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양목 버선

2013.01.03 17:37

김수영 조회 수:1052 추천: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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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양목 버선                                         金秀映     


   옥양목은 무명보다 천이 발이 곱고 얇다. 무명은 두껍고 색깔이 약간 누르꾸레하다. 목화솜을 따서 목화 실을 물레로 자아올릴 때 가느다란 실을 만들어 양잿물에 표백한다. 표백한 다음 말려서 베틀에서 짜진 옥양목은 눈이 부시도록 눈처럼 희고 발이 고와 우리나라 고유의 옷감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옥양목은 고급스럽게 보이고 무명은 좀 촌스럽게 보였다. 옥양목은 양반이 입고 무명은 평민이 입었다. 시골에서는 상주가 되면 무명 고의적삼과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문객을 맞으며 상을 치렀다. 나는 옥양목 옷보다 무명옷을 더 좋아했다. 옥양목은 최고조로 뽑아 올린 현 같아서 켜면 섬세한 가야금 소리를 듣는 것 같이 내 마음이 설레었다. 하지만 무명은 좀 투박하고 텁텁하게 보이지만 퉁소를 부는 시골 촌뜨기같이 순전 무구한 맛을 느끼게 하였다.     

   무명이나 옥양목은 천연섬유라 참 촉감이 좋고 피부 알레르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아서 좋았다. 요즘, 인공섬유나 합성 섬유처럼 전기가 일어나지 않아서 건강에도 좋았다. 고향은 시골이라도 나는 도시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공무원이라 이사를 자주 다녔다. 어머님은 무명 대신 옥양목을 선호하셔서 이불 홑청도 깨끗하고 하얀 옥양목을 사용하셨다. 풀을 빳빳하게 매겨 다듬이질하면 옥양목은 금방 지은 하얀 햅쌀 밥처럼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촉감이 신선하고 만지면 바삭바삭 소리가 날 정도로 정갈하고 더운 여름에도 땀이 묻어나지 않고 천 주위에 겉돌았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세라복이었다. 하얀 옥양목 옷깃을 빳빳하게 풀을 해서 목 주위에 옷깃을 달아 주시는 어머님께 늘 고맙게 생각했다. 학급에서 나의 세라복 컬라는 항상 청결하고 깨끗했다. 어머님은 학급 반장인 나에게 공부도 잘해야지만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언제 생을 마감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옷장을 뒤져 많은 옷을 정리하게 되었다. 쌀 뒤주처럼 생긴 오래된 오동나무 궤짝 골동품 속에 오랫동안 감추어 두었던 옛 옷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었다. 이 궤짝은 골동품 가게를 하던 언니가 이민 올 때 나에게 선물로 준 아주 귀한 궤짝이다. 이민 온 지 32년 동안 잘 간직해 왔는데 그동안 한두 번 열어보고 통 열어보지를 않았다.       

   이 오동나무 궤짝 안에는 시집올 때 어머니가 친구들과 손수 지어주신 여러 벌의 한복과 버선 열 켤레와 비단 옷감과 비단 이불감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버선은 옥양목 버선 다섯 켤레(여름용), 무명버선 다섯 켤레(겨울용)였다. 새 동정도 여러 개 있었다. 어머니가 손수 바느질하신 정성 때문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이민 보따리에 실려 왔다. 이민 와서 이삿짐을 줄이기 위해 두어 번 궤짝을 열어 쓸모가 없게 된 옷과 버선과 비단과 동정 등을 버리야 했는데, 어머니 생각에 고이고이 싸서 간직하고 살아왔다. 이뿐만 아니라 결혼 때 만들어 주신 양단 솜이불과 요를 다 싸서 이민 왔지만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솜이불이 어찌나 무거운지 이사 다니기가 너무 힘들어 양단 이불이라 버리기가 아까웠지만 오래전에 비영리단체 중고품 센터에다 기증하고 말았다. 하지만 한복과 버선 등은 버리지 않고 계속 간직해 왔는데 이제는 버릴 때가 왔구나 하고 궤짝을 열어 하나둘씩 끄집어내었다.      

   거의 반세기 전에 지어 주신 치마저고리는 동정이 두껍고 섶과 깃이 영 촌스러워 보였다. 저고리 길이도 길고 유행이 지나 아주 구식 옷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가 정성스레 지어주신 옷을 끄집어내면서 버릴 생각을 하니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르 뺨으로 흘러내렸다. 한 번 입어보지도 못하고 한 번 신어 보지도 못한 옷과 버선비싼 비단 옷감과 이불감도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어머님 정성을 무시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어차피 이왕 버릴 바에야 진작 버려야 하는데 어머님 사랑 때문에 미련이 남아 값비싼 보물처럼 간직해 왔다. 버려야 하나 마나 망설이다가 아니 버릴 수 없어.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어머님 혼이 살아 옷과 버선 속에 살아 숨 쉬는데…., 버린다면 어머님께 불효를 저지르게 되는 거야.’  나는 유언장처럼 하얀 백지 위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써 내려 갔다. 내가 죽은 다음 나의 관 속에 이 옷과 버선등 모든 유품을 함께 넣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을 자녀들에게 썼다. 오동나무 궤짝 속 옷 위에다 올려놓았다. 자녀가 유품을 정리할 때 내 소원대로 해 주리라 믿으니 어머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싹 가시었다.        

   나는 옷을 다시 끄집어내어 입고 싶었다.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아 어머님 정성이 무시당한 것 같았다. 자녀 결혼식 때에도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했던 죄스러움. 크리스마스 때나 명절 때에도 한 번도 몸에 걸쳐 보지 않아 반세기 동안 무용지물로 푸대접을 받았던 한복과 버선들.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다 해도 나는 어머님 옷 솜씨를 거울 앞에 자랑하고 싶었다.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한 벌 두벌 입어 보기 시작했다. 버선도 옥양목 버선과 무명 버선을 번갈아 신어 보았다.      

   폴리에스터로 된 버선이 난무하는 이 세대에 옥양목 버선은 참으로 나에겐 귀한 유산이다. 미국에서 자란 내 딸이 외할머니의 정성스레 만들어 주신 옥양목 버선의 가치를 안다면 한 켤레의 옥양목 버선이라도 유산으로 물려받으면 좋으련만…..비록 유행은 지났어도 비단옷이라 날아갈 듯 가볍고 고풍스러워 어머님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발이 유별나게 커서 고무신 문수가 22문이었다. 여자 고무신은 21문 수가 최고로 큰 문수였다. 22문 수를 찾으려면 시장 바닥을 헤매야 했다. 어머님은 발이 큰 나를 위해 특별히 마음을 쓰셔서 버선코가 날이 서게 예쁘게 만들어 주셨다. 발이 커도 칼 발이라 넓은 마당발이 아니어서 가늘고 길어 버선을 신었더니 얼마나 곡선미가 예쁜지 나 자신이 놀랐다.       

   나는 치마, 저고리를 입고 두 팔을 벌려 거울을 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어 보았다. 팔을 들어 올릴 때 소매가 얼마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지 한복의 아름다움에 또 한 번 놀랐다. 섶이며 깃이며 꼬부라진 곡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 복의 매력에 흠뻑 취해 보았다. 예전엔 한복을 입어도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회가 어머님 사랑에 심취해 처음 느껴보는 행복감에 함초롬히 젖어 들었다. 고깔모자를 쓰고 날 선 버선을 신고 승무를 춤추는 여승처럼 나는 나르시스에 어느덧 빠져 있었다. 뾰족한 코를 자랑하는 하얀 옥양목 버선을 신고 날렵하게 춤추는 나는 어느덧 어릿광대처럼 줄다리기하듯 하얀 버선 춤에 취해 있었다. 


*서울 문학신문 2013년 신춘문예 가작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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