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12

2011.04.01 12:39

김영강 조회 수:593 추천:96

-토요연재-

  침묵의 메아리

  
  제 12회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며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체가 흐릿하게 번져갔다. 애경이의 얼굴이 물속에서 일렁거렸다. 나는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어마, 너 쇼크 받았구나. 얘, 혹시 너도 임신했었니?”

   정신이 번쩍 들어 나는 큰 소리로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다.

   “그렇지. 너 같은 맹꽁이는 어림도 없지. 밀어냈겠지. 그러니까 이민우가 도망갔지. 사실 말이지, 이민우가 척 봐서는 아주 매력이 있잖아. 여자들이 따르는 타잎이지. 네 애인인 줄 뻔히 알면서 언니가 잡아끌어 뺏은 거 보라고. 우리 언니 이중인격자인 거 너도 이제 알잖아. 화끈하게 잡아끄는 여자가 있는데 어느 남자가 맹꽁이 같은 너한테 붙어 있겠냐?”
  
   순간, 애경이의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그 말을 받아쳤다. 나도 놀랐다. 그와 사귀는 동안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들이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여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만 봐도 가슴이 덜커덩 하고 내려앉는 충격을 느끼곤 했기에,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일 것이다.

   “잡아끄는 대로 끌려가다간 여자가 자꾸 바뀌겠네. 그렇게 매력이 있으니 앞으로 이민우 잡아끄는 여자가 어디 한둘이겠니? 니네 언니가 만날 눈물이나 짜고 말야. 두고 봐.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거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차지게 꾹꾹 눌려 소리의 강약이 두드러졌다. 분이 치받혀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나의 돌변한 말투에 잠시 놀란 듯 주춤하다가 애경은 손으로 내 무릎을 치면서 신이나 죽겠다는 듯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언성을 높였다.

   “어마나 네가 웬일이니? 악담을 다하고?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위선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네가 어떤 땐 언니랑 너무 닮아 기분이 되게 안 좋았는데, 이제야 네가 내 친구 같다야.”

   병원 수술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던 생각이 났다.

   ‘네 아이만 보호받을 권리를 타고 났니? 어디 두고 보자.’

   애경이 말대로 나는 정말 악담을 하고 있었다.

   소설을 읽은 그 다음날 바로 나는 한국타운의 책방엘 갔다. 혹시 강미경이 펴낸 책이라도 있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으로 출판된 소설책은 한 권도 없었다. 수필집이나 시집 쪽도 다 훑어보았으나 ‘강미경’도 ‘강 미셀’도 없었다.  

   사실 그녀는 책을 많이 읽었고, 동생인 애경이한테, 또 나한테도  좋은 책들을 추천해주었다. 물론 영어로 된 책이었다. 우리가 미국 주류사회에 끼이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며, 잡지나 신문도 열심히 읽으라고 강조했었다.

   애경을 따라 교회에 나가 점점 강미경과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에게 사귀는 남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는 좀 의아했다. 타인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그 어떤 신비감을 풍기고 있어 남자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의 분위기가 좋았다. 그 분위기가 신성해보였다. 정말 그때, 난 강미경이 이민우와 엮여질지는 꿈에도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민우가 강미경과 엮어진 후, 내 의지로써 노력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를 붙잡아 보려고 그에게 매달린 적도 없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모양 ‘이 나쁜 놈아!’ 하고 따귀를 갈긴 적도 없고, 강미경을 만나서 물러나라고 말한 적도 없다. 나는 아무런 슬픔도 극복할 수 없는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침묵을 지키면서 그가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렸다. 애경이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면을 썼다.

   또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우린 결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얘기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결혼이란 단어를 들먹거려본 기억도 없는 것 같다.  

   갑자기 언니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애경의 죽음을 캐자는 것은 아니다. 그냥 한번 보고 싶었다. 주소는 신문사에 연락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프고 괴로웠던 추억들이 이제는 모두가 다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다. 헤어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를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깨달았다.    

   그 소중한 경험을 내 가슴에 안겨준 이민우가 도리어 고맙기까지 하다. 소소한 바람도, 이파리 하나도, 이 세상을 온통 아름다움으로 비춰지게 한 그 사랑까지도.    

   그들이 혼전임신으로 아들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나는 똑바로 서질 못하고 계속 비틀거렸다.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어져 몸속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아무리 주먹을 힘주어 쥐어보려 해도 손에 힘이 모아지지가 않았다. 가슴 밑바닥에 구멍이 송송 뚫린 것같이 허전했다. 숨을 쉬어도 허방으로 다 새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지만, 학교 채플을 향하는 내 발걸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원망할 때는 언제고, 또 무슨 맘으로 교회엘 왔는지 부끄럽기까지 했다. 동이 막 트기 시작한 아침의 교정은 무척이나 한적했다. 교회당도 텅 비어 있었다. 기도도 잘 할 줄 모르는 나인지라 눈을 감고 “하나님” 하고 입속으로 불러보았다. 부르긴 했는데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는 “도와주세요” 라고 소리를 내며 기도하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하나님. 지금 저는 아무런 의욕이 없어요. 모든 게 다 힘들고 귀찮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어요. 이대로 가다간 제 몸이 다 사그라져 흔적도 없이 없어질 것 같아요. 제게 의욕을 주시고 힘을 주셔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세요. 도와주세요.”
  
   두서없이 몇 마디를 지껄이는데 목이 콱 메면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제는 눈물이 그친 줄 알았는데 다시 울음이 복받친 것이다. 텅 빈 널따란 공간이었기에 저절로 소리가 새나왔다. 서러움 때문은 아니었다. 앞길이 막막해서 울었다. 사방이 꽉꽉 막혀 있는 내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이 너무나 슬펐다. 이제는 그리움에 지쳐, 나 혼자 남겨두고 같이 떠나버린 부모님이 원망스러워 울었다. 소리가 바깥으로 퍼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냥 울었다. 두 팔을 고이고 머리를 움켜쥔 채 울고 또 울었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 고개를 들었는데 웬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의 햇살에 눈이 부셨지만 그의 얼굴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언어학과 교수 애론 윌헴이었다. 언어학 중에서도 한국학을 전공했고, 한국에 나가 어학연구소에서 2년 동안이나 일을 한 사람이었다. 한국어뿐만이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 불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한 남자로 학생들 간에 잘 알려진 교수였다.  
  
   어머니가 한국여자이기에 한국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어 한국학을 전공했는지는 모르나, 한때는 좀 의아한 느낌을 가졌다. 개인적으로는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으나 나도 그의 한국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한국 학생들이 그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을 상당히 거북해 해, 모두들 그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불렀다. 나는 처음에 그가 교수인 줄 모르고  학생인 줄 알았다.
  
   무안해서 얼른 일어나 인사를 하려고 하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갑자기 왼쪽다리가 뻣뻣해지면서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온몸을 찔러댔다. “아아아-- ” 하고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나는 저절로 들린 왼다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누운 채로 뒹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통증은 처음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애론은 재빨리 나를 들쳐업었다. 그리고 급하게 차에 태웠다. 내게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으나 그 아픔을 이길 수가 없었다. 엉덩이로부터 왼발이 뜯겨나가는 것 같았다. 뜯겨나간 자리에 혈관이 실밥처럼 너덜거리는 것이 감은 눈 속에 보였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척추신경의료원으로 한의원을 겸하고 있었다. 학교 병원응급실로 향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헛것에 시달리기 그 전부터 왼다리가 아팠다. 콕콕콕 찌르기도 하고, 쥐가 나서 재리기도 했다. 어떤 땐, 감각이 아주 없어 걷다가도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곤 했다. 며칠 전에는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뭔가가 찍 하고 잡아당겨 쭉 뻗친 다리가 그대로 굳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가 쩌억 벌어져서 금세 오물어지지가 않았다. 내 의지로는 컨트롤할 수 없어 그냥 “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증상이 매일 계속되지는 않아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하고 내버려둔 것이 병을 키운 결과가 되고 말았다.

   다리뿐만 아니라 팔도 아팠다. 양쪽 어깻죽지에서부터 손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다리의 통증보다는 약했으나 양치질을 하려고 팔을 들면 당겼다. 양치질을 끝내고 두 팔을 한번 쳐들어 보았다. 큰 통증 없이 잘 올라가긴 했다. 그러나 순간 나는 거울에 비친 내 겨드랑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전만한 반점들이 여기저기에 둥글둥글 퍼져 있는 것이었다. 양쪽이 다 그랬고, 팔 안쪽에도 여러 개가 내려와 있었다. 옅은 밤색이었으나 아주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큰 것은 쿼터만 했다. 가렵거나 아프거나 하는 감각이 없었기에 그 반점들이 언제 생겼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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