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아이를 묻는 어머니들

2009.04.18 00:48

고대진 조회 수:527 추천:120

아주 어렸을 때 색이 바랜 어머니의 가족사진에 모자를 쓴 한 남학생이 앉아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외가댁에 남자라곤 외할아버지밖에 없는데 누굴까 하며 물었더니 돌아가신 나의 외삼촌이라고만 대답하고 입을 다무셨다.  그 뒤 난 외가댁에서 외삼촌에 대하여서는 묻는 것이 금기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외할머니가 집에 계실 때는 더욱 그랬다. 어머니에게 외삼촌의 죽음에 대해서 물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철이 나고도 한참 뒤였다.  
우리 외가댁은 일본 오사까에 있었는데 해방이 되기 전 해에 연합군의 폭격이 심해지면서 전라북도 정읍으로 피난을 오셔서 둥지를 틀었다. 어머니와 이모들 모두 소위 제일동포 2세 였던 셈이다. 해방이 되고 한참 빨치산이 근처에서 기승을 부릴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외삼촌이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학교 조회시간에 "빨갱이를 토벌하러 가자!" 라면서 죽창을 들고 선동하는 사람들에 싸여 -이때 참석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렸으니까- 산으로 올라간 것인데 죽창으로 무장한 어린 학생들과 기관총으로 무장된 빨치산의 전투 결과는 안 보아도 너무 빤했을 것. 삼촌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외아들을 먼저 보낸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의 미쳐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뒤 한참을 외할머니는 국가에서 나오는 전사자 원호금도 받기를 거부했다. 시체를 확인 못했으니 아직도 살아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데도 나는 외할머니의 얼굴에 세겨진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내가 감히 그 슬픔을 안다고 하겠는가?  아침에 학교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외아들을 수 십 년 넘게 기다리는 그 마음을.... 이락과의 전쟁의 소식이 가까워지면서 나에게는 가슴에 아이들을 묻게될 어머니들의 모습이 외할머니의 모습과 겹쳐진 이미지가 자꾸 떠오른다.
최근 중앙일보 미술 포럼에 소개되는 <전쟁과 죽음>이란 제목의 사진에서 본 한국전의 사진 하나가 생각난다. 빨치산의 목을 도끼로 배어서 그 머리를 들고 웃고있는 한 사람의 사진이었다. 죽은 사람이나 웃는 사람이나 모두 너무 어리게 생긴 모습들이었다. "저 목 잘린 사람도 누구의 귀한 아들이겠지... 사람의 목을 자르고도 웃고있는 저 사람은 전쟁에 누구를 잃었기에 저렇게 증오로 미쳐버렸을까?..." 생각하니 정말 전쟁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 같다. 전쟁에서 생긴 미움들이 깊은 정글의 나무들처럼 얽히고 설켜 도저히 전쟁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오직 피할 수 없는 위기에서만 그리고 그것도 마지막 수단으로만 해야 하는 것일 게다.
성 어거스틴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당한 전쟁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말한다. 의심할 필요도 없는 엄청난 위험을 당했을 때, 국민을 대표한 적법 기관에 의해 선포되었을 때, 경제적 이해관계 등 때문이 아닌 올바른 의도에 의해 행해졌을 때, 성취된 것이 해를 끼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을 수 있을 때, 성공할 확률이 높을 때이고 그것도 마지막 수단으로만 해야 하는  것이다 라고. 부시행정부가 하려는 이락과의 전쟁이 과연 정당한 전쟁일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쟁으로 죽어갈 수많은 아이들과 남은 어머니의 슬픔을 그저 '전쟁이기 때문에...'라고 쉽게 이야기해도 되는 것일까? 과연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들이 독재자 사담을 없애주어 감사하다고 성조기를 들고 나와 춤을 출까? 형제를 누이를 그리고 부모를 잃은 사람들 가운데  이락의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가 나오지 않으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과연 미국이 전쟁 전보다 더 안전한 곳이 될 것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 젖고 있다.


<미주 중앙일보 2003년 3월 10일>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9
어제:
0
전체:
37,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