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한 번째 편지 작품평 / 임헌영 평론가

2009.06.26 12:28

김영강 조회 수:938 추천:190

* 작품평

- 임헌영 평론가가 본, 단편소설 “백한 번째 편지”-

   사십 년 전에 백 편의 편지를 보낸 남성(김동추)이 회갑 때 약속대로 백한 번째 편지 형식의 초대장을 여인(옥희)에게 보낸 저간의 사정을 만상 현식으로 쓴 게 이 작품이다. 두 남녀는 각자 가족을 이뤘을 터이고 소식도 없었다는 게 이소설의 구성 전제 조건이다. 이만한 전제 조건이라면 뒷이야기는 작가에 따라서는 매우 긴장된 설렘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해 갈 수 있다. 그런데 작가 김영강은 아예 이런 로맨틱과는 담장을 높게 쌓아버린다. 윤리의식의 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집안끼리의 중매로 옥희는 남편(상민)을 만난 지 육 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유학생인 그를 따라 미국 땅”을 밟았다. 그녀는 “맘속으로라고 남편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를 써 보아도 아무런 추억거리가 없다. (현대 소설사에서 이런 여인상은 가히 박물관감이다.)

   이런 여인이 어떻게 백통의 사랑의 고백서를 받았을까. 대학 미팅 때 만난 김동추는 외모와 매너가 전반적으로 “문전박대” 수준(옥희는 너무나 냉대했던 지난 일을 만나면 사과할 작정)이었으나 “글 솜씨는 혼자 보기 아까운 문학작품”인 “사랑을 읊은 긴 서사시“를 ”일종의 집착“으로 보내 왔는데, 옥희는 시종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고 이 소설을 일관되게 묘사한다. 동추는 ”대대로 내려오는 땅부잣집 외아들로 부모는 둘 다 대학교수“에다 그 자신은 일류공대생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옥희의 남성 선택 기준에서 외모가 얼마나 중요했던가는 짐작된다.

   이에 비해 남편 상민은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능수능란”해서 “예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연스럽게 할 줄 아는 남자”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유머”를 가진 것으로 작가는 묘사한다. 그런 한편 상민은 동추를 의식하면서 옥희에세 어떤 계기나 빌미가 주어지지 않도록 치사할 정도로 방어막을 설치하는 치밀한 남성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렇게 두 주인공의 성격을 정리하고 나면 백한 통의 편지가 어떤 갈등을 가져올 것인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갈등의 핵심은 그 초청에 아내를 보낼 것인가 라는 남자의 입장과, 남자가 허락하든 않든 여자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에 있다.

   이런 주제는 60대를 넘어선 문학인의 작품에서 흔히 보는 양상이다. 결론은 너무나 뻔해서 만나거나 안 만나거나 상관없이 가족 제일주의로 환원하는데, 특히 만났을 경우에는 젊은 시절의 그 환상적인 꿈이 기대를 저버린 채 산산조각이 난 채 현실적인 가족의 실체가 더욱 소중하게 부각된다는 싱거운 끝맺음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와는 반대로 과거의 어떤 제약으로 이룩할 수 없었던 사랑을 만년에 이룩하는 결말의 작품도 요즘 역시 성행하고 있는 “노인문학”의 한 양상이다. 특히 오랫동안 미국에 살다가 모처럼 귀국길에서 옛 사랑을 만나는 줄거리는 국내외에서 흔하게 보는 소재로 대개의 경우는 결말이 너무 싱겁다.

   무대를 미국으로 설정한 “백한 번째 편지”도 예외는 아니다. 회갑을 앞둔 동추가 죽어버린 것으로 결말이 나는데, 이건 옥희가 그를 만나든 안 만나든 내려야 할 결단을 할 조건을 아예 없애는 가장 안이한 선택법일 것이다. 소설 구성상으로 보면 남편에게 따져보기로 했던 그의 옛 사랑 박영선 문제를 아예 비켜가버리는 등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왜 재미작가들이 모국의 작가들보다 윤리적으로 휠씬 더 보수적일가란 점이다. 아니, 이런 문제는 국내외로 따질게 아니라 작가 개인적인 성향일 터지만 대개의 경우 미주지역 작품에 나타난 가족 이데올로기의 집착이 국내의 작품보다 더 치열한 건 사실이며, 그건 이국땅에서 살아가기에 당연한 가치관일 수도 있다. 이런 윤리적인 순결성이 다른 분야, 예컨대 정치, 경제, 사회, 국제문제, 종교, 교육, 문화예술 등등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보수적인 성향으로 연동되고 있는 것 또한 미주문학의 특징이며 이를 극복하는 작업은 미주문학의 중요한 하나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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