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는 눈만큼만
2009.04.18 00:49
성경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보복의 법칙은 고대사회부터 있었다. BC 1750년경 쓰여져 얼마 전까지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졌던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이 법은 ‘탈리오의 법칙’이라고 불렸다. BC 2050년경 제정돼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최근 판명된 ‘우르남무의 법전’에도 ‘생명에는 생명’ 이란 법이 있다. 우리나라 고조선의 ‘팔조금법’중 남아있는 세 조항이 우르남무의 법전과 비슷한 것을 보면 사람의 생각은 동서를 막론하고 비슷했던 모양이다.
탈리오법의 근본정신은 항간에서 인용하듯 보복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과도한 보복이나 보복의 악순환을 막는 데 있었다고 한다. 즉 눈에는 눈만큼만 이에는 이만큼만 복수를 하지 더 이상의 복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복수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이다.
이런 탈리오의 법칙을 지혜롭게 적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수의 정도를 가늠할 숫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나의 눈’의 가치와 ‘너의 눈’의 가치가 동등하지 않다고 생각할테니까 말이다. 싸우다가 나의 눈 하나가 멍들었을 때 상대의 눈 두 개를 멍들게 하고 싶고, 가만있는 내 아이가 누구에게 맞아 이빨이라도 하나 부러졌다면 난 때린 녀석에게 달려가 흠씬 두들겨주고 이빨을 서넛 뽑고 싶은 생각이 안 날까? 그 녀석의 편을 드는 사람까지 몇 대 갈겨주면 더 시원할 것이고. 그러나 그렇게 당한 사람들은 처음 일은 잊어버리고 이를 갈며 복수를 생각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복수의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리라. 네 눈 하나에 상대방 눈 하나라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탈리오의 법을 넘어서라고 가르쳤나보다.
국가끼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항상 폭력을 휘두르는 국가는 그 전에 다른 국가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적절한 보복을 가한다고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가리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국가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4000년 전의 탈리오 법칙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까지 ‘네 이웃 국가를 네 나라같이 사랑하라’거나 ‘네 원수의 나라를 사랑하라’라고 말하는 기독교 국가를 본 일도 들은 일도 없으니까 말이다. 즉 ‘국가’란 단위에서 보면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예수 님의 말씀이 적용되기는커녕 ‘이것으로 충분해’라며 멈추는 일도 거의 없는 것 같다. 혹시 국가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최근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마의 축’으로 지목하면서 선제 공격을 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평양이나 원산에 눈 달린 폭탄(smart bomb)이 떨어질지 모르겠다.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어떻게 될까, 또 그 보복의 대상이 될 본국의 형제들은, 확대된 전쟁에서 죽어가야할 수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어야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나?’라고 묻던 밥 딜런의 노래가 생각난다. 우린 언제 ‘이거면 충분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젠 감싸고 사랑할 때라고,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라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다.
<미주 중앙일보 2002년 2월 14일>
탈리오법의 근본정신은 항간에서 인용하듯 보복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과도한 보복이나 보복의 악순환을 막는 데 있었다고 한다. 즉 눈에는 눈만큼만 이에는 이만큼만 복수를 하지 더 이상의 복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복수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이다.
이런 탈리오의 법칙을 지혜롭게 적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수의 정도를 가늠할 숫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나의 눈’의 가치와 ‘너의 눈’의 가치가 동등하지 않다고 생각할테니까 말이다. 싸우다가 나의 눈 하나가 멍들었을 때 상대의 눈 두 개를 멍들게 하고 싶고, 가만있는 내 아이가 누구에게 맞아 이빨이라도 하나 부러졌다면 난 때린 녀석에게 달려가 흠씬 두들겨주고 이빨을 서넛 뽑고 싶은 생각이 안 날까? 그 녀석의 편을 드는 사람까지 몇 대 갈겨주면 더 시원할 것이고. 그러나 그렇게 당한 사람들은 처음 일은 잊어버리고 이를 갈며 복수를 생각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복수의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리라. 네 눈 하나에 상대방 눈 하나라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탈리오의 법을 넘어서라고 가르쳤나보다.
국가끼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항상 폭력을 휘두르는 국가는 그 전에 다른 국가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적절한 보복을 가한다고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가리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국가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4000년 전의 탈리오 법칙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까지 ‘네 이웃 국가를 네 나라같이 사랑하라’거나 ‘네 원수의 나라를 사랑하라’라고 말하는 기독교 국가를 본 일도 들은 일도 없으니까 말이다. 즉 ‘국가’란 단위에서 보면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예수 님의 말씀이 적용되기는커녕 ‘이것으로 충분해’라며 멈추는 일도 거의 없는 것 같다. 혹시 국가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최근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마의 축’으로 지목하면서 선제 공격을 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평양이나 원산에 눈 달린 폭탄(smart bomb)이 떨어질지 모르겠다.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어떻게 될까, 또 그 보복의 대상이 될 본국의 형제들은, 확대된 전쟁에서 죽어가야할 수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어야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나?’라고 묻던 밥 딜런의 노래가 생각난다. 우린 언제 ‘이거면 충분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젠 감싸고 사랑할 때라고,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라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다.
<미주 중앙일보 2002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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