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경영학 교수의 시비(詩碑) 건립

2014.05.09 08:14

김수영 조회 수:578 추천: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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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시비 앞에서 김영교 시인과 함께


어느 경영학 교수의 시비(詩碑) 건립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안동은 낙동강을 끼고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퇴계 이황 선생이 조선 시대에 도산서원을 세워 후학을 양성한 대 선비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류성룡은 조선 중기의 영의정으로 명성을 날렸다. 서애 류성룡선생의 고향인 하회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다녀간 유명한 곳이다.

     17세의 홍안의 소년이던 김동기 교수는 이곳 선비의 고장에서 태어나 선조들의 얼을 물려받아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많이 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문장력이 뛰어나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교내의 각종 글짓기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휩쓸었다. 이 청소년은 청운의 꿈을 안고 학업에 매진하여 초. 중. 고교를 모두 고향인 안동에서 마쳤다. 같은 나이 또래의 학생들과는 사뭇 다른 비범한 데가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이나 동급생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청소년으로 모든 사람의 선망 대상이었다. 

     그러나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하루아침에 이 청소년은 꿈이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보였다. 전쟁 중 아버님과 누님이 돌아가시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아버지 대신 집안의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돌봐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공부만 하던 나이에 갑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학업을 중단하고 일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며 직장을 구해 보아도 나이가 미성년자라 아무도 선뜻 일자리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낙심된 이 청소년은 일자리를 찾아 남으로 내려가다가 드디어 부산까지 가게 되었다. 부산에서 얻은 일자리는 미군부대 행정보조원 자리로   출퇴근 체크와 급료 계산 업무를 맡았다. 어느 정도 영어 실력을 쌓은 뒤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원주에 주둔 중인 미군 부대의 영어통역으로 일하였다. 

     일 년 뒤 다시 복교하여 삼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바로 이 소년이 작은 오라버니였다.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오라버니는 많은 시와 논문을 쓰셨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1950 년 후 중. 고생들의 종합잡지로 널리 애독되었던 월간지 '학원'의 제 일회 학원 문학상 시 부분 최우수상 작품으로 오라버니의 시 '기(旗)'가 1954년에 선정되었다. 당시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다. 

     2003 년 10월 5일 안동고등학교 교정에는 이색적인 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개교 50주년을 맞이하여 동창회에서 기념사업의 하나로 모교를 빛내고 국가사회에 크게 기여한 동문중 두 사람을 선정하여 동상이나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오라버니였다. 동창회에서는 시 비 건립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기로 했다. 

     제막식에서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인 정공채(鄭孔采) 시인은 그때 같은 또래로서 자기도 학원문학상에 여러 차례 응모했지만 낙선하고 몇해 만에 수상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감회어린 축사를 했다. “저는 지금부터 반세기라고 일러도 좋은 꼭 49년 전 그러니까 1954년 초에 ‘안동고 3학년 김동기’라는 학생의 이름을 제 기억속에 아로새기게 되었습니다. 이 연유는 그 당시 중고생들의 ‘학교 바깥의 또 다른 넓은 학교’로 알려진 ‘學園’의 제 일회 학원문학상 최우수 작품으로 뽑힌 시 ‘기 (旗)’를 지금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빼어나게 빛나는 당시의 시‘旗’를 지금도 암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 고생들은 물론 대학생에게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기억된 시이고 아울러 김동기 시인은 우리 모두의 동경과 선망의 표적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이헌재 전 총리는 축사에서 ‘이 시비의 주제인 ‘旗’의 시상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미래를 지향코자 하는 청년의 순수한 의지와 고민이 함께 깔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이 시의 終句 ‘내가 旗를 올리면 旗는 또한 나를 올린다’는 대목은 이 시를 끝맺는 압권으로서 ‘旗’와 자신의 순환적 상승승화(相乘昇華)를 힘있게 표현한 매우 감동적인 부분이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어윤대 (魚允大) 고려대 총장은 축사에서 ‘선생님이 그동안 고려대학교에 재직하시면서 보여 주셨던 해박한 학문적 깊이, 번뜩이는 아이디어, 과감한 추진력 등이 이미 선비의 고장인 안동에서 키워진 것 같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재학시절 문학창작을 통해 그 기개가 숙성된 것을 보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자칫 삭막할 수 있는 경영학도임에도 불구하고 정감 어린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고 오늘 이 자리에서 제막식을 하는 시 ‘旗’에 이미 세계와 호흡하려는 강인한 기개가 돋보이니 이것이 평생 선생님이 보여주신 인생 그 자체라 아니 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자리를 빌려 거듭 존경의 뜻을 전합니다’라고 했다. 

      오라버니는 15권의 저서와 백여 편의 연구논문이 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석좌교수와 대한민국 학술원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2010년 희수를 맞이하셔서 시문집 '청천에 펄럭이는 기처럼'을 출간하셨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찌 감회가 깊지 않겠는가! 시인으로 등단 후 시인의 길을 접으시고 전쟁 후 우리나라의 낙후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경영학을 전공하셨다. 미국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과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수학하신 후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셨다. 경영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으시고 그 후 각계로부터 많은 공로상을 받으셨다.

     1985 년 미국의 Marquis 사에서 발간한 'Who's who in the world'(세계인명사전) 가 5 번째 출판되었을 때 오라버니의 업적이 실려 있었다. 나는 이곳 미국 도서관을 찾아가 오라버니의 이야기가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하여 책을 찾아 내용을 읽어 보았다. 오라버니의 경영학에 대한 업적과 영향과 공로만 나열해 놓았지 오라버니의 청소년 시절과 고생하신 이야기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 자신도 본인이 고생한 이야기를 시문집이나 다른 어떤 책에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내가 처음으로 오라버니의 고생하셨던 과거를 들추어 내어 외람되게 생각되지만, 한편으로 뿌듯한 마음으로 그 고생을 참고 견디며 이겨내신 오라버니가 한없이 존경스러워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이다. 오라버니께서 어린나이에 원주에서 미군부대 통역으로 일하셨기에 고려대 최초로 영어로 강의하실 수 있는 교수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평생을 암송하며 좋아했던 오라버니의 시 '기(旗)' 를 이곳에 올려본다. 


기(旗) 


너를 볼 때마다 

파란 연기처럼 

오르고 싶은 마음 


나는 너의 호흡이 

너의 세계가 못 견디게 

그리워서 그만 네가 되어본다


너는 나를 키워준 

또 하나의 어머니 


비록 기(旗)는 바람에 찢기고 

눈보라에 헐리었어도 


여기 내가 기(旗)를 올리면

기(旗)는 또 나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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