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19

2011.05.20 08:25

김영강 조회 수:657 추천:98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19회

  
   애경은 올 때마다 폴 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애경이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느 때, 사귀던 남자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첨엔 그냥 귓전으로 흘려버렸으나 차츰차츰 그들이 잘 됐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고, 애경이가 폴한테서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애경이보다 나이가 너무 많은 것도 맘에 걸렸고, 그가 유부남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더 그랬다. 나이차가 무려 14년이었다.
  
   그녀는 나이가 좀 든 남자를 좋아했다. 유부남도 상관없이 명예와 지위와 돈이 있는 남자들을 주로 만났다.  
   내가 이민우와 사귀고 있을 때였다. 윤 사장이라는 남자한테 푹 빠진 그녀는 날 만나기만 하면 그 남자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 그러다가 그 남자 부인이 알면 어쩌려고 그래?”    

  “염려 마.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그 여자는 나보다도 한 열 배나 더 바빠. 가정주부인데도 얼마나 스케줄이 빡빡한지 남편에게 눈 돌릴 새가 없는 사람이야.”
  
   나는 애경이로부터 그의 와이프 얘기를 들으면서 세상에 참 이상한 가정주부도 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자는 남편이 늦게 들어올수록 좋아한댄다. 아침에는 헬스클럽에서 수영이나 운동을 하고 저녁에는 문화센터에 나가 포크 댄스와 에로빅을 한단다. 골프는 프로 수준이라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치고, 또 유한마담들과 친교가 많아 형님 아우님하면서 점심 먹으러 우루루 몰려다니고. 또 아니? 남자가 있는지도?”
  
   그녀는 숨도 안 쉬고 말을  늘어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내의 일과는 윤 사장이 잠수하기에는 아주 좋은  깊은 바다이니, 모를 수도 있고 또 안다고 해도 별로 개의치 않을 여자 같았다.  

  “어떻게 너는 그  여자의 일과를 그렇게 꿰뚫고 있니? 그 남자가 그러디? 그게 무슨 부부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렇게 사는 부부도 많아. 네가 사는 세상만 세상이 아니니, 너는 그냥 너대로 한 남자한테 일편단심 바치면서 살아.”

   결국은 윤 사장과도 석 달이 못 가 깨졌다.

   어느 날, 마침 크리스틴이 와 있는데 애경이가 찾아왔다. 애경은 크리스틴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한 채 앉자마자 폴 얘기를 하기에 바빴지만 나는 가슴이 뛰었다. 전화 없이 항상 불쑥불쑥 찾아오는 애경이지만 이렇게 크리스틴이랑 마주칠 줄은 몰랐다.
   어색하게 서 있던 크리스틴이 잠깐 나갔다 오겠다면서 문께로 향했다. 그때서야 난 아차하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야. 여긴 선생님 친구.” 하고 서로를 소개했다. 애경이가 바로 얘기를 쏟아놓는 바람에 소개시킬 틈도 없었고 그들의 묘한 관계 때문에 내가 좀 예민해진 탓도 있었다.

   그때서야 애경은 같은 방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는 것을 안 듯이 크리스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너무 빤히 바라보아 나는 도둑이 발이 재린 듯이 안절부절못했다. 애경이가 느닷없이 한마디를 했다.

  “낯이 익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 혹시 어디서 나 본 적 있어?”

   애경은 초면인데도 반말을 했다. 반말도 아주 하대하는 식의 말투라 크리스틴 보기에 민망했다. 크리스틴은 계면쩍은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애경이의 정확한 눈썰미에 놀라 “크리스틴 인상이 좋아서 그런가?” 하고 얼른 애경이의 말을 받아넘기면서  크리스틴에게 너무 늦지 말라고 당부했다.

   애경은 “어디서 꼭 본 것 같은데···.” 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어디서 본 게 아니라 이민우하고 딱 닮았네.’ 라는 말이 연이어서 나올 것 같아 나는 얼른 폴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폴 말야, 혹시 유부남 아니니?”

  “아냐. 싱글이야. 집에도 몇 번 가 봤는걸. 사귀어보니까 진짜 믿을 만한 사람이야.”

   이런 얘길 할 때, 내 말투는 빈정거리기 일쑤였는데 이번에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끄집어낼 듯 말 듯하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너 얼굴이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못쓰게 됐다. 어디가 또 아프니?”

   본 척 만 척했던 내 얼굴이 이제야 눈 안에 들어온 모양이다.

   “소화가 잘 안 돼서 죽 먹고 있어.”

   “죽도 학부형이 끓여다 줬어? 전복죽이야? 너는 운도 좋다. 학생까지 와서 도와주니 말야.”

   몸이 아팠어도 그동안 소화기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한 주어 주 전부터 계속해서 속이 더부룩했다. 운동을 않고 누워만 있다 보니 소화가 안 돼 얼굴이 더 못쓰게 된 모양이다.
   애경이 핸드백을 뒤적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백 속을 뒤지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은 아까 폴 후배랑 같이 만났었어. 같은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야. 내가 네 자랑을 했더니 소개시켜 달라고····.”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아는 애경이라 일부러 나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게 뻔했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었다.

   “이거 그 사람 명함이야. 내가 그 사람한테 네 전화번호 줬으니까 전화 오면 한번 만나 봐.”    

   폴하고 깨지면 어쩌나 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던 내 맘에 그녀는 찬물을 확 끼얹었다. 나는 그만 식탁을 쾅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너 정말 미쳤구나.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전화번호를 함부로 주니?”

   나도 놀랐다. 내 음성이 지나치게 컸다. 악에 받친 것같이 소리가 찢어졌다. “주니?” 하는 끝말은 아파트 천장을 찌를 듯이 옥타브가 높아졌다. 그동안, 늘 남자 소개시켜 주겠다고 들볶아, 그 지겨웠던 감정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주 속이 뒤틀렸지만 그냥 부글부글 화만 끓였지 바깥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함부로 하고 앞뒤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알지도 못하고 마구 지껄이는 애경이를 좀 부족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다 받아주었다. 이렇게 큰 소릴 지르며 화를 낸 건 처음이다. 그녀 역시 맞대응을 했다.

   “너한테 물어보면, 네가 전화번호 주라 그랬겠어? 왜 소릴 질러? 너를 생각해서 한 일인데 왜 소릴 지르고 그래? 내가 언젠가 얘기했지? 지금 네가 살길은 결혼뿐이라고.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이 되는데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니? 아직도 이민우 못 잊어서 그래. 그 새끼 결혼했어. 이 바보야. 내가 얘기했잖아. 아들도 낳고, 사업도 잘 되고 아주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근데 넌 이게 뭐냐? 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진짜 바보로구나 바보.”

   애경은 형부인 이민우를 “그 새끼” 라고 호칭하면서 식탁을 쾅쾅 쳐대고 내게 달려들었다. 식탁 한번 친 대가를 톡톡히 받고 있었다. 차근차근 나를 설득시켜도 될 말에 그녀는 정도 이상으로 흥분했다. 내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생전 처음 겪는 나의 돌변한 태도에 애경이가 놀랜 듯했다. 애경이의 말이 계속되는 중에 나는 다시 소릴 질렀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정말 지겹다. 지겨워. 올 때마다 어떻게 너는 맨날 남자 얘기니? 내가 너랑 같은 줄 아니?  나를 네 수준에 갖다붙이자 마.”  

   “뭐? 내 수준에 갖다붙이지 말라고? 네 수준은 어떻고 내 수준은 어떤데? 그간에 네가 나를 무시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었어. 근데 이제 탁 깨놓고 막 내뱉는구나. 너는 잘나고 나는 못났다아--. 이거야? 천만의 말씀. 넌 네가 못난 정도를 넘어 바보 수준인 거 모르지? 주위를 둘러보면서 어찌 살아야 하는지 좀 생각해 봐라. 너 이러고 있는 게 하도 딱해서 수준 좀 끌어올려주려고 하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이민우한테 차이고도 찔찔 울기나 하고 강미경한테 따지지도 못하고, 그게 바로 바보나 하는 짓인 거 너 몰랐어?”

   아주 빈정거리는 어조로 미간에 내 천자를 그리며 인상을 구겼다. 모아진 눈빛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음성도 점점 고조되었다.  

   “너 지금 영주권도 없이 애들 가르치며 돈 벌고 있는 거, 불법이야. 이민국에서 알면 추방당한다고. 추방당하면 어찌 되는지 알아? 한국에는 네가 발붙일 곳도 없잖아. 부모도 다 죽었다며? 사면이 꽉꽉 막힌 게 불쌍해서 앞길 터주려고 하는데, 나를 무시하고 소릴 질러?”

   남자들한테 써먹던 불똥이 내게로까지 날아올 줄은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앞뒤 분간도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애경이지만 그녀의 한마디는 실로 내겐 충격적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들먹인 말투에서는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빨딱 일어서서 나가라고 말하고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 간다고. 붙잡아도 간다고. 그동안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고 해? 나 건드리지 마. 잘못 건드리면 큰 코 다쳐. 내 말 한마디면 너는 당장 추방이야.”

   당장이라도 내 머리채를 잡을 듯이 애경은 눈을 부릅뜨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은혜니, 원수니, 그건 얼토당토아니한 말이다. ‘지겨워. 지겨워. 정말 지겨워.’ 하면서도 딱 끊어내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녀를 받아준 내가 바보스러웠다. 애경에게 질질 끌려다닌 기분이었다.  
  
   한창 분위기가 안 좋을 때에 크리스틴이 들어왔다. 나는 주춤했으나 애경은 누가 있든 말든 아무 상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었다. 언성도 있는 대로 높였다. 크리스틴은 놀라서 얼른 몸을 피하며 뭘 사왔는지 주섬주섬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애경이가 나간 다음 크리스틴은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선생님 괜찮으냐고 놀래서 물었다. 애경이가 이민우를 거론하며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막 소리를 지른 바로 다음에 크리스틴이 들어와 천만다행이었다. 혹시 바깥에까지 그 소리가 새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선생님한테 저런 괴상한 친구가 다 있어요? 무슨 일이라도 터질가 봐 무서워서 혼났어요. 선생님한테 덤벼들 것 같아 제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어요.”

   그 후로, 애경이로부터는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불안하고 꺼림칙했지만 왠지 이제는 더 이상 연락이 없을 것 같았다. 얼마 후, 대사건이 터질 줄을 상상조차 못한 채.

   다리의 통증도 거의 말끔하게 나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손이 저려 한참 동안이나 만져주곤 했는데 그 증상도 없어졌다. 그리고 가끔은 양쪽 손바닥 바깥쪽이 아무 감각이 없었는데 그 증상도 사라졌다. 아무리 꼬집어보아도 아프지 않아 이러다가 온몸이 마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 속에 밤잠을 설쳤는데, 이제는 그 걱정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적 같은 일은 겨드랑의 반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도 닥터 윌헴 말대로 나아버린 것이다. 눈에 보이던 헛것들도 사라졌고 나쁜 꿈도  더 이상  꾸지 않았다.

   애론의 도움을 받아, 학교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몸으로 부딪치니 얼마든지 살길이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울기만 했던 나 자신이 정말로 바보스러웠다.

   심장에 켜 있던 빨간 신호등이 서서히 파란불로 바뀌면서 내 인생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눈앞을 뿌옇게 가렸던 비안개가 조금씩, 조금씩 걷혔다. 몸체에서 떨어져 바짝 말라 최후를 장식했던 나뭇잎이 땅에 묻혀 다시 생명을 전승하고, 벗은 나목의 가늘디가는 줄기도 긴 겨울의 침묵에서 벗어났다. 사철이 서로 얼싸안고 해마다 사랑을 잉태해 계절의 순환기에 접어들 듯, 나의 삶도 또 하나의 부활인 봄을 맞게 된 것이었다.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을 파악한 닥터 윌헴은 우선 과외지도부터 그만두라고 했다. 파트타임으로 좀 편히 일할 수 있는 다른 직장을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즐겁게 가르치긴 해도 그것이 얼마니 큰 스트레스인지 모르니  되도록 푹 쉬어야 하며 그 시간에 학교공부를 조금이라도 더 하라고 했다.

  SAT 시험결과 발표가 있는 그 전날 밤은 잠을 못 이루고 조바심에 시달리고, 모의고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 처지가 떳떳이 일할 수 없는 유학생신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다.  

  “해주 씨가 병원일을 좀 도와주세요.”

   뜻밖이었다. 다른 직장이란 바로 그녀의 병원이었다.

   월급은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장학금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오후에만 일을 하면 된다는 그녀의 말이 첨엔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편안해 질 수가 있다. 내 처지에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만큼 뻔뻔스럽지가 못한 나는 그녀와 여러 번 만나서 상의를 했다. 공부가 끝나고 취직이 되는 대로 갚는다는 약속을 하고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녀가 한 장학재단에 매달 이천 달러씩을 보내고 있는 것을 나는 안다. 그 일환으로 내게도 장학금을 지급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대학도 졸업을 못한 처지에 박사학위까지 받으려면 참말로 머나먼 길이었다. 그러나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배짱이 생겼고, 영주권도 학위만 받게 되면 해결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불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것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편했다.

   마침, SAT 시험결과가 다들 기대 이상으로 좋게 나온 후라 부담감 없이 과외지도로부터 훌훌 손을 털었다.  
그런데 크리스틴은 시간 착오로 인해, 시험을 다 끝내지 못하고, 그날 시험은 취소를 시켰다고 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선생님, 제 실수였어요. 근데, 선생님 저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무슨 소리야. 다음에 한 번 더 볼 기회가 있는데. 더 열심히 해서 잘 보면 되지.”

  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도 마음에 걸렸지만 진실을 묻어 두고 있는 것이 더 걸렸다.

  ‘진실을 지금 밝힌들 뭐가 달라질까?’
  
   몸은 점점 편안해졌다. 편안한 몸에 익숙해지다 보니,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밤중까지 여러 그룹을 뛰어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쳤던 나날을 어찌 내가 견디어냈는지 실감이 안 났다.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이 편안하니 마음도 편안해져서 병원일이 쏙쏙 머리에 들어왔다. 복잡한 보험관계도 금세 파악이 되었다. 닥터 윌헴으로부터 과분한 배려를 받아 어느 땐, 이 현실이 꿈을 꾸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샛별 같은 평화와 해와 같은 덕이 있었다. 샛별이 지고 태양이 떠오르듯이 그 마음의  평화에서 덕스러운 행위가 배어나왔다.

  그녀는 곧, 내게 병원 살림살이를 송두리째 맡겼다. 다리의 통증은 전혀 없었지만 그녀는 내 상태를 계속 지켜보면서 치료를 해주었다. 딸처럼 대해주는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닥터 윌헴을 만나고부터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내 모든 것들이 하나씩 둘씩 제자리로 돌아오고, 고통과 시련의 고개 너머에는 또 다른 희망이 시작되고 있었다.      

  햇살이 감미롭게 남아 있는 어느 토요일 저녁나절, 나는 처음으로 닥터 윌헴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애론은 학교 근처에 따로 살고, 그녀는 친정어머니와 살림을 해주고 있는 아줌마 한 분과 같이 살고 있었다. 친정어머니는 팔십이 넘었을 나이인데도 아주 건강해 보였다. 첫 만남인데도 그녀는 내 손을 붙들고 오랜만에 손녀딸을 본 듯이 반가워했다.

  “어서 오세요. 해주 씨 맞지요? 진작 보고 싶었는데··· ···. 이제 좀 자주 놀러와요. 우리 딸이 해주 씨가 일을 잘해 줘서 무척 편하다고 그랬어요. 고마워요.”        

  부엌에 있던 아줌마까지 내게로 달려와 환영을 했다.

  “선생님한테서 해주 씨 얘길 많이 들어 그런지 처음 뵙는 분 같지가 않네요.”

  지나친 환대와 그들이 나한테 깍듯이 존칭을 쓰는 것이 어색했다. 나 역시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는 나보다 훨씬 어려도 존댓말을 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지만, 내가 받는 것은 불편했다. 닥터 윌헴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 말씀 낮추시라고 말을 했지만 쉬이 실행을 안 해, 하루는 내가 강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말씀 낮추세요. 제가 너무 불편하고 또 선생님과의 사이가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아 제가 불안해서 그래요.”

  그 다음부터 나를 이해했는지 그녀는 내게 말을 놓았다. 나는 얼른 그들에게 말씀 낮추시라는 말부터 했다. 닥터 윌헴도 내 맘을 알고 한마디 거들었다.

  “앞으로 가족처럼 지낼 텐데, 그냥 말 놓으세요. 아줌마도요. 그래야 해주 씨 마음이 편하지요.”

  “가족처럼”이라는 그녀의 말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갑자기 애경이가 떠올랐다. 언젠가, 그녀가 자기 생일날을 몇 번이나 강조를 해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해주야, 너랑 나랑 식당에서 밥 먹는 거, 이게 처음이야. 내가 밖에 나가서 밥 먹자고 하면 항상 넌 싫다 그랬다고. 그래서 너네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었잖아.”

   그때, 난 늘 라면만 끓여 먹고 살았다. 이민우와 사귈 때에는 못하는 요리이지만 그를 위해 부엌에 서 있는 시간이 즐거웠고, 그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시간도 행복했으나 그는 내게로부터 먹는 즐거움마저도 송두리째 빼앗아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애경이가 늘 내 아파트엘 찾아왔지, 그녀와 밖에서 만난 적은 거의 없었다. 거기엔 내 고의적인 감정이 숨어 있었다. 좀 미안했다. 마침 웨이트리스가 지나가 화제를 돌릴 수가 있었다.

  “여기 찬물 좀 더 주시겠어요?”      
   애경이가 픽 웃었다.
  “저런 애한테 무슨 존대냐? 더구나 열 몇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어린애한테.”

  그리고 웨이트리스의 뒤통수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완전히 명령조의 말투였다.  “야, 여기 김치하고 콩나물무침 더 갖고 와.”

  “여기 김치 많이 남았는데 뭘 또 갖고 오라 그러니?”

  “남으면 싸가지고 가지. 이런 김치는 마켓에서도 안 팔아.”
   허지만 추가로 부탁한 김치는 못 가져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녀는 “걱정 마. 다 수가 있어” 하고는 한번 더 소리쳤다.
   “야, 김치 좀 많이 갖고 와라.”  
  
    언뜻 애경이를 떠올리고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영주권 운운’ 한 그 뒤엔 계속 소식이 없는 것이 다시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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