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침묵의 비밀 <수정본 2014년 9월>

2008.05.11 02:44

김영강 조회 수:804 추천:141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십이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한밤중,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며 요란하게 울렸다.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미경은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유리창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가 미경의 가슴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끼쳤다.  
  “애경이가 죽었어요. 자살을 했어요. 천장에 목을 매고 자살을 했어요.”
  뭔가에 쫓기는 듯, 숨 가쁘게 뱉어내는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엉엉 울기 시작하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애경의 남편 톰이었다. 벌떡 일어나 앉는데 무거운 둔기로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아찔함에 현기증이 났다. 애경이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지 않나 하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으나 톰의 말은 명확한 현실이 되어 미경의 가슴에 칼날처럼 박혔다.  
  "한밤중에 웬 전화야?"
  남편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톰이에요. 톰"
  미경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남편이 얼른 일어나 불을 켜고 전화기를 뺏었다.
  “언니, 언니가 계속 그딴 식으로 나오면 나 콱 죽어버릴 거야.” 하고 애경은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심지어는 언니네 식구 다 쏴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는 험악한 말까지 했으나 미경은 동생이 자살을 하리라고는 생각초차 해본 적이 없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남편은 아파트의 위치를 묻고는 “알았어. 곧 갈게.”라는 한마디를 한 후, 미경에게 빨리 나오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그는 지극히 태연했다. 아마, 잘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외출을 알리고 그들은 집을 나섰다. 무슨 불길한 예측이라도 한 듯이 미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아주 우울했다. 아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  
  바람은 더 기승을 부리며 불었다.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거리에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가로수들이 마구 휘청거리며 울부짖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미경은 코트 자락을 여민 후, 두 팔을 오므리고 팔꿈치를 꼭 잡았다. 뿌연 불빛을 내비치며 묵묵히 서 있는 가로등의 둥그런 눈에 그득하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불빛 아래에는 눈물이 빗금을 그으며 흩날렸다.
  남편의 뒤를 따라 차에 오르는데 부모님의 슬픈 얼굴이 떠오르며 그제야 울음이 솟구쳤다. 거의 한 시간가량을 차를 타고 가면서 미경은 계속 흐느꼈다. 흐느낌 속에 소리까지 묻어 나왔으나 남편은 침묵을 지키며 고개도 까닥 않고 앞만 보며 운전했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애경이가 저렇게 죽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에요. 저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 절 좀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용서해 주세요.’  
  동생이 사는 아파트이지만 미경에게는 첫 방문이었다. 온 동네가 침침하고 어눌한 분위기였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도 희끄무레했다. 겨우 눈에 들어온 아파트들이 유령의 집인 양 음산했다. 웨스턴을 타고 남쪽으로 피코 블루버드를 지나 한참을 내려왔으니 미경에겐 동네 자체에도 첫걸음이었다. 이곳 로스앤젤레스 중에서도 흑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문도 없는 입구가 입을 쩍 벌리고 시커먼 속을 드러내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 건물은 꽤 높은데도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안 했고 층계는 너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애경이가 산다는 4층으로 올라가니 어두침침한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애경의 죽음은 옆방에서조차 모르는 듯, 삭막한 분위기는 처참할 정도로 고요했다. 어슴푸레 시야에 들어온 복도 끝이 마치 지옥의 입구라도 되는 것 같아 미경의 몸은 경직되었다.  
  
  아파트에 들어서니 애경이가 방바닥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가슴에서부터 무릎까지 얇은 담요를 덮고,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린 채 두 눈은 감고 있었다. 목에는 노끈의 붉은 흔적이 선명하게 나 있었고 다리는 좀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으면서 약간은 얼룩덜룩했다.
  동생을 보는 순간 미경은 가슴이 메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사면의 하얀 벽이 뱅뱅 돌며 눈앞이 노래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경이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애경아, 애경아.” 하고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동생이 ‘언니!’ 하고 부르며 벌떡 일어나 앉을 것만 같았다.
  “애경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언니가 너한테 잘못한 게 너무 많아. 언니를 용서해줘. 미안해.”
  미경은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바닷물 같은 눈물을 쏟았다. 동생은 가해자이고 자신은 항상 피해자라고만 생각해왔던 현실이 완전히 뒤바뀌어졌다. 남편이 어깨를 흔들며 조용히 말했다.
  “큰소리 내지 마. 소릴 죽여.”
  톰은 한참을 훌쩍거리다가 고개를 젖히며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일 끝나고 들어오니까 저기에 저기에····.”
  남편이 벌떡 일어나 저기라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녀도 고개를 들어 천장에 시선을 꽂았다.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셨다.

  거기에는 손목만큼 굵은 파이프가 여러 개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곧고 매끈매끈한 보통 파이프가 아니었다. 납으로 만들었는지 허연 색깔에 표면이 좀 꺼칠꺼칠해 보이고 또 약간은 울퉁불퉁했다. 파이프가 천장에 딱 붙어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었다. 히터 시스템이라 했다.
  남편은 꼿꼿하게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마치 수사관이나 된 듯, 여기저기를 살피면서 파이프에 눈을 박고 있었다. 톰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말할 기력도 없는 사람처럼.
  “내려놓으면 금세 도로 살아날 것만 같아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애경을 톰은 방바닥에 내려놓고 인공호흡을 시켰다는 것이다. 살려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숨은 이미 끊어진 후였다고 한다.    
  톰은 병원 랩에서 테크니션으로 일을 하는데 그 시간이 일정하지가 않다. 정식 직원이 아니고 병원에서 불러줘야만 하는 임시 직원이기 때문에 뜨내기 신세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로 밤에 일을 했고, 요즘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휴가 간 직원들이 많아 거의 매일 일을 했다고 한다. 밤 열두 시에 일을 끝내고 행여 아내가 깰까봐 살며시 들어왔는데, 애경이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네가 이 노끈을 풀고 처제를 내려놓았단 말이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지극히 침착한 목소리로 남편은 애경이가 목을 맸다는 샛노란 끈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는 나일론 줄을 여러 겹으로 꼬아서 만든 매끈매끈 윤기가 나는 아주 튼튼해 보이는 손가락 굵기 정도의 끈이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 말릴 때 쓰는 줄이라고 했다. 빨랫줄치고는 짧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남편은 방바닥에 눈을 박은 채 침묵했다. 그러다가 애경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계속 훌쩍거리고 있는 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톰은 아내를 살려보려고 별의별 짓을 다했다는 말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서럽게 흐느꼈다. 생김새는 전형적인 백인의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도 넋두리까지 유창한 한국말로 엮고 있는 톰이 너무나 생소했다. 거짓이 그의 온몸을 에워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부터 미경은 톰이 싫었다.  
  
  동생이 결혼을 했다면서 남편이라는 사람과 함께 미경을 찾아온 것이 바로 한 달 전의 일이다. 소식이 끊어진 지 2년 만이었다.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던 동생이라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편할 줄 알았다. 그러나 동생은 가시가 되어 늘 미경의 목에 걸려 있었다.  
  이사를 했는데도 용케 집을 찾아왔었다. 애경은 너무 살이 쪄 몰라볼 정도였다. 대책 없이 마구 먹어대던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났다. 이제 겨우 스물아홉인데 완연한 중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동생이 한심스러웠다. 반면에 남편인 톰은 동생보다 10년이 위라는데도 도리어 애경이보다 더 젊어 보였다. 그는 유난히 하얀 피부에 짙은 눈썹이 맨 먼저 눈에 띄는 전형적인 백인이었다. 조각처럼 깎아 세운 듯한 콧날하며 깊고 푸른 눈동자, 뚜렷한 이목구비가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만들어 놓은 듯한 그의 모습에 미경은 손톱만큼의 친근감도 가지 않았고, 제부라는 느낌도 도무지 들지가 않았다.
  그는 완벽한 한국말을 했다. 놀라서 물었더니 어머니가 한국 여자이며 한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는 고등학교 때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완연한 서양 사람이었다. 어쨌든 섞이긴 했으나 차라리 미국남자와 결혼을 한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서 만나 넉 달 전에 결혼을 했고, 그곳에서 살다가 언니가 보고 싶어 엘에이로 왔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언니, 내가 다 잘못했어. 용서해줘. 앞으로는 그런 일 절대로 없을 거야. 이제 나도 결혼했으니까 마음잡고 잘 살게.”
  이상하게도 미경은 아무 감정이 일지 않았다.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동생이 나타났으면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반가워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동생이 “언니, 언니.” 하고 소리 내어 흐느끼면서 자신을 껴안는데도 목석을 대하는 것 같아 아무 느낌이 와 닿지 않았다. 톰은 아내가 울고불고 야단인데도 놀라지도 않고 으리으리하게 잘 꾸며진 실내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높은 천장으로부터 길게 늘어뜨려진 샹들리에의 불빛을 눈이 부신 듯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시체를 가지러온다는 사람들은 밤이 다 지나가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추운 탓인지 무서운 탓인지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자꾸만 어머니 생각이 나서 괴로웠다. 어머니의 영혼이 지금 애경이 곁에서 맴돌고 있는 것 같아 더 무서웠다. 시커먼 돌멩이를 삼킨 듯이 가슴이 짓눌리며 속이 답답했다.  

  미경이와 애경은 네 살 터울로 태어난 자매이나 어렸을 적부터 모든 것이 너무나 달랐다. 하얗고 가녀린 체격에 얼굴도 예쁜 언니에 비해 애경은 그렇지가 못 했다. 발가락 하나라도 닮은 데라고는 없었다. 성격 역시 하늘과 땅만큼이나 동떨어진 자매였다.
  이들 두 자매는 전생에서 무슨 철천지원수가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비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애경은 항상 언니와는 반대의 길만 골라 걸었다. 모범생에다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언니에 비해 그녀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대며 부모 속을 썩였다. 교과서를 맡겨놓고 만화를 빌려보는가 하면, 아주 어릴 적에도 가게에서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것을 살짝살짝 훔쳤다. 커 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마구 꾸어 쓰고는 갚을 생각도 안 했다. 용돈을 주면 그날로 다 써버렸다. 뭐든지 자기 원하는 대로 해야 했다. 울고불고 떼를 써 어떤 때는 무서울 정도였다. 물론 공부하고도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다. 미경은 그런 동생을 둔 것이 정말 창피하고 싫었다. 차라리 죽어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상상을 하다가 자신도 깜짝 놀라곤 했다.
  한 번은 학교에 불려갔던 어머니가 미경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머리가 나쁜 거는 아닌데 공부를 통 안 한다는구나. 시험을 칠 때도, 시험 치는 자체가 그냥 귀찮고 지루해서 문제를 읽지도 않고, 아무 답에나 제멋대로 표시를 한단다. 좀 더 크면 스스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선생님이 위로를 하더라만 도대체 이를 어쩌면 좋으냐?”
  어머니는 항상 애경이 걱정을 안고 살았으나 말썽꾸러기 딸을 돌봐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당장 먹고사는 일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행상을 했고 어머니는 시장 바닥에서 장사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미경은 시장에서 엄마가 어떤 아줌마와 엉겨붙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숨어서 지켜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 엄마가 창피했다. 돈만 아는 억척스런 엄마가 싫었고 자신의 그런 환경이 원망스러웠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일찍 철이든 미경은 모든 스트레스를 공부로 풀었다. 성적표만이 그녀의 행복이었고 공부만이 그녀의 살 길이었다. 하지만 애경은 날이 갈수록 더 못된 아이가 되기로 작정을 한 듯이 엇가는 길만 골라 줄달음을 쳤다.

  미국에 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지적이 되어버렸다. 카운슬러가 자기의 영역을 이미 넘어섰으니 전문가를 찾아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멀쩡한 애를 정신병자 취급한다고 도리어 기분이 상해 학교 문을 박차고 나왔었다. 통역을 해주던 이중언어 교사가 의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관심을 보였는데도 어머니는 일없다고 한 마디로 거절한 것이다.
  애경은 바깥에서 일이 잘 안 풀리면 죄 없는 엄마만 들볶았다. 아버지는 사업에만 정신이 팔려 애경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행상으로 고생하다가 나중에는 땅 투기를 하여 운 좋게 돈을 벌게 된 아버지는 미국에 온 후에도 부동산에만 눈독을 들이며 동분서주했다. 어머니 역시 같이 뛰었다.  애경이가 사고를 칠 때마다 어머니는 돈으로 막았고, 또한 애경이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며 딸의 입을 막았다.
  애경이가 한창 말썽을 부릴 때, 미경은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며 공부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런 동생을 둔 것이 부끄러워 그냥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상가 건물의 세입자들과 자주 말다툼을 하고, 집을 샀다 팔았다 하며 돈에만 연연하는 부모가 싫었다. 공부를 끝낸 다음에도 미경은 직장을 핑계로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직이 된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앞길에 찬란한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고 느껴져 회사 일에만 몰두했다.
  그러던 중 미경은 가족이 있는 로스앤젤레스 지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전격적인 영전이었다. 남들은 가족이 있는 곳으로 지원도 하건만 미경은 그 반대였다. 그러나 앞날을 바라보고 그녀는 회사의 발령에 따랐다. 그때 애경은 집에서 나와 혼자 아파트에 살면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돈도 한 푼 벌지 못하고 완전히 부모한테 의지하고 사는 주제에 자립했다고 말을 하는 동생이 한심스러웠다.
   미경이가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는 큰딸을 붙들고 애경이를 사람 좀 만들어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러나 미경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동생이었다. 그동안 어머니에게는 변한 것이 있었다. 열심히 교회에 나가시는 것이었다. 애경이도 가끔씩은 교회에 왔다. 돈을 타 가기 위해서 교회에 온다 해도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으로 미경이도 합세를 해, 어느 일요일에는 세 모녀가 나란히 교회에 나가기도 했다.  세 모녀가 다 쓰라린 상처를 안고 서로가 서로의 속마음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으나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멀쩡했다. 어쨌든 어머니의 행복한 모습이 미경은 좋았다. 아무한테나 “우리 큰딸, 큰딸” 하시면서 소개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부산스러운 어머니가 못마땅했으나 미경은 어머니를 모시고 매주 교회에 나갔다.    
  
  무슨 인연이었는지 미경은 교회에서 남편을 만났다.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미경은 그와 결혼하는 데에 성공을 했다. 상가 건물 입주자들과 소송이 붙었을 때, 그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입주자들과 원만한 해결을 보는데 핵심 역할을 해, 부모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공학 전공의 가난한 유학생으로 박사 학위를 목전에 두고 있으면서도 학교 공부보다는 생산 쪽에 더 매력을 느껴 언젠가는 특허품을 만들어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구체적인 아이텀도 설정해 놓은 상태였다. 단지 자본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는 비즈니스 쪽으로의 머리가 아주 비상했다. 생산과 경영, 그 꿈이 이루어지면 그는 양쪽 어깨에 날개를 달 수 있게 된다.
  결혼 1년 후, 부모님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어머니는 그 며칠 후, 세상을 떠나셨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데도 어머니는 첫마디부터 애경이 걱정으로 시작하여 죽는 순간까지 “애경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기어들어가는 모기소리로 입술을 겨우 달싹거렸지만 미경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한테 딱 한 가지 절실한 소원이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 아냐? 애경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죽는 거였어. 근데 이렇게 내가 먼저 죽게 되었구나.”
어머니의 저 가슴 깊은 곳에 애경의 자리가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미경은 몰랐었다. 미경은 어머니의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엄마, 엄마, 아무 염려 마세요. 애경이는 제가 책임지고 돌볼게요”라고.  
  ‘아, 불쌍한 어머니····.’
  미경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자신을 돌아보며 뼈저린 후회를 했다. 어머니를 위해서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고 모두가 다 미경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었다. 어머니에게 잘못한 것까지 다 합쳐서 이제는 애경이에게 온 정성을 쏟아 잘해줘야 된다는 결심을 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동생은 자기 책임이니 죽을 때까지 잘 돌봐야한다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한때는 못난 동생이 그저 밉고, 창피하고 거추장스러웠으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이제 애경은 언니인 미경의 책임이었다. 애경은 이제 미경이가 평생을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되었다.
  교통사고가 난 그때, 애경은 여행 중이었다. 연락을 할 길이 없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제멋대로 사는 애경이었기에 한참 동안 행방이 묘연해도 집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애경은 어딜 갔다 왔는지 근 한 달이나 지난 다음에야 나타났다. 물론 남자와 동행했음은 뻔한 일이다. 커뮤니티 칼리지에 적만 올려놓고 애경은 남자들과 노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남자들은 수시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애경이가 배반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님을 잃은 슬픔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애경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언니와 형부가 변호사와 짜고 유언장을 위조했다면서 당장에 부모 유산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유언장에는 작은 딸 애경의 몫은 큰딸 미경에게 위임한다고 씌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벌려놓은 부동산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미경은 모든 일들을 남편의 도움으로 해결을 했다. 그의 사업적인 수완은 뛰어났다. 경영의 귀재였다. 남편이 선정한 변호사 역시 능수능란하게 일 처리를 잘해 모든 것이 다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은행과의 거래 관계가 성공적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그러나 애경은 형부가 변호사와 짜고 상가 건물을 말아먹으려고 한다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했다. 은행 부채도 많고, 부동산 값도 땅에 떨어지고 해 당장은 팔수 없는 지경인데도 애경은 형부 앞에서 울고불고 날뛰며 반말을 직직 그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 나쁜 새끼야. 내가 다 알아봤는데 상가 건물이 4백만 불도 넘는다고 했어. 그러니까 내 몫으로 2백만 불 내놔. 안 주면 나 고소할 거야. 이 사기꾼아.”
  속 내용이야 어찌 돼 있든지 간에 애경은 2백만 달러를 입에 달고 형부를 괴롭히다가 나중에는 백만 달러로 내렸다. 은행 빚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한 번은 남편이 그랬다. 전문가를 찾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그리고 정신병원을 들먹거리는 바람에 미경은 성격이 못돼서 그런데 무슨 그런 소릴 하느냐고 도리어 남편을 섭섭하게 생각했다.
  한데, 하나의 생각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미국에 오자마자 바로, 애경이가 중학교 다닐 때였다. 학교 카운슬러가 그런 말을 했었다. 자기의 영역을 넘어 섰으니 정신과 의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한 것을 어머니는 교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도리어 화를 내셨던 것이다. 이중언어 교사가 간곡히 부탁을 했으나 어머니는 멀쩡한 아이를 정신병자 취급한다고 한마다로 잘라 거절을 했었다.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했듯이 미경 역시 동생이 정신병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또 한 사람도 정신과 치료를 들먹인 분이 있었다. 한 번은 어이없게도 애경이가 미경이의 회사로 찾아와 사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언니가 부모의 유산을 가로챘으니 그런 나쁜 년은 당장 해고를 시켜야 한다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소연을 한 것이었다.  
  
  동생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겠다고 굳게 결심을 했건만 이제 미경은 그만 그 십자가에 깔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상가 건물에 대한 자기 몫, 백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계속해서 들볶는 것이었다. 은행 융자 관계며 부동산 값이 형편없이 떨어져 지금은 매매할 수가 없고, 매매를 해도 한 푼도 남는 것이 없다고 누누이 설명을 해도 통하지가 않았다. 자기가 한 번 그렇다고 단정을 하면 그것이 진실이 돼버리는 것이 애경의 성격이다. 어릴 때도 콩을 팥이라고 우기면 그렇다고 해야만 했다.    
  이제 애경이가 찾아올 때마다 미경은 가슴이 마구 뛰는 증세가 생겼다. 전화벨 소리에도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은 충격이 왔다.
  미경은 넌더리가 났다. 계속 생활비를 대주면서도 이렇게 시달려야 하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는 원하는 대로 해주고 동생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심심하면 찾아와서는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야단을 하고, 거실에 놓인 화분을 집어던지기는 이제 예사로운 일이 돼버렸다. 이웃에서 경찰을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러는 중에 진짜로 큰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날이었다. 바깥에서 또 무슨 안 좋은 일을 당했는지 서슬이 퍼래 가지고 애경이가 들이닥쳤다.
  “언니, 나 돈 좀 줘. 지금 당장 만 불이 필요해.”  
  미경은 어이가 없었다. 어디에 쓰려는지 물을 가치조차 없었다. 돈타령에 이미 이력이 난 미경이다.
  “뭐 만 불? 그 많은 돈이 갑자기 어디서 나니?”
  미경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동생은 언성을 높이며 대들었다.
  “만 불이 없다고? 금고 열어봐. 비밀금고 있지? 어딨어? 비밀금고 어딨냐고?”
  애경은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며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심지어는 벽에 걸린 그림의 뒷벽까지 살폈다. 한참을 날치던 애경은 제풀에 지쳤는지 거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행히 아기가 자고 있는 방에는 들어가지 않고 문만 열어봐 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돈의 용처를 밝혔다.
  “그 개새끼가 꼭 이혼한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해놓고는 돈만 먹고 도망을 가버렸어. 너무 웃기는 일은 와이프가 임신을 한 거야. 나하고 사귀면서 와이프하고 잤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뿐 새끼. 변호사한테 물어봤더니 고소하면 내가 이긴대. 돈도 다 받을 수 있다니까 그 새끼 한국으로 튀기 전에 붙잡아야 돼. 근데 변호사비가 만 불이야.”        
  남자가 도망갔다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애경의 그런 말에 미경은 이제 만성이 되었다. 얼마 전에 고소한다면서 울고불고 할 때는 그래도 유부남은 아니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못 살겠어. 내가 깜빡 속았다고. 그 새끼 꼭 잡아서 감옥에 처넣고 말 거야. 쌍놈의 새끼 만나기만 해봐. 죽여버릴 거야.”
  애경은 분에 못 이겨 입에 거품을 물고 계속해서 개새끼라는 말을 반복했다.  
  침묵을 지키며 동생이 흥분에 떠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미경이 차갑게 한마디를 뱉었다.
  “돈도 없고, 있다 그래도 못 주니 제발 좀 고소한다는 소리 이제 고만해라.”
  애경은 아무나 보고 고소한다는 소릴 쉽게 한다. 상가건물 가로챈 언니 형부 고소한다는 얘기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뭐야, 못 준다고? 그럼 내 돈 내놔. 왜 언니가 다 떼어먹으려고 해? 지금 달라구. 당장 달란 말야. 이 집도 엄마 집이잖아. 나가. 나가. 나가라고····.”
  집은 현재 완전 은행 소유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애경은 소리를 질러댔다. 흥분했던 태도에 더욱더 가속도가 붙었다. 동생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하더니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번 남자에게도 호되게 당한 모양이다. 화풀이는 항상 미경의 몫이라 그녀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느 때와 좀 달랐다. ‘죽는다. 죽인다’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언니야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집도 있고 돈도 있고, 없는 거 없이 다 있지만 난 아무것도 없는 몸이야. 나 하나 죽으면 간단해. 울어줄 사람도 없어. 근데 나 혼자는 절대로 안 죽어. 왜 혼자 죽어? 억울하게.”
  동생은 완전히 미친 사람모양 악을 쓰고 울부짖으면서 엄지와 검지를 쫙 펴고 미경을 겨누며 총 쏘는 시늉을 했다.
  “권총으로 다 쏴 죽이고 죽을 거야. 형부랑 언니랑, 그리고 애기 목숨도 내 손에 달렸다고. 그뿐인 즐 알아? 형부 회사 가서 그냥 마구 총 쏴댈 거야. 내 목숨 내놓는데 무슨 짓을 못하겠어? 벌써 총도 사놓고 총알도 다 사놨어. 겁나지?”
   희번덕거리는 눈빛이 섬뜩해 마주볼 수가 없었다. 억장이 무너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왔다. 시야가 노오래지고 속이 메슥거렸다. 귀가 멍멍해지면서 앞에 앉은 동생의 무서운 얼굴이 뱅글뱅글 돌았다. 미경은 겁이 더럭 났다. 자고 있는 아기에게 신경이 쓰였다.
  “뭐 이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오라 그래도 더러워서 안 와. 어디 보자. 얼마나 잘먹고 잘사나. 부모 유산 가로챈 거 얼마나 가나 두고 볼 거야. 돈뿐만이 아냐. 언니는 내 모든 것을 뺏어 갔다구우우--. 난 언니 그늘에 가려서 빛도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자랐어. 언니 그거 알아? 모르지? 언니는 모를 거야. 내가 어떻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나는 쪼끄말 때부터 내버려진 아이였다고. 모두가 다 언니만 예뻐하고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어엉-- 어어엉--. 뉴욕서 언니 공부하는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엄마는 날 철저하게 무시했어. 내가 엄마 속을 일부러 뒤집어놓았는데도 엄마는 날 외면했어. 언니가 알면 속상해 할까봐 언니한테도 일체 내 얘기 안 했잖아. 언니는 하나도 몰라. 하나도 모른다고.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고 자랐는지····. 엉어엉. 다 언니 때문이야, 언니 때문이란 말야.”
  ‘뭐 엄마가 널 무시했다고?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야. 그건 엄마가 네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뿐이야. 엄마가 도저히 너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야. 눈을 감는 순간까지 엄마는 네 걱정만 하셨어.’
   마음속에 있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와 딸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에 미경은 놀랐다. 미경이도 그랬고, 아버지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동안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제각기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악을 쓰며 통곡을 하던 동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의 집기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도자기와 조각품들을 대리석 바닥에 내동댕이를 치니 쩽그렁쩽그렁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미경을 향해 사기의 뾰족한 조각들이 튀겼다. 금세라도 뭐든지 집어들고 언니의 정수리를 내리칠 기세였다. 미경은 무섭고 떨려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동생을 도저히 말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말이 그렇지 설마 네가 나를 죽이기야 하겠니?’
  그러나 미경의 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경을 부여잡았고, 애경의 육중한 무게와 힘에 밀려 곧바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응접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다음, 동생은 식탁 의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유리창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미경은 다시 동생을 가로막았으나 또다시 나뒹굴어지고 말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애경의 난동은 계속되었다. 응접실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이중 유리문이 단번에 와르르 와르르 깨졌다. 순식간에 유리의 파편들이 이리 저리 튀기고 나르며 집안은 전쟁터가 되었다.
  갑자기 아기의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애경은 아기 방을 향해 재빨리 몸을 날렸다. 순간 미경은 죽을힘을 다해 애경을 나꿔챘다. 허나, 애경은 언니를 또다시 내동댕이쳤다. 유리 파편에 등이 찔린 것도 모르고 미경은 다시 일어나 동생의 팔소매를 부여잡았다.
  ‘지금 애경이는 제정신이 아니야. 무슨 일을 저지를 지도 몰라. 아기가 위험해.’
  그 순간이었다. 딩동댕동하고 벨이 여러 번 요란스럽게 울렸다. 언젠가 한 번 경찰을 부른 적이 있는 옆집 사람이 또 경찰을 부른 것이었다. 미경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우는 아기를 안았다. 아기는 계속 울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들었는지 애경은 행동을 멈추고 경찰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연극배우 모양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경찰의 동정을 사기에 급급했다. 미경은 차마 동생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수가 없었다. 또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애경이를 위해서라도 경찰에 넘겨주어야 한다고 남편이 누누이 설명을 했지만 미경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가정문제이니 경찰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어질러진 현장을 보고 혹시나 애경을 잡아가면 어쩌나 하고 도리어 동생을 두둔하기까지 했다. 한바탕 악몽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 며칠 후였다. 애경으로부터 빨간 펜으로 쓴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봉투를 뜯는 순간부터 가슴이 섬뜩했다. 아기를 납치하겠다는 협박 편지였다. 그리고 맨 먼저 아기를 죽이고, 형부, 언니 차례로 죽인 다음에 자신도 자살을 하겠다는 내용의 협박 편지가 일주일 후에 또 배달이 되었다. 역시 빨간 글씨였다. 남편은 애경을 위해서도 경찰에 신고를 하고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한다고 했으나 미경은 거부했다. 혹시 애경이가 저지를 일에 대비하여 접근 금지 신청이라도 내야 한다고 남편이 제안을 했으나 미경은 그것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다가 애경이가 진짜로 미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 유산 가로채려고 멀쩡한 동생을 정신병자로 몰았다고 하면서 정말 진짜로 미쳐버릴 수도 있는 애경이다.
  ‘그리되면 애경의 인생은 정신병원에서 끝이 난다. 그럴 수는 없다. 차라리 애경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자. 어떡해 해서든 현금을 만들어 보자.’
  마침 그때 땅이 팔렸다. 아버지가 변두리 지역에 사 둔 땅이 있었는데, 그게 팔린 것이었다. 그 돈의 일부는 남편의 새 사업에 투자를 했고 나머지 돈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주었다. 30만 달러였다. 백만 달러를 입에 달고 살았으나 애경은 헤헤거리며 엘에를 떠났다.
    
  집엘 다녀간 후 애경이한테서 전화가 몇 번 왔었다. 생각했던 대로 역시 돈 이야기였다.
  ‘2년 동안에 그 돈을 다 써버렸단 말인가?’
  아니다. 애경이라면 한 달 만에라도 까먹을 수 있는 액수다. 미경은 ‘또 시작이로구나’ 하는 후끈한 덩어리가 치밀어 올라 언니를 만나고 싶다는 동생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그랬더니 옛날 버릇 그대로 그녀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뭐? 만날 필요가 없다고? 언니도 형부하고 똑 같구나. 며칠 전에 형부한테 갔더니 비서가 따돌리더라. 톰이랑 같이 갔는데도 만나주지 않더라. 사람이 어쩜 그래. 형부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유명한 사장이 됐냐구우우. 그렇게 잘 사는 게 다 누구 덕분이인데····.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내 돈 가로챈 거 다 내놓으라구우우····.”
   전화통을 부셔버리기라도 할 듯이 악을 쓰다가 갑자기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애경은 태도를 바꾸었다.
  “언니, 톰이 암만해도 이상해. 언니가 돈 안 주면 나는 또 버림을 받아. 난 톰 없이는 못 살아. 언니 나 좀 도와줘. 제발 부탁이야. 톰이 도망갈 것 같아 불안해서 못살겠어.”      
  미경은 계속 고민에 빠져 밤잠을 설쳤다.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 하고 그 방도를 모색하느라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남편한테 말해봐야 입김도 안 들어갈 건 뻔한 일이다. 또 병원에 입원을 시키라고 할 것이다. 애경이가 톰을 데리고 찾아왔더라는 얘기도 그는 하지 않았다.
  애경이가 없는 2년 동안 남편의 새 사업은 시작부터 호조를 보였다. 재학 시부터 정신을 쏟았던 특수 글루가 특허를 받아 그는 일약 대 사업가로서 발돋움을 했다. 생산과 경영, 그의 꿈대로 두 어깨에 날개를 달게 된 것이었다. 미경 역시 회사에서 중역으로 승진을 해 거액의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유산은 여전히 답보 상태였다. 집은 팔아 은행 빚 청산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상가 건물은 관리인이 일을 잘해주어 정상적으로 돌아갔지만 겨우 현상유지에 미치는 정도였다.  

  떠나기 바로 전 “다 언니 때문이야. 언니 때문이란 말야”하고 엉엉 울며 부르짖던 그 모습이 새삼스레 떠올랐고, 며칠 전 “언니가 안 도와주면 나 죽어버릴 거야.”하고 전화를 탕 끊던 애경의 음성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서너 시간이 지난 후에야 푸르스름한 가운을 입은 남자 둘이 들어섰다. 진회색의 제법 두꺼운 비닐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애경을 둘둘 말고는 노끈으로 팔, 그리고 발목 부분을 단단히 묶은 후 들것에 담고는 두 사람이 들고 아파트 층계를 내려갔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사건이 터졌을 때 시체를 들것에 담아 들고 나오던 그 장면과 똑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천장에 목을 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람을 발견했으면 내려놓기 전에, 놀라 뛰어나가 먼저 옆집 사람을 부르는 것이 상식 아닐까? 그리고 경찰에 신고를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혼자서 목을 맨 끈을 풀고 시체를 방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끈을 풀면 금세 도로 살아날 것 같아서? 너무 사랑하는 사람에겐 그럴 수도 있는 것일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미경의 머리는 자꾸 복잡해졌다.
  ‘뭐! 끈을 풀었다고?’
  또 또, 의사는 의사는····. 의사는 다녀간 것일까?
    
  길거리엔 희뿌연 새벽빛이 몰려오고 있었다. 길 한쪽 옆에 하얀색의 병원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은 차 뒷문을 열고 들것 채로 애경의 시체를 밀어 넣고는 문을 쾅 닫았다. 부르릉거리는 자동차의 요란한 소리가 애경의 통곡이 되어 그녀의 고막을 쳤다.
  미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애경아! 애경아!” 하고 부르며 달리는 차를 향해 뛰었다. 남편이 따라와 잡는 바람에 그냥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는데, 가슴 밑바닥에 쌓여 있던 덩어리들이 통곡이 되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미경의 통곡 소리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땅에 하늘에 마구 퍼져나갔다.
  톰도 따라와 미경의 팔을 붙들었다. 미경은 톰의 팔을 세차게 뿌리쳤다.
  남편이 말했다.
  “남들한텐 자살했다 그러지 말고 교통사고라고 해”
  
  그다음 날부터 미경은 편지함을 열 때마다 가슴이 섬뜩섬뜩했다. 손이 마구 떨렸다.
  그러나 유서는 없었다.

2014년 문학세계 제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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