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건너지 못하는 강

2007.02.21 14:27

김영강 조회 수:843 추천:185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고층 건물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사면이 전부 유리로 단장된 초현대식의 멋진 건물이었다. 고개를 젖히고 빌딩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에 반사된 유리창이 유난히도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빙글빙글 도는 육중한 유리문에 몸을 들이밀면서 나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했다. 그리고 유 변호사가 가르쳐준 대로 삼십이 층에 있는 회사를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리셉션이스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겼다.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와아‘ 라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실내장식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옅은 핑크빛의 아늑한 분위기 속에 벽에 걸린 그림이랑 구석에 놓인 화분들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붉은색 계통의 빛깔을 띤 가죽 소파도 화려하거나 유치해 보이지가 않고 도리어 고상해 보였다. 그 감촉 또한 부드럽고 폭신했다. 무역회사인데도 어디 미술관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사람들은 모두가 백인이었고 하나같이 정장을 하고 있어 다들 영화배우 같았다. 로비에서, 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온 지 오 년 만에 나는 드디어 내가 원하는 직장을 잡게 되었다. 영주권도 해결되었으니, 이제 나의 목표는 착실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못 다한 공부를 끝내는 것이다. 앞으로는 꿈을 펼칠 일만 남았다. 희망에 부풀어 가슴이 벅찼다.

    유 변호사 부인 방은 굉장히 넓었다. 또 고급스럽게 잘 꾸며져 있어 그녀가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단박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아주 우아한 자태의 미인이었다. 나이를 따져도 오십은 훨씬 넘었을 텐데 몸매까지 팔등신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보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다고 느꼈다. ‘어디서 보았을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다. 강수미와 닮았다. 너무 닮았다. 주는 느낌까지 똑 같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국적인 용모가 판에 박아놓은 것처럼 똑같다.
    남편의 옛 애인인 강수미, 그 여자를 내가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띠우면서 말을 하는데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해 나는 또 놀랐다. 약간 높은 톤으로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밝고 맑았다. 그녀는 이력서와 직업학교 원장이 써준 추천서를 찬찬히 훑어보면서 내게 미국이름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도 영어로 없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강수미와 혹시 혈연관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모녀관계? 아니다. 유 변호사는 딸이 없고 아들만 둘이다. 그럼 자매인가? 나이가 너무 차이 나지만 그건 가능하다.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다.

    “내 이름은 비비안이에요. 앞으로 비비안이라고 부르세요. 그럼 영어이름 하나 지읍시다. 한국이름이 영아니까 아이린 어때요? 아이린... 괜찮은 것 같은데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평생을 붙어 다니는 개인의 상징인 이름을 너무 즉흥적으로 짓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입에선 ‘좋다’는 말이 나왔다. ‘좀 생각해 보겠다고’도 말할 수가 있었는데 딴 생각을 하던 뒤끝이라 그냥 얼떨결에 대답이 튀어나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의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리고 세련된 매너에 내가 그만 완전히 압도돼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강수미와의 첫대면에서도 나는 입이 얼어붙어 할말을 제대로 못했었다.
  어쩜 이런 느낌까지도 똑같단 말인가?
  
    그녀는 인터폰으로 쟌이라는 시람을 불러 나를 아이린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아이린이 되어 쟌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이력서와 추천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내게는 별것 묻지 않고 회사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중에서 제일 끌리는 부분은 육 개월 견습기간이 지나면 회사에서 학비를 대준다는 대목이었다. 공부를 끝내지 못해 늘 마음 아파하는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할까 하고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가슴이 벅찼다. 주말에 공부할 수 있는 학교도 있고 또 주중이라도 일 끝나고 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비안이 학비 프로그램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그냥 한국어로 설명을 해주면 될 걸 왜 쟌으로부터 영어로 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상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강수미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집에 와서도 비비안과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졌다. 그들이 꼭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강수미, 그녀는 내 운명을 바꾸어놓은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기억 속의 여자다.  

    육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이혼이라는 절벽 앞에 막막히 서 있었다. 아찔한 몸의 중심을 겨우 지탱하고 절벽 끝에 휘어진 외줄기 나뭇가지에 매달린 듯한 절박한 심정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사방을 에워싼 바위들이 나를 조이면서 다가왔고 그것은 애절한 슬픔이 되어 온몸을 짓눌렀다.
    
    대학졸업 후 바로, 나는 집안끼리의 중매로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나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았으나 여러가지 좋은 조건들을 두루 갖춰 다른 사람들도 다 탐내는 신랑감이었다. 그런데 일 년도 채 못 되어 내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는 사건이 터졌다.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남편에게 딴 여자가 생긴 것이다. 참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고 현실이었다.

   새 여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남편의 옛 애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집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친 남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랜 세월을 질질 끌기만 했었다. 그러다가 나를 만난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한 것이었다.
  
    남자친구 하나 없이 공부에만 전념하던 나는 나에게 잘해주는 남편이 좋았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듬직한 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뭐든지 다 해결이 될 것 같았고 그와 같이 있으면 항상 편안했다. 그것이 사랑인지 뭔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일사천리로 진행시키는 순서에 따라 강물이 흐르듯 나는 순종했다. 그리고 짧은 만남으로 맺어진 때문인지 결혼을 한 후에 그가 더 좋아졌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취해 있었고 우수에 잠긴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 빠져 있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남편은 정말 나에게 잘 해주었다. 그것이 가식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행복했다.
  
    당당한 말투로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였고 떨리는 가슴으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였다.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었었다. 그녀를 만나고도 그랬다. 그녀와의 대면에서 나는 그만 그 미모에 기가 질려버렸다. 늘씬한 큰 키와 세련된 아름다움은 외국 여배우를 연상케 했다. 나하고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었다. 그녀는 이름을 밝히면서 남편과는 대학 동기생이라고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 당당함에는 나를 완전히 무시하고, ‘네 남편은 내 거야’ 하는 자신만만함이 내포돼 있었다. ‘아무리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너는 내 상대가 안 돼’ 하고 맘속으로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헤어지려고 참 많은 노력도 하고 일 년 동안 떨어져 있어도 봤어요. 그러나 도저히 안 돼요.”
  뻔뻔스러운 소리다. 그렇지 않고서야 법적으로 엄연한 그의 아내인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더 심했다.
  “그이도 나를 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고 해요. 그러나 애를 쓰면 쓸수록 생각이 더 났대요. 오죽하면 결혼이라는 걸 다 해 봤겠냐고 하면서, 결혼을 하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되더래요. 밤마다 내 생각이 자꾸 나서 영아 씨한테 너무 죄를 짓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내가 불쌍해서 영아 씨한테 잘해주려고 최대의 노력을 했다는군요.”

  그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아니, 그녀는 무대 위의 배우모양 눈물까지 줄줄 흘리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장하고는 내게 비수를 날렸다.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 가슴 한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킨 것이다. 포장된 가식스러운 눈물처럼 그 말도 무대 위의 대사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저수지의 둑이 무너지듯 순식간에 펑펑 쏟아져 나오는 패배의 피를 나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파서 숨이 끊어져버릴 지경이었다. 강수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뭐, 한 여자를 잊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을 해 봤다고? 밤마다 나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 여자를 생각했다고? 비겁한 사람, 등뒤에서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남편은 검사였다. 부모도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데 이렇게 파렴치한 말을 함부로 하며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기가 찼다. 무작정 남편에게 빠져있던 내가 바보스러웠다. 가끔은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은 그의 표정을 나는 남에게 형벌을 가해야 하는 직업의식에서 오는 스트레스라고 해석했었다. 언젠가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뜻을 따라 법대에 지망을 했고, 또 검사가 되었지만 내 적성에는 안 맞아. 지금이라도 다 그만 두고 그림이나 그리면서 살고 싶어.”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그는 아버지의 꿈대로 살아왔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내게 잘해준 것도 그녀를 못 잊는 죄의식 때문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럼 나는 남편한테 뭐였단 말인가? 아기가 생기지 않은 것도 남편의 계략이었을까?

  그는 모든 사실을 다 시인하고는 내게 미안하다고 빌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만일 이혼을 못해주겠다고 하면 계속 나랑 살 수 있다는 건가?  
  강수미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우리의 결혼생활은 행복할 수 없다. 또 그 사실을 알면서, 더구나 그가 나를 어찌 생각하는 지를 뻔히 알면서 남편과 산다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는 내면에선 그를 붙잡아야 된다는 강한 욕구가 일고 있었다.
  그의 몸과 마음이 내게서 완전히 떠난 것을 알고도 분하다는 감정보다는 먼저, 온몸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 때문에 나는 울었다. 돌아누운 그의 뒷등이 방안의 어둠보다도 더 캄캄하게 뭉친 바윗덩어리가 되어 내 가슴을 짓눌러 숨을 죽이고 입술을 깨물면서 흐느꼈다. 남편이 일 때문에 출장을 갔을 땐, 호텔 방에서 그녀를 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 한밤의 허리가 겨워지도록 홀로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애절하고도 슬픈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힘으로 남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타는 노력을 했건만,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강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내 힘으론 도저히 그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행여나 남편이 그 강을 건너와 주려나 하는 기적 같은 실마리를 잡아도 봤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그녀에게는 남편을 헤어나올 수 없게 하는 어떤 강인한 힘이 있었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뇌 속에서 헤매던 나는 이혼밖에 길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는 한국이 싫어 현실도피의 방법으로 미국유학을 택했다. 집안 어른들은 이혼을 강력히 만류했으나 오직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해 주었다. 넓은 세상에 나가 하고 싶은 공부하며 내 꿈을 펼치면서 살라고 격려해 주었다.

  박사학위를 받아 당당히 그들 앞에 나타나리라는 꿈은 사라지고 나는 공부를 못 끝낸 채 주저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사업 도산으로 집으로부터 송금이 끊어져 도저히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댁으로부터 받은 집마저 은행으로 넘어가버렸었다. 한데 나는 그때 운 좋게 직장을 얻었다.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소규모의 직업학교에서 컴퓨터를 배우는 학생신분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 유 변호사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직업학교원장의 친구로 몇 번 학교에 온 적이 있었다. 마침, 영주권을 신청할 길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이라 그가 변호사라는 것을 알고 내 처지를 말하고 도움을 청했었다. 그 사람이라면 내가 믿고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았다. 그후, 내겐 실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영주권 문제가 해결되었고 그의 부인이 재정담당 부사장으로 있는 회사에 취직이 된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컴퓨터 위로 시선을 높여 오른쪽으로 약간 고개를 돌리면 비비안의 방이 반쯤 보인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나는 가끔 훔쳐본다.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봐도 그녀는 참 아름답다. 또 거기다가 세련된 멋을 부린다. 우아하게 손질한 머리가 항상 단정하다. 그리고 늘 아주 고급스러운 옷만 입는다. 어떤 땐 내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딴 세상에서 사는 천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서 있는 그녀, 그녀 역시 내게는 한 발자국도 다가오지 않는다. 한국사람끼리인데도 늘 영어만을 사용해야 하니 그것도 가까워질 수 없는 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는 듯한 그 모습에서 나는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점점 좋아졌다.

   또한, 강수미와의 혈연관계에 대한 의문도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세상에는 닮은 사람도 허다하니까, 아닐 거야’ 하고 좋을 대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도 비비안의 친척이 된다는 미세스 김이라는 여자를 교회에서 알게 되었다. 회사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그녀의 입에서 갑자기 비비안 이름이 나온 것이다. 세상은 좁았다. 미세스 김의 남편이 유 변호사 육촌동생이라고 했다.
  남편은 교회에 안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교회하고는 거리가 멀다며 이십 년을 기도했는데도 아직 응답을 못 받았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비비안보고 절대로 자기 만났다는 말은 하지 말라면서 앞으로도 자기 안다고 그러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다음에 말하겠다며 화제를 돌리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미세스 김은 나에게 늘 친절했다. 내가 감탄을 한 것은 그녀가 양로원에 있는 시어머니에게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교회 끝나고 나도 몇 번 따라가 보았는데 너무나 정성을 쏟아 나는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 간호사인 그녀의 직업에 어울리는 희생이었다. 십팔 년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구처럼 급속도로 친해졌다.

    회사 근처로 이사를 한 후부터 나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혼을 한 경력이 있다고 밝히고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나를 미혼인 줄 알고 중매가 들어온 적이 있기에 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이혼을 했다고 하면 그 사연을 궁금해 할 것이고 또 그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 싫어서였다. 그는 내게 이미 죽은 사람이고 나 또한 그에게는 완전히 죽은 여자이기 때문이다. 단 유 변호사만은 내가 이혼한 사실을 알고 있다. 영주권을 신청할 때 나는 모든 사실을 다 얘기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미세스 김을 따라 기도원이라는 곳엘 가 보았다. 금요일 오후에 야외로 나가니 소풍을 가는 것 모양 기분이 좋아 우리는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마냥 즐거워했다. 기도원에 도착을 하니 울창한 푸른 나무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저만치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또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생동감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그날 밤 나는 미세스 김에게 내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그녀에겐 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미국에 온 후, 아무한테도 안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혼하게 된 사연과 그리고 내가 겼었던 그 아픔들을 얘기할 때는 아직도 눈물이 났다. 유 변호사를 알게 되어 회사에 취직이 된 얘기도 몽땅 다 했다. 그러면서 화제는 자연히 비비안에게로 이어졌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비안에 대해서도 놀랐으나 미세스 김에 대해서도 놀랐다.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그녀가 아닌 완전한 딴 사람이었다. 신앙 좋은 여자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했다. 그들에겐 돈 관계가 얽힌 사건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그녀는 비비안이랑 인연을 끊었고 남편이 버는 돈은 다 그 집 빚 갚는 데 들어가 그녀가 집안경제를 몽땅 짊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부자면서 돈에는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욕을 했다. 마땅히 갚아야 할 돈을 갚는 것인데 왜 저러는지 이상했다. 계속 이야기를 듣노라니 두 여자의 감정문제가 더 일을 크게 만든 것 같았다.
    “하여튼 인물값 하느라고 어딜 가도 여자가 붙어 가지고  내 속을 썩인다구.”
    “그러니까 비비안이 미세스 김 남편을 좋아했다는 건가요?”      
    “비비안만 좋아한 게 아니고, 우리 남편이 그 여자를 더 좋아했어. 하느님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받들어. 완전히 우상이야 우상. 계속 그 집에 들랑거리면서 궂은 일을 다 해주고 있는 모양인데, 그게 다 비비안 때문 아니겠어? 요새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속을 누가 알아?”
    “아무리 그럴까? 비비안이 훨씬 더 나이가 많잖아요? 그리고 또 친척인데..”
    “참 답답하네. 잘 난 여자들 연하의 남자 좋아하는 거 몰라? 또 시동생뻘이니 남의 눈 속이기도 좋고...”
    “아닐 거예요. 미세스 김이 오해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녀는 자기 말을 믿어 주지 않는 나에게 도리어 화를 내면서 내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으니까 앞으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살라고 훈계를 했다. 내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것이 은근히 후회가 돼 심란스러웠다. 유 변호사에게도 두 사람이 이상한 관계라는 것을 말했다고 해,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유 변호사한테도 다 털어놨었는데 도리어 나보고 괜히 의심한다며 나무라셨어. 둘이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하는데도, 믿지 않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어마나,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참 순진한 소리하네. 그렇게 당하고도 세상물정을 아직도 몰라? 보나마나 뻔한 일이잖아.”
    한심하다는 듯이 잠시 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녀는 눈길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높았던 언성이 확 낮추어졌다.
    “도리어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고 병원에 처넣으려고 해, 그땐 정말 혼이 났어.”
    미세스 김은 계속 비비안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부부 사이가 나쁜 것은 이미 소문난 사실이란다.   이혼 안하고 사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멀리서 보기에는 남들이 다 우러러보며 부러워하는 완벽한    집안이지만 일단 문을 열면 그냥 악취가 쏟아져 코를 막고 도망을 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눈빛    은 질투의 열기를 강하게 내뿜고 있었다. 무서워서 섬뜩할 정도였다. 내 얘기를 다 해버린 것이 또다시 후회가 됐다.
    비비안을 아무리 다른 눈으로 보려 해도 그녀는 내게 천사였다.

    그러던 중, 공교롭게도 미세스 김의 남편이 우리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미세스 김을 안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녀와 얽히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그 남자는 그의 부인 말대로 아주 잘 생겼었다. 한국사람이라고는 비비안 외에 나밖에 없는 때문인지 처음부터 은근히 친근감이 생겼다.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취직이 된 며칠 후에 스티브가 자기는 비비안이랑 먼 친척이 된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금세 그가 미세스 김의 남편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어제 미세스 김을 교회에서 만났는데도 그런 말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그녀가 반갑게 받으며 오늘은 오후 근무라고 했다. 혹시 남편 이름이 스티브 아니냐고 물으니 그녀는 맞다면서 어떻게 아느냐고 도리어 반문했다. ‘이 여자가 자기 남편이 우리 회사에 취직이 된 것도 모르고 있구나’ 하고 나는 당황했다. 며칠 전부터 우리 회사에 출근을 한다고 하니 그녀는 또 엉뚱한 말부터 했다.
    “우리 남편한테 나 안다고 했어?”
    “아뇨.”
    “아휴, 그럼 잘됐다. 절대로 나 아는 척하지 마. 나도 모르는 척하고 있을 거야.”
    “그럼 여기 취직된 것도 모르는 척하실 거예요?”  
    “물론이지. 자기가 말할 때까지 잠잖고 있을 거야. 잘됐네. 우리 남편이 얼마 전에 레이오프 당했거든. 아마 돈 받기 위해서 비비안이 그 회사에 넣어줬을 거야. 일석이조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미스 리도 자세히 살펴봐. 둘 사이가 심상치 않은 관계인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비비안 이야기만 나오면 그녀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한다. 희생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이다. 나는 멋쩍어서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와이프한테 자기 취직된 얘기도 안해요?”
    “그 사람 워낙 그래. 더구나 비비안하고 연관된 얘기는 절대로 안해. 어쨌든, 비비안이랑 우리 남편한테는 나하고 미스 리는 모르는 사람이야. 알았지?”

    그 동안 비비안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이제는 나보고 이중으로 죄를 지으란다. 스티브는 회사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주로 메일 룸에서 일했다. 첫날부터 두 사람의 낌새가 어떤가 하고 눈여겨보았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또 삼중으로 죄를 지어야만 했다. 미세스 김이 수시로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의 동태를 묻는 것이었다. 두 사람 아무일도 없는 것 같으니 마음 놓으라고 안심을 시켜도 그녀는 믿지를 않았다.
    “그야 사람들 앞이니까 가면을 썼겠지. 두 눈을 좀 똑바로 뜨고 살펴봐. 미스 리도 금방 알게 될 거야.”

    나는 점점 그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스티브랑 가까워지면서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스티브는 자기가 미국 오자마자 지금까지 유 변호사 부부 신세를 지고 있으며, 그들은 항상 남을 위해 베풀고 산다면서 칭찬을 했다. 그의 부인과는 너무나 정반대의 말을 해, 똑같은 사람인데도 보는 눈에 따라 이렇게 극과 극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나는 비비안에 대해 평소에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비비안은 언제 미국에 왔어요?”
    그는 잠깐 주춤하더니 금세 대답을 안 했다. 지극히 평범한 질문인데도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식의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한국말을 통 안 쓰는데 혹시 한국말이 서툰 거 아녜요?” 아주 어릴 때 미국에 왔어요?”
    그제서야 그는 빙그레 웃으며 스무 살이 넘어서 유학을 왔으며, 한국말도 우리와 똑같이 잘한다고 했다.
    “매사에 정확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 미국회사이니 영어만 쓰는 모양이죠. 저보고도 사내에서는 한국말 쓰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어요. 한데 한국사람끼리 한국말을 해야지 어떻게 영어를 써요? 낯간지럽게....”

    스티브는 내게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사무실의 모든 여자들에게 친절했다. 어떤 때는 너무 희생적이라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그것은 그의 착한 성품 탓이지 어떤 흑심을 품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남자 직원들에게도 마찬 가지였다. 그는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남을 배려해주는 사람이었다. 조금씩 친해지면서 그는 자기 부인 이야기도 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들으려니 미안하기도 했으나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없었다.
    “참 좋은 사람인데 나를 믿질 못해요. 내가 매일 아이린같이 젊고 예쁜 한국여자랑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거 알면, 그 사람 밤잠도 못 자요.”  

    나는 아차했다. 그녀가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 나를 귀찮게 구는 대상이 비비안이 아니고 나였단 말인가?
    “그럼 의부증이 있는 거예요?”
    의부증이라는 말에 그는 눈을 떨구며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기도원에서 미세스 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갑자기 머리에 떠올랐다. 정신병환자 취급을 받았다는 얘기가 제일 먼저 생각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나는 지극히 평범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스티브가 여자 문제로 부인한테 단단히 속을 썩인 적이 있어 그러는 거 아녜요?”
    그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면서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무슨 오해가 있으면 얘길하고 속을 풀면 좋을 텐데 입을 꼭 다물고 혼자서 끙끙 앓기만 해요. 혼자 상상하고 혼자 결론 짓고 또 혼자 고민하고 그래요. 그 동안은 괜찮았었는데 얼마 전부터 또 시작이에요.”
    “아니, 이상하네. 와이프가 암말도 안 하는데 스티브가 그 속을 어떻게 알아요? 오버센스 아녜요?”
    “전 다 알아요. 일단 그런 의심이 생기면, 우리 와이프는 아무것도 아닌 다른 일에 괜히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이고 그래요. 그리고 잘 울어요. 왜 우느냐고 물으면 더욱 신경질을 내 나도 그냥 입 꽉 다물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더라고요. 이제는 만성이 돼 모르는 척 넘겨버려요. 그러다가 또 혼자 풀어지거든요. 한데 요즘은 부쩍 심해졌어요.”  
    아! 나 때문에 더 심해졌구나.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스티브한테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미세스 김을 어찌 대해야 할 지가 큰 걱정거리로 다가왔다.
  
    스티브가 회사에 들어온 다음부터 미세스 김과는 좀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남편이 미세스 김 얘기를 많이 해요. 시어머니한테 너무 잘한다며 효부상 줘야 한다고 칭찬이 자자해요. 그리고 얼마나 부인 생각을 많이 하는지 몰라요. 미세스 김이 밤일하는 것도 가슴이 아프다고 그랬어요.”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없는 말을 만들어 듣기 좋은 소리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믿지를 않았다.
    “그 사람하고 벌써 이십 년을 살았어. 내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그 속은 내가 더 잘 알아. 이제 체념하고 사니까 괜히 나 위로하려고 그러지 마. 미스 리가 자꾸 그런 소리하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하여튼 미스 리도 조심해. 그 사람 여자 후리는 데는 선수야.”

    그녀가 드디어 나와 자기 남편 사이를 의심하는 말을 했다. 나는 모욕을 당한 것 같아 기분이 매우 나빴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한마디도 못한 채 도리어 그녀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죄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두근두근했다.
    “아이 참, 나한테는 거의 아버지뻘인데, 그런 걱정하시지 마세요.”
    “아버지뻘이라니? 뭐가 아버지뻘이야. 십 오년 차이밖에 안되는데.”
    그녀는 벌써 나이 계산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알았어요. 조심할 게요. 저도 이제 곧 결혼할 거예요.”
    나는 미세스 김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어떤 사람이야. 근데, 왜 나한테 진작 말 안했어? 언제 결혼할 건데?“
    나 때문에 그 동안 밤잠도 제대로 못 잤나 보다고 생각하니 그녀가 참 안됐었다. 잘 생긴 연하의 남편과 살다보니 열등의식이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비비안을 이틀째 회사에서 볼 수가 없었다. 출장을 갔나 보다 하고 쟌한테 물었더니 한국엘 갔다고 했다. 한국에는 출장 갈 일이 없다. 출장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면서 뒷말을 하는데 나는 그만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교통사고로 딸이 위독해서 부랴부랴 한국엘 나갔다는 것이었다.
    딸이라니... 그럼 비비안에게 딸이 있었다는 말인가?

    가슴에 심한 방망이질이 시작됐다. 쿵쿵 쿵쿵... 얼른 메일 룸으로 갔다. 스티브는 내게 말을 안했으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비비안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데, 딸이 있었어요? ”
    “아니, 누구한테 들었어요?”
    그는 놀란 듯이 반문했다.“
    “지금 쟌이 그러던데요. 아들만 둘이고 딸은 없는 걸로 알았는데 어찌된 거예요?“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다급하게 묻는 것을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나는 그때서야 이성을 찾아 사고의 상황을 물었다.
    “위독하다고 그러던데 어느 정도래요?”
    차에 다른 사람도 같이 탔느냐고, 그 사람은 누구냐고, 계속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니, 제일 먼저 알고 싶은 것은 비비안 딸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스티브의 말부터 듣기로 했다. 이 이야기는 비밀인데 나한테만 털어놓는다며 그는 말을 시작했다. 혹시나 했던 그 일이 사실로 확인되어 가는 순간이었다.
  
   비비안이 처녀 적에 딸을 하나 낳았다고 한다. 부인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실수로 생긴 아이였다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애 아버지한테 주고 비비안은 미국으로 건너 왔고, 워낙 똑똑한 그녀는 명문대학에 입학을 해 유 변호사를 만났다고 한다.
    “내가 그 사실을 안 지는 몇 년 안 돼요. 딸이 미국에 왔을 때 알았거든요.”
    “그 때가 언제였어요?”
    “한 오륙 년 전 같은데, 여기서 일 년쯤 있다가 적응을 못해 한국으로 도로 나갔어요. 나가서 바로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맞구나. 모든 것이 들어맞는구나. 우리가 만나서 선보고 결혼하고, 한 일 년 좀 못 되게 같이 살았고, 바로 그때 그녀가 미국에 있었구나. 그녀 말대로 한 일 년 떨어져서 잊으려고 노력하다가 도저히 안 돼 도로 나타나 내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고 그들은 결혼을 했구나.
    “그럼 결혼한 후에 남편이랑 같이 미국에 왔었겠네요.”
    “아뇨. 내가 알기로는 한번도 온 적이 없어요. 그쪽 집안에서는 비비안의 존재를 인정 안 하는 모양이에요. 딸하고도 별 연락 없이 지내는 것 같았고요.”
    “그럼 비비안이 딸 결혼식에도 안 갔어요?”
    스티브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이 너무 속사포로 쏟아진 모양이다.
    “모르겠어요. 결혼식 얘기는 통 못 들었어요.”
    ‘그럼 결혼식 사진은 본 적이 있느냐’ 고 물으려다가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미세스 김이 그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이 좀 이상했다. 아니 스티브가 말 안했을 것이다. 그는 와이프한테 비비안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안하며 더구나 남의 약점은 말 안하는 사람이다. 만일 미세스 김이 알고 있었다면 나한테 말 안했을 리가 없다. 확실히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스티브도 비비안 딸 봤겠네요.“
    “그럼요 내가 구경도 시켜주고 자주 같이 다녔어요. 아주 굉장히 미인이었어요. 피는 못 속인다더니 어쩜 그렇게 비비안이랑 똑 닮았는지... 서로가 너무 오래 안 보고 살다가 만나서 그런지 모녀간에 별 정도 없어 보였어요. 그런데 성격이 너무 강해 지 엄마하고 많이 부딪혔어요.”
    그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자기가 보기에 그 딸이 좀 이상했다고 한다. 엄마인 비비안한테 할말 안 할말을 분간 못하고 상처받을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고 한다. 막 소리를 지르고 행패를 부리면서 물건을 집어던지기까지 했단다.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면서 비비안이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 자기 책임이라면서 끝까지 참고 딸한테 잘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럼 결혼 후에도 문제가 많았겠네요.”
    “글쎄요, 비비안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남편한테는 잘했나 봐요. 시댁하고는 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어젯밤에 유 변호사님이랑 통화가 되어 자세한 얘기를 들었는데, 사고 난 날도 시댁에 갔다오다가 부부가 차에서 싸웠다는군요. 남편이 술을 마셔서 부인이 운전을 했다는데 그만...”

    스티브는 잠깐 말을 끊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심중을 알 리가 없건만 나는 흠칫했다. 그리고 그 뒷말을 기다렸다. 남편의 생사를 가름하는 말이 분명히 나올 것 같아서다.
    남편은 어떻게 됐대요? 많이 다쳤대요?
    나는 감히 ‘죽었어요?’ 라고는 물을 수가 없어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으면서도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스티브의 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스티브가 입을 열었다.
    “남편은 현장에서 숨지고 딸은 코마 상태래요.”  
    나는 완전히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태연해지려고 애쓰며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남편은 뭐하는 사람이었어요?”
    “검사였는데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시부모님도 둘다 유명한 변호사이고, 법조계에서 알아주는 좋은 집안이라고 비비안이 자랑을 한 적이 있어요.  
    그의 입에서 검사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강수미 남편의 나이까지 묻고 있었다.
    “둘이 동갑이라니까 아마 서른 여섯 쯤 됐을 거예요. 참 아까워요.”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남편이 죽었다. 갑자기 가슴이 옥죄어들며 숨이 막혔다. 눈물이라도 확 쏟아버리면 막힌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몸 안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움츠러들어 전신이 뻣뻣하게 경직돼버린 느낌이었다. 답답했다. 나는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두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아니,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아요.”
    스티브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한번 태연을 가장하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녜요. 괜찮아요. 근데 아이는 없었어요?”
    “딸이 하나 있는데 무사한가 봐요. 차에 같이 탔었는데 기적적으로 다치지도 않았다고 해요.”
    “지금 몇 살이래요?”
    “글쎄요.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서너 살쯤 됐을 거예요.”
    그 여자랑 결혼하고는 바로 아이를 가졌었구나.
    
    그날 밤 나는 뜬눈으로 밤새 울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그의 얼굴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다가왔다. 내게는 빈껍데기뿐이었던 남편, 그 빈껍데기에 알맹이를 채우려고 나는 노력했다. 그러나 알맹이가 채워지기는커녕 껍데기마저 찢기는 듯 그는 아파하고 괴로워했다.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우유부단한 남편, 내가 좀더 강인한 사랑과 끈질긴 인내로 버티었으면 그가 내게로 돌아왔을까? 내 사랑이 부족한 탓이었을까?

  그러나 그를 사랑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도 남편을 생각하면 아스스한 그리움이 온몸에 전율처럼 흘렀다. 그가 미국에 있을 리는 만무한데도 바바리 코트를 입은 키 큰 남자의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곤 했다. 그리고 괜히 눈물이 났다. 혹시 그가 마음을 돌려 나를 찾으러 오지나 않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폈다 접었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었다. 공부에 몰두하고 일에 파묻히면서 남편은 점점 내게서 잊혀져 갔다. 나는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이다.    
  
   정말 혼돈스럽다. 그렇다면 유 변호사는 내가 누군인 줄 알고 도와준 것일까? 비비안도 내가 자기 딸 때문에 이혼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나만 그 동안 깜박 속아온 것일까? 아닐 거야. 내가 먼저 도움을 청했지 유 변호사가 먼저 나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은 아니니까.  
    나는 매일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렸다. 유 변호사라도 먼저 오면 이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텐데 소식이 없었다. 만일 그들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두 주일쯤 되었을 때, 그들이 돌아왔다. 공항에 나갔다 온 스티브가 대충 소식을 전했다. 딸은 계속 혼수상태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울한 소식 말고 좋은 소식도 있다고 했다.  
    “웬일로 우리 와이프가 비비안을 위로해야 된다면서 그 집엘 갔어요. 사실 그 동안에 비비안이랑 와이프 사이가 별로 안 좋았거든요. 와이프가 괜히 나랑 비비안 사이를 의심한 때문이었죠. 모든 것이 다 자기 오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하루빨리 사과를 해야겠다나요? 나한테도 사과를 했어요. 답답하던 속이 이제야 확 뚫린 기분이에요. 막힌 하수구가 뚫렸으니 앞으로 와아프와도 일이 잘 풀릴 것 같네요. 실은 내가 이 회사에 취직이 된 것도 와이프는 며칠 전에야 알았어요.”  
    스티브의 말을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온몸이 서늘해졌다. 오한이 들며 몸이 떨렸다. 그 좋은 소식이 내게는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비비안의 얼굴은 몰라보게 초췌해져 있었다. 인사를 하려는데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무거운 기분으로 멍하니 앉았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비비안이었다. 자기 방으로 오라는 것이다. 목소리가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문을 닫으라면서 앉으라고 하는데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공무가 아닌 얘기도 회사에서는 영어만 사용하던 그녀다.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기만할 수가 있어? 앙큼하게 나를 철저하게 속이고 있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난 아이린을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일도 잘해서 키워주려고 노력했어. 그 동안 감쪽같이 속아온 걸 생각하니 치가 떨려. 그래, 모든 걸 뻔히 알면서 천사의 탈을 뒤집어쓰고 내 남편을 유혹해? 그리고 돈까지 뜯어내? 니가 수미한테 남편 빼앗겼다고 그 복수를 나한테 하려고 했어? 따지고 보면 네가 우리 수미남자를 뺏은 거야. 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거라고.”

    드디어 수미라는 이름이 비비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마디마다 똑똑 끊어 상대방을 다잡을 듯한 그녀의 음성은 분에 받혀 있었다. 서슬이 퍼런 그녀의 눈빛은 나를 집어삼킬 듯이 강렬했다. 나는 자다가 홍두깨로 세차게 맞고 있었다. 어리벙벙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게 말할 새도 주지 않고 계속 흥분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수미 죽어 가고 있어. 어때, 이제 속이 시원하니?”
     수미라는 이름이 바늘이 되어 내 속을 긁어내렸다.
    “뭐 이제는 스티브한테도 손을 뻗쳤다며? 그 집은 지금 너 때문에 이혼직전이야. 니가 이혼당했다고 남의 가정 다 파괴하려고 해? 너는 가정파괴범이야. 스티브 와이프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어떻게 스티브한테를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 그게 남자 유혹하는 전술이야?.”
    강한 힘을 주어 따지는 그 혀끝에 나는 온 전신이 말려들어 그녀의 입속으로 흡수돼 버리는 듯 정신 혼미했다. 갑자기 눈앞이 노래지고 그녀의 얼굴이 빙빙 돌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속이 메스메슥해 왔다.
    그녀가 오해를 하고 있는데 이제는 내 이야기를 해서 해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계속 빙글빙글 도는 사면의 하얀 벽들만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했다. 귀가 멍멍해졌다. 비비안이 계속 뭐라고 말을 하는데 통 들리지가 않았다. 언성이 자꾸 높아지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소리를 지르다가 그녀는 거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문을 쾅 닫고 나가면서 강하게 내뱉은 마지막 말은 귀에 뚜렷이 들어왔다. 어금니 사이에서 파아랗게 갈려나온 그 소리는 내 뼛속을 후비며 파고들었다.
    “앙큼한 것 같으니. 당장 돈 갚아. 그리고 내일부터 회사 나오지 마!”    
    비비안이 나간 후 쟌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한데 운전은 할 수 있겠냐고 걱정을 하며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비비안은 바로 퇴근했다면서 우선은 그 소파에 누워 안정을 찾으라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야단이었다. 스티브가 놀래서 뛰어 들어왔다. 아무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말할 기력조차 없었다. 밑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까마득한 벼랑의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져 온몸이 바스러진 채 나는 한줌의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 동안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고 흠모해 왔는데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뭐 유 변호사를 유혹했다고? 돈까지 뜯어냈다고? 아무리 오해를 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그런 끔직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비안에게 그런 더러운 인간으로 낙인이 찍힌다는 것은 내게는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이었다.

    운전을 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흐려왔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강수미를 만난 다음, 집으로 오면서도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운전을 했다. 지금은 강수미의 어머니로 인해 내게 똑 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우연이라고 돌려버리기엔 너무나 엄청난 현실이다.
  그들과 필연적으로 얽혀야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일까? 이것이 악연이라는 것인가? 이제 겨우 좋은 직장을 갖게 되어 회사 근처로 이사까지 하고 새 삶을 시작했는데 이 무슨 변고인가? 학교에 등록까지 하고 꿈에 부풀어 있는 내게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비비안이 나한테 왜 저러는지 줄거리를 정리해 봤다. 대강 윤곽이 잡혔다. 그때 기도원에서 나는 미세스 김에게 남편의 그 여자가 비비안하고 너무 닮았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영주권을 받는 과정에서 유 변호사한테 빚을 좀 졌는데 이제 곧 갚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 남편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더구나 내가 교회로부터 슬슬 발길을 끊자, 나를 안 보면 좀 나아지리라는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 미세스 김은 더욱 더 깊은 고뇌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 터진 비비안의 딸 문제를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정리한 결과 사실을 파악한 후 그녀는 나를 잡으려고 자기 좋을 대로 내용을 각색했다. 그리고 비비안을 통해 나를 향하여 화살을 쏜 것이다. 참으로 억울하게 맞은 두 번째 화살이다.
    실수로 인해 화살이 빗나갔다 하더라도 그 화살을 맞은 사람은 피를 흘리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지금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나는 피를 흘리고 있다. 너무 아파서, 정말 너무 아파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다.  

    비비안은 자기 딸과 내가 얽힌 사연을 지금에야 알았고 나는 모든 사실을 처음부터 알면서 계획적으로 유 변호사에게 접근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미세스 김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의부증이 있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나를 겪어 보고도 내가 그런 여자로 그녀의 눈에 비춰졌단 말인가? 그야, 딸이 저 지경이 됐으니 넋이 나가 이성과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다. 그리고 나와는 늘 사무적인 일뿐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 어서 빨리 오해를 풀어야 한다. 우선 미세스 김을 만나야 한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시커먼 커다란 물체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절벽의 검은 아가리가 한입에 나를 삼킬 듯이 돌진해 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확 꺾었다.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일이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바람 소리가 물결처럼 들려오는 꿈속이었다. 희뿌옇게 밀려오던 새벽빛은 어느새 걷히우고 지평선과 맞닿은 동녘 하늘엔 붉은 태양이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떠오르고 있었다. 눈이 부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묻어나리 만큼 짙은 어둠 속에서 막 빠져나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저만치 강 건너에서 웬 남자가 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훌쭉하니 큰 키에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남편이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남편을 보는 순간 행복감에 온몸이 녹아드는 듯했다. 뜨거워지는 가슴을 안고 나는 단숨에 달려갔다. 그러나 눈앞에 가로놓여 있는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강물은 은빛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남편은 환하게 웃으며 빨리 오라고 자꾸 손짓을 했다.  

    이 강을 어떻게 건널까 하고 애를 태우고 있는데, 갑자기 강수미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나르듯이 훌쩍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서로 꼭 껴안은 채 한참을 서 있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서히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남편이 그녀를 감싸안은 다정한 그들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다가 나는 쓸쓸히 돌아섰다. 텅빈 벌판에 나 혼자 버려져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눈물을 홍건히 머금고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그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점점 뚜렷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영아야., 영아야....
    얼마 만에 들어보는 내 이름인가. 영아란 이름은 잊은 지 오래고 나는 아이린이었고, 미스 리였다. 미국에서 내 이름을 영아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나는 전신의 힘을 귀에다 모으고 안간힘을 쓰며 애를 태웠다.
    누굴까? 아! 어머니의 목소리다.
    꿈은 아니었다. 분명히 내 귀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렸다.
    외롭고 쓸쓸할 때 항상 등불이 되어 내게로 다가온 어머니,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어머니였던가?
    그러나 아무리 눈을 뜨려고 애를 써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엄마라고 목청이 터져라 불러도 그 소리는 그대로 내 안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 교통사고가 났었지..., 그럼 내가 죽었단 말인가. 육체는 죽고 영혼만 남아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영혼의 눈이라도 뜨면 어머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전신의 힘을 다 모아서 애를 태워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아! 그리운 어머니.
    나는 갑자기 온몸이 더워오는 열기를 느꼈다. 그리움의 불꽃이 서서히 내 몸에 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뜨거운 눈물이 되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자지러지듯이 소리를 질렀다.
    “영아야! 영아야! 엄마다. 엄마가 여기 있다. 이제 정신이 드니? 선생님, 얘가 눈물을 흘려요. 그럼 살아난 거지요?. 내 딸이 이제 살아난 거지요?”
    부산한 발자국 소리... 아! 여기가 병원이구나.
    나는 '엄마 엄마' 하고 계속 불렀다. 입이 조금씩 열렸다. 목청이 터져라고 불러대는 그 소리가 작은 신음소리처럼 새 나왔다. 그리고 어렴풋이 어머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맨 먼저 비비안이 오해를 풀었느냐고 물어 보고 싶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 마음을 다 알고 계시는 듯 내 뺨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그래 그래 니 마음 다 안다. 아무 걱정 말고 마음 푹 놓아라. 모든 오해가 다 풀렸다. 앞으로 유 변호사 부부가 너를 친딸처럼 보살펴 주시겠다고 했다.”  
    눈물과 눈물이 함께 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 동안 다들 네 병상을 지키며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미세스 김이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와서 기도해 주셨다.”  
    그럼, 내가 한 달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단 말인가...

    내가 정신이 든 그날, 강수미는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우리는 한 달동안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넘나들면서 남편을 찾아 같이 헤매고 다닌 것일까?
    내가 꿈을 꾸던 그 시간에 그녀도 똑같은 꿈을 꾸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건너지 못한 강을 그녀는 쉽게 건너 결국은 저 세상까지 남편을 따라간 것이다.  <크리스천문학 제 14집, 2000년 >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4
어제:
1
전체:
74,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