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8

2011.03.04 11:26

김영강 조회 수:481 추천:54


-토요연재소설-

침묵의 메아리


제 8회

    

   “배고프다. 저녁 먹으러 가자.”

   그는 내 손을 붙들고 일어섰다. 그의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착잡했던 가슴이 금세 훈훈해져 쓴웃음이 나왔다.  

   “실컷 잤어요?” 하고 쏘아주지도 못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네. 미안해’ 하는 한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건만 그는 그 말을 안 했다. 나는 저녁 시간이 지난 지도 몰랐다. 우린 근처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었다. 이제 각자의 집으로 갈 일만 남았다. 종일을 내내 같이 있으면서, 단둘이만 있을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느낀 하루였다.
  
   집 동네에 들어서서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주 가던 찻집을 향했다. 찻집은 텅 비어 있었다. 늘 반가워하던 주인 마담도 안 보였다. 달변인 그가 르네상스의 침묵을 깨고 드디어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김 부장의 시선에 매어 잡쳤던 내 기분도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 전시회에서 황진이의 시를 풀이한 후속인지 그는 고전문학에 관한 얘기를 했다.

   “현대소설보다도 고전문학에 심취하면 훨씬 더 그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있어. 고등학교 때 역사 시간에 배웠잖아. 해주도 기억할 거야. 이조시대 소설, 한중록이나 인현왕후전, 또 계유일기 같은 거 말야.”

    한중록은 비운의 사도세자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자전적인 소설이라 데서부터 얘기는 시작되었다. 인현왕후전 얘기를 할 때, 나는 장희빈을 떠올렸고,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들먹이며 계유일기 얘기를 시작했을 때는 다행히도 역사 시간에 배운 폭군 광해군과 인조반정 사건이 기억났다. 그래서 조금씩 얘기에 끼어들 수가 있었으나 실은 이 모두가 다 사극에서 본 줄거리들이었다.

  “인현왕후전과 계유일기는 작가 미상인데 둘 다 궁중의 나인들이 쓴 것이야. 자기가 모시고 있던 왕비의 비극을 쓴 거지. 이런 옛날 소설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와 내가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나는 가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달아. 우리의 고유문자로 후세에 길이 전할 문헌을 남겼다는 것, 참 대단한 일이야.”

  나는 그와 마주앉아 얘길 듣는 것이 참 즐거웠다. 나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마냥 행복에 젖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의 깊은 바다에 침몰하고 있었다.  

   그는 헌책방을 돌고 돌며 고전문학전집을 구입했다고 하며, 어릴 적 꿈이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은 내가 어릴 때, 글짓기 대회에 뽑혀나가 더러 상을 받은 적이 있거든. 중학교 1학년 때는 방학숙제로 글짓기를 하다 보니 소설이 돼버렸더라고.”

  나는 너무 신기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마나, 중1 때 소설을 썼다고요?”

  “뭐, 소설 비슷한 글이었어.”

  “어떤 얘기였어요?”

  나는 정말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줄거리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긴 하는데 두 형제 이야기였어. 형이 주인공 “나”로 서술된 일인칭 소설로, 갓난아이 적에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쌍둥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어머니를 만나게 되는데 형은 엄마를 용서하지만, 동생은 그렇지가 못해 갈등을 겪는다는 뭐 그런 줄거리였어.”

   계속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엄마도 없이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란 쌍둥이가 불쌍해 가슴이 찡했다.  

  “어마. 슬프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맘에 내려앉아 공감을 자아냈다.

   자기 소설에 몰두해 있는 내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그는 얘길 하다말고 내 얼굴에 코가 맞닿을 듯이 고개를 돌리고는 뺨을 살짝 꼬집었다. “슬퍼?” 하고.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끝에는 어찌 됐어요?”

  “끝은 기억이 안 나. 형이 엄마를 만나러 가는데, 동생이 막 울고불고 가지 말라면서 형을 붙잡고 그런 것만 기억이 나네. 근데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 받은 걸로 끝나버렸어.”

  그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그때 국어 선생님이 자질을 발견하고 끌어주었더라면 지금쯤  유명한 소설가가 됐을 것도 같은데····.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아니. 그건 내  어릴 적 꿈이었지. 지금은 아냐. 소설가는 배고픈 직업이거든.”  

  “그럼, 학교 다닐 때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어릴 적 잠시였지. 꿈은 자꾸 바뀌더라고.”

  “그렇지만 자질이 있으니까, 다른 일을 하면서 취미로 쓸 수도 있잖아요.”

   “취미로 써서 좋은 글이 나올까? 죽기살기로 달라붙어도 좋은 글이 나올까 말까 하는 게 소설이야. 장사 중에서도 제일로 밑지는 장사지. 그래서 일찌감치 포기했어.”

  그는 소설을 쓰면서 모든 고난을 다 겪은 사람처럼 말했다.  천재적인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 났는데도 세상을 일찌감치 내다보게 된 이민우는 법대를 지원했다. 명예와 부와 권리를 한꺼번에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법조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가 내 손을 꼭 쥐었다.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는 의자에 팔걸이까지 있어 손을 잡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자기 뺨에다 갖다댔다.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도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누가 볼까봐 흠칫했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의 뺨은 뜨거웠다.

   이미 어두워진 바깥에는 가는 비가 불빛 속에서 빙수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색색가지의 네온사인들이 활짝 웃고 있는 불빛 환한 어두운 저녁, 저녁 비는 불빛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찻집 입구에서 우산을 사 쓰고, 천천히 걸었는데도 어느새 우린 집 앞까지 와 있었다. 그가 내 어깨를 감싸안고 돌아세우며 저기까지만 다시 갔다 오자고 했다. 그리고 다 와서는 또 돌아서고····. 그렇게 우린 우산 속에서 여러 번을 왔다갔다 반복했다.

   “해주야!!” 하고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보통, 부를 때와는 뭔가 다른 억양이었다. 불러만 놓고 잠잠했다.

   “왜요?” 하고 묻는 내게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너, 그냥 내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라. 맨날 쪼물딱 쪼물딱하고 다니게”

   밤이라도 새울 듯, 그렇게 한참을 왔다갔다 하다가, 그는 어느 컴컴한 골목으로 나를 밀어붙였다. 삼겨버릴 듯이 진한 입맞춤과 더불어 어찌나 꽉 껴안는지 가슴이 조여들어 나는 그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가냘픈 새 한 마리가 그의 품안에서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 우산은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이민우와 자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우리가 얼마큼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인데도 아버지의 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민우를 남자친구로 사귄다는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 된다고 했다. 워낙에 어렵고 무서운 아버지라 잠자코 순종하는 척했으나, 조건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덕수궁 미술전시회에서 김 부장을 만난 후, 아버지가 곧 아시리라고는 각오했지만 이리도 강력하게 반대를 할 줄은 몰랐다. 똑똑한 이민우이니 아버지가 어느 정도는 수용하리라 믿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김 부장이 그날 본 광경을 어찌 말했는지 모르나 그의 눈에도 우리가 완연한 애인 사이라는 것이 비춰진 모양이다.

   나의 아버지는 사장이고 그의 아버지는 트럭 운전수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직업이다. 인간은 다 평등하기에 직업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겐 그런 조건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항상 당당했고 자신만만했다. 나는 그런 그가 더 좋았다.

   한데, 나중에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하는 아유가 딴 데 있다는 것을 어머니로부터  듣게 되었다.

  첫째 이유는 본인인 이민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된 셈인지 아버지는 그를 싫어했다. 그가 믿을 만한 녀석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둘째 이유는 그의 아버지에게 있었다. 거짓말을 잘 하며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고 또한 부부싸움을 할 땐 아내를 두드려 팬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회사 야유회 때, 그 많은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역시 남편에게 맞을 짓을 하며 끝까지 바락바락 대든다는 것이다. 또한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뻔뻔스러운 여자라고 소문이 파다했다.

  또 다른 이유가 이어졌다. 이민우 아버지는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그리고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까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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