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남편과 호들갑이 수정본 2011년

2005.01.10 11:13

김영강 조회 수:911 추천:144

저만치서 그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명자는 재빨리 등을 돌려 교회 옆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이구 형님, 이게 얼마만이야.’ 하고는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감겨들 것이 뻔해 피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어느새 “형님, 형님” 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예배에는 안 빠지는 편이나 명자는 교회에 별로 친한 사람이 없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예배 끝나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법도 없이 곧장 집으로 직행하는 그녀다. 다른 사람들도 명자의 존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 그녀는 오히려 마음 편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늘 명자 앞에 나타나서 아는 체를 하고 친절하게 굴며 가까이 접근을 한다. 어떻게 나이를 알았는지 그 여자는 명자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사실이지, 그 여자로부터 형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싫다. 처음에 명자는 그녀가 자기보다 훨씬 위인 줄 알았다. 결혼한 딸이 있고 손녀가 둘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시애틀에 살고 있다는 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이곳 엘에이를 방문한 적이 있다. 두 손녀가 칭얼대는데도 그 여자는 교인들에게 딸을 소개하느라고 바빴다. 명자 앞에서는 더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명자보다 네 살이나 아래였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스무 살에 결혼을 했다는 결론이 나왔었다. 그 나이에 명자는 유학시험 준비에 바빠 데이트 한번 못해 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 그녀의 주위에는 남자들이 얼씬거리지를 않았다. 예쁘지 못한 얼굴이 그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땅만 보고 다녔다. 못 들은 척 하려다가 명자는 마지못해 돌아보았다. 디자인이 아주 특이한 은색 빛깔의 의상으로 치장을 하고 뛰어오는 그 모양이 마치 펄떡이는 인어 같았다. 윗도리는 목이 너무 깊게 파여 가슴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였고, 치마는 허리에서 엉덩이 부분까지는 꽉 끼는 스타일인데 밑으로 내려오면서는 약간 퍼져 무릎 아래엔 잘잘한 주름을 잡아 무대 위의 칼멘을 연상하게 했다. 빨간 의상이 아닌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한 갈색에 노오란 색깔로 하이라이트를 가미한 머리가 아주 보기 좋았다. 굽슬굽슬한 웨이브가 자연스럽고 멋있게 손질이 되어 있었다. 마른 편은 아닌데도 그 여자는 아주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풍만한 가슴이 조화를 이루어주고 둥글둥글하고 큼직한 히프가 받혀주는 탓인지 허리가 유난히도 잘록해 보인다. 숨을 항상 안으로 들이밀고 있는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배에는 군살이 하나도 안 붙었다. 한마디로 섹시하다. 손녀를 둘이나 둔 할머니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얼굴도 주름살이 없어 아주 젊어 보인다. 생김새는 눈코 입이 다 큼직큼직해 좀 억세 보이긴 하나 좋게 말해 현대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얼굴이다. 쌍꺼풀의 두께로 보아 눈은 성형을 한 것이 틀림없다. 입술도 까뒤집었는지 두툼하다. 가무잡잡한 피부는 건강미가 흘러 넘쳐 보기가 좋다. 얼굴이 너무 큰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체격도 큰 편이니 균형이 맞는다. 헐레벌떡 달려온 그녀는 잽싸게 명자의 팔짱을 끼면서 큰 눈을 더 크게 동그랗게 만들고는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리고 명자가 상상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싸구려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범벅이 되어 코를 찔렀다. 역겨웠다. “어이쿠, 형님. 너무 오랜만이야. 아참, 홍콩에 출장 갔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하여튼 형님은 참 근사해. 외국 출장도 다니고 말야. 형님 없는 동안에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알아? 오죽하면 형님 꿈을 다 꾸었을라구. 아이고 더 이뻐지셨네. 출장 갔다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아?” 출장 다녀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는 말끝을 올렸다 내렸다 해가면서 마치 죽마고우를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더 예뻐졌다는 그녀의 말에 기가 꽉 막혔다. 예쁜 것하고는 거리가 먼 명자이기 때문이다. 어정쩡한 미소를 띠며 그녀와 나란히 걷는 수밖에 없었다. 교회 안에 들어가서는 둘이 나란히 앉지 않을 것이니 정말 다행한 일이다. 그녀는 항상 앞에서 서너 번째 줄 한가운데에 앉고 명자는 뒤쪽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뒷모습도 화려해 금방 눈에 띄는 그녀다. 물론 앞모습은 더 화려하다. 그 화려한 모습으로 몸을 비비꼬면서 아양을 떠는 것이 그녀의 특징이다. 남자들한테도 마찬가지다. 좋게 말해서 호들갑을 떤다는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어느 날, 명자는 그 여자에게 호들갑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땐 그 호들갑이 추태로까지 느껴지긴 하나, 참말로 딱 들어맞는 별명이었다. 춘실이라는 그 여자의 이름과도 어울리는 별명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교회 뒤뜰에서 남자 둘이서 언쟁이 붙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몸싸움이라도 할 것같이 두 남자는 험악한 인상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 때,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호들갑이 부리나케 달려와서는 한 남자를 낚아챘다. 몸을 남자한테 바짝 밀착시키고 오른손으로 그의 왼팔을 부여잡고 왼손으로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자기 몸으로 남자의 몸을 밀어냈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남자의 입 속까지 들어갈 것 같아 아슬아슬했다. 치고박고하는 사태가 벌어질까 봐 한 남자를 상대방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여름이라 남자도 그녀도 반소매 차림이었기에 맨살과 맨살이 비벼지고 있었다. 호들갑이가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닌가?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물은 적도 없지만 명자는 왠지 그녀가 남편이 없는 여자 같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하루는 뒤에 앉은 여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로 호들갑이가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호들갑이는 꼭 저렇게 남자들 틈에 끼어 앉는지 몰라.” 한 여자의 빈정대는 말에 옆엣 여자가 음성을 팍 낮추며 대꾸를 했다. “혼자 살다보니 남자 냄새가 맡고 싶은 게지 뭐. 이혼한 지 꽤 오래됐지 아마.” 교회당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은 대화를 하면서도 그들은 낄낄거렸다. 명자도 호들갑이가 싫다.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으나 독신인 그녀가 지나치게 화려한 차림새로 아무한테나, 특히 남자들한테 호들갑을 떨고 다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남편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를 따라 마지못해 아주 가끔씩 교회에 간다. 남편이 처음 교회에 나간 날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 하는데 원로목사님이 다가오시어 남편을 아주 반갑게 대해주었다. 주위에 있던 분들도 서로 인사를 건네며 웅성웅성 서 있을 때였다. 갑자기 호들갑이가 나타나서는 남편 앞에 바짝 다가서더니 말을 거는 것이었다. 손을 불쑥 내밀고 악수를 청하면서..... 소개를 시켜주고 어쩌고 할 겨를도 없었다. “백 박사님 안녕하세요? 형님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형님하고는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예요. 만나뵈서 너무 기뻐요 호호호..., 아이이--, 앞으로는 좀 자주 교회에 나오세요. 이렇게 두 분이 같이 나오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요오--? 근데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아요. 인상이 너무 좋으셔서 그런가 봐요.” 명자는 어리둥절했다. 한번도 그녀에게 남편 얘기를 한 적이 없고, 더구나 그녀와 친한 사이는 결코 아니다. 그리고 남편의 인상이 좋은 것도 절대로 아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그냥 지껄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이 박사라는 것을 호들갑이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좀 놀랐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박사학위는 허울 좋은 이름뿐이다.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이 돼버린 것이다. 그는 오래 전에 직장에서 밀려나와 전공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벌어오는 돈도 쥐꼬리만 하다. 겨우 자가 용돈에 그치는지 집에는 한푼도 내놓치 않는다. 몸을 비비꼬면서 아양을 떠는 그녀의 모습도,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비음 섞인 음성도 다 거슬렸다. 눈웃음을 살살 치면서 남편의 눈을 뚫어지라고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제일 기분 나빴다. 아무에게나 과잉친절을 베푸는 여자라 남편 앞에서도 역시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를 대하는 남편의 태도가 예상 밖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이 두 눈을 번쩍 뜨고, 남편은 넓적한 얼굴 전면에 활짝 웃음을 퍼뜨렸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호들갑이의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을 꼭 잡은 채 허리를 구십도 각도로 정중히 꾸부렸다. 유난히도 작은 남편의 키가 반으로 접히니 아예 땅에 붙어버리는 듯해 참말로 꼴불견이었다. “반갑습니다. 이런 미인을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앞으로는 자주 교회에 나오겠습니다.” 말단 공무원이 대통령의 손을 잡고 감격해 하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남편의 말을 가로막고 호들갑이 뭔가 생각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콧소리를 냈다. “제 이름은 전춘실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뭘 잘 부탁드린다는 걸까? 남편도 맞장구를 쳤다. 같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구 제가 부탁을 드려야죠 무슨 말씀을..., 전춘실씨, 이름도 아름다우십니다. 봄 춘, 열매 실, 맞죠?” “어마나, 어쩜.., 바로 맞히셨어요.” “춘실 씨의 농익은 미모와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농익다는 말이 귀에 거슬렸으나 호들갑이와는 어울리는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래도 ‘따스한 봄날, 촉촉한 밭에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둔다’ 라는 풀이까지는 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편은 계속 호들갑을 떨었다. “아 참, 제 이름을 말씀 안 드렸군요. 저는 백억조입니다. 어마어마하죠?” “어마나, 진짜 어마어마하네요. 백. 억. 조. 박사님. 호호호..” 여자 호들갑이와 남자 호들갑이가 이름 석자를 가지고 유치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명자는 빙그레 웃고 있는 원로목사님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민망스러웠다. 옆엣 사람들 보기에도 창피했다. 악수를 했으면 금세 손을 놓는 것이 예의인데 남편과 그녀는 얘기를 하는 동안 내내 손을 붙들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남편은 허리까지 굽신굽신했다. 그날 집에 오는 차안에서 명자는 몇 번이고 생각을 반복했다. 당신 아까 그 여자한테 하는 행동이 그게 뭐예요? 더구나 처음 보는 여자한테..., 그 여자는 아무 남자에게나 그러는 사람인데 당신도 똑 같이 추태를 부리면 어떡해요? 주위 사람 보기에 창피해서 혼났네. 목사님이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당신 아주 우스운 사람으로 알 거 아냐? 이름 풀이도 잘 해주던데? 뭐 농익었다고? 그래서 따먹고 싶었어? 호들갑이의 손을 붙들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남편의 표정이 자꾸만 떠올라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더러운 기분으로 며칠 동안을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으나 그냥 넘겨버리자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별걸 다 질투한다고 그럴까봐 자존심이 상해 꾹 참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일요일에 교회에 가나 안 가나 지켜볼 참이었다. 맨날 교회에 가자고 노래를 불렀으니 간다고 따라 나서면 떼 내버릴 수가 없는 것이 명자의 입장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은 교회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는 동안에 어쩌다 서너 번 정도는 간 것 같다. 그 때마다 호들갑이는 남편에게 달려와서 호들갑을 떨었고 남편 역시 막상막하라 쌍으로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내민 손을 붙들고 흔들어대며 반가워했다. 행복의 극치에 달한 듯한 두 개의 커다란 얼굴에 펼쳐진 표정 또한 가관이었다. 마주치는 눈빛에도 전기가 팍팍 튀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둘이서 얼싸안기까지 했다. 심사가 뒤틀렸지만 명자는 모르는 척 태연을 가장했다. 환갑을 지나고도 이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정말이지 남편이 너무 추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한 여자가 호들갑이랑 남편이 부부인줄 알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자의 음성에서 빈정거림이 잔뜩 묻어 나왔었다.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하하..하하..” 남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순간적으로 열이 확 솟구치며 얼굴이 화끈했다. “아이, 박사님도., 농담도 잘 하셔.” 하고 남편을 향해 눈을 살짝 흘기면서 통쾌한 듯이 호호거리는 그녀가 참말로 밉살스러웠다. “정말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아내의 면전을 호되게 친 남편의 말을 명자가 맞받아 친 것이다. 말은 야멸치게 나갔으나 그 소리는 금세 먼지가 되어 허공 속으로 흩어져버렸다. 집에 오는 차안에선 둘 다 침묵했다. 농담한 걸 가지고 왜 그래? 당신, 전춘실 미모에 열등의식 있어?’ 열등의식? 미모? 끼가 줄줄 흘러 천박하기 그지없는 그런 여자가 당신 눈에는 미인으로 보여? 그야, 똥개 눈에는 똥이 황금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어? 명자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남편의 행동이 일일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별일이 아닌데도 화가 저절로 났다. 남편이 텔레비전을 보다말고 꾸벅꾸벅 졸고 앉았으면 “잠이 오면 방에 들어가 자지 왜 그렇게 졸고 앉았어요?”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쭈그리고 앉아 신문을 볼라치면 “신문을 읽으려면 좀 편안히 앉아서 읽어요. 왜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궁상을 떨어요?” 하고 어금니로 말을 갈아 버리듯이 힘을 주며 인상을 팍팍 썼다. 멸치 좀 볶으라고 노래를 불러도 볶아주지 않았다. “저녁은 뭘 먹지? 뭘 먹지?” 하고 냉장고 문울 열었다 닫았다 해도 못 들은 척 했다. 그리고 침묵으로 항변하면서 일부러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아내가 신경질을 부려도, 말대꾸를 안 해도 남편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는 연신 서재를 들락날락하면서 “안 잘 거야? 안 잘 거야?”를 반복했다. 그리고 명자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아양을 떨었다. “좀 쉬어가면서 해. 회사에서도 맨날 컴퓨터 들여다보잖아. 이러다가 당신 병나면 어떻게. 이리와 봐. 내가 마사지 해줄게.” 남편의 속셈을 뻔히 아는 명자는 속으로 조소를 퍼부으며 그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물론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컴퓨터에만 눈을 고정시킨 채 말이다. 치근덕거리는 그가 정말 귀찮았다. 그의 동물근성에 혐오감이 느껴졌다. “오늘밤에 이거 끝내려면 나 밤새야 돼요. 내일 중요한 미팅이 있거든. 방해하지 말고 가 잠이나 자요” 그리고는 서재에서 자고 새벽같이 출근을 해버렸다. 복수하는 기분이 들어 아주 고소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남편을 보고 속으로 실컷 비웃고 욕하면서 그냥 넘겨버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편해졌다 하더라도 이런 얘기는 친구들한테 하는 성격이 아닌 명자인데 하루는 느닷없이 그만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친구는 깔깔대고 웃었다. “하여튼 남자들은 웃기는 족속이야. 우리 남편은 어땠는지 아니? 벌써 십 년도 더 넘은 일이야. 왜 너도 알잖아? 수정이 말야. 걔가 미국 다니러 와서 우리 집에 한 일 주일 있었거든. 그때 우리 남편 참 웃겼단다. 아침마다 목욕재개하고는 두 손을 비비고 몸을 비비꼬면서 ”수정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어찌나 아양을 떠는지 눈꼴이 시어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단다.” 친구는 벌떡 일어서서 두 손을 비비고 몸을 꼬면서 남편 흉내를 그대로 냈다. 원망의 그림자는 이미 완전히 가신 상태인데도 어찌나 실감나게 재현을 하는지 명자는 깔깔대고 웃었다. 재미있는 비디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또 밥 먹을 땐 접시에다 일일이 이것 저것 들어주면서 많이 드세요. 많이 드세요 하고 유난을 떠는 거야. 수정이가 난처할 정도로 말야. 나도 수정이 보기가 민망스러웠고. 남편이 친구한테 잘해 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 것이 정한 이치인데, 그게 너무 지나치니까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더라구. 그때 우리 남편 지나쳐도 한참을 지나쳤단다. 아닌 말로 밤중에 걔 자는 방에 숨어들어 가기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마지막 말에 명자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얘.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 소린 지나쳤다. 어디 가서 그딴 소린 하지 말아라.” 말과는 달리 친구는 계속 생글거렸다. “그래서 걔 간 다음에 대판 전쟁이 났었어. 그렇게 좋으면 수정이랑 살아라. 하고 펀치를 날리니 내가 그렇게 기분 나빴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며 깜짝 놀래더라. 우리 집에 온 내 친구이니까 자기는 그냥 친절하게 대해 준 것 뿐이랬어. 어쨌든 간에 내 감정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게 됐다면서 다음부터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었단다.” 한참 동안이나 자기 남편 얘기를 하던 친구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호들갑이랑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남편을 위해 충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안 되니 절제를 하라고 정중히 타이르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정말 그런 일이 또 생기고 말았다. 드디어 명자의 분통을 터뜨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원로목사님의 고별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교회에 몇 번 나가지도 않은 남편이지만 원로목사님께서 항상 신경을 써주시고 심방도 오신 적이 있어 남편을 끌고 교회엘 갔었다. 호들갑이의 존재가 좀 걸리긴 했으나 이 날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예배가 끝난 후, 아는 분과 이야기를 하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니 남편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호들갑이가 설치고 다니는 것이 눈앞에 보여 안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어쩌다 눈을 돌리니 저쪽 바깥에 호들갑이와 남편이 바짝 붙어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남편의 팔이 그녀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얹혀있는 정도가 아니라 옆구리까지 닿을 정도로 몸을 바짝 밀착시키고 있었다. 아무도 없으면 그대로 끌어안고 키스라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까지 머리를 어지럽혔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대충 얘기를 끝내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녀의 어깨에 얹혀있던 남편의 손은 내려와 있었다. 짜리몽땅한 남편의 체구가 호들갑이의 높은 어깨에 매달려 있자니 팔 힘이 부쳤던 모양인가? 한데 이게 웬일인가. 가까이 가면서 보니 둘이서 손을 꼭 붙잡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명자는 자기가 안 보는 사이에 얼마나 추태를 부렸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스쳤다. 미국식 인사랍시고 포옹을 한 것은 기정사실이겠지. 아마 힘을 주어 으스러지게 껴안았을 것이다. 모양새로 봐 남편이 호들갑이의 품에 안겼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니 그 상황 속에서도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명자가 남편 앞에 딱 서니 그들은 슬며시 손을 놓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손들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아니 둘이서 언제 이렇게 친했어? 꼭 무슨 애인 사이 같네. 명자는 입을 꼭 다문 채, 조소어린 표정으로 남편과 그녀의 얼굴에 번갈아 눈빛을 꽂았다. 둘다 벌레 씹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행복한 순간을 깨버려 김샜다는 것인지 미안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까만 복장을 하고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고별예배와 어울리는 아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에 오는 차안에서 명자는 정식으로 항의를 했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일체 왈가왈부 하지 않고 그날 일어난 일 하나만 가지고 서두를 꺼냈다. “도대체 당신 정신이 있는 사람이야? 교회에서.., 그것도 목사님 고별예배에 그 무슨 추태예요? 아유. 구역질 나. 다른 사람들도 다 봤을 텐데 정말 창피해서 못 살겠어. 당신 같은 사람보고 더티 올드맨이라고 하는 거야.“ 그만 시작부터 큰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친구 말대로 정말 정중하게 타이르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았다. 근 일 년이나 참아오던 분통이 터져 버린 것이다. 남편은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며 운전을 했다. 아내가 두서도 없이 이렇게 나올 때, 남편은 늘 시침을 딱 떼고는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알기 쉽게 설명을 해” 하고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 모양 되묻곤 했는데 그날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생각할수록 더러워서 구역질이 나. 이제 정말 창피해서 교회는 다 갔다 다 갔어. 사람들이 날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할까? 당신을 천하 바람둥이로 볼 거 아냐? 도대체 그 여자하고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는데? 나 몰래 뒷구넝에서 만나기라도 했어? 세상에.., 그 사람 많은 앞에서 어떻게 어깨를 껴안고 또 손을 꼭 붙들고, 얼싸 안으면서 그 야단을 했을까? 그것도 엄숙한 뷰잉에.. 당신 어떻게 헤까닥 돈 거 아냐? 아예 지금 정신병원으로 바로 가자구.” 명자는 한 말을 자꾸 반복하면서 언성을 있는 대로 높였다.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다음부터 조심할게. 이 한 마디면 명자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련만 한참을 몰아세워도 남편은 끄떡도 안했다. 얼싸안기는 한 모양이다. 꽉 껴안고 어쩌고 하면서 말을 불려 뒤집어씌워도 남편은 일언반구도 안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명자는 호들갑이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 년도 미친년이야.” ‘년’ 짜가 입 밖으로 튀어 나와버렸다. 에라 이왕 버린 몸, 이런 경우에 고상한 척하는 것은 위선이야. 솔직하게 내 감정을 표시하자. “미친년.., 남자가 치근덕거리면 여자가 적당히 피해야지 그래 얼씨구 좋다구나 하고 거- 사람 많은 앞에서 같이 추태를 부려. 하여튼 둘다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어. 아이구 창피해. 생각할수록 창피해서 미치겠네. 정말.” 말을 하고보니 셋다 미친 사람이 되었다. 그제서야 남편이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나한테 와서는 하도 반가워하고 내 손을 잡고 그래서.....” “비겁하게 그 여자 핑계대지 마. 그래서 당신도 이게 웬 떡인가 하고 둘이 얼싸안고 히히덕거렸어? 그 여자는 아무 남자한테나 추파를 던진다고 소문난 여자야. 그 여자 별명이 뭔지나 알아? 더러워서 입에 담기도 싫은 별명이라구우우--” 호들갑이가 더러운 별명은 아니다. 그런데도 명자는 남편이 다른 어휘를 생각하도록 유도를 하고 있었다. 남편으로 하여금 호들갑이를 아주 저질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리게 하고 싶어서였다. 자기가 정해 놓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만 골라 사귀는 남편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명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맨날 싸우다가 이혼했을 거야. 어떤 남자가 그 꼴을 보고 살겠어? ” 이혼했다는 것 빼놓고, 명자는 호들갑이의 사생활을 모른다. 그런데 소문 운운하면서 자신이 느낀 것에 불과한 사실을 참말인양 부풀리고 있었다. 정말로 명자답지 않은 짓이다. 그 여자가 이혼녀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잠자코 있었다. “당신, 그 여자 이혼한 거 알았어? 그래서 마음 놓고 히히덕거린 거야?” 남편이 드디어 한마디를 했다. 거세게 목청을 높이며, 아주 지겨워 죽겠다는 듯이. “이제 그만 해. 그만 해. 제발 좀 그만 해.” 그래도 명자는 계속 긁어댔다. 그러나 ‘그대로 끌어안고 키스라도 하고 싶었어?’ 하는 소리는 차마 입밖으로 끄집어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신, 왜 나한테 아이 엠 쏘리 안 해. 분명히 잘못했잖아----?” 말끝이 하늘을 찌를 듯이 옥타브가 올라갔다. 있는 대로 악을 쓴 것이다.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고 있던 남편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홱 돌리며 명자를 째려보았다. 운동장만한 얼굴에 서슬이 퍼렇게 깔려있었다. 앞차 뒤꽁무니를 콱 박기라도 할 것 같았다. 명자의 목소리가 금세 낮아졌다 “왜 날 째려봐요. 정신 차리고 운전이나 똑바로 해요.” 집에 와서도 한바탕했으나 남편은 그날,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남편은 참 이상하다. 그는 여간해서는 미안하다라는 말을 안 한다. 분명히 잘못해 놓고도 얼렁뚱땅 아내를 얼리면서 슬쩍 넘어가려고 한다. 허지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이왕 터뜨린 일이니 자존심 때문이라도 확실하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며칠 후에 또 시작했다.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져 못 살겠네. 도대체 왜 그랬어요? 세상에, 그것도 목사님 입관예배 날에..., 그래, 그 여자가 좇아와서 손을 붙들고 호들갑을 떠니 이게 웬 떡인가 했겠지?” 남편은 묵묵부답으로 텔레비전에만 눈을 박고 있었다. 그 태도가 그녀를 더 화내게 했다. 완전히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계속 바가지를 긁고 있는 자신이 비참해지기까지 했다. “얼마나 날 무시하면 그래, 그 사람 많은 앞에서 딴 여자하고 그런 추태를 부려?” 그래도 남편은 대꾸를 안 했다. 명자의 언성이 다시금 높아졌고 말을 하다 보니 그날 했던 말들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계속 녹음테이프를 돌려대며 남편의 속을 박박 긁고 있는데 그도 역시 재방송인 한마디를 했다. “알았어. 잘 알았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 좀 해.” 그러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명자는 “뭘 알았다는 거냐”고 다시 걸고 넘어졌다. “분명히 당신이 잘못했죠? 잘못한 걸 알았다는 말이죠? 근데 당신 왜 나한테 사과 안 해?” 명자는 남편을 뚫어지라 응시하면서 말 마디마디를 똑똑 끊으면서 차지게 말했다. 남편은 그녀의 눈빛을 계속 피했다. 그리고 보는지 마는지 텔레비전에만 시선을 둔 채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실수했어. 미안해.”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입안에서만 우물우물거리는 그 소리는 목구멍으로 도로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의 남편 모양 잘못했다는 말도, 다음부터 안 그러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한테는 대판했으나 그 여자에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땄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피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여전히 명자에게 ‘형님 형님’ 했다. 팔짱을 끼면서 몸을 비비꼬는 것도 여전했다. 그럴 때는 징그러워서 살갗이 스물스물 했다. 팔을 쓱 빼면서 명자는 혼자 속으로 웃었다. 내가 왜 자기 형님이야? 남자 하나 가운데 놓고 지가 작은님이라도 되고 싶은가? 이러한 명자의 감정을 눈치 챘는지 어쨌는지 한동안은 교태를 덜 부리더니 언제부터인가 호들갑이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땐 예배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는 명자인데 그날은 만날 사람이 있어 밖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교회엘 나오지 않았는지 눈에 띄지 않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바로 곁에서 여자 둘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얘. 너 그 호들갑이 소식 들었니?” 명자는 귀가 번쩍 띄었다. 호들갑이라는 이름이 이미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슬쩍 곁눈질을 했다. 그녀보다는 젊은 여자들이었다. “아니. 또 무슨 사건 생겼어?” “생겼지. 아주 어마어마한 사건이야.” “그 남자가 죽었대.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가서 바로 숨을 거두었대나 봐.” “어마나 그래? 호들갑이는 어떻게 됐대?” “몰라. 남의 가정 깨놓고 남자까지 죽였으니 뭐가 잘 되겠어?” “아이구, 그런 말 말아. 뭐 호들갑이가 죽였나?” “어쨌든 호들갑이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 남편이 호들갑이랑 놀아나는 동안 그 와이프가 얼마나 속이 썩었겠니?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자기 눈에는 피눈물 나는 법이야.” 사람이 죽은 불행 앞에서도 그들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이 벌린 삼각관계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을 하고 있었다. “남자가 부자라고 소문은 났으나 그건 다 와이프가 고생고생해서 이룬 거래. 그래서 이혼은 해줄 테니 빈 몸으로 나가라고 와이프가 강력하게 나간 모양이야. 아이들도 완전히 엄마 편에 서서 아버지를 몰아붙이고 말야. 모든 재산권은 와이프가 쥐고 있고 사업 경영은 아들들이 하는 모양이야. 남자는 무능하고 놀기 좋아해 젊었을 때부터 빌빌거리며 골프나 쳤대. 둘이 만난 것도 골프장이랜다. 호들갑이가 돈 많은 남자 하나 물었다 싶었다가 헛물 켰지 헛물 켰어. 아주 싸다 싸.” “얘 좀 봐. 왜 너는 호들갑이라면 그렇게 이를 박박 가니? 느네 남편이 호들갑이한테 좀 친절히 굴었다고 해도, 그건 남자들의 속성이야. 화려한 차림새의 미녀가 꼬리를 치는데 마다할 남자가 어딨니? 알고 보니 호들갑이는 박사라면 사족을 못 쓴다더라. 네 남편도 박사라서 그랬나 보다.” 박사 운운하는 대목에서 명자는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웃었다. “어쨌든 호들갑이가 우리 교회에 안 나오니까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다 얘.” “어마 너도 그러니?” 명자는 고개를 수그린 채 마음속으로 ‘나도 그래요’ 하고 시원하게 외쳤다. “근데 말야, 또하나 사건 있다.” 이를 박박 가는 여자가 또다른 스토리를 전개했다. 호들갑이한테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벌써? 아니 애인 죽은지가 얼마나 됐다고? 어떤 남자래?“ “몰라. 어떤 남자랑 만나는 걸 누가 봤대나봐.” 홍콩으로 발령을 받은 명자는 한껏 기분이 좋았다. 남편은 안중에도 없었다. 몇 번 출장을 가본 결과 그곳에서 일 년 정도 일하는 것은 그녀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고, 명자가 설치한 컴퓨터 시스템이라 일하는 데도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도리어 그곳 직원들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라 그녀는 더 기분이 좋았다. 홍콩으로 가게 될 것 같다는 얘길 했을 때 남편은 예상대로 “좋다”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일 년 동안의 홍콩근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전보다 거의 두 배 정도로 올려준 보수가 명자를 이렇게 혹사시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 어찌나 골머리를 썩였는지 머리가 그만 반백이 되어버렸다. 아주 폭삭 늙어버린 것이다. 떠날 때는 연휴나 휴가 때, LA에 몇 번은 다녀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크나큰 오산이었다. 바쁜 중에서도 그에게 잘못했던 일들이 자꾸 뇌리에 떠올랐다. 남편을 너무 무시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아 한국 가면 정말 잘해주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 중에서도 남편이 홍콩에 왔을 때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딱 한번, 남편이 다녀간 적이 있다. 두 달 만이었다. 아내를 만나러 온 남편을 명자는 푸대접했다. 회사 사정이 비상사태라 그럴 수밖에 없었기도 했으나, 그때 명자는 남편보다 회사 일을 우선순위에 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항상 그랬다. 남편이 있는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일을 한 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후회스럽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아무리 비상사태라 하더라도 그건 내가 잘못했어. 남편은 홀로 홍콩 시내를 쏘다니다가 일주일 휴가가 며칠 남았는데도 그냥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난 후에야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린 명자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아냐.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당신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한데, 당신 얼굴이 많이 상했던데 건강 조심해.” 도리어 명자의 건강까지 걱정을 하면서 그는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자주 전화하려고 노력하면서 ‘이제야 내가 철이 들었나. 남편이 없어 보니까 소중함을 알았으니 말야.’ 하고 말 한마디라도 그에게 친절히 대했다. 한번은 명자가 그랬다. “미안해요. 내가 그동안 당신한테 너무 소홀하게 한 것 같아요.” 하고. 남편은 명랑한 목소리로 별 소릴을 다한다면서 명자를 안심시켰다.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 먹는 것도 잘 챙겨먹고 아주 편히 잘 지내고 있어. 집은 당신 있을 때보다 더 깨끗해졌어.” 명자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침대 위에 마구 펼쳐놓은 옷가지들을 남편이 차곡차곡 옷걸이에 걸어서 옷장에 가지런히 정리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없으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편의 고마움이 새록새록 맘속에 스며들었다. 앞으로는 정말 잘해주어야 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더 했다. 다음에 홍콩에 오면 만사 제쳐 놓고라도 남편을 우선순위에 놓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허나, 그는 더 이상 아내를 만나러 오지는 않았다. 근데 가끔씩 호들갑이가 생각남은 참 모를 일이었다. 두 여자가 교회에서 그녀에게 새 남자가 생겼다는 말이 언뜻언뜻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 없을 때, 심심해서 만나는 정도야 눈감아 줄 수 있지 뭐’ 하는 마음도 들었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나니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천만금을 주어도 더 이상 홍콩에 머물고 싶지가 않았다. 공항에 나온 남편을 보고 명자는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이 내 남편인가 하고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명자에겐 일 년이라는 세월이 십 년이나 앞으로 달음박질을 쳤는데, 남편에겐 뒷걸음질을 친 것 같았다. 그는 확 젊어져 있었다. 예전하고는 완전히 다른, 브라운 색깔에 자연스럽게 웨이브 진 머리가 아주 세련되어 보였다. 옷차림도 마찬가지였다. 노르스럼한 가죽 재킷에 짙은 밤색의 바지가 머리 색깔과 아주 잘 어울렸다. 남편이 이렇게 멋있게 명자 눈에 비친 것은 생전 처음이다. 명자를 집에 데려다 주고는 회사에 급한 일이 있다면서 그는 바로 나갔다.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었으나 그녀 자신도 회사일에 쫓긴 적이 많았기에 이해를 했다.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앉아 명자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올 때, 염색도 하고 커트도 하고 올 걸 하고 후회가 되었다. 일 년 동안에 자신의 몰골이 이렇게 늙어 버린 것을 그녀는 느끼지 못 하고 살았다. 이제야 정신이 확 들었다. 그날 밤, 남편은 밤늦게야 들어왔다. 평소에는 술이라고는 입에 안 대는 남편이다. 허나, 그날은 거나하게 술이 취해 있었다. 그리고는 “아이 피곤해” 하더니 그냥 곯아 떨어졌다. 아내의 뒤척거리는 기척을 아는지 모른지 그는 등을 돌린 채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았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은 명자는 아주 늦게야 눈을 떴다. 기분 좋은 커피 향이 온 집안에 퍼지고 있었다. 토요일인데도 남편은 어딜 갔는지 안 보였다. 뜻밖에도 그가 완벽한 식사를 준비해 놓았었다. 베이컨, 햄, 소시지가 골고루 준비되었고 스크램블드 에그에 토스터 두 쪽, 헤쉬브라운, 그리고 과일까지 접시에 예쁘게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 하얀 봉투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웬 편지까지? 아침 준비해 놨으니 맛있게 먹고, 푹 쉬라는 건가’ 하고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말인가. 그 속에는 도저히 상상도 못한 현실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신 앞에서는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질 것 같아, 이렇게 네 마음을 전하니 그대로 받아주면 고맙겠어.사실, 그동안 당신하고 산 세월, 이제 와 깨닫고 보니 허송세월이었어. 당신한테 평생을 무시당하고 살았는데 바깥 세상에 나가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나도 이제 대우받고 인정받으며 살고 싶어.” 그는 완전히 간이 바깥으로 빠져나온 소리를 하고 있었다. 팔랑개비처럼 가볍게 보이던 남편이 아주 과묵하게 또 진지하게 편지를 써내려갔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었다. 안팎으로 몽땅 변신한 남편이 이제부턴 삶도 완전히 탈바꿈을 하겠다는 소리다. 명자는 홍콩이라는 거리와 일 년이라는 시간이 남편과의 사이에 이리도 높은 담을 쌓아 놓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고, 그 마음도 남편한테 알려주었는데,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는 말인가. “당신같이 똑똑하고 고고한 여자보다는 싸구려 화장품이더라도 화장품 냄새가 나는 여자가 나한테는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당신이 천하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그런 여자 말야. 당신이 이런 말 듣고 나랑 더 이상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잘 알아. 아니 당신도 원했던 일인지도 모르니 우리 하루속히 정리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마지막에는 곧 이혼 서류를 보내겠다고 씌어 있었다. 수정본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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