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백 한번째 편지 <수정본>

2010.02.01 23:16

김영강 조회 수:670 추천:171

   초대장과 함께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옥희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김동추였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사십 년 전에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만 육십, 회갑이 되면 당신을 꼭 만나리라고 굳게 다짐한 그 맹세입니다. 다가오는 3월 5일이 바로 그날입니다. 초대장을 동봉하오니 꼭 참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몇 줄 안 되는 간단명료한 편지였다. 그리고 편지 끝에는 <10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 사십 년 만에 받는 백한 번째 편지였다. 육십 회 생일잔치가 열리는 장소는 엘에이 올림픽 가에 있는 한미호텔이었다. 봉투에 명기된 발신처는 이곳에서도 부촌으로 알려진 산 마리노였다. 세 딸을 모두 출가시키고 옥희 역시 회갑인 나이에 생긴 일이다.
   김동추가 미국에 살고 있단 말인가?
   대학 시절, 옥희에게 백통의 편지를 보낸 김동추, 그는 애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만난 적이라고는 서너 번도 안 되었다. 그것도 다시는 편지하지 말라는 그녀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냥 혼자서 편지로 시작하여 편지로 끝난 완전히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편지를 읽는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그냥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편지가 배달됐을 때, 하필이면 옥희는 외출 중이었다.
  
   토요일 아침이면 항상 골프장으로 향하는 남편인데 그날은 예약이 안 됐다고 집에 있었다. 마침, 서울에서 온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라 옥희는 아침 열 시쯤에 집을 나섰고, 친구랑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닐 예정이었지만 그녀의 급한 일정 때문에 점심만 먹고 바로 헤어져 집엘 들어서는데 남편이 편지를 내민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생각조차 안 해본 사람인데도 김동추의 얼굴이 금세 떠올랐다. 남편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빨리 뜯어보라고 재촉했다. 편지를 같이 읽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늘을 봐도 한점 부끄럼 없는 그녀인지라  자신 있게 봉투를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김동추? 누구야? 오동추가 아니고 김동추야?”
   남편은 마구잡이로 봉투 한 귀퉁이를 북 찢었다.
   “왜 있잖아요. 옛날 학교 다닐 때 나한테 만날 편지했다는 사람. 언젠가 내가 얘기한 적 있죠?”
   이름도 잊어버린 척하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시치미를 뚝 딸 걸, 그만 진실이 툭 튀어 나와버렸다.  
   “아! 당신 옛날 애인? 그 편지 백 토오옹...”
   편지 백통이라는 뒷말엔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실실 웃었지만 마디마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속에서 뭐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였다. 갑자기 옥희의 언성이 높아졌다.
   “옛날 애인은 무슨 옛날 애인이야? 그런 식으로 뒤집어씌우지 말아요.”
   신혼 초에 남편이 자기 첫사랑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중학교 시절, 등굣길에서 매일 마주치던 한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말도 한번 못 붙여 보고 혼자 가슴을 앓았다는 이야기였다. 남편의 그 마음이 참 아름답고 측은하게 여겨졌다. 동시에 김동추 생각이 났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였기에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대학  때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너무 쌀쌀맞게 굴어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을 했다.
   “아니, 아무 반응이 없는 여자한테 미쳤다고 편지를 백통씩이나 보내? 자기가 꼬리를 쳤으니까 그렇지.”  
   그날 밤, 옥희는 울고불고 소동을 벌였다. 옥희는 “날 의심하면 자기랑 살 수가 없으니 이혼하자”고 정말 얼마나 울었는지 나중엔 남편이 싹싹 빌어 무마가 됐었다.

   사실 그 당시, 옥희는 김동추의 편지를 은근히 엔조이했다. 그의 글솜씨는 혼자 보기 아까운 문학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랑을 읊은 긴 서사시였다. 음률까지 내재된 참말로 아름다운 서사시라 책으로 묶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무슨 말을 썼는지 도대체 모르겠다면서 “이거 미친놈 아냐” 하고는 뜯지도 말고 없애버리라는 등, 도로 돌려보내라고 성화를 했었다. 그러나 식모언니가 받아두었다가 어머니 몰래 옥희한테 전해주었고. 옥희는 꼬박꼬박 뜯어서 읽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의 편지를 기다렸고, 편지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편지에 관심이 쏠린 것이지 김동추에게는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 편지를 받는 자체가 재미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편지에는 어김없이 일련의 숫자가 적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페이지 번호가 아닌 편지의 횟수 번호였다.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그 번호는 70, 80 그리 고 90이 넘었고, 드디어 100을 마지막으로 김동추의 편지는 더 오지 않았다.
   백통을 채우려고 작심을 했던 것일까?
  
   남편은 몇 줄 안 되는 편지를 요리조리 훑으며 빈정거렸다.
   “글씨가 개발나발이군.”
   옥희가 보기에도 글씨체가 예전과 같지 않았다. 필체도 나이 따라 변하는 것인지 옛날처럼 반듯반듯하지가 않고 힘없이 구부러져 있었다. 초청장에 분명히 쓰여 있는데도 남편은 달력 한 장을 휙 쳐들고 다시 확인을 했다.
   “3월 5일이라... 아직 보름 남았군.”
   그는 보름 동안에 취할 무슨 행동이나 구상하듯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다음,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거칠게 말했다.
   “도대체 이 새끼가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
   어느새 김동추가 이 새끼로 호칭이 되었다. 그런데 옥희는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왜 멀쩡한 사람을 새끼라고 해요?”
   김동추를 두둔해서 한 말은 절대 아니다. 평상시에도 이 새끼 저 새끼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남편에게 늘 말버릇 좀 고치라고 했었다. 새끼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그녀의 반응이었다.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왜? 옛날 애인보고 이 새끼라고 하니 기분이 쓰라려? 같은 엘에이 바닥인데 만나면 될 걸, 무슨 편지질이야.”
   그리고는 “아참! 그 새끼 편지 쓰는 거 좋아하지. 미친놈, 요새 무슨 회갑잔치야?” 하더니 진짜로 복통 터지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맹세까지 한 걸 보니,  둘이서 죽자사자 했구먼. 그래놓고 뭐, 그 새끼 혼자서 편지질 했다고?”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둘이 사귀다가 헤어지면서 무슨 맹세나 한 것 같은 애매한 표현법을 써, 옥희도 좀 불쾌한 건 사실이었으나 남편이 막상 그 따위로 나오니 전혀 생각지도 않은 뚱딴지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죽자사자 했다. 왜? 결혼 전 일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당신은 연애 안 했어?”
   두 사람의 언성이 차츰차츰 높아지고 있었다.
   “아---. 이제야 실토를 하는구나. 나만 손해 봤네. 나는 연애 한번 못 해보고 결혼한 사람이야.”
   순간, 번쩍하고 옥희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뭐야? 연애 한번 못 해봤다고? 거짓말을 하려면 좀 들어 먹히게 하라고. 내가 증거를 쥐고 있는데도?”
   “증거? 무슨 증거? 대봐 대봐.”
   “정말 대봐?”
   결혼 전의 일이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거짓말을 한다는 자체에 화가 난 옥희는 그만 그 여자 이름을 들먹이고 말았다.
   “박영선이 말야. 내가 모르는 줄 알았지?”
   남편은 잠깐 멍한 눈으로 옥희를 바라보더니 “박영선이가 누구야? 나는 모르는데.” 하고는 옥희가 뒷말을 할 새도 없이 초대장과 편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휭 하니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요” 하고 따라 나가는데 남편은 차를 타고 붕 떠나버렸다.  
   그는 아내가 박영선 이름까지 아는 사실에 분명 놀랐을 것이다. 터뜨려버리고 나니 옥희는 속이 시원했다.

   결혼한 후, 이십 년도 더 지난 다음에 옥희는 총각 시절에 있었던 남편의 연애 사건을 알게 되었다. 미국을 방문한 시이모로부터였다. 옥희는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오랜 만에 만난 시이모와 시어머니는 거실에 앉아 웃음꽃과 이야기꽃을 한껏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목청이 큰 시이모의 음성은 옥희의 귀에도 뚜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음성을 낮추며 두런두런 말하는 소리도 대충은 귀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날, 옥희는 자꾸만 그들의 대화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다가 상민이라는 남편의 이름과 박영선이라는 여자가 그들의 화제에 오른 것을 그만 엿듣게 된 것이다. 거실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위치상 그들은 옥희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먼 옛날 일이라 옥희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남편의 과거를  실타래 풀 듯 술술 풀어내고 있었다.
   “영선이가 며느리가 됐더라도 언니한테 잘 했을 거야. 근데 언니, 걔도 괜찮았는데 왜 그렇게 반대를 했어?”
   “영선이가 누구냐?”
   시이모는 소리를 낮춘 듯했으나 시어머니는 정말 모르겠다는 투로 또렷이 말해 옥희는 영선이라는 이름을 분명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왜 그 애 있잖아. 내 제자 박영선이...”
  시이모님은 한때 여학교 교편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박영선이라는 여자는 시이모님의 제자였고 남편은 시이모님을 통해서 그 여자를 알게 된 것 같았다.
   “너는 기억력도 좋다.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아직 그 애 이름을 기억하고 있니? 눈치를 보아하니 상민이보다도 걔가 일방적으로 더 좋아한 것 같더라.”
   “언니도 참... 걔가 일방적으로 좋아했다면 그렇게 오래 사귈 수가 없지. 걔네들 일은 언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둘이서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래. 사이도 꽤 깊었고.”
   잠시 얘기가 끊긴 듯하더니 시이모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어쨌든 상민이가 영선이한테 못할 짓 했어. 그 후 나한테는 통 연락이 없었으나 소문 들으니 시집을 아주 잘 갔대.”
   얘기를 들으면서 옥희는 온몸에 맥이 다 풀려버리는 것 같았다. 황량한 바람이 몰아치는 허허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허지만 그 여자가 시집을 잘 갔다는 말에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날 밤, 옥희는 곁에서 곤히 자는 남편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져 좀처럼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옥희가 먼저 물어볼까 하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으나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었다는 사실도 부끄러웠고, 옥희의 마음도 금세 잔잔하게 가라앉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낫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말았다.
   진짜 알맹이는 쏙 빼놓고 중학교 때 한 여학생 때문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아내로부터 편지 백통 이야기를 끄집어낸 그 술수가 참 대단했다.
  
   지나친 표현이 될지 모르겠으나 사실, 남편은 여자 다루는 솜씨가 능수능란하다. 예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연스럽게 할 줄 아는 남자다.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신경을 써주며 아주 자상하게 옥희를 대해 준다. 자상한 성격이 가끔은 쪼잔하게 변모를 해버려 탈이지만 말이다.
   데이트할 때, 그는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유머로 옥희를 아주 재미있게 해주었다. 정말 다방면으로 아는 것이 많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옥희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어찌나 웃기는지 웃기도 많이 웃었다. 그러다가 둘 사이가 급속도로 진전되어 옥희는 연애 한번 못 해보고 처음 선본 남자를 남편으로 맞았다. 맞선 본 지 육 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유학생인 그를 따라 미국 땅을 밟은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어떤가?
   옥희한테 적극적으로 다가온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여자들을 사귀었을 것이고, 또 그들에게 무척이나 살랑거렸을 것이다. 물론 박영선이한테는 두 말 할 나위도 없겠지. 옥희는 자신을 만나기 전의 남편 나이를 거꾸로 세면서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불쾌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맘속으로라도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어 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추억 거리가 없는 옥희다. 있다면 그것은 김동추의 편지 백통뿐이다.
  
   따지고 들면 남편보다는 김동추가 훨씬 더 유리한 결혼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다. 김동추와 집안끼리 잘 안다는 같은 과 친구인 김동미가 그랬다. 그는 기가 막히게 머리 좋은 수재이고, 대대로 내려오는 땅 부잣집 외아들로 부모는 둘다 대학교수라는 것이었다. 부모님도 아주 좋은 분들이고, 김동추 또한 한없이 착하고 순수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 너무나 볼품이 없었다.
  
   김동추가 파트너로 지정이 되었을 때, 옥희는 아이구 아니올시다. 하고 실망이 컸었다. 체격이 왜소하고 키가 아주 작았기 때문이다. 유난히도 하얀 얼굴이 어찌나 창백해 보이는지 어디 요양소에서 갓 나온 환자 같았다. 거기다가 그는 하얀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맨 처음 편지가 계속 학교로 배달이 되었을 때, 오죽하면 친구들이 하얀  멸치라는 별명을 붙였을까? 거기다가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통 말을 안 해 정말 재미없고 지루했다. 수재만 모인다는 일류 공대 학생인데도 옥희의 눈에는 그가 바보처럼 보였다.
  
   한데 어떻게 그런 글귀들이 나오는지 옥희는 편지를 읽을 때마다 감탄을 했다.
   외모에서부터 선입감을 가졌기에 그의 진가를 몰라본 것일까?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 옥희는 참말로 철이 없었다. 키 작은 남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은근히 외모를 중요시했다. 언젠가 김동추가 집으로 찾아와 대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공교롭게도 어머니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남자애가 그리도 비리비리하냐?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더라. 걔 어디 아픈 거 아니니? 나가서 돌려보내. 원 세상에, 널 처녀로 늙혔으면 늙혔지 그런 놈은 절대로 안 된다.”
  
   물론 그는 옥희로부터도 문전박대를 당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안됐다. 김동미는 키가 작은 것이 당장은 흠이 되겠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잘 생각해 보라면서 옥희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었다. 우선 한번 사귀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녀가 너무 속물 같아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으나 세월이 지난 후, 딸들을 시집보낼 때는 옥희 역시 속물이 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든 동미가 참 대견스럽다. 대학 졸업 후, 어디 취직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가끔 서울엘 나갔었는데도 그녀의 소식은 바람결에도 들은 적이 없다. 하얀 피부에 자그마한 옥희에 비해 그녀는 바짝 마른 몸매에 키가 아주 컸으며 체격 또한 큰 편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는 늘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어떤 땐 슬퍼 보이기까지 했던 그 표정이 옥희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김동추와 김동미, 혹시 무슨 인척 관계라도 되나 싶어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씩 웃으며 “먼 친척이 되긴 하지만, 실은 우리 엄마가 그 집 찬모였어. 일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우리 엄만 음식 담당이었어. 쉽게 말하면 그냥 식모지 뭐.”하고 말했다. 상상조차 못한 김동미의 대답에 옥희가 도리어 미안해 눈 둘 바를 몰랐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쓸려가듯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혹시 내 주소를 김동미를 통해 안 것이 아닐까? 김동미와는 어떻게 연락이 닿았을까?

   휑 하니 나가는 남편의 뒤통수에 눈총을 쏘아댔지만, 또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렇게 달려가 김동추를 만나 내가 누구의 남편이라고 밝히고는 뭘 어째보자는 심보일까? 설마, 봉투에 적혀 있는 발신지로 차를 몰지는 않겠지. 만일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김동추는 나를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할까?
   여기까지 상상을 하니 옥희는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럴 땐 속에선 화가 솟구치더라고 아내 앞에선 좀 침착한 척하면서 차근차근 대화로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 남편이 취해야 하는 행동이 아닐까?
   보통 남편들은 다 그럴 것만 같았다. 아내 없을 때 배달된 편지이니 그냥 쓱싹 입 씻고 모르는 척할 수도 있고, 허허 웃으며, 초대받았으니 우리 같이 가자구. 하는 남편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잡념들만 일어 머리가 혼란했다. 원인 제공을 한 것은 옥희 자신이지만 그 일을 처리하는 남편의 행동이 너무 조잡해 예전 일까지 겹쳐지며 실망감은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옥희가 서울엘 가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큰애가 한 살 때였으니 벌써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새벽 비행기였기에 짐을 다 챙겨서 아예 차에 실어 놓았었다. 잠이 안 오는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남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자기 서울 가면 그 사람 안 만날 거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회전하면서 불쾌감이 전신을 휩쌌다. 남편이 김동추를 대상으로 그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다. 화가 솟구쳐  올랐으나 감정을 꾹꾹 누르면서 모르는 척 시침을 뚝 따고 물었다.
   “그 사람이라니... 그 사람  누구우--?”
   “그 사람 누구” 하는 끝말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남편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 편지 백통 말야.”  
   참말로 기가 찼다.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불끈 치솟았다. 한국 가는 것, 다 집어치우고 한바탕 해볼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꼭 나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면 그렇게 한판 치고 안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첫 손녀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고 친구들에게도 철석같이 한 약속이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슴을 꾹꾹 누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고, 그날 밤은 별 소동 없이 잘 넘어갔다.
  
   그러나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뭐 죽자사자 했다고? 나는 뭐 할 말이 없는 줄 알아? 옛날에 당신, 나보고, 서울 가면 그 사람 안 만날 거지? 하고 말한 것도 당신이 서울 가면 박영선이를 만나기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나 몰래 계속 만나고 있었지? 그래놓고 박영선이 이름을 대니 부리나케 도망을 쳐? 비겁하게. 나는 당신하고 차원이 달라.
   이렇게 똑같이 뒤집어씌우며 또박또박 따질 것이다.
  
   그동안 옥희는 남편을 믿고 살았다. 믿고 안 믿고 라는 개념을 떠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무슨 일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주 서울 출장을 다녀도, 박영선이를 만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의심도 품은 적이 없다.  
   사실, 김동추 외에도 옥희의 주위에서 서성이는 남자들이 더러 있긴 있었다. 허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남자들이 만나자고 하면 그냥 만나주고, 저녁도 얻어먹고 영화도 보고 등등, 심지어는 옷까지 얻어 입고하는 그런 친구들을 옥희는 아주 추하게 생각했다.
   “꼭 좋아하고 사랑해야만 만나니? 그냥 재밌잖아. 이런 남자 저런 남자 만나봐야 결혼 상대도 잘 고를 수가 있는 거야. 머리 좋은 애가 왜 그쪽으론 그렇게 맹탕이니? 참 답답하다 답답해. 너처럼 그렇게 도도하게 구는 거, 남자들이 좋아하는 줄 아니? 천만에 말씀. 도망가기 딱 안성맞춤이지.”
   어느 친구가 한 말이다. 지나고 보니 그 친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왕 의심을 받을 바에는 놀기라도 했더라면 억울하지나 않지.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했다. 남편의 말에는 최근에 김동추를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내포되어 있었다.
   삼십오 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하고도 아내가 어떤 여자인지를 모른단 말인가?
   허무했다. 따질 때, 그렇게 날 의심한다면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니 이혼을 하자고 강력하게 밀고 나가리라는 다짐도 했다.
   편지 백통 이야기를 꺼냈던 그날 밤처럼. 그러면 남편이 또 싹싹 빌까?
   사실, 이혼을 한다고 해도 기록이 남는다는 것뿐이지, 현실적으로 볼 때는 옥희에게 전혀 손해 날 일이 없다.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는 자꾸 복잡해져 갔다. 그리고 김동추가 머리에 꽉 차서 나가지를 않았다.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쯤 그는 어찌 변했을까? 하얀 멸치 같던 비리비리한 모습도 이제는 지위와 부에 이력이 붙어 중후하고 듬직하게 변했을 거야. 아마 지금쯤은 부동산 재벌이 됐겠지. S공대에서도 손꼽히는 수재였으니 분명히 여기 칼텍 정도는 나왔을 거고, 또 박사 학위도 받아 대학교수가 됐을 거야. 그 부모도 둘 다 대학교수였으니까. 물론 결혼은 했겠지. 어떤 여자를 만났을까? 아니야. 너무 용해 빠져서 여자를 사귀지도 못 했을 거야. 그 성격에 평생을 독신으로 지낼 수도 있는 사람이야.  
   아직도 나를 잊지 못한 건 아니겠지. 그러다가 또 혹시? 하는 망상까지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에 남편이 한 행동이 괘씸해서라도 생일 파티에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귀다가 헤어지면서 무슨 맹세나 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편지에서 불쾌감을 느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도리어 김동추의 현주소에 관심이 쏠렸다. 그와의 만남이 큰 기대로 다가왔다.
  
   옥희는 자신의 몸매를 거울에 비쳐보았다. 나이치고는 아직도 괜찮았다. 김동추가 아악하고 실망을 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지금 이 정도면 우수한 편이다. 사십 년 전 사이즈 6에서 아직도 딱 한 단계 위인 8에 머물고 있으니 말이다. 옷도 새로 한 벌 사야지. 아주 점잖으면서도 눈에 확 띠는 것으로. 얼굴도 다들 십 년은 아래로 봐 주니 아마 그도 놀랄 것이다. 현재 하는 일도 괜찮고, 아무리 그가 수준이 높다 하더라도 대화에 궁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 가서 만나 보자. 또 알아? 내 인생에 커다란 혁명이 일어날지.      

   옥희는 컴퓨터를 켰다. 잡념을 끊고 시간을 보내는 데는 컴퓨터가 최고다. 이미 끝을 낸 번역이지만 문장을 더 더 듬어야 할 곳 이 없나 하고 다시 검토를 했다. 한데 정신 집중은 안 되고 컴퓨터 화면엔 밉살스런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다가 또 예날보다는 훨씬 근사해진 김동추의 모습이 자꾸 그려졌다.
   근 이십  년 동안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다가 오 년 전 에 회사를 그만둔 후, 옥희는 지금 번역 일을 맡아 아주 즐기며 돈을 벌고 있다.
  
    회사가 합병을 해 타주로 이전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남편은 당장 굶어죽기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내색이 심했다. “아이구  어떡하지, 아이구 어떡하지”를 연발하면서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누우며 한숨을 푹푹 쉬어대곤 했다. 사실 그간에 남편 못지않게 월급을 받던 옥희다. 그렇지만 그 월급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살림의 규모를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딸은 이미 출가를 한 후였고 막내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시기였기에 옥희는 차라리 잘된 것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능력의 한계를 느껴 가끔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나 보다 하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딸들도  적절한 시기에 잘 그만두게 된 것이라고 엄마를 위로했다. 회사가 계속 그대로 있었더라면  본인의 의지로는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엄마 고생했는데 이제는 자기네들이 생활비를 보태겠다고 해 말만 들어도 흐뭇했다.
   그런데 남편은 밉살스런 소리를 하며 옥희 속을 긁었다.
   “왜 애들보고 생활비 얘기하고 그래?”
   남편은 참 이상한 면이 있다. 무슨 때에 아이들이 비싼 선물이라도 하면 그것을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다음엔 이렇게 비싼 것 하지 말라고 아주 정색을 하고 말을 한다. 카드에 금일봉이라도 들어있으면 카드만으로도 족하니 돈은 도로 돌려주려 한다.
   아이들이 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청소하는 사람이 다 하는데 왜 애들 고생시키느냐고 안쓰러워하던 남편이다. 그래서 부부싸움도 했으나 결국 남편은 옥희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겼다. 이제 딸들은 다 반듯하게 잘 컸고 셋 다 엄마와는 친구처럼 친하다.
   옥희는 남편에게  한바탕 난리를 쳤다.
   “애들 힘든 것만 가슴 아프고 와이프는 평생 힘들어도 돈만 벌어오면 된 다 그거야? 내가 돈 잘 벌어 오니까 그동안 나하고 산 거야? 이제 직장 떨어졌으니 이혼이라도 하고 싶어? 당장 생활의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남자가 어떻게 그딴 식으로 안달을 해? 내가 얘기했잖아. 앞으로 당신 혼자 벌어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야. 왜, 나는 집에서 놀면 안 돼?”
   말을 한껏 불려 과장을 해 쏟아내면서 옥희는 남편을 다잡았다. 그래, 내가 몸이라도 팔아서 돈만 벌어오면 좋겠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으니 그건 잘 참아냈다. 그런데 남편이 그녀가 번역 일을 맡게 됐다고 하니 어찌나 좋아하는지 옥희는 또한번 씁쓸한 기분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동안 직장 생활하느라 힘들었는데 또 금세 일거리가  생겨 어떡하지? 좀 쉬었다가 일을  맡지 그래.    
   이렇게 말을 했다 하더라도 번역 일을 안 맡을 옥희는 아니다. 한바탕 난리를 치며 교육을 시켰는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심도 안 먹고 훌쩍 나간 사람이 해가 서산에 걸렸는데도 소식이 없다.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옥희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큰딸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마누라 없는 텅 빈 캄캄한 집에 들어서는 남편을 그려보고는 아주 고소해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십여 분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에 치밀던 울화가 점점 가라앉았다.
   “할머니이--” 하고 좋아 날뛰는 손자들을 품속에 안으니,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었다. 큰딸은 옥희에게 친구 만나고 오는 길이냐면서 아빠 들어오실 시간 다 됐다고 뜻밖의 말을 했다. 남편은 사위랑 같이 골프를 치러 간 것이었다.
   “아까 낮에 이 서방이 아빠랑 통화했거든요. 친구 만나 엄마 늦게 들어오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일찍 끝났네요.”
   옥희가  집구석에 앉아 혼자 지지고 볶고 하는 동안에 남편은 탁 트인 푸른 초원을 훨훨 날아다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런저런 망상으로 복잡했던 머리가 이제야 정리가 되었다. 사위의 전화를 받고 얼씨구 좋 구나 하면서 골프채를 차에 싣고 막 떠나려는 차에 우체부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편지들을 갖고 들어와  겉봉을 훑어보는 중에 옥희가 들어온 것일 게다.

   드디어 차가 멎으며 남편과 사위의 모습이 거실 창밖을 통해 시야에 들어왔다. 멀찌감치서 보니 장인과 사위가 같은 또래의 친구 같다. 사위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남편의 큰 키도 오늘 따라 왠지 멀대같이 보여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버님이 싱글 쳤어요. 싱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사위가 한 첫마디였다. 싱글이란 남편이 아직 한번도 못 쳐본 점수 아닌가? 옥희의 출현이 뜻밖이라는 듯 남편은 잠깐 주춤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요게 김동추 머리통이다 하고, 때리니까 딱 딱 하고 어찌나 공이 잘 맞던지... 어허어 쏙 씨언해.”
   큰 소리로 목청을 돋우고는, 신이 나서 죽겠다는 듯이 그는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큰딸과 사위는 김동추가 누구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 있다아아--” 하고 노래를 부르듯 뒷말을 길게 늘어뜨리고는 두 팔을 쭉 뻗어 휘두르면서 계속 골프 치는 시늉을 했다. 있는 힘을 다해 진짜 김동추의 머리통을 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박영선이 생각도 안 했을 리 만무다. 옛날 추억과 더불어 아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같이. 그런데도 싱글을 쳤다니 대단하다. 아니다. 남편은 두 가지를 생각을 한꺼번에 못하는 사람이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두 팔을 휘두르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행동을 딱 멈추고 옥희의 눈에 시선을 꽂고는 마디마디를 꼭꼭 누르면서 힘주어 말했다.
   “어쩔 거야? 갈 거야? 말 거야. 가고 싶으면 가라구. 얼마든지 가라구. 3월 5일이면 아직 보름 남았으니 그 안에 만나봐도 되겠네.”
   그의 끝말에 다시금 화가 치솟았다. 웬만큼 잔잔해진 옥희의 감정에 다시금 돌멩이를 던진 것이다. 박영선이라는 이름이 옥희 입에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의 표정에는 손톱만치의 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위 앞이라 어쩔 수 없어 꾹 참았다. 남편을 잠깐 꼬나보고는 맘속으로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구, 덩치 값도 못하는 양반아. 당신 나한테 열등의식 있어? 아니면 개 눈엔 똥만 보인다더니 당신이 옛날에 박영선이 이하 여러 여자들하고 놀아난 결과, 얻은 결론이 겨우 그거야?
   큰딸과 사위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둘이서 눈빛으로만 표정을 주고받았다. 옥희는 사위를 향해 지극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 서방 배고프지? 저녁 다 됐으니 어서 씻고 와.”
   부엌을 향하면서 옥희는 한번 더 속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조용히. 그래. 갈 거야. 왜 못 가. 꼭 간다고. 당신이 간다면 같이 갈 수도 있어. 가서 멋지게 연극 한번 하자구.
   만일 입장이 바뀌어 박영선이가 그런 편지를 보냈다 하더라도, 아니 남편 눈앞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옥희는 저렇게 채신머리없이 굴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편안한 감정으로 여유 있게 대할 자신이 있었다.

  식탁에 앉자마자 둘째 녀석이 “와, 함머니 팬케이--익” 하고 목청을 돋우며 눈을 반짝거린다. 두 아이가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은 다 잘 먹는 편이며, 그중에서도 할머니 팬케이크인 해물전을 제일 좋아한다. 남편은 싱글 친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위도 맞장구를 쳐가며 장인의 기분을 한껏 맞춰 주고 있었다. 거기다가 손자 녀석까지 합세를 하여 싱글이 뭐야? 하고 끼어들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네 살짜리 아이가 어찌 알겠냐마는 남편은 녀석한테도 자랑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연년생인 둘째도 눈을 말똥거리며 듣고 있었다. 이제는 두 녀석들이 말을 잘해 의견 소통이 잘 된다. 그리고 어찌나 재잘재잘 말이 많은지, 저녁을 먹으면서도 말하기에 더 바쁘다. 낮에 일어난 일을 몽땅 잊어버렸는지, 옥희도 남편도 아이들 재롱에 빠져 마냥 즐겁기만 하다.

   여느 때, 대화가 그리 잘 통하는 남편은 아니다. 아니, 아주 안 통하는 편이다. 어떤 땐, 기가 막혀 어금니를 꽉 물고 옥희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손주들 얘기만 나오면 둘이 맘이 딱딱 맞아 떨어진다. 온 얼굴에 저절로 퍼지는 웃음과 함께 행복에 빠져드는 것이다.
   남편의 얼굴에 김동추의 하얀 얼굴이 겹쳐졌다. 그리고 또다른 상상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도 이렇게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리라는.
  
   김동추에게는 옥희가 편지를 쓰는 대상에 불과했고, 끄덕도 안 하는 옥희에게 백통의 편지를 보낸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닌 집념일 수도 있다. 만일 그가 옥희를 진정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때의 감정에 불과하다. 지금 그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 아주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쌀쌀하기 그지없고 도도하고 교만한 옥희에게 차인 것이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기적이 일어나 옥희라는 여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어떡할 뻔했지? 아휴,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다.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면서 만날 아내 눈치만 보다가 바짝바짝 말라 비틀어졌겠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옥희는 김동추와의 만남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옷장 문을 열고 한참 서 있다가 또 거울 앞에 한참 동안 서서 자신의 모습을 요리조리 비춰보며 표정까지 관리한 생각을 하니 푸우우 하고 웃음이 터졌다.
  
   한판 붙어보리라 하고 단단히 벼르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그 다음날 아침, 남편이 박영선 일은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옥희는 남의 말하듯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당시는 좀 씁쓸한 느낌이었으나, 이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동안 아무 내색도 안 했지? 나한테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남편의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다 지난 일인데 뭐 하러 물어요? 그리고 결혼 전 일인데, 무슨 상관있어요? 남자가 그 나이에 연애도 한번 못 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부글부글 끓던 속이 하룻밤 만에 어찌 이리 가라앉았는지 옥희도 이상했다. 남편 역시 하룻밤 사이에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 맞아. 현재가 중요하지 과거 같은 건 들먹일 필요가 없지.”
   “과거 같은 건” 이란 말에 옥희와 김동추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뭐야 또? 당신은 내가 김동추하고 정말 연애를 했다고 생각해? 하고 따지지도 않았고, 어제처럼 화도 안 났다. 박영선과의 연애담을 솔솔 불수도 있었건만 남편은 얘기를 건너뛰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그 사람 회갑잔치에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뜻밖이다. 같이 가자 그래도 절대 안 가리라 생각했던 남편이다. 혼자 간다고 하면 물론 말리지는 못하겠지만. 잠재의식에서인지 옥희는 남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른 대답했다.
   “당신이랑 같이 가면 나는 좋죠. 잘 됐네. 그런데 어제 아침에는 왜 그리 화를 내고 그랬어요?”      
   박영선이 때문에 갑자기 부드러워졌나? 하면서 옥희는 실실 웃었다.
   “몰라. 편지 보니까 그냥 화가 나서.” 그러더니 남편은 옥희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씽긋 웃고는 또 술수를 썼다. “지금도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 아니겠어?” 하고.

   3월 5일을 일주일쯤 앞두고, 옥희는 뮤직센터에서 열린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갔다. 남편은 클라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친구랑 동행이었다. 모처럼 정장을 한 참말로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친구랑 둘이서 한껏 행복하게 연주회를 관람하고 우루루 몰려나오는 관중들에 섞여 주차장을 향하는데 누가 뒤에서 불렀다. “옥희 씨.” 하고. 남자 목소리였다.
   옥희는 돌아서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바로 뒤에서 불렀는데 모두들 와글거리며 옥희를 지나쳤다. 같이 가던 친구도 “분명히 불렀는데.” 하고 그 자리에 섰다. 그때 자그마한 몸집의 남자가 미소를 띄우며 옥희 앞에 나타났다.

   김동추였다. 옥희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나 그는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도로 돌아간 듯했다. 하얀 테 안경도 그대로 끼고 있고 낯 색도 창백했다. 초청장을 받은 후부터 계속해서 김동추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인지,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생각이 갈팡질팡했으나 그녀는 김동추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날짜를 손꼽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너무나 담담했다. 김동추 역시 담담하게 그녀를 대했다. 사십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 쉽게 알아볼 수가 있느냐며 감탄하는 친구와 함께 그들은 저쪽 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초청장 받았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대화가 술술 잘 이어졌다. 김동추와의 일을 다 알고 있는 친구가 중간에서 거들었다.
   “옥희가 초청장 받고 지금, 그날만 손꼽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미리 만났네요.”
   보통 때 같으면 펄쩍 뛸 옥희다. 그런데 그녀는 그냥 가만있었다. 그들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또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얘기를 계속했다. 입담 좋은 친구가 있어 얘기가 더 잘 풀렸다.
   김동추는 독신이었다. 육십이 되도록 결혼을 한번도 안 한 것이었다. 옥희의 가슴에 파도가 일었다. 죄를 지은 것처럼 김동추에게 미안했다. 꼭 하고 싶었던 말, 그때는 참 미안했단 애길 하려고 하는데 어디서 “동추 씨. 동추 씨”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까지 거기 있으면 어떡해요? 빨리 가야죠.”하는 소리와 함께 웬 여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안 보이고 형상만 보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뮤직 센터가 쩡쩡 울렸다. 옥희의 침대도 흔들거렸다.          
   사십 년 동안에 한번도 김동추 꿈을 꾼 적은 없다. 그런데 요즘 매일 생각을 하다 보니 꿈에까지 그가 나타난 것 같았다.
  
   꿈을 꾼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옥희는 뜻밖의 편지를 또 한통 받았다. 발신인은 김동미였다. 아니, 김동미가 웬일로? 동시에 발신처로 눈길을 주니 김동추가 보낸 편지와 같은 주소였다. 순간, 강한 의문 하나가 번개처럼 번쩍하며 뇌리를 스쳤다. 초대장을 받은 후부터 무슨 까닭인지 김동미가 김동추의 얼굴에 겹쳐져 자꾸만 머리에 떠올랐었다.
   봉투를 뜯는 옥희의 손이 떨렸다. 회갑연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취소되었다는 간단한 공문 편지와 함께 김동미가 친필로 쓴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십 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옥희야, 너무나 긴 세월이 흘러버려 오랜만이라는 인사는 어울리지 않겠지? 그러고 보니 졸업하고 처음이구나.  
   네가 깜짝 놀랄 소식 한 가지 전한다. 나, 동추씨랑 결혼했어. 우리가 먼 친척간인 거, 너도 알지? 그래서 집안의 반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결국은 단둘만의 결혼식을 올렸지만 그간의 사정이 아주 복잡했어.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할게. 할 얘기가 정말로 너무너무 많아.  

   옥희야, 내가...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너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면 너는 믿을 수 있겠니? 진심이야. 나는 동추 씨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어. 슬픔, 아픔... 그리고 그의 지병까지도.

   동추 씨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회갑연이 취소됐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아주 좋아 의사의 허락 하에 추진한 일이었는데 말야. 지금 병원에 있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꼭 와 주리라 믿는다.’

   저 만치서 스무 살 적의 김동추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허약해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김동미가 슬픈 얼굴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고요한 집안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운 침묵으로 변해 옥희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큰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가 휴우하고 내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편지 끝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6
어제:
1
전체:
74,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