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의 오두막

2007.02.16 05:11

고대진 조회 수:1898 추천:154

몇 년 전, 버지니아 미술박물관에서 열린 인상파 특별 전시회에서 모네의 <바렌지비의 어부의 오두막>을 만났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다시 만난 듯 가슴이 저려왔다.

이 그림은 화면을 사선으로 이등분한 구도의 그림으로 사선 위 멀리 쪽빛 바다가 펼쳐져 있고 아득한 바다 수평선 가까이 흰 돛단배들이 떠 있다. 사선 아래 근경으로는 작은 잡목이 우거진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는 아담한 빨간 지붕의 오두막집이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홀로 서 있는 그림이다. 마치 멀리 수평선 가까이 떠 있는 흰 돛단배를 지켜보고 있는 듯이 바다로 향해 돌아서 있는 그 집. 저 오두막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오두막을 보면 사람의 그림자가 없다. 주인 어부는 먼 바닷가로 나가 오래 돌아오지 않은 듯 빈집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봄바람이 오두막을 감싸고 있고 봄볕은 언덕을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다. 만일 누가 있다면 마당에 빨랫줄이 있고 걸려있는 하얀 빨래가 바람에 날리거나 하늘색의 커튼 자락이 창문 밖으로 조금은 나와 있을 것 같은데… 사람의 그림자가 안 보여도 그런 집이라면 무척 행복하게 보일 것 같다하지만 이 오두막은 그냥 비어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봄의 따스함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느껴진다. 나는 이 그림만 보며 이해인 시인의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라는 시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 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 지어줄 /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버거워지면 우리는 멀리 떨어진 쓸쓸한 곳에 있는 빈집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늘과 별이 보이고 바다까지 잘 보이는 어부의 오두막 같은 집. 하지만 빈집은 오래 빈집으로 남으면 폐가가 된다빈집은 누군가 들어와야 하고 들어올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은 빈집에도 희망이 있다. 홀로 있거나 멀리 있어도 누가 찾아오리라는 기다림은 항상 이 그림 속의 따스한 봄날을 생각하게 한다.

이 오두막이 있는 바닷가 언덕은 어릴 적 고향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때를 생각나게 한다. 제주도 서쪽 끝에 있는 우리 마을에는 까마귀 동산이라는 언덕이 있었다. 언덕 아래로 멀리 하늘과 바다가 닿아있고 밤이면 작은 섬 ‘비양도’에서 비추는 등대가 ‘등댓불 까암빡’이라고 말할 때마다 한 번씩 빛을 뿌리곤 했다. 아버지는 바다 건너 공부하러 가신 지 오래고 어머니는 일을 나가셔서 며칠 만에야 한 번씩 돌아오시곤 했다. 나는 동산 위에서 바다를 보며, 바닷가 길을 따라 먼지 나는 버스를 타고 오실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굳이 언제 오신다는 말씀도 없었지만, 혹시나 오늘은 하며 어머니를 기다리던 봄날. 유채꽃이 만발한 밭을 지나 불어온 부드러운 마파람이 얼굴을 따스하게 감싸고 노오란 밭 너머로 검푸른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이 그림을 보면 그 어릴 때의 아스라한 기다림의 기억이 노랗게 혹은 하얗게 팔랑대는 나비처럼 떠오른다.

모네는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이 언덕을 소재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렸다. 이 집을 소재로 한 그림만 해도 높은 언덕에서 아래로 보며 그린 그림, 아래서 위로 보며 그린 그림, 그리고 집과 눈높이를 같이하여 그린 이 그림이 있다. 동산 수풀 아래로 내려가는 길 또 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으니 이곳은 그에게도 돌아오고 싶은 외딴 마을의 빈집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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