드를 주는 것일까? '

  그런데 할 수 없이 온 것 같지가 않았다. 어느새 그녀가 내 맘에 들어와 있었다. 의료원에 도착하고도 크리스틴은 나를 업고 병실까지 따라 들어왔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이에요.”

  크리스틴은 미소를 띠우며 닥터 윌헴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나는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날은 내가 못 보던 크리스틴의 다른 면이 속속 나타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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